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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창근 [金昌根, 1908~1980]
성결교 목사
【1908년】
- 1월 27일, 경남 합천군 대양면 오산리에서 한학자 김영함의 다섯째 아들로 출생하였다.
【1925년】
- 18세 때 일본 동경으로 유학길에 올랐다.
【1928년】
- 유학 중 세례를 받았다.
【1929년】
- 1월, 교회에서 개최한 부흥회에 큰 은혜를 받았다.
- 4월, 담임목사의 추천으로 동경성서학원에 입학하였다.
【1930년】
- 서울에도 같은 성서학원이 있음을 알고, 귀국하여 경성성서학원에 편입하였다.
【1930년】
- 아현교회 이기봉 장로의 장녀 이경숙 양과 결혼하였다.
【1931년】
- 5월, 경성성서학원을 졸업하였다. 그의 졸업 동기생은 한성과 교수, 차창선 목사, 전혜완 전도사 등 16명이었다.
- 졸업과 동시에 대전교회 부임전도사로 파송 받아 대전교회 주임목사요, 충호지방회 감리목사인 김응조 목사 밑에서 목회를 배우게 되었다.
【1932년】
- 3월, 첫 목회지로 전남 신안군 암태면 도창리 암태교회(현 암태 도창교회)로 파송되었다.
암태교회는 1931년 암태 도창리 출신 김흥기 청년이 목포북교동교회 이성봉 전도사에게 은혜를 받고 돌아와 마을을 전도했는데, 후에 북교동교회가 지교회를 세워 신자들 100여명이 모이는 교회였다.
그는 암태에서 목회한 지 3년 만에 암태에 2교회, 자은에 2교회, 도초와 안좌에 각각 2교회 등을 세웠다. - 경성성서학원 학생인 문준경 전도사가 개척한 임자와 증도의 교회들과도 협력관계가 이루어졌다. 즉 1930년대 신안군 동쪽의 섬마을 교회들은 문준경 전도사가, 서쪽의 섬마을 교회는 김창근 전도사가 개척한 것이다.
- 도서지역 개척의 공로가 인정되어 대전교회의 주임교역자로 발령을 받았다.
1919년 4월 한 방앗간에서 시작한 대전교회는 서서히 부흥하여 김응조 목사 재임시 성전도 짓고, 성경학교도 개설하여 충청 호남지역의 성결교회 센터 역할을 했다.
【1936년】
- 대전교회를 중심으로 교역하였다.
- 그는 1951년까지 대전교회에서 18년 간 시무하면서 능력을 발휘하여 질적, 양적으로 큰 교회의 기틀을 놓았다. 그는 일제강점기에 장로교와 감리교가 자리 잡은 중부지역에 성결교회를 적극적으로 개척하여 성결교회의 붐을 일으키는 계기를 마련했다.
- 유성교회를 개척하였다.
【1937년】
- 목사안수를 받았다.
- 충북 영동읍에 영동교회를 개척하였다.
- 충청, 호남지역의 순회목사로 활동하였다.
【1940년】
- 공주읍에 공주교회를 개척하였다.
- 일본 한인성결교회 순회목사로 활동하였다.
- 대전고등성경학교를 세워 사명 있는 평신도를 가르쳐 목회자로 세웠다.
【1941년】
- 12월 일제가 태평양전쟁을 일으켜 모든 정책을 전쟁수행으로 밀고 나가 물자의 궁핍과 함께 기독교 탄압을 노골화했다. 그는 태평양전쟁의 정당성을 연설하라는 부탁을 거절한 죄로 일주일 동안 수감되어 심문을 받고 석방되자마자 고문 후유증으로 몸져 누었다. 전쟁수행에 혈안이 된 일제는 기독교를 더욱 억압했다. 그 중 성결교회가 가장 큰 타격을 받았고 1943년 교직자 검속 때 다시 수감되어 고난을 또 다시 겪었다.
【1945년】
- 11월 9일, 서울신학교 강당에서 200여 명의 지도자들이 모여 재흥총회를 갖고 교회 재건에 총력을 경주하기로 결의했다. 이날 임원을 선출했는데, 김창근은 서기로 피택되었고 제2회 총회 때는 부총회장으로 선출되는 등 총회지도자로 급부상하여 전국의 성결교회를 재건하는데 힘을 다했다.
- 대한독립촉성국민회 충남위원장을 역임하였다.
【1946년】
- 11월에는 과도정부 제헌(制憲)의원으로 피선되어 조국을 재건하는데 일조했다.
【1947년】
- 교단을 재건하면서 서대전교회와 진잠교회를 개척하였다.
