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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 사전]/[아]

양주삼 [梁柱三, 1879~1950?] 감리교 목사, 초대 총리사, 교육가, 수난자(납북), 호는 백사당(白沙堂)

by [수호천사] 2024. 8.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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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주삼 [梁柱三, 1879~1950?]

감리교 목사, 초대 총리사, 교육가, 수난자(납북), 호는 백사당(白沙堂)

 

【1879년】

  • 1월 25일, 평남 용강군 신남면 홍문리에서 양정섭과 김원실의 2남 2녀 중 장남으로 출생하였다.
  • 유학자의 가문에서 태어나 어려서부터 한학을 배웠다. 특히 한학자인 조부에게서 훈도와 감화를 받았고, 이병준(李秉俊)에게서 초등학문을 배웠다.
  • 일찍부터 종교에 관심을 두고 유ㆍ불ㆍ선 3도(道)에 취미를 가지고 연구하였으며 동학이 성행할 때에는 이를 알고자 1년여 연구에 몰두하기도 했다.

 

【1898년】

  • 우연히 한문으로 된 〈만국공보(萬國公報)〉란 잡지와 《덕혜입문(德慧入門)》이란 상해주재 선교사들의 저술을 접하면서 기독교에 대해 알게 되었다.

 

【1899년】

  • 당시 평양에 주재하면서 자주 용강에 들렀던 노블(W. A. Noble) 및 베어드(W. M. Baird) 선교사에게 감명을 받아 기독교를 믿기로 결심하였다.
  • 부모의 허락도 없이 상경하여 현 숙명여학교 뒷터에 있던 인공양잠전습소(人工養蠶傳習所)에 입학하였고, 당시 군내 부참관 오인탁(吳仁鐸)의 집에서 신세를 지며 1900년 10월, 졸업할 수 있었다.

 

【1901년】

  • 상해유학을 결심, 선교사 헐버트(H. B. Hulbert)의 소개장을 가지고 1901년 5월 인천을 출발하였다.
  • 상해에 도착한 그는 남감리회에서 운영하던 중서서원(中西書院) 원장 파커(Parker)를 찾았다. 중서서원은 이미 윤치호 선생이 수학한 곳이라 한국 학생에 대한 인상이 좋았으며 원장은 양주삼과 한문으로 필담을 나눈 결과 그의 실력을 인정하고 입학을 허락하였다.

 

【1902년】

  • 10월, 파커 원장에게 세례를 받아 정식 남감리회 교인이 되었으며 재학 중 영어웅변대회에서 1등을 할 정도로 영어에 뛰어난 재능을 보였다. [1887년 4월 3일 세례를 받은 윤치호에 이어 두 번째였다]

 

【1905년】

  • 6월, 중서서원을 졸업한 뒤 서양유학의 길에 올라 영국을 경유하여 미국에 도착하여 뉴욕지방에 머물다가 이듬해 샌프란시스코로 이주하였다.

 

【1906년】

  • 미국 남감리회 여선교회 및 리이드 박사의 도움을 얻어 1906년 12월 샌프란시스코 한인감리교회를 설립하였으며 교회내에 야학교를 설립, 동포들에게 영어와 미국생활에 필요한 지식을 교육하였다.

 

【1907년】

  • 7월, 『한인연합교회보』 발기인으로 참여하였다.

 

【1908년】

  • 12월, 『한인연합교회보』를 〈대도(大道)〉로 개칭하여 월간으로 발간하였다.
  • 샌프란시스코에서 발행되던 교포신문 〈공립신보(共立新報)〉에도 글을 게재하였다.
  • 샌프란시스코에서 장인환(張仁煥)ㆍ전명운(田明雲)이 친일파 미국인 스티븐스를 저격한 사건이 일어났을 때 통역을 하였다.

 

【1910년】

  • 본래 의학을 전공할 뜻을 가졌으나 중서서원 재학시 파커 원장이 그에게 목회에 투신할 것을 권유한 이후 계속 이 문제로 씨름하다가 마침내 신학을 하기로 결심, 1909년 12월 샌프란시스코교회를 사임하고, 이듬해 1월 테네시주에 있는 밴더빌트대학 신학부에 입학하여 3년동안 수학하였다.

