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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 사전]/[아]

앤더슨 [Wallace Jay Anderson, 1890~1960] 안대선(安大善), 미국북장로회 선교사, 목사, 교육가, 청년운동가, 신학자, 음악가

by [수호천사] 2024. 8. 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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앤더슨 [Wallace Jay Anderson, 1890~1960]

안대선(安大善), 미국북장로회 선교사, 목사, 교육가, 청년운동가, 신학자, 음악가

 

【1890년】

  • 1월 18일, 미국 미네소타주 이든프레이리에서 앨버트 앤더슨(Albert H. Anderson, 1849~1931)과 플린다 빌스(Philinda Freelove Bills, 1855~1931) 사이의 3남매 가운데 장남으로 출생하였다.

 

【1917년】

  • 미네소타 매컬리스터대학을 거쳐 샌프란시스코신학교를 졸업하였다.
  • 캘리포니아대학 졸업생 릴리언 비드(Lillian Elizabeth Beede, 1892~1934)와 결혼하고 미국 북장로회 해외선교부 파송을 받아 1917년 9월 27일 내한하였다.
  • 경북 안동선교부에 배치되어 어학 공부를 하면서 안동읍교회 주일학교와 지방 사경회 사역을 시작하였다.

 

【1919년】

  • 3ㆍ1독립운동을 현장에서 목격하였고, 그해 가을 윈(Rodger Earl Winn, 인노절)과 함께 처음으로 지방 순회여행을 실시하였다.
  • 1919년 여름 안동읍교회 아동여름성경학교를 실시하여 300명이 넘는 학생들이 참석하였다.
  • 겨울에 독자적으로 지방을 순회하며 157명을 문답하여 43명에게 세례를 주고 61명을 학습인 명부에 올렸다.
  • 예천 신전교회 당회장을 역임했고 강신충 목사를 동사목사로 하여 매정교회 등 6개 교회를 관리하였다.

 

【1920년】

  • 부인과 함께 ‘확장주일학교’를 시작하였다. 이는 매주일 오후 불신자 집안의 아동들을 모아 성경ㆍ찬송ㆍ영어 등을 가르치며 전도하는 프로그램으로 지역사회의 반응이 좋아 지방교회로 확산되었다.
  • 1920년 안동선교부 관할 지역에서 만 1년 사이에 신입 교인 1,600명이 생겼고 교회도 25곳에 설립되었다. 안동읍교회에만 새 신자가 350명 늘었고 기독교에 반감이 높았던 예천에서도 300명 교인이 생겼으며 십여 명이 모이던 영주교회도 3~400명으로 늘었다. 풍계에서는 예배당이 좁아 마당에서 예배를 드려야 했으며 예배당이 없던 내성교회도 큰 예배당을 짓고 전도사와 전도부인을 파송하였다. 이런 교회 부흥은 3ㆍ1독립운동을 계기로 지역 사회의 기독교에 대한 인식이 바뀐 결과였다.
  • 앤더슨은 3ㆍ1독립운동 이후 민족의식과 복음전도 의지가 강화된 안동지역 청년학생들을 위해 기독청년면려회를 조직하였다.
    1881년 미국 포틀랜드에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을 아는 일에 협력하자”(Work Together to Know God in Jesus Christ)라는 표어를 내걸고 시작한 기독청년면려회는 초교파 복음주의 선교단체였지만 한국에서는 장로교회 청년운동으로 정착하였다. 앤더슨은 1920년 4월 안동교회 청년 학생들로 기독청년면려회를 조직하고 권대윤을 회장으로 추대한 후 자신은 총무가 되었다. 앤더슨은 면려회의 목적을 “소년과 청년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말씀을 가까이 하며 그 말씀을 배우고 실천하도록 이끈다. 그들을 기도생활로 이끌어 나중에 교회에서 기도회와 예배까지 인도하도록 지도한다. 청년들이 교회 안에서 할 일을 찾아 하게 함으로 교회를 떠나지 않고 그들에게 전도의 열정을 심어주어 믿지 않는 청년들을 교회로 인도하도록 한다.”고 정리하였다.

