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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 희종 [唐僖宗, 862, 873~888] 당나라 제18대 황제

by [*수호천사*] 2025. 6.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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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 희종 [唐僖宗, 862, 873~888] 당나라 제18대 황제

 

  • 본명 : 이현(李儇)
  • 출생 : 862년 6월 8일
  • 사망 : 888년 4월 20일 (향년 25세)
  • 재위 : 873년 8월 16일 ~ 888년 4월 20일
  • 부친 : 당 의종 이최(李漼)
  • 모친 : 혜안황후 왕씨
  • 자녀 : 건왕(이진), 익왕(이승) 등
  • 묘호 : 희종(僖宗)
  • 시호 : 혜성공정효황제(惠聖恭定孝皇帝)
  • 능 : 정릉(靖陵)

당 희종은 중국 당나라 제18대 황제로, 재위 기간은 873년부터 888년까지이다. 즉위 당시의 이름은 이현(李儇)이며, 부친은 제17대 황제 당 의종(唐懿宗), 모친은 혜안황후 왕씨(惠安皇后 王氏)이다. 그는 당나라의 말기를 상징하는 황제로, 왕조의 쇠망이 본격화되는 격동의 시기를 통치하였다.

 

【즉위 배경과 초기 통치】

 

희종은 아버지 당 의종의 다섯 번째 아들이었지만, 유력한 환관 전령자(田令孜, ~893)의 지지를 받아 12세의 나이로 즉위하게 된다. 어린 나이에 즉위했기 때문에 정치는 자연히 환관 세력에게 장악되었고, 특히 전령자의 권세는 막강하였다.

 

재위 중 사용된 연호로는 다음과 같다 :

  • 건부(乾符) : 874년 ~ 879년
  • 광명(廣明) : 880년
  • 중화(中和) : 881년 ~ 884년
  • 광계(光啓) : 885년 ~ 887년
  • 문덕(文德) : 888년

희종 본인은 정무보다는 오락에 열중하였으며, 투계, 격구, 내기 바둑, 기사, 무기 수집 등 쾌락적인 활동에 몰두했다. 이는 황제의 권위 약화를 더욱 심화시켰고, 실권은 점점 환관과 절도사(지방 군벌)로 넘어갔다.

 

【신라인 최치원, 발해인 오소도】

 

건부(乾符) 원년(874), 신라에서 온 유학생 최치원(857~)이 빈공과에 급제한다. 최치원이 급제하기 2년 전, 신라인 이동(李同)이 빈공과에 합격한 사실이 있었다. 그런데 그해 수석은 발해 사람 오소도가 차지하였다. 최치원은 자신을 수석으로 뽑아준 것을 감사하며 시험 주관자였던 당나라 관료 배찬에게 편지를 보냈다.

 

“2년 전, 오소도가 신라인을 제치고 빈공과 수석을 차지했습니다. 이는 신발과 모자의 위치가 거꾸로 바뀐 것이나 다름없었습니다. 신라로서는 치욕이었습니다. 한데 이번 빈공과에서 저를 수석으로 뽑아주시니, 이 영광이 (신라의 영토인) 삼한에 퍼지게 되었습니다.”

 

오소도는 그 아들 오광찬 때에 반대의 경우를 당한다. 서기 906, 당나라 빈공과 수석은 신라인 최언위가 차지했다. 최언위는 신라 말기 최치원, 최승로와 더불어 삼최(三崔)’라 불린 천재였다. 이때 차석은 오소도의 아들 오광찬이었다.

 

마침 오소도가 당나라에 사신으로 가서 이 사실을 알고 전에 자신이 이동보다 위였음을 상기시키면서, 그의 아들 광찬이 수석이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당나라는 최언위의 재주와 학식이 광찬보다 빼어남을 들어 허락하지 않았다. 이러한 이야기는 신라와 발해 사이의 대립양상이 당나라를 매개로 한 문화적 우열의 경쟁으로 기울고 있음을 나타내주고 있다.

 

【황소의 난(黃巢之亂)】

 

당 희종 치세의 최대 위기는 9세기 중반 발생한 대규모 농민 반란, ‘황소의 난이었다. 이는 단순한 반란을 넘어, 당 제국의 구조적 붕괴를 드러낸 대사건이었다.