 

【1912년】

  • 9월, 남감리회에서 집사목사로 안수받았다.

 

【1913년】

  • 6월, 밴더빌트 신학부를 졸업하였다.
  • 9월, 예일대학교 신학부에 진학하였다.

 

【1914년】

  • 6월, 예일대학교 신학부를 졸업하였다. 함께 예일대학교를 다닌 동기동창 가운데 저명한 신학자 라인홀드 니버(Reinhold Niebuhr, 1892-1971)도 있었다.

 

【1915년】

  • 1월, 고국을 떠난 지 15년만에 귀국하였다. 귀국 즉시 협성신학교(현 감리교신학대학) 교수로 임용되었다.

 

【1916년】

  • 2월, 당시 교장인 하디(R. A. Hardie)와 함께 신학잡지 《신학세계(神學世界)》를 창간하였다.
  • 6월 16일, 이화출신으로 협성여자성경학원에서 교수로 있던 김매륜(金邁倫)과 동대문교회에서 하디(Robert Alexander Hardie, 河鯉泳, 1865-1949) 목사의 주례로 결혼하였다.
  • 10월 4일부터는 1년간 자교교회 제6대 담임목사직도 겸임하였다.
  • 9월, 개성 한영서원 부교장을 맡았다.

 

【1916년】

  • 9월, 개성 한영서원(후의 송도중학교) 부원장으로 초빙을 받아 2년간 재직하였다.

 

【1918년】

  • 10월 15~16일, 경성중앙기독교청년회관에서 모인 제2회 조선예수교장감연합협의회에서 서기로 피선되었다.
  • 12월, 남감리회 (미국) 선교백주년 기념사업회 총무로 선출되어 이후 5년간 선교사업을 추진하였다.
  • 이때 그는 램버드 및 크램 선교사의 협조를 얻어 만주 및 시베리아 선교를 시작하여 남감리회 시베리아선교연회를 구성하는 업적을 남겼다.

 

【1919년】

  • 《남감리회 도리와 장정》을 발간하였다.
  • 9월, 3ㆍ1운동으로 투옥된 오화영 목사 후임으로 종교교회 제6대 담임목사로 파송되었다(1919~1921년).
  • 10월 14~15일, 평양 장대현예배당에서 모인 제3회 조선장감연합협의회에서 회장으로 선출되었다.

 

【1921년】

  • 선교백년기념 〈감리회보〉(1921) 발간 등의 출판 업적을 남겼다.

 

【1922년】

  • 미국남감리회 총회에 한국 대표로 참가하였으며 콜럼비아대학 하기연구과에서 수학하였다.

 

【1923년】

  • 4월, 시베리아선교처 관리자로 임명되어 시베리아 만주 교회를 관할하였다.

 

【1924년】

  • 철원지방 장로사(감리사)로 임명되었는데 한국인으로는 최초의 장로사였다.

 

【1927년】

  • 한국에서 선교하고 있던 미국감리회의 두 교파, 즉 남ㆍ북감리회의 합동을 강력히 주장하여 미국교회에 남북활동을 청원할 청원서작성위원에 피선된 이래 합동운동을 적극주도하였다.
  • 9월 20일, 경성 정동예배당에서 모인 제4회 조선예수교연합공의회 회장으로 선임되었다.

 

【1928년】

  • 3월 24일부터 4월 8일까지 예루살렘에서 개최된 국제선교대회(IMC)에 신흥우ㆍ정인과ㆍ김활란ㆍ노블 등과 함께 한국대표로 참석하였으며 귀국길에 덴마크를 방문하여 그곳 농촌운동을 몸으로 체험하고 돌아와 한국교회 농촌운동을 전개하게 되었다.
  • 9월, 조선남감리교회 전도국 총무를 맡았다.

 

【1929년】

  • 《남감리회조선선교 30년사》를 발간하였다.

