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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화영 [吳華英, 1879~1960]
감리교 목사, 독립운동가, 민족대표 33인, 정치인, 일명 하영(夏英), 호는 국사(菊史)
【1879년】
- 4월 5일, 황해도 평산군 평산면 대촌리에서 오석조(吳錫祚)의 장남으로 출생하였다.
【1894년】
- 갑오농민전쟁에 가담하였다가 만주로 망명하였다.
【1906년】
- 귀국 후 남감리교 미국인 선교사 기이남(奇二男, Rev W. G. Cram)에게 세례를 받으며 기독교인으로 활동을 시작했다.
【1909년】
- 남감리회 소속으로 전도생활을 시작하였다.
- 개성 서구역 전도사(1909~1911년)로 활동하였다.
【1911년】
- 개성 북부교회 전도사(1911~1913년)로 활동하였다.
【1913년】
- 9월, 원산 상리교회로 전임했다.
- < 감리교인물사전>에 따르면, 그는 원산 상리교회 전도사 시절 원산여(女)선교회 창립에도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최초의 원산여선교회는 앨리스콥 성경학원에서 발족되었는데 흔히 보혜(普惠)여자성경학원 혹은 원산여자성경학원으로 불렸다. 이 성경학원은 전도부인과 여성 지도자들을 많이 양성하였으며 이후 원산여선교회의 구심점이 되었다. 당시 원산여선교회의 사업을 주관하고 있던 노이즈(Noyes)는 아래와 같은 증언을 남긴 바 있다.
- “이곳(원산) 상리교회 전도사 오화영의 제안에 따라 여성들이 스스로 회(band)를 하나 만들었는데 매달 봉급의 20분의 1을 내서 전도부인 1명을 보조할 계획입니다. 올해는 주님 사업에 있어 기쁨과 축복으로 가득 찬 해였습니다.”
【1914년】
- 8월 23일, 김영학(金永鶴), 최태곤(崔泰崑)과 함께 앳킨스 감독(Bishop James Atkins)에게 집사목사 안수를 받았다.
- 1913년부터 시무한 원산 상리교회 담임목사로 취임하였다.
【1917년】
- 서울 종교교회로 전임되었다.
【1918년】
- 감리회 협성신학교를 졸업하였다(제6회).
- 10월, 장로목사 안수를 받았다.
【1919년】
- 3ㆍ1운동 당시 민족대표 33인 중의 하나로 활동하였다.
【1920년】
- 10월, 3ㆍ1운동 관련하여 경성복심법원에서 최남선ㆍ이강성ㆍ김창준 등과 함께 2년 6개월의 실형을 언도받고 옥고를 치른 뒤 만기 출옥하였다. (기미독립선언서에 서명하는데 그치지 않고 자신이 목회 활동을 한 적이 있는 개성과 원산의 지역 만세 운동을 조직한 것이 확인되어 비교적 중형을 받은 것이다.)
【1922년】
- 5월, 서울 수표교회 담임목사로 부임하였다.
- 9월, 다시 종교교회 목사로 전임되었다.
【1924년】
- 9월 24일, 새문안교회에서 모인 제1회 조선예수교연합공의회에서 통계서기로 피선되었다.
【1925년】
- 3월 22일, 그는 서울 사직동 신흥우(申興雨) 집에서 결성된 흥업구락부에 참여하였다.
- 9월, 개성 북부교회 목사로 시무하였다(1927년까지)
【1927년】
- 2월 15일 개최된 신간회 창립대회에서 간사 35명 중 1인으로 선출되었고, 이어 서무부장, 경성지회 검사위원에 선임되었다.
- 9월, 다시 수표교회 목사로 취임하였다.
【1928년】
- 수표교교회에 적을 두고 있기는 하였으나, 1928년부터 1931년까지 조선기독교청년회연합회YMCA 종교부 간사로 활동하였다.
【1929년】
- 광주학생독립만세사건 당시 동아일보 편집국장 주요한, 의사 이용설, 목사 박연서 등과 자택에서 사후대책을 강구하던 중 체포되어 두 번째 옥고를 치뤘다.
【1930년】
- 9월, 수표교회를 사임하였다.
- 12월 남감리회와 북감리회가 통합하여 기독교조선감리회를 조직할 때 남감리회측의 특선위원(特選委員)으로 참여하였다.
【1931년】
- 4월 28일 조선물산장려회 신임이사회에서 유성준, 설태희(薛泰熙), 김용기(金容起) 등과 함께 고문으로 추대되었다.
- 5월 12일 서울 종로에 가난한 환자들을 진료하기 위해 설립한 사회영중앙실비진료원(社會營中央實費診療院)을 개원하고 초대 원장을 맡았다
【1932년】
- 5월 12일 사회영중앙실비진료원유지회(社會營中央實費診療院維持會) 제2회 정기총회에서 현동완(玄東完), 이대위(李大偉), 홍병선 등과 함께 이사로 선임되었다.
- 서울 상동교회 담임으로 시무하였다(1932~1934년).
【1934년】
- 6월 4일 민중의원유지회 제4회 총회에서도 이사로 연임되었다.