 

【1921년】

  • 1921년 3월 The Korea Mission Field에 발표한 “안동 부흥운동”이란 논문에서 “독립운동 때 불신자들과 손을 잡고 저항운동을 벌이다 체포된 교인들이 옥중에서 불신자보다 더 혹독한 고문과 악형을 받으면서도 신앙심으로 버텨내는 모습을 보고 많은 불신자들이 기독교를 보는 시각이 바뀌었다.”고 언급하였다. 그리고 그것은 1918년 여름 원산 선교사연합수양회에 참석했던 안동선교부 선교사들이 수양회 후 2년 동안 매일 정한 시간에 교회 부흥을 위해 기도를 드린 결과라고 설명하였다.
  • 앤더슨은 1921년 6월 7~9일 면려회 안동지방대회를 개최하였고 참석했던 학생들은 2개 전도대로 편성해서 지방에 나가 봉사와 전도활동을 벌였다.
  • 1921년 6월 경북노회에서 면려회를 노회의 산하조직으로 인준하였고 그해 9월 개최된 조선예수교장로회 총회에서도 총회 산하기구로 인준하였다.

 

【1922년】

  • 면려회의 조직이 확대되자 1922년 6월 서울에서 개최된 북장로회 한국선교회 연레회는 앤더슨의 임지를 서울로 옮겨 면려회를 전국적인 운동으로 발전시키도록 했다. 앤더슨 부부는 서울 연지동선교부로 옮긴 후 안동에서 면려회 운동을 시작했던 권대윤ㆍ윤치병 등과 전국을 순회하며 면려회 운동을 확산시켰다.

 

【1923년】

  • 6월 경충노회에서는 노회 내 각 교회가 면려회를 조직하기로 결의하였고, 남장로회, 캐나다장로회, 호주장로회도 참여한 장로교연합공의회에서도 면려회 운동을 적극 추진하기로 결의한 후 앤더슨은 책임자로 선임하였다.
  • 그는 면려회 운동에 주력하면서 경기노회의 중부시찰과 동부시찰을 담당하여 교회들을 순회하였다. 양평 문호교회ㆍ상심리교회ㆍ용진교회ㆍ고송리교회ㆍ양주 지사리교회에서는 당회장으로 시무하였고 초교파 신학교인 피어선성경학원에도 나가 강의하였다.

 

【1924년】

  • 1923~1924년 안식년 휴가를 다녀온 후 KMF 편집위원으로 활약하였고, 안식년 휴가를 떠난 커(W. C. Kerr) 를 대신해서 찬송가 개정위원으로 활동하였다.
  • 1924년 9월 피어선성경학원 이사장 겸 원장으로 선임된 후 새문안교회의 차재명 목사를 부원장, 승동교회의 차상진 목사를 원감으로 세우고 복음전도자와 평신도 지도자 양성을 위한 고등성경학교로 학제와 교과목을 개편하였다.
  • 1924년 12월 2~5일 피어선성경학원에서 전국 대표 30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기독청년면려회조선연합회 창립대회를 개최, 박현식을 회장, 김창덕을 부회장에 선임하였고, 앤더슨은 계속 총무를 맡았다.

 

【1925년】

  • 조선총독부로부터 피어선성경학교 설립 인가를 받았다.
  • 앤더슨은 기독청년면려회 조선연합회 부총무 권중연과 함께 전국을 순회하며 조직을 확대하였고 1925년 9월 면려회 기관지로 월간 「진생」(眞生)을 창간하여 5년간 발행하였다.

 

【1928년】

  • 7월 총회 종교교육부와 공동으로 제1차 ‘장로회청년회하기수양회’를 연희전문학교에서 개최하여 전국대표 120명이 참석하였다.

 

【1929년】

  • 9월 16일, 서울 새문안교회에서 전국연합회 제2차 총회를 개최하여 미국 유학을 다녀온 이대위를 회장으로 선임하고 앤더슨은 계속 총무직을 맡았다. 농촌계몽사업과 절제운동을 적극 추진하기로 한 총회 결의에 따라 앤더슨은 이대위, 농촌부장 조희렴과 전국을 순회하며 전도계몽 강연회를 개최하였다.
  • 1929년 당시 면려회는 500개 지회에 1만 2천명 회원을 확보하였다.