 

【1930년】

  • 남ㆍ북감리회가 합동하여 기독교조선감리회라는 단일교회를 구성하는 데 크게 공헌하였다.
  • 조선감리회 조직전권위원으로 활동한 그는 그해 제1회 총회에서 초대 총리사로 선출되어 이우 8년간 한국감리교회를 이끌어 나갔다.

 

【1931년】

  • 6월, 미국 랜돌프 메이컨대학에서 명예 신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1932년】

  • 한국 감리교회 대표로 미국감리회 총회에 참석하였다.
  • 6월, 개릿신학교에서 역시 명예 신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 6월, 경성이화고등여학교를 설립하였다.

 

【1934년】

  • 10월, 제2회 총회에서 총리사로 다시 재선되었다.
  • 10월, 윤치호 희년기념회발기인 겸 상무위원을 맡았다.
  • 한국 감리교회 대표로 미국감리회 동아총회(남경)에 참석하였다.

 

【1935년】

  • 남감리회 중국연회 50주년 기념식(상해)에 참석하였다.
  • 9월 18일, 경성 정동예배당에서 모인 제12회 조선기독교연합공의회 회장으로 피선되었다.

 

【1936년】

  • 1월, 조선총독부 학무국에서 윤치호(尹致昊) 등 기독교계 지도자들에게 신사참배가 국가의 제사의식이라고 설명하자 이를 수용하였다.
  • 4월, 『감리회보』에 「신사문제에 대한 통첩」을 번역하여 공포하여 감리교회가 신사참배를 받아들이게 하였다.
  • 9월 22일, 경성 종로야소교서회에서 모인 제13회 조선기독교연합공의회에서 회장을 맡았다.

 

【1937년】

  • 7월, 종교단체 연합시국강연회에 감리교 대표로 참석하여 강연하였다.
  • 8월, 조선총독부 학무국 주최 조선인 유력자 시국강연 강사로 선정되었다.
  • 12월, 이화토지경영주식회사 이사로 위촉되었다.
  • 12월 7일, 경성 조선야소교서회에서 모인 제14회 조선기독교연합공의회에서 회장을 맡았다. 이후 조선기독교연합공의회는 해산되었다.

 

【1938년】

  • 미국 남감리회 총회에 참석하였다.
  • 제3회 총회에서 김종우 목사를 2대 총리사로 선출함으로 총리사직에서 물러난 그는 자원하여 만주선교사업 관리자로 부임하여 만주지역의 교포 선교에 전력을 기울였다.
  • 1938년 5월부터 1942년 4월까지 조선기독교연합회 위원으로 선정되었다.
  • 9월, 영변 숭덕학교 재단이사를 맡았다.
  • 10월, 제3회 기독교조선감리회 총회 공식순서에 ‘애국일 실시’를 넣고 배재학교 운동장에서 치른 애국일 행사를 총 지휘하여 기독교인으로 ‘충량한 신민’이 되라고 강연하였으며 신도들을 이끌고 총독부에 가서 만세봉창을 하고 조선신궁에 참배하였다.
  • 10월, 기독교 조선감리회 만주선교사업 관리자로 취임하였다.
  • 12월, 감리교 대표로 일본을 방문해 이세[伊勢]신궁과 신사를 참배하였다.

 

【1939년】

  • 2월, 세브란스의학전문학교 이사로 선출되어 재단법인 영변숭덕학원과 송도고등보통학교 이사직을 사임하였다.
  • 3월, 회갑연금을 국방헌금으로 냈다.
  • 5월, 일제의 전시통제기구인 국민정신총동원조선연맹 평의원에 선임되었다.
  • 10월 내선감리교회합동문제 연합위원회에서 기독교조선감리회 대표를 맡았다.
  • 12월 기독교조선감리회 총리원 이사 겸 은급부장, 연희전문학교 이사로 재선되었다.

 

【1940년】

  • 9월, 국민정신총동원조선감리회연맹 이사가 되었다.
  • 10월 국민총력조선연맹 평의원과 재단법인 조선중앙기독교청년유지재단 이사를 맡았다.

