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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 사전]/[아]

오기선 [吳基善, 1877~1946] 감리교 목사, 독립운동가, 청년운동가

by [수호천사] 2024. 9.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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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기선 [吳基善, 1877~1946]

감리교 목사, 독립운동가, 청년운동가

 

【1877년】

  • 4월 21일, 평남 강서군 함종읍에서 출생하였다.

 

【1893년】

  • 관비생이 되어 평양에서 구학문과 신학문을 익혔다.

 

【1896년】

  • 20세 때 일단 고향으로 돌아왔는데 이 무렵 유명한 여전도인 전삼덕(全三德) 부인의 전도를 받아 감리교인이 되었다.
  • 함종교회에 출석하며 함종에 사립소학교를 설립, 직접 교사로 활약하였다.

 

【1908년】

  • 선교사 노블(W. A. Noble)에 의해 함종교회 전도사로 정식 파송받았다.

 

【1909년】

  • 미감리회 조선연회에 입회하였다.
  • 감리교 협성신학교에 입학하였다.

 

【1911년】

  • 감리교 협성신학교를 졸업하였다(제1회). 당시 교장은 하디(Robert A. Hardie, M.D) 박사였다.
  • 집사목사 안수를 받았으며 해주읍교회로 파송되었다.

 

【1912년】

  • 서울 동대문교회로 전임되었다.
  • YMCA 하령회에 강사로 참여하였다.

 

【1913년】

  • 장로목사 안수를 받았다.
  • YMCA 이사로 선출되었다.
  • YMCA 조선연합회가 창설될 때 그 연합위원으로 피선되었다.

 

【1914년】

  • 토오쿄오한인연합교회에 파송되었다.
  • 토오쿄오 유학생들이 중심이 되어 토오쿄오에 YMCA가 조직되고 그 안에 한인연합교회(현 토오쿄오한인교회)가 설립되어 본국에 목회자 파송을 요청하자 장로교와 감리교는 번갈아 목회자를 파송하여 교회를 지도하게 되었는데 1913년에 파송된 장로교의 주공삼 목사 뒤를 이어 1914년에 오기선 목사가 파송되었다.
  • 그는 토오쿄오교회에 부임하자 가네다(神田)에 큰 집을 얻어 학생들을 위한 교회를 개척했으며 최승만ㆍ백남훈 등과 함께 토오쿄오 YMCA를 지도해 나갔다.

 

【1916년】

  • 일본에서 2년간 활약하고 귀국한 그는 평양과 진남포교회 목사로 부임하였다.

 

【1917년】

  • 인천지방 감리사가 되어 4년간(1920년까지) 활동하였다.

 

【1918년】

  • 3월 26일, 제1회 조선예수교장감연합협의회 서기를 역임하였다.

 

【1919년】

  • 3ㆍ1운동이 일어났을 때 그는 인천에 있었는데, 박희도ㆍ오화영ㆍ정춘수 등 감리교지도자와 YMCA 지도자들과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며 만세시위를 준비하는데 참여하였고 특히 천도교와 연합운동에도 보이지 않는 영향력을 발휘하였다.

 

【1920년】

  • 한국 감리교회 대표로 미국 감리회 4년 총회에 참석하게 되었는데 이때 마침 본국에 가 있던 노블과 함께 한국에서의 일제 만행을 폭로하는데 일익을 담당하였다.

 

【1921년】

  • 또 다시 토오쿄오 한인교회 제6대 목사로 부임하였다.

 

【1923년】

  • 칸토(關東)지방에서 대지진이 일어나 한국인들이 일본인에게 학살당하는 참상을 겪게 되었을 때 그는 목숨의 위협을 무릅쓰고 토오쿄오 YMCA총무 최승만과 「재해동포위문단」을 조직, 본국 교회와 연락을 맺으면서 피살자 가족 위문 및 복구사업에 전력을 기울였다.

 

【1924년】

  • 귀국하여 평양 남산현교회에 부임하여 1939년 은퇴하기까지 남산현교회 목사로, 평양지방 감리사로 크게 활약하였다.

 

【1930년】

  • 남ㆍ북감리회가 합동될 때 미감리회측 합동전권위원회의 한 사람으로 남감리회의 양주삼 목사와 함께 감리교 합동의 실질적인 실무자로 활동하였다.

 

【1934년】

  • 남산현교회에서 근속 10년 표창을 받았다.

 

【1935년】

  • 남산현교회에서, 이윤영 목사를 후계자로 세우고 일선 목회에서 은퇴하였으며 대신 서부연회 자치 사업부 총무로 활동하였다.

 

【1937년】

  • 총리원 전도국 사업담당으로 전도사업에 매진하였다.

 

【1939년】

  • 5월에 은퇴하였다.

 

【1945년】

  • 은퇴후 황해도 백천에 있다가 해방후 월남하여 북아현동 아들 집에 머물렀다.

 

【1946년】

  • 4월 5일, 별세하였다.

 

【기타】

  • 부인 오득애(吳得愛)와의 사이에 2남을 두었는데, 장남 천석(天錫)은 교육가로 서울대학교 총장, 문교부장관을 역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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