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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 사전]/[아]

유각경 [兪珏卿, 1892~1966] 기독교 여성운동가, 한국 YWCA 창설자.

by [수호천사] 2024. 8.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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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각경 [兪珏卿, 1892~1966]

기독교 여성운동가, 한국 YWCA 창설자.

 

【1892년】

  • 6월 14일, 서울에서 중추원 참의와 충청남도ㆍ강원도지사를 지낸 유성준의 딸로 출생하였다.
  • 유길준의 조카이며 유억겸의 사촌이다.

 

【1910년】

  • 정신여학교 보육과를 졸업하였다(제4회).

 

【1914년】

  • 장로교 여선교사의 주선으로 중국 북경에 유학, 기독교 계통의 북경 협화(協和)여자전문학교에 입학하여 1914년 졸업하였다.
  • 그는 그곳에 재학시절 학생기독청년회회원으로 활약하면서 YWCA봉사사업과 기독친선 정신을 배우고 한국에서도 이 운동을 펼칠 것을 결심하고 9월 귀국하였으며 모교인 정신여학교 교사로 부임(1914~1920년)한 후 구체적인 작업을 진행시켰다.

 

【1918년】

  • 이해영(李海永)과 결혼하여 개성과 서울을 오가며 활동하였다.

 

【1920년】

  • 교직에서 사임하였다.

 

【1921년】

  • 6월, 아버지 유성준이 사장으로 있던 신가정사(新家庭社)에서 발행한 『신가정』의 주필을 맡았다.

 

【1922년】

  • 남편이 유학길에 오르자 다시 상경하여 본격적인 여성운동에 투신하였다.
  • 3월 27일, 한국 YWCA 창립 발기회에서 임시회장으로 발탁되었으며, 조선여자기독교청년회 연합회기성회를 조직한 후 실질적인 회장으로 초창기 살림을 꾸려나갔다.
  • 서울 종로구 안동교회 내에 안동유치원을 설립해 부원장을 겸했다.
  • 또한 그는 YWCA 역사상 최초의 유급총무로서 몇 년간 일하였다.
  • 《한국 YWCA 반백년》에서는 다음과 같이 언급하고 있다.
    “창설 당시 유각경은 단지 재정위원으로 임원으로서의 공식직책은 없었으나 방신영 회장이 곧 사표를 내었고 김활란은 또 7월에 도미유학의 길을 떠났으며 김필례는 지방조직 책임을 맡아 지방을 순회하고 있었으므로 그가 실질적으로 기성회의 실무를 담당한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그러다가 1923년 완전히 연합회를 구성하면서 그 회장과 총무직을 겸임하였다.”

 

【1924년】

  • 상해에서 열린 YWCA 훈련 코스에서 훈련을 받고 돌아와 한국 YWCA를 위해 일할 연구와 계획을 갖고 전국적으로 Y의 목적과 사업을 발전시키는 일에 주도적 역할을 담당하였으며 Y연합회 회장(1923~1925년)과 동시에 서울여자기독청년회 회장 및 총무(1924~1934년), 연합회 총무(1934~1938년) 등을 역임하였다.
  • 당시 YWCA가 임대했던 태화여자관 안에 유치원을 개원하여 운영하였다.

 

【1927년】

  • 2월, 신간회 창립 직후 선임된 간사 35명 가운데 한 명이었다.
  • 4월, 여성의 독자적 조직체 구성에 대한 요구를 수렴한 근우회(槿友會) 발기인 총회에 창립준비위원으로 참여했다.
  • 5월, 근우회 창립총회에서 부회장에 선임되었다. 이후 근우회 선전조직부원, 감사위원 등으로 활동했다.

 

【1928년】

  • 9월 14일, 제5회 조선예수교연합회 부서기를 역임하였다.

 

【1932년】

  • 7월부터 YWCA 회장을 맡았다.

 

【1936년】

  • 7월부터 YWCA 총무를 맡았다.

 

【1935년】

  • 조선여자기독교절제회 회장을 역임하였다(1935~1940년).

 

【1936년】

  • 7월, 조선예수교장로회 포교자로 조선총독부에 포교계를 제출하였다.
  • 9월 22일, 제13회 조선기독교연합회 부회계를 역임하였다.

 

【1937년】

  • 예장 여전도회 회장을 역임하였다(1937~1947년).
  • 미국에서 열린 여자기독교절제회 세계대회에 한국대표로 참가하기도 하였다.
  • 8월, 애국금차회(愛國金𨥁會) 발기인 겸 간사로 참여했다.
  • 9월, 제14회 조선기독교연합공의회에서 부회계를 역임하였다.

 

【1938년】

  • 5월, ‘시국과 여성의 각오’란 주제로 열린 여성단체연합 시국강연회에서 일제의 전시체제와 황민화정책을 옹호하고 여성들의 동원을 독려했다.
  • 친일 단체 애국금차회에 간사로 참여하였다.
  • 조선여자기독청년회가 일본 Y동맹에 통합되었을 때 사퇴하였다.

 

【1939년】

  • 8월, 국민정신총동원 조선연맹 주관 국민정신선양전국순회강연 등에 참여해 수많은 강연과 좌담회에서 일제의 전시체제와 황민화정책을 옹호하고 여성들의 동원을 독려했다.

 

【1941년】

  • 4월, 국민총력조선예수교장로회 총회연맹 여자부 중앙위원을 맡았다.
  • 8월, 조선장로교신도 애국기헌납기성회 부회계를 맡았다.
  • 12월, 조선임전보국단 부인대 지도위원이 되었다.

 

【1942년】

  • 5월 12일자 『매일신보』에는 징병제 실시를 홍보하는 「어머니 자신부터 가진 ‘야마토 다마시히[大和魂]’」라는 글을 기고하였다.

 

【1943년】

  • 1943년 5월 7일자 『매일신보』에는 「당신들도 우리도」라는 글을 기고했다.

 

【1945년】

  • 8월 17일, 조선건국준비위원회의 외곽조직인 건국부녀동맹(建國婦女同盟)에 집행위원으로 참여했다.
  • 9월, 기독교 계통 여성들이 중심이 된 한인애국부인회를 창설해 위원장을 맡았다.

 

【1946년】

  • 4월, 독립촉성애국부인회(獨立促成愛國婦人會)에 참가하였다.
  • 11월, 전국여성단체총연맹에 참가하였다.

 

【1948년】

  • 정부 수립 후 여러 여성단체와 정부, 정당 활동에 참여했다.
  • 남북협상론과 단정 수립론이 나타났을 때는 이승만의 단정 수립론을 지지하였다.

 

【1949년】

  • 5월, 대한부인회가 창설되자 부회장을 맡았다.

 

【1950년】

  • 1950년 5월 사회부 부녀국 국장에 임명되어 1952년 4월까지 재직했다.

 

【1953년】

  • 감찰위원회 위원에 임명되었다.

 

【1956년】

  • 대한부인회 대표 자격으로 자유당 중앙위원을 맡았다.

 

【1959년】

  • 대한부인회 대표 자격으로 자유당 중앙위원을 맡았다.

 

【1966년】

  • 9월 7일, 별세하였다.

 

【기타】

  • 슬하에 1남을 두었다.
  • 유각경의 친일 활동은 「일제강점하 반민족행위 진상규명에 관한 특별법」 제2조 제13호에 해당하는 친일반민족행위로 규정되어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 보고서』 Ⅳ-10: 친일반민족행위자 결정이유서(pp.391∼416)에 관련 행적이 상세하게 채록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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