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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 사전]/[가]

김석진 [金錫珍, 1892~1975] 장로교 목사(통합)

by [수호천사] 2024. 8.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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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석진 [金錫珍, 1892~1975]

장로교 목사

 

【1892년】

  • 경남 남해군 산동면 영지리에서 출생하였다.

 

【1898년】

  • 7세부터 「선곡재」, 진주 「낙육재」 등지에서 한문을 수학하였다.

 

【1907년】

  • 16세 때 신학문의 흐름에 따라 동명학교에서 2년간 수료하였다.

 

【1909년】

  • 남해육영학교에서 1년간 일본어와 수학을 공부하였다.

 

【1910년】

  • 19세에 남해군에서 수재로 인정받아 당시 관립진주실업학교(현재 진주농업고등학교)에 입학하였으나 가세가 어려워 중퇴하고 말았다.
  • 집에서 가사를 도우면서도 향학에 불탄 그는 일본 토오쿄요에 있는 국민중학교를 통신강의록으로 이수하였다.

 

【1911년】

  • 전북 김제군 소재 대창교회내 대창학교에서 교편을 잡았고 부친 별세 이후 부담하게 된 부친의 빚을 갚기 위해 수입이 나은 순사보(巡査補) 시험에 합격하여 잠시 경찰직에 재직하였다.

 

【1918년】

  • 총독부 보통문관시험에 합격하여 판임관(判任官)으로 김해군청에 재직하였다.

 

【1919년】

  • 남해경찰서 사법주임으로 재직시 이충무공 사당을 보수하라는 말이 화근이 되어 좌천되는 소동이 일어났으며 이 일로 인하여 당국에서는 배일사상자로 낙인찍혔다.

 

【1927년】

  • 관직에 회의를 느낀 그는 부산 초량교회 주기철 목사에게서 세례를 받고 1927년 경남 창원군 진전면 곡안리 전도인으로 파송되었고 그곳에서 개척교회를 설립하였다.

 

【1928년】

  • 고성 학동에 전도인으로 파송받았지만 지역 주민의 반대로 전도를 하지 못하고 철수하게 되었으며 부산 초량교회 전도사로 시무하였다.

 

【1930년】

  • 39세의 나이로 평양 장로회신학교에 입학하였다.
  • 신학교 재학시에는 평양 경창문교회를 담임하였다.

 

【1933년】

  • 평양 장로회신학교를 졸업하였다(제28회).
  • 4월, 평양노회에서 목사안수를 받았다.
  • 장천교회와 구동창교회를 담임하는 한편 평양 신의(信義)보통학교장을 겸임하였다.

 

【1935년】

  • 부산진교회를 담임하였다.
  • 경남노회장으로 피선되었다.
  • 중일전쟁과 태평양전쟁이 극심화되면서 중국 산동성을 점령했던 일본 해군이 한국선교사 박상순(朴相淳) 목사를 신사참배반대 죄목으로 군법회의에 회부 사형선고를 내렸는데, 그가 이때 총회 특사로 중국에 파송되어 박상순 목사를 구출한 일이 있다.

 

【1940년】

  • 선교사 추방으로 문을 닫았던 동래 일신여학교를 인수하여 종교교육에 앞장선 그는 그해 경남노회장으로 재선되었다.

 

【1942년】

  • 국내의 모든 교회가 신사참배로 어려움을 당하자 중국으로 건너가 산동성에 있는 제남교회를 담임하였다.

 

【1944년】

  • 중국일대를 관활하는 화북노회장을 역임했다.

 

【1945년】

  • 해방 이후 산동성에 있는 제남국민의 민회고문, 광복군고문, 제남한인 소ㆍ중학교장을 역임하면서 혼란했던 당시의 교포사회를 이끌어갔다.

 

【1946년】

  • 중국이 공산화되지 탈출하여 귀국한 후 이어 전남 함평군 14개 지교회 순회 전도목사로 목회에 전력을 다했으며 이때 학교리에 교회를 개척하였다.
  • 그후 전북 신태인교회로 전임하였다.

 

【1948년】

  • 경남 평산교회의 청빙을 받고 고향에 안착하여 율곡교회ㆍ남해읍교회를 담임하였다(제6대).
  • 특히 남해읍교회를 담임하면서 현대식 건물로 교회당을 신축하는 한편 해방후 교파분열로 어려움이 많았던 경상남도 지역에 있는 교회들을 화해신앙으로 이끌었다.
  • 해성중학교를 세워 교장으로 봉직하였으며 간척사업에도 뜻을 두어 80여 정보의 땅을 개척하였다.

 

【1951년】

  • 경남노회장을 역임하였다.

 

【1952년】

  • 경남노회장을 역임하였다.

 

【1953년】

  • 경남노회장을 역임하였다.
  • 11월 5일, 제7회 한국기독교연합회 부회장을 역임하였다.

 

【1956년】

  • 12월, 남해읍교회 제9대 목사로 부임하였다.

 

【1957년】

  • 1957년 은퇴할 때까지 장로회신학대학 재단이사로서 또 이사장으로 신학교육사업에 헌신했다.

 

【1959년】

  • 진주노회장을 역임하였다.
  • 제44회 총회에서 부회장에 피선되었다.
    에큐메니칼 지지세력 총대들은 그 길로 상경하여 서울 연동교회에서 제44회 총회를 속회하고 총회장 이창규 목사, 부회장에 김석진 목사를 각각 선출하였다.

 

【1961년】

  • 재단이사장으로 재임시 1만 6천평의 대지를 확보하여 학교를 건립한 일과 문교부로부터 신학대학 인가를 얻는데 큰 공헌을 하였다.

 

【1962년】

  • 대한예수교장로회 부총회장, 계명대학교 이사, 영남신학교 이사를 역임하였다.

 

【1969년】

  • 남해읍교회에서 원로목사로 추대되었다.

 

【1975년】

  • 9월 2일, 별세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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