【1950년】
- 한국전쟁 당시 고아구제 사업을 비롯한 사회사업에 관여하였다.
- 부산에 피란 중 서울피란신학교의 교수로 임명되어 10여년 간 신학생들을 양육했다.
【1951년】
- 서울신학교 교수로서 발령을 받았고 기독교세계봉사회(C.W.S.) 한국위원회 회장에 피선되었다.
- 대한성서공회 회장으로 피선된 후, 15년 간 회장을 두 차례 역임하면서 성경반포사업과 성서개역사업에 기여했다.
- 보수적인 복음동지회(NAE) 회장을 역임하였다.
- 9월 5일, 제5회 한국기독교연합회 부회장을 역임하였다.
【1952년】
- 대한성서공회 재단이사를 역임하였다.
- 10월 15일, 제6회 한국기독교연합회 부회장을 역임하였다.
【1953년】
- 기독교대한성결교회 총회장을 역임하였다.
- 성결교회 재단법인 이사를 역임하였다.
- 찬송가 개편위원을 역임하였다.
- 환도 후, 11월 5일, 제7회 한국기독교연합회(NCC)의 회장에 피선된 그는 1954년 남산공원의 부활절연합예배 때 이승만 초대 대통령을 처음으로 참석시켜 기도하는 대통령이 되게 하므로 교계가 그의 능력에 감탄했다.
【1954년】
- 1954년부터 「헤브론 영아원」을 설립하여 사회사업에도 기여하였다.
【1955년】
- 대한기독교복음주의자협회(N.A.E.) 회장을 역임하였다.
- 성서공회 위원장을 역임하였다.
【1957년】
- 10월 22일, 제11회 한국기독교연합회 회장을 역임하였다.
【1959년】
- 서울신학대학 학감을 역임하였다.
- 4월 21일 성결교회 총회가 열렸다. 이 총회에서 김창근목사 외 12명이 NAE의 교단적 가입철회의 건을 제출하였다. 그리고 이어서 김용은목사외 3인이 NCC가입철회의 건을 제안하였다. 이 두 가지 제안이 토론된 결과 1년 유보하자는 의견이 통과되었다. 그리고 교파연합사업연구위원회를 구성하는 것에 동의하였다.
- 1959년 한국교회는 가장 큰 시련에 처해 있었다. 한국교회의 가장 큰 교단인 장로교가 둘로 갈라진 것이다. 이것이 에큐메니칼문제를 둘러싼 분열로 나타난 것이다. 장로교회의 분열을 본 성결교회와 이명직목사는 더 이상 연합기관문제에 휘말려 교회가 분열하지 않기를 바랐다. 그래서 성결교회는 연합기관 탈퇴문제가 나오게 되었고, 59년 총회에서는 탈퇴문제가 공식적으로 제기되었다.
【1960년】
- 메킨타이어는 성결교회 지도자들을 만나 갈등을 부추겼다. 결국 성결교회 내에서도 찬반양론이 나왔고 1960년 총회에서 NCC탈퇴안이 상정되어 투표 결과 몇 표차로 보류되자, 탈퇴지지 대의원들이 회의장을 박차고 나가 보수동지회를 조직했다. 총회는 분열을 막기 위해 그해 11월에 임시총회를 열어 NCC탈퇴를 결의했지만, 보수동지회는 1961년 예수교성결교회(예성)를 창립하므로 성결교회가 분열되었다.
- 4월 19일 제 15회 총회가 서울신학대학에서 열렸다. 총회가 개회되고, 얼마 후 4. 19 혁명이 일어났다. 혁명직후 비상계엄령이 선포되었으므로 21일 오전 총회는 비상정회를 선포하였다. 4. 19는 한국사회에서 매우 중요한 시기였다. 젊은이들은 구세대를 비판하며 새로운 리더쉽을 요구했다. 사회는 혼란스러웠고, 일부에서는 무분별한 통일을 말하기도 하였다. 이런 변화가 성결교회에도 불어왔다.
- 당시 서울신대 교수들의 주된 흐름은 여전히 복음주의적이었다. 서울신대교수들은 성명을 발표하고, NCC에서 탈퇴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서울신대는 에큐메니칼운동을 인정하지 않고, 복음적, 영적 통일을 원한다는 것이다. 비상계엄령으로 휴회된 15회 총회가 5월 20일 속개될 때, 서울신대에서 속개되지 않고, 대전중앙교회에서 열리게 되었다.
