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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 사전]/[아]

매큔 [George Shannon McCune, 1873~1941] 윤산온(尹山溫), 미국북장로회 선교사, 목사

by [수호천사] 2024. 8. 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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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큔 [George Shannon McCune, 1873~1941]

 

윤산온(尹山溫), 미국북장로회 선교사, 목사

 

【1873년】

  • 12월 15일, 미국 펜실베니아주 피츠버그에서 비엔나 매큔(Vienna Catherine Shannon McCune, 1847~1919) 부인의 아들로 출생했다.

 

【1880년】

  • 막내동생 캐서린 매큔(Katharine Ann McCune, 윤가태, 1880~1942) 출생하였다.
  • 그녀는 1909~1939년 한국선교사로 사역하였다.

 

【1884년】

  • 12살 때 아버지가 사망하자 학업을 중단하고 피츠버그 한 은행의 보조 점원으로 일하는 등 22세 때까지 여러 가지 직업을 가지고 가정을 돌보았다.

 

【1893년】

  • 일하면서 공부할 수 있는 장로교 학교인 파크중학교(Park Junior High School)에 들어갔다.

 

【1897년】

  • 파크중학교를 졸업하고 파크대학에 들어갔다.

 

【1901년】

  • 파크대학을 졸업하였다.

 

【1903년】

  • 피츠버그대학교(University of Pittsburg)에서 교육학석사 학위를 받았다.
  • 그 후 아이오와주 코에대학(Coe College)에서 교육심리학을 가르쳤으며 그 대학 부속 고등학교 교장을 겸했다.

 

【1904년】

  • 파크대학 설립자 맥아피(John Armstrong McAfee)의 딸 헬렌 맥아피(Helen Bailey McAfee, 1872.11.24.~1952.3.5.)와 결혼하고 같은 해 미국 북장로회 해외선교사에 임명되었다.

 

【1905년】

  • 1902~1905년 미국 북장로회 아이오와대회(the Iowa Synod)의 목회자 연수과정을 거쳐 1905년 5월 목사 안수를 받았다.
  • 9월, 부인과 함께 내한하였다.
  • 평양선교부에 배치되어 한국어를 배우면서 숭실학교에서 가르쳤다.

 

【1909년】

  • 평북 선천선교부로 전임하여 신성학교 교장을 맡았다.
  • 일제의 한국 강제병합 바로 직전 해인 1909년 12월 일제 헌병대의 기밀 보고서에서도 “그곳(평양) 기독교에서 합방(合邦)에 대해 가장 반대의견을 가진 자는 장로파 미국인 선교사 리길함(李吉咸, Graham Lee)ㆍ마삼열(馬三說, S. A. Moffett)ㆍ소안륜(蘇安倫, W. L. Swallen)ㆍ방위량(邦韋良, W. N. Blair)ㆍ편하설(片河雪, C. F. Bernheisel)ㆍ윤산온(尹山溫, G. S. McCune)ㆍ우월씨(禹越氏, J. H. Wells) 등이라고 들었으나 그들은 아직 행동상으로는 나타내지 않고 있습니다.” 라고 보고 하여 선생이 합방반대 선교사 명단에 포함되어 있다.

 

【1911년】

  • 10월, 일제가 조작한 ‘105인사건’으로 신성학교 학생들과 교사들이 구속되고 자신도 이 사건의 연루자로 알려지자, 이 사건을 선교본부에 보고하고 이들의 석방과 공정한 재판을 위해 노력했다.

 

【1913년】

  • 1912년 9월 28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일제의 고문에 의한 허위 자백을 근거로 기소된 123명 중 105인이 유죄판결을 받았다. 이들은 모두 항소하여 1913년 3월 20일 양기탁ㆍ윤치호ㆍ이승훈을 비롯한 이른바 주모자 6명을 제외한 99명이 경성복심법원에서 무죄를 선고받고 풀려났다. 이들이 무죄로 풀려나는 것을 보고 1913년 3월 하순경 안식년으로 귀국하였다.