 

874, 왕선지(王仙芝)가 반란을 일으키고 이어 황소(黃巢)가 가세하였다. 황소는 세를 불려 879년에는 광주(廣州)를 점령하고 대규모 학살을 감행하였다. 이어서 88011월 낙양을 함락시켰고, 12월 장안까지 점령하여 스스로 제위에 오르고 대제(大齊)’를 건국하였다. 희종은 수도 장안을 포기하고 환관 전령자와 함께 사천(四川)으로 피신하였다. 전령자는 돌궐 사타부 출신의 이극용에게 구원을 요청했다.

 

황소의 군은 전파(田陂)에서 이극용에게 패하고 관중(關中)으로 물러났다. 882년 황소의 휘하에 있던 주온(朱溫)이 당에 항복하여 당 조정으로부터 전충(全忠)이라는 이름을 하사받고 황소 진압에 나섰다. 결국 884년 산동성 태안에 있던 호랑곡에서 황소가 자결(부하 임언에게 살해되었다는 설도 있음)함으로 진압되었다.

 

【복귀 이후의 통치와 혼란】

 

황소 진압 후 8853월 희종은 장안으로 복귀했지만, 왕조는 이미 회복 불능의 상태에 있었다. 중앙 정부의 권위는 땅에 떨어졌고, 절도사라 불리는 지방 군벌들이 독립적인 정권처럼 행동하였다.

 

대표적인 군벌로 선흡(宣歙)의 진언(秦彦)과 절동의 유한굉(劉漢宏), 판활(汴滑)의 주전충, 태원(太原), 상당(上黨)을 차지한 이극용, 봉상(鳳翔)의 이창부(李昌符)하양(河陽)과 낙양을 장악한 제갈석(諸葛爽), 허채(許蔡)의 진종권(秦宗權), 치청(淄青)의 왕경무(王敬武), 그리고 회남(淮南) 8()를 장악한 고병(高駢)이 있었다.

 

8853, 환관 전령자는 하중절도사(河中節度使) 왕중영(王重榮)과 사이가 틀어졌다. 왕중영이 태원의 이극용에게 구원을 요청하여 주목(朱玫)과 이창부를 대패시키고 장안을 핍박하자 전령자는 다시 희종을 데리고 봉상으로 달아나 버렸다. 이때 여러 도의 병마가 장안으로 들어와 마구 불을 지르고 죽이며 약탈을 일삼았다. 이러한 혼란기에 주목은 양왕(襄王) ()을 황제로 세우고 연호까지 새로 건정(建貞)이라 선포하였다. 희종은 다시 왕중영과 이극용 등의 군벌들에게 자신의 정통성을 호소했고, 몰래 주목의 부하 왕행유(王行瑜)에게 조서를 보내 주목을 칠 것을 권했다. 왕행유는 주목과 그의 당여 수백 명을 잡아 죽이고 병사를 풀어 다시 약탈을 벌였다(마침 겨울이라 얼어 죽은 백성의 시체가 길에 깔렸다고 전한다). 양왕 온은 왕중영에게 살해되었고, 전령자도 쫓겨났지만, 광계 3(887) 3월 희종이 봉상에서 돌아오려 하자 이번에는 절도사 이창부(李昌符)가 황제의 행차를 막아 억류했다. 이창부는 6월에 희종이 머무르던 행궁으로 쳐들어갔지만 실패하고 농주(隴州)로 달아났으며 호가도장(扈駕都將) 이무정(李茂貞)이 그를 뒤쫓아가 죽였다.

 

지방은 각기 다른 군벌이 장악하고 있어 중앙정부는 사실상 상징적인 존재로 전락했고, 희종은 실질적인 통치력이 거의 없었다.

 

【사망과 계승】

 

희종은 888420, 25세의 젊은 나이로 병사(또는 독살)하였다. 후계자는 이복동생 이엽(李曄)으로, 황위에 올라 당 소종(唐昭宗)이 되었다. 그러나 당 제국은 이미 쇠망의 길을 걷고 있었고, 훗날 후량 주온(훗날 후량[後梁] 황제 주전충)이 실권을 장악한 가운데, 907년 결국 당나라가 멸망하게 된다.

 

【평가 및 의의】

 

  • 정치적 측면 : 무능하고 유약한 황제로 평가받으며, 환관 정치의 폐해를 보여주는 전형적 사례.
  • 사회적 측면 : 황소의 난을 계기로 당 왕조는 실질적으로 분열, 절도사 체제로 전환됨.
  • 역사적 의미 : 당 희종의 치세는 당나라가 황금기를 지나 몰락하는 과정을 상징하며, 이후 오대십국 시대로 이어지는 전환점 역할을 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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