 

【1930년】

  • 8월 5~11일 독일 베를린에서 개최된 기독청년면려회 제8차 세계대회에 조희렴과 함께 한국대표로 참석하여 한국 면려회의 활동을 보고하고 돌아왔다.
  • 9월 29일, 평양 장로회신학교에서 개최된 전국연합회 제3차 총회에 참석하였다.

 

【1931년】

  • 6월, 안식년 휴가를 얻어 귀국할 때 피어선성경학원 학생회 주최로 중앙기독교청년회관에서 ‘안대선 선교사 송별음악회’가 열렸다. 연희전문학교 관현악단과 피어선성경학원 합창단 외에 선교사와 한국인 음악가들이 출연해 연주하였는데 마지막 순서로 앤더슨이 가곡 ‘조선아 잘 있거라’를 불렀다.

 

【1932년】

  • 휴가를 마치고 1932년 8월 귀환한 후 면려회와 피어선성경학원 사역을 지속하였다.

 

【1934년】

  • 5월, 정동음악사 대표 최성두와 함께 전조선음악동호회를 결성하여 건전한 음악 보급운동을 전개했다.
  • 9월 1~11일 평양에서 조선예수교장로회 총회를 기하여 희년선교대회와 기독청년면려회 총회 및 전국대회를 서문밖교회에서 개최하였다. 국내 뿐 아니라 해외에서 2,157명 청년 대표들이 참석하였고 숭실전문학교 대강당에서 열린 강연회와 기념음악회에는 5천여 명이 참석하였다. 대회 참석자들은 낮에 평양시내 시가행진을 하며 절제운동과 복음전도 전단지를 살포하여 경찰이 긴장하기도 했다.
  • 평양대회를 마치고 서울로 돌아온 앤더슨은 부인의 병 간호에 매달렸다. 부인은 1934년 1월 맹장염 수술을 받고 후유증으로 건강이 악화되어 세브란스병원에 입원, 치료를 받다가 11월 29일 별세하여 양화진외국인선교사묘원에 안장하였다.
  • 조선예수교서회 이사, 조선주일학교연합회 총무를 역임하였다.

 

【1935년】

  • 9월 18일, 제12회 조선기독교연합공의회에서 영문서기에 선임되었다.

 

【1936년】

  • 9월 8일, 일본 도쿄에서 서울외국인학교 교사로 5년째 사역하던 허미 루이스(Hermie Lewis, 1903.8.14.~1991.11.19.)와 재혼하였다.
    허미 루이스는 사우스캐롤라이나에서 웨이브 루이스(Wade Hampton Lewis, 1876~1951)와 마거리 보위(margery Adelaide Bowie, 1878~1927) 사이에서 출생하였다.

 

【1937년】

  • 여름 연희전문학교 교수 현제명과 함께 서울 시내 음악교사들을 위한 음악 수양회를 개최하였고 개인적으로 성악을 배우려는 청년 학생들을 개인교습으로 지도했다.

 

【1938년】

  • 신사참배 문제가 대두된 1938년 이후 면려회 운동도 크게 위축되었고 10년 넘게 원장으로 사역했던 피어선성경학원도 폐교되었다. 앤더슨은 피어선성경학원 기숙사를 지방에서 올라온 유학생 숙소로 전환하여 지방교인 자녀 80여명을 수용한 후 매일 새벽기도회를 갖고 영어성경공부반을 운영하였다.

 

【1940년】

  • 5월 안식년 휴가로 귀국하였다.

 

【1942년】

  • 1941년 미일전쟁 발발로 한국 귀환에 어렵게 되자 1942년 한국선교사직을 사임하고 중남미 과테말라 선교사로 활동하다가 은퇴한 후 로스앤젤레스 두어트(Duarte)에 거주하였다.

 

【1960년】

  • 12월 5일, 별세하여 알타데나 마운틴뷰 공원묘지에 안장되었다.

 

【기타】

  • 허미 루이스는 1970년에 북장로회 의료선교사로 세브란스병원에서 사역한 존 맥앤리스(John Albert McAnlis, 목부리, 1897~1979)와 재혼하였으며, 1991년 11월 로스앤젤레스에서 별세하여 알타데나 마운틴뷰 공원묘지에 안장되었다.
  • 릴리안과의 사이에 딸 둘(Shirley Lucille Anderson, Phyllis Marie), 허미 루이스와의 사이에 딸 하나(Lola Beth)를 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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