 

【1914년】

  • 전에 교수로 재직했던 코에대학에서 1914년 명예 신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 11월 19일, 가족과 함께 다시 내한하여 선천선교부에 복귀하였다.

 

【1915년】

  • 부흥회 등에서 배일사상을 고취하여 1915년 1월 12일 평안북도 경찰부장에게 불려가 ‘훈계’를 들었다.

 

【1918년】

  • 8월, 장로회 평북노회 노회장에 선임되었다.
  • 10월, 미국으로 돌아갔다.

 

【1919년】

  • 다시 내한하던 길에 서울에 들러 1919년 2월 3, 4일경 세브란스병원에서 학생독립운동을 계획하던 연희전문학교 학생 김원벽(金元壁)을 만나 격려하였다.
  • 3월 8일, 선천에서도 독립만세시위가 일어나고 일제 군경의 탄압, 만행이 일어나자, 목격 상황을 친필로 기록하여 일제의 우편 검열을 피하고자 캐나다로 여행하는 사람에게 맡겨 캐나다에서 미국 시카고에 있던 「컨티넨트(The Continent)」 잡지사로 보내 게재하게 하였다.
    이 잡지 1919년 4월 10일호에서 “불쌍한 한국! 능히 한국을 도와줄 수 없는가? 현금(現今) 정형은 참으로 견딜 수 없도다. 이 산골(선천을 가리킴)에서 한인들이 3월 8일에 대를 이어 평양으로 모여 들어가며 ‘독립 만세!’를 부르며 평양성 안에 사는 인민의 애국정신을 고취하여 일본이 한국을 그네들에게 돌려줄 때까지 싸움하자 결심하였는데, 이 아래 기록한 사실은 나(윤산온)와 다른 선교사들이 3월 8일부터 10일까지 목견(目見)한 것이라.” 하며 일제의 만행을 폭로하였다.
  • 이밖에도 3ㆍ1독립운동 당시 많은 학생의 독립운동을 후원하였다.

 

【1920년】

  • 9월 1일, 선천경찰서에 폭탄을 던지다가 체포된 신성학교 학생 박치의(朴致毅)를 변호하여 ‘온량한 학생으로 결코 폭탄을 던질 사람이 아니다. 분명히 관헌들의 고문에 마지못해 자백했을 것’이라는 고문설을 유포시켰다. 이런 행적 때문에 일제에 의해 ‘극단적인 배일자(排日者)’로 지목되어 감시를 받았다.

 

【1921년】

  • 2월 22일, 장남의 심장병을 치료하기 위해 가족과 함께 미국으로 돌아갔다.
  • 대한인국민회 북미총회에서는 3월 28일 샌프란시스코에서 환영 만찬회를 열어주었다.
  • 이후 언론과의 인터뷰와 강연을 통해 한국과 한국교회의 상황을 설명하고 일제의 만행을 폭로하였다.
  • 8월, 사우스다코다(South Dakota)주 휴론대학(Huron College) 학장에 취임하여 7년동안 사역하였다.

 

【1928년】

  • 5월 9일, 다시 내한하여 평양 숭실전문학교와 숭실학교의 교장직을 겸임하였다. 이때 여동생 캐서린 매큔도 안식년 후 1926년에 귀환하여 평양여자고등성경학교 교장으로 취임하여 남매가 같은 곳에서 사역하게 되었다.

 

【1930년】

  • 9월 19일, 제7회 조선예수교연합공의회 부회장에 선임되었다.

 

【1932년】

  • 1930년대에 들어 일제가 신사참배를 다시 강요하기 시작하고, 평안남도 지사가 1932년 9월 18일 이른바 ‘만주사변 1주년 전몰자위령제’에 학생들을 참배시키도록 통첩했으나 다른 기독교 학교들과 함께 불참하였다.