- 서울 연화봉교회(蓮花峯敎會)에 파송받아 담임으로 시무하였다(1934~1935년).
【1935년】
- 7월 9일 서울 중앙기독교청년회관YMCA에서 열린 사회영민중의원 유지회 정기총회에서도 이사로 연임되었다.
- 조선감리회 중부연회에서 수표교교회에 파송받아 시무하였다.
【1937년】
- 중부연회에서 퇴회하였다.
【1939년】
- 항일비밀경사 흥업구락부사건으로 다시 검속당한 후 6개월 간의 옥고를 치르고 석방되었다.
- 이때 대다수 인사들은 전향서를 쓰고 풀려난 뒤 친일로 돌아섰지만, 그는 끝까지 전향서를 쓰기를 거부했으며 신사참배도 거부하고 은거했다.
【1945년】
- 9월 1일 여운형(呂運亨)이 위원장으로 있던 조선건국준비위원회 위원으로 초청받았다.
- 9월 19일 이갑성, 남상철(南相喆), 이종린(李鍾麟) 등과 함께 각당통일기성회(各黨統一期成會) 총무부를 맡았다.
- 10월 18일 독립운동사를 편찬하기 위하여 조직된 조선독립운동사편찬발기인회에 발기인으로 참여하였다.
- 11월 18일 중국 동북지구를 중심으로 한ㆍ중 양국 전재동포의 근본적 구조대책을 강구하기 위하여 조직된 한중협회(韓中協會) 회장에 취임하였다.
- 11월 24일 종로 기독교청년회강당에서 실업자, 고물가, 빈민구제, 38도 남북 물자교류, 주택, 기타 사회문제를 해결코자 결성된 조선사회문제대책중앙협의회(朝鮮社會問題對策中央協議會) 중앙위원에 선임되었다.
- 12월 22일, 남한 내 23개 정당이 합동하여 결성한 신한민족당(新韓民族黨)의 정치국 국장에 임명되었다.
- 12월 28일 신한민족당을 대표하여 신탁통치반대 결의를 표명하였다.
- 12월 30일 신탁통치반대 국민총동원위원회 중앙위원에 선임되었다.
【1946년】
- 2월 8일 독립촉성중앙협의회(獨立促成中央協議會)와 탁치반대국민총동원회(託治反對國民總動員會)가 통합하여 새로 조직한 대한독립촉성국민회 고문으로 추대되었다.
- 이 무렵 「3ㆍ1운동과 나」라는 제목의 글을 『자유신문』 1946년 2월 27일자에 기고하여, “우리의 완전한 독립을 위해서는 3ㆍ1(운동) 그 때와 같은 충동과 결심은 우리 민족의 가슴에 다시 한 번 환기(喚起)해야만 될 것 같다.”고 회고하였다.
- 5월 12일 서울운동장에서 독립전취국민대회 회장을 맡아 국민대회를 치르고 미군정 당국에 체포되어 5월 17일 군정재판에서 이른바 「포고령 위반」으로 징역 3개월과 벌금 2만원의 언도를 받았으나 집행이 유예되었다.
- 6월 11일 서울 정동예배당에서 열린 대한독립촉성국민회(大韓獨立促成國民會) 주최 전국대표대회 사회를 맡았다.
- 6월 13일 운현궁에서 열린 제1회 중앙집행위원회에서 신익희(申翼熙)와 함께 독립촉성국민회 부위원장에 선임되었다.
- 12월 12일 남조선과도입법의원 관선의원에 선임되었다.
【1947년】
- 11월 18일 과도입법위원 시국요강심사 특별위원에 선임되었다. 이 무렵 1930년대 사회영민중의원을 운영할 때 함께 했던 이대위, 유석창(劉錫昶) 등과 함께 대학설립운동에도 관여하였다.
【1948년】
- 재단법인 조선정치대학관을 설립하고, 그 이사 및 관장을 맡았다.
【1949년】
- 3월 12일 민족정신선양회에 참여하였다.
- 9월 정부로부터 인가를 받아 정치대학(건국대학교 전신)이 되면서 초대 학장을 맡았다.
【1950년】
- 5월 30일 제2대 국회의원 총선거에서 서울 종로구(을)에 무소속으로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 6월 19일 제2대 국회 개원식 사회를 맡았다.
- 한국전쟁 당시 공산군에 의해 납치되었다.
- 7월 30일 라디오(서울방송)를 통해 ‘이승만 정권에 대한 비판과 북조선지지 의사’를 밝혀야 했으며, 이후 북한군 퇴각 때 납북되었다.
【1956년】
- 7월 2~3일 열린 재북평화통일촉진협의회 결성대회에서 주석단의 1인으로 참석해 최고위원 3인 중 1인, 상무위원 11인 중 1인, 집행위원 29인 중 1인으로 선임되었다.
- 조소앙ㆍ안재홍 등과 함께 최고위원으로 동원되었으며 상부위원으로 활약하도록 강요당했다.
【1960년】
- 2002년 통일신보 보도에 따르면, 오화영은 1960년 9월 2일 사망해 평양 근교의 애국열사릉에 묻혔다고 한다.
【기타】
- 1987년 재북 인사에 대한 독립유공 표창의 일환으로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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