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곤잘레스, 『초대교회사』 제5장 : 최초의 국가와의 대결 박해의 이유와 방법은 시대에 따라 달랐다. (59) # 새로운 유대교 분파 (59) 유대인들을 향한 기독교의 메시지는 그들의 고유한 유대성을 버려야 하다는 것이 아니라 메시아의 시대가 시작되었으므로 더 나은 유대인이 되어야 한다는 것 (60) 이방인들을 향해서는 아브라함과 그 후손에게 주어진 약속에 참여하라는 것. 이방인들은 육신적으로 아브라함의 자손이 될 수 없었으므로 신앙을 통해 그 자리를 차지하도록 초대되었다. (60) 로마인들과 유대인들과 기독교인들은 당시의 문제가 유대인들 사이의 내분이라는 데 동의하고 있었다. (61) # 네로 시대의 박해 (63) AD. 64년 6월 18일 로마의 대화재 발생 – 황제는 기독교인들에게 혐의를 씌우기로 작정함. 타키투스의 기록 (64-65) 로마 문화와 사회를 .. 2021. 2. 20.
곤잘레스, 『초대교회사』 제4장 : 이방 선교 # 선교의 규모 (47) 이방인 개종자들이 이스라엘 율법을 지켜야 하는가 하는 질문 (48)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들” (49) # 바울의 사역 (50) 초기 기독교 전파에서 바울의 중요성을 과장해서는 안 된다. (50) 바울의 가장 큰 공헌 : 교회를 세운 것이 아니라 남긴 서신들이 기독교 정경의 일부가 됨으로써 기독교회의 생활과 사상에 계속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 것 (52) 이방인 교회의 성장으로 특히 예배 생활에 많은 변화가 초래되었다. “말씀예배”와 “성찬예배” (52-53) # 사도들 : 사실과 전설 (53) 베드로(54), 바울(54), 요한 – 최소한 두 명(54-55) 도시와 연결된 사도들의 전설 : 빌립 – 콘스탄티노플(56), 야고보(산티아고) – 스페인(56), 도마 – 인도(56-5.. 2021. 2. 20.
곤잘레스, 『초대교회사』 제3장 : 예루살렘 교회 사도행전을 보면 처음에 예루살렘에 강력한 교회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39) # 통일성과 다양성 [39] 헬라파와 히브리파의 갈등 (39-40) 최초의 박해는 주로 헬라파 기독교인을 향한 것 (41) 사도행전 9장 이후 바울이 부각되면서 이방 기독교 중심으로 전환 (41-42) # 종교생활 [42] 최초의 기독교인들은 유대교를 부정하지 않았고, 자기들의 신앙이 오랫동안 고대해온 메시아에 대한 약속의 성취라고 확신했다. (42) 지도자 - 베드로와 요한(두 기둥), 주님의 형제 야고보 (43) # 유대인 교회의 쇠퇴 [44] AD. 62년 - 예수의 형제 야고보 살해 (44) 요단강 건너편 펠라로 이동 – (야고보 이후 또 다른 형제 시므온이 이끔) – 로마에 의해 처형됨 – 독자노선 – 이단 학설과 괴.. 2021. 2. 20.
곤잘레스, 『초대교회사』 제2장 : 때가 차매 준비된 예수, 주위 세계와 단절된 적이 없는 교회 (23) # 팔레스타인의 유대교 [24] 팔레스타인의 지정학적 위치 (24) 알렉산더의 정복과 헬레니즘, 헬레니즘의 혼합주의의 위협 (25) 로마의 정복과 유대인의 저항 (26-27) 유대교 당파 : 열심당(27), 바리새파(27-28), 사두개파(28), 에세네파(28) 유대인들이 공통적으로 가지고 있던 두 가지 기본적인 믿음 : 1) 윤리적 유일신 신앙, 2) 종말론적 소망 (28) 성전 멸망 후에 생존할 수 있었던 바리새파 (29) # 디아스포라 유대교 [29] 디아스포라 유대교와 구약성경의 헬라어 번역 (30) 기독교인들이 70인역을 독점하게 됨 (31) 디아스포라 때문에 유대교는 헬레니즘과 타협하게 된다. 알렉산드리아의 필로. (31-32) # .. 2021. 2. 20.
곤잘레스, 『초대교회사』 제1장 : 서론 수세기를 두고 기독교인들이 외친 복음이란 하나님께서 우리의 구원을 위하여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특별한 방법으로 인간의 역사에 참여하셨다는 것이다. (13) 사도행전의 열린 결말 – 그가 전하는 이야기는 역사가 종료되기 전에는 끝날 수 없기 때문이다. (15) 기독교회 이야기 : 알곡과 쭉정이가 혼합된 모습 1) 이 이야기가 성령의 사역인 동시에 그 사역이 우리와 동일한 죄인들을 통하여 이루어졌다는 점 2) 그러한 죄인들을 통하여, 그리고 그 교회를 통하여–오직 그들만 통하여-성경의 메시지가 우리에게 전달되었다는 점 우리가 존경하는 이들만 아니라 멸시하는 자들이 우리를 오늘의 이 위치에까지 이끌어 온 것이다. (15-16) 역사하기(doing history)와 역사 만들기(making history)의 연.. 2021. 2. 20.
“의주에서의 3.1운동과 유여대 목사” - 김승태(2018) 김승태 (2018). 의주에서의 3 1운동과 유여대 목사. 기독교사상, 715, 108-119 의주 3ㆍ1운동 1919년 3월 1일 오후 2시 30분경, 평안북도 의주군 의주면 의주 읍내에 있는 서예수교회당 부근 공지에 양실학교 교사와 학생들을 비롯한 주민 700-800여 명이 모여 독립선언식을 거행하였다. 이 선언식을 주재한 사람은 3ㆍ1독립선언서에 서명한 민족대표 33인 중 한 분인 유여대(劉如大) 목사였다... (108) 식장에는 운천동 운천교회 장로 허상련이 미리 준비한 대형 태극기 두 개가 세워지고, 종이로 만든 소형 태극기 1백 수십 매도 모인 사람들에게 배포되었다. 식이 시작되자 함께 찬미가를 부르고 나서 안동현에 거주하던 김병농(金炳穠) 목사가 조선의 독립을 성취하도록 하나님께 비는 기도를.. 2021. 2. 20.
“평양에서의 3ㆍ1운동과 김선두 목사” - 김승태 김승태 (2018). 평양에서의 3 1운동과 김선두 목사. 기독교사상, 713, 91-100 평양 3ㆍ1운동 1919년 3월 1일 오후 1시, 평양 장대현교회의 종소리를 신호로 교회 옆 숭덕학교 운동장에서 평양의 장로교회 연합으로 1,000여 명이 모여 광무황제봉도식과 독립선언식을 거행하였다.... 당시 장로회 총회장이자 서문외교회를 담임하던 김선두 목사가 사회를 맡았다. 서문회교회 전도사로 일하던 정일선 장로가 서울에서 보내온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산정현교회를 담임하던 강규찬 목사가 독립운동에 관한 연설을 했다. 이어서 윤원삼의 만세 삼창으로 독립선언식을 마치고 만세시위에 들어갔다... 남산현교회에서 출발한 감리교 시위대와 설암리 천도교구당에서 출발한 천도교 시위대와 합류하였다. (91-92) 일제 .. 2021. 2. 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