 

【1935년】

  • 9월 18일, 제12회 조선기독교연합공의회에서 부회장에 선임되었다.
  • 조선총독부 학무국에서 1935년 10월 24일부터 3일간 각도의 학무과장과 사범학교장을 포함한 시학관들을 중앙으로 불러 회의를 하고, “국가관념의 함양에 관한 건, 경신숭조에 관한 건, 국어사용의 보급 철저에 관한 건, 사립학교 지도 감독에 관한 건, 심전개발에 관한 건, 교화사업에 관한 건”등을 지시하였다.
  • 평안남도 지사는 같은 해 11월 그 지역 공사립 초등학교장 회의와 중등학교장 회의를 잇달아 소집하여 이러한 상부의 지시를 전달하고 실행을 독려하였다. 그런데 초등학교장 회의가 끝나는날 평양신사에 참배하게 하였으나 그들 중 기독교인 학교장들이 빠져나가 신사에 참배하지 않았다.
  • 이어서 1935년 11월 14일 개최한 평남 중등학교장 회의에서 야스타게(安武直夫) 지사는 회의를 개최하기 전에 평양신사에 참배하고 나서 회의를 하자는 제안을 하였다. 그러자 중의여학교 교장 대리 정익성(鄭益成 ), 순안 의명학교 교장 리(H. M. Lee, 李希滿)와 함께 그런 일은 전례가 없을 뿐만 아니라 기독교의 교리상 그 지시에 따를 수 없다고 거부하였다. 평남지사는 금후 교장으로서 자신들의 신사참배 여부는 물론 학생들의 신사참배 여부를 명확하게 서면으로 회답하도록 요구하고 그 회답의 내용에 따라 관련자의 학교장직 파면은 물론 학교의 강제 폐교도 불사하겠다고 위협하였다. 매큔은 그날로 이 사건을 긴급 전보로 북장로회 선교부 실행위원장 홀드크로프트(J. G. Holdcroft, 허대전)에게 알리고 도움을 요청했다. 홀드크로프트는 11월 24일에 평양에서 실행위원회를 소집하여 이 문제에 대한 대책을 심도있게 의논하였지만 결론을 내리지 못하고, 미국 뉴욕에 있는 선교본부에 스피어(Robert Speer) 총무를 파송하여 주도록 요청하여 그에게 상황을 보고한 후 대책을 마련하기로 결의하였다. 그 다음날 실행위원장 홀드크로프트는 베커 선교사와 함께 야스타게 평남지사를 방문하여 “숭실학교, 숭의여학교 및 같은 학교 교장의 신사 불참배문제에 관하여 학교 및 학교 교장 측의 정식 회답 제출을 1936년 9월경까지 연기해달라는 신청”을 하였다. 그리고 바로 서울로 올라와 같은 날로 실행위원들이 연명하여 북장로회 조선선교부 실행위원회 명의로 우가키 총독에게 진정서를 제출하였다. 이러한 요청에도 불구하고 12월 2일 야스타게 평남지사로부터 홀드크로프트에게 학교장의 회답 연기를 거절하며 오히려 그 회답을 독촉하는 편지가 왔다. 그러자 홀드크로프트는 12월 7일 우가키 총독에게 편지를 보내 총독이나 총독부 관리들과의 면담을 요청하고, 12월 9일부터 13일까지 서울에서 선교부 실행위원회를 열어 이 문제에 대한 대책을 협의하였다. 이 회의에서는 한국인 목회자들의 자문도 받아 최종적인 결론은 아니지만, 종교의 자유와 양심에 따라 신사참배를 거부하는 회신을 보내도록 매큔 교장에게 권고하고, “평양학교와 관련된 상황이 심각하다”는 취지의 전보를 해외선교부에 보내기로 하며 당국자와 협상하기 위해서 로즈(노해리), 솔타우(소열도), 홀드크로프트(허대전) 3인을 선임하여 위원회를 구성하였다. 홀드크로프트는 12월 13일 와타나베 학무국장에게 장문의 편지를 보내 이 회의에서 논의한 결과를 알리고 선처를 호소하였다. 매큔도 이 회의의 결과에 따라 12월 13일 야스타케 평남지사에게 최종적인 회답을 유보한다는 편지를 보냈다. 그 다음날 홀드크로프트도 평남지사에게 편지를 보내 12월 13일자 매큔의 편지 내용이 실행위원회에서 권고한 내용임을 확인해 주었다. 홀드크로프트는 12월 17일에도 우가키 총독에게 12월 7일자 편지와 11월 25일자 진정서 사본을 다시 보내 신사참배 문제에 대한 선교부의 입장을 설명하면서 재차 면담을 요청하였다. 그러나 야스타케 평남지사는 그러한 요청을 거절하는 의미로 매큔의 회답을 돌려보내고 12월 19일 홀드크로프트에게도 이 사실을 통보하였다. 그는 총독부 학무국에 요청하여 숭실전문학교 교장을 겸하고 있는 매큔에게 경고하도록 하였다. 이에 따라 와타나베 학무국장은 12월 30일 북장로회 선교부 실행위원장 홀드크로프트, 위원 솔타우, 숭실전문학교장 매큔을 학무국으로 불러 신사참배에 따르도록 설득하고 경고하였다. 매큔은 이미 12월 20일에 숭실학교 이사회에 교장직 사퇴서를 제출하였으나, 이사회는 교장으로서 잘못이 없다는 이유로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매큔 자신도 여러 사람의 자문을 얻은 결과 일제의 압력에 굴복하여 사퇴하기보다는 파면당하는 것이 오히려 떳떳하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1936년】