- 이 문제는 5월 20일 오후에 다루어졌는데, 여기에는 두 가지 의견이 제기되었다. 첫째는 경기지방회장이 양기관 탈퇴를 제안한 것이요, 둘째는 1959년 총회에서 결의한 교파연합사업연구위원회의 NCC탈퇴 보류의 의견이다. 총회 내의 두 그룹의 주장은 강경했다. 그래서 사태의 중대성에 비추어서 저녁 식사 후에 공청회를 가졌다. 먼저 이명직목사가 나서서 에큐메니칼운동은 비복음적이라고 강조하였다. 다음으로 이용선, 김창근목사가 나와서 이명직목사 주장의 부당성을 강조하였다. 이들의 주장은 과거의 경험을 비추어서 문제가 없으며, 따라서 탈퇴 보류가 적합하다는 것이다. 여기에서 엘마 길보른선교사는 “미국에 있어서 NAE와 에큐메니칼운동은 결코 대립되지 않는다. 내 친구는 NAE에 속하고 있으면서 에큐메니칼운동에 투신하고 있다.”고 말하면서 탈퇴를 반대했다. 이런 공청회가 있은 후 교단의 통일을 위한 간절한 통성기도 후에 투표한 결과 재석회원 84명 중 보류가 43표, 탈퇴가 40표 기권 1표가 되었다. 결국 보류로 가결되었다. 이명직 목사의 기도로 이날 회의는 끝이 났다.
【1961년】
- 4월 11일, 중앙교회에서 제16회 총회가 열렸다. 이때 다시 NCC와 NAE 동시 탈퇴안이 거론되었고 탈퇴가 보류되자 조병두, 이성호, 박원준, 김동완, 이종규등은 같은 날 오후 10시에 무교동 부근의 여관에서 복음진리수호동지회(보수동지회)를 결성하고, 한보순목사를 회장으로 선출했다. 이 보수동지회가 바로 분열의 핵심역할을 하였다.
- 동양선교회가 NCC에서 탈퇴하고, 반 에큐메니칼 전선에 서게 된 이상 16회 총회측도 여기에 영향을 받지 않을 수 없다. 7월 3일 열린 임원회에서는 NCC 탈퇴를 진지하게 논의하였다.
- 당시 서울신학대학 학장인 이명직목사는 16회 총회측이 NCC를 탈퇴하면 다시 총회로 복귀하겠다는 성명을 내고, 이것을 날인하여 총회본부에 제출하였다. 이것은 교단의 최고 지도자로서 한국성결교회에 분명한 방향을 제시해 준 것이다.
서면투표는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한때 이런 결의의 합법성을 문제 삼던 김중환, 박명원, 한명우등이 탈퇴를 지지하는 서한을 보냈다. 서면결의에 대한 개표는 8월 24일 이루어졌다. 탈퇴 찬성 64, 반대 8, 기권 1로 탈퇴가 결정되었다. 탈퇴 이후 성결교 내부는 더욱 복잡하게 전개되어 기성과 예성으로 분열되었다. - 이렇게 되자, 김창근 목사는 충격과 함께 책임을 느끼고 모든 연합회 일선에서 후퇴한 후, 교단 사회사업유지재단 이사장직만 주위의 강권에 의해 맡을 정도였다.
- [참고 : 1960년대 초 한국성결교회의 분열과 합동]
【1962년】
- 숭의학원 이사장에 피선되어 교육사업에도 관심을 쏟았다.
【1963년】
- 운영하던 상도동 헤브론영아원 대지에 사재를 털어 헤브론교회를 설립하고 건축하여 17년간 목회에만 전념하였다.
【1978년】
- 정년은퇴하고 헤브론교회의 원로목사로 추대되었다.
- 그는 곧 4남매가 사는 미국 로스엔젤레스로 이주하여 당시 유일한 나성성결교회(안수훈 목사)에 출석하여 원로목사의 대접을 받으며 평안한 노후를 보냈다.
【1979년】
- 황성택 목사와 재회하였다.
- 1960년 대 김창근 목사는 NCC를 지지하는 대표였고, 황성택 목사는 NCC를 반대하는 세력의 거두로, 두 사람 모두 교단의 갈등과 분열을 야기시킨 책임이 있는 인물들이다.
- 나성성결교회 안수훈 목사는 견해가 달라 서로 갈등이 있었지만 이제 목회를 마쳤으니, 서로 이해하고 화해하며 살다가 주님 앞에 가시자고 하여 둘의 손을 마주 잡게 했다. 이후, 이 둘은 교회에서 만나면 서로 악수하고 웃었다.
【1980년】
- 고혈압으로 양로병원에서 요양하다가 별세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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