 

【1941년】

  • 1월, 조선성서공회 특별위원회 위원장이 되었다.
  • 3월, 국민총력기독교조선감리회연맹 이사 겸 기독교조선감리교단본부 규칙개정위원 및 교파합동연락위원을 맡았다.
  • 4월, 조선기독교서회 이사장 및 행정총무를 맡았다.
  • 5월 국민총력기독교조선감리교단연맹 이사로 위촉되었다.
  • 8월 흥아보국단 상임위원 및 경기도 준비위원으로 선임되었고, 이후 조선임전보국단 발기인 및 평의원으로 선임되었다.

 

【1942년】

  • 1월, 대동민우회가 주최한 ‘미영배격설전대’ 연사로 평양, 진남포, 안주 방면을 맡았다.
  • 3월, 감리교회조선선교부유지재단 대표이사를 맡았다.
  • 4월, 기독교조선감리교단 경성교구년회 목사대표에 위촉되었다.
  • 6월, 『내선일체』에 「조선에 징병제를 실시한다는 발표가 얼마나 감격스러운가」라는 글을 기고하였다.

 

【1943년】

  • 2월, 국민총력조선연맹이 주최한 ‘미영격멸간담회’에서 미영폐풍 근절운동을 논의하였다.
  • 11월 9일, 『매일신보』에 「학도여 성전에 나서라」를 기고하였다.

 

【1944년】

  • 9월, 국민동원총진회 중앙지도위원이 되었다.
  • 12월 14일, 『매일신보』에 「전열, 제4년의 각오: 총후는 총무장, 임전무퇴의 결사대」를 투고하여 학병지원을 독려하였다.

 

【1945년】

  • 7월, 조선총독부가 개신교 교파를 통폐합한 일본기독교조선교단 고문에 선임되었다.

 

【1948년】

  • 해방 후 1948년 3월 부일협력행위로 반민특위에 구속되었다가 4월 기소유예로 풀려났다.

 

【1949년】

  • 4월, 반민특위에서 피의자 조사를 받고 있던 양주삼 목사의 증인으로 나온 이규갑 목사에 의해 1943년 9월 4일 혁신교단의 사무국장이었던 이동욱 목사의 서랍에서 나왔다는 〈朝鮮監理敎團革新案實踐要義〉라는 문건이 증거 서류로 제출된바 있는데, 이 문건의 부록, “교단혁신의 방해실례”라는 글에 의하면 혁신교단 협조를 부탁하는 정춘수 감독의 요청에 대해 양주삼 목사는 “아는 神社敎會를 만들자는 것이므로 나는 여기에 參加하지 않을 것이니 鄭 監督 혼자 獨斷으로 하시오. 이는 恩人을 알지 못하므로 宣敎師를 排斥하는 背恩者가 되는 것이므로 나는 그것에 協力하여 나가지 않을 것이며 徹底히 反抗할 것이다.”고 하여 비협조적일 뿐 아니라 반대한다는 의사를 분명하게 밝힌 것으로 되어 있다(〈반민족특별법위반 피의자 양주삼 증인 이규갑 심문조서〉, 1949.4.8.) 이를 근거로 윤춘병은 “이 문서에 의해 양주삼 박사가 친일이라는 누명은 완전히 벗겨졌다.”고 기록하고 있다(윤춘병, “양주삼 총리사의 생애와 사상”, 《양주삼 총리사 저작전집》, 1(전기), 한국감리교회사학회, 1991, 133쪽).
    [참고] 양주삼 목사의 생애와 신학사상 / 이덕주
    [참고] 이규갑의 심문조서
  • 10월, 대한적십자사 초대 총재로 취임하였다.

 

【1950년】

  • 8월 23일, 한국전쟁 때 공산군에 의해 연행된 뒤 소식이 끊겼다.

 

【기타】

  • 부인 양매륜(양주삼과 결혼후 양씨로 바꿈)은 1980년 별세하였다.
  • 양주삼 목사가 시무했던 종교교회는 1959년 새 교회당을 마련하고 양주삼 총리사 기념예배당으로 명명하여 그의 업적을 기리고 있다.
  • 2002년 발표된 친일파 708인 명단과 2008년 공개된 민족문제연구소의 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명단, 2009년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가 발표한 친일반민족행위 705인 명단에 모두 포함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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