  • 야스타케 평남지사는 총독부와 충분한 협의를 거쳐 1936년 1월 16일 매큔을 도청으로 불러들여 신사참배 여부에 대한 회답을 독촉하였다. 그리고 같은 날 우가키 총독에게 “사립학교 규칙에 의한 학교장 인가 취소의 건 내신”이라는 공문을 보내 1월 18일자로 매큔의 숭실학교장 인가를 취소할 것이라는 사실을 보고하고 아울러 그의 숭실전문학교장 인가도 취소해 달라고 요청하였다. 매큔이 최종 답장을 1월 18일에 보냈는데, 이미 이 답장을 보내기도 전에 숭실학교장 인가취소를 결정했을 뿐만 아니라, 숭실전문학교장 인가취소도 요청하고 있었던 것이다.
  • 1936년 1월 18일자로 기독교의 교리와 양심상 자신이 신사참배를 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학생들에게도 참배를 시킬 수 없다고 최종 서면으로 답변함으로써 그날로 숭실학교장직과 1920년 숭실전문학교장직 인가를 취소당했다.
  • 1936년 3월 21일, 안식년에 해당하는 해이기도 하여 가족과 함께 귀국길에 올랐다.
  • 4월 초순경, 미국에 돌아가는 길에 하와이 호놀룰루에 들러 한국인의 환영을 받고 일제의 신사참배 강요정책을 비판했고 귀국해서도 비판강연과 기고를 계속했다.
  • 그해 재미 유학생 단체인 북미대한인학생회(The Korean Students League of North America) 자문위원을 맡았다.
  • 1936년부터 1941년까지 미국 시카고 무디성경학교(Moody Bible Institute)에서 교수하였다.

 

【1938년】

  • 1월호 The Presbyterian Tribune지에 “너는 내 앞에 다른 신을 두지 말라”는 제목으로 신사참배 절대불가론을 게재하여 당시 연희전문학교 교장으로 학교 유지를 위해 ‘신사참배 순응’을 주장하던 언더우드(H. H. Underwood)와 논쟁하였다.

 

【1941년】

  • 12월 5일, 시카고장로회병원에서 별세하였으며, 미주리주 파크빌에 있는 월넛그로브(Walnut Grove) 공원묘지에 안장되었다.

 

【기타】

  • 부인은 1952년 3월에 별세하여 남편 옆에 묻혔다.
  • 한국 정부는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 여동생 캐서린은 1936년 5월 안식년으로 귀국한 후 귀환하지 못했고, 1942년 4월 뉴욕 클립턴스프링스에서 별세하여 어머니 묘소가 있는 피츠버그 유니언데일 공원묘지에 안장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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