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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성여왕 [眞聖女王, AD. ?~897] 신라 제51대 국왕(AD. 887~897)

by [*수호천사*] 2025. 6.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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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성여왕 [眞聖女王, AD. ?~897] 신라 제51대 국왕(AD. 887~897)


【개인 정보】

  • 이름 : 김만(金曼), 만헌(曼憲)
  • 출생 : 미상 – 어머니인 문의왕후가 870년에 사망했으므로 최소 860년대 중후반~870년 사이에 태어난 것으로 보인다.
    사망 : 기원후 897년 6월 1일(음력)
    재위 : 기원후 887년 7월 5일(음력) ~ 기원후 897년 12월(음력)
  • 전임 : 정강왕
    후임 : 효공왕

【가계 정보】

  • 부왕 : 경문왕(景文王, 841/846~875, 재위 : 861~875)
    모후 : 문의왕후
  • 숙부 겸 남편 : 김위홍(金魏弘, ?~888)
  • 의붓아들 : 김양정(金良貞)

【진성여왕 연보】

 

【기원후 887년】 진성여왕 원년

  • 진성왕(眞聖王)이 왕위에 올랐다. 이름은 만(曼)이며, 헌강왕(憲康王)의 여동생이다.[『최치원 문집(崔致遠文集)』 제2권 「사추증표(謝追贈表)」에는 “신하 탄(坦)은 말합니다. 엎드려 삼가 하명을 받들어 저의 죽은 아버지 응(凝)을 태사(太師)로 삼아 추증하고, 죽은 형인 정(晸)을 태부(太傅)로 삼아 추증하였습니다.”라고 되어 있고, 또 「납정절표(納旌節表)」에는 “저의 큰형인 국왕 정이 지난 광계(光啓) 3년 7월 5일에 갑자기 세상을 떠났으나, 저의 조카 요(嶢)는 태어나 아직 1년이 되지 않았으므로, 저의 둘째 형인 황(晃)이 임시로 나라를 다스리다가, 또한 1년을 넘기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습니다.”라고 하였다. 이를 보면 경문왕(景文王)의 이름이 응인데, 본기에는 응렴(膺廉)이라 하였고, 진성왕의 이름이 탄인데, 본기에는 만이라 하였으며, 또 정강왕(定康王) 황은 광계 3년에 돌아가셨는데, 본기에는 2년에 돌아가신 것으로 되어 있으니, 모두 어느 것이 옳은지 알 수 없다.]
  • 죄수들을 크게 사면하고, 모든 주와 군의 1년간의 세금을 면제하였다.
  • 황룡사(皇龍寺)에서 백고좌(百高座)를 열고 임금이 직접 행차하여 설법을 들었다.
  • 겨울에 눈이 내리지 않았다.

【기원후 888년】 진성여왕 2년

  • 봄 2월, 소양리(少梁里)에서 돌이 저절로 움직였다.
  • 임금이 평소에 각간 위홍(魏弘)과 정을 통하였는데, 이때에 이르러서는 늘 궁중에 들어와서 일을 보게 하였다. 그리고 그에게 명령하여 대구화상(大矩和尙)과 함께 향가를 수집하고 정리하게 하였다. 이를 『삼대목(三代目)』이라 한다.
  • 위홍이 죽자 혜성대왕(惠成大王)이라는 시호를 추증하였다. 이후로 임금은 젊은 미남 두세 명을 몰래 불러들여 음란하게 지내고, 그들에게 요직을 주어 나라의 정사를 맡겼다. 이 때문에 아첨하고 총애를 받는 자들이 방자하였고, 뇌물을 주는 일이 공공연하게 행해졌으며, 상과 벌이 공정하지 못하고 기강이 문란해졌다.
    이때 이름 없는 누군가가 정치를 비방하는 말을 지어 관청 거리에 방을 붙였다. 왕이 수색하게 하였으나 잡을 수 없었다. 어떤 사람이 왕에게 말하였다.
    “이것은 반드시 문인으로서 뜻을 펴지 못한 자의 소행이니, 아마도 대야주(大耶州)에 숨어 사는 거인(巨仁)이란 자가 아닌가 합니다.”
    임금이 명령을 내려 거인을 붙잡아 감옥에 가두고 그를 벌주려 하였다.
    거인이 분하고 원망스러워, 감옥 벽에 다음과 같은 글을 썼다.
    우공(于公)이 통곡하니 3년이나 가물었고,
    추연(鄒衍)이 슬퍼하니 5월에도 서리 내리네.
    지금 나의 깊은 시름은 돌이켜 옛일과 같지만
    하늘은 말없이 푸르기만 하네.
    그날 저녁에 갑자기 구름과 안개가 덮이고 번개가 치며 우박이 떨어졌다. 임금이 두려워하여 거인을 풀어주고 돌려보냈다.
  • 3월, 초하루 무술일에 일식이 있었다.
  • 임금이 병들어 편안하지 못하자, 죄수들을 조사하여 사형수 이하의 죄수를 석방하고, 스님 60명에게 도첩을 주었다. 임금의 병이 곧 나았다.
  • 여름 5월, 가뭄이 들었다.

【기원후 889년】 진성여왕 3년

  • 나라 안의 여러 주와 군에서 공물과 세금을 보내지 않아 창고가 비고 국가재정이 궁핍하였다. 임금이 사람을 파견하여 독촉하니, 이로 인하여 도처에서 도적이 봉기하였다. 이때 원종(元宗), 애노(哀奴) 등이 사벌주(沙伐州)에 웅거하여 반란을 일으켰다. 임금이 나마 영기(令奇)에게 명령하여 그들을 사로잡게 하였으나, 영기가 적들의 보루를 보고 두려워하여 진군하지 못하였다. 촌주(村主) 우연(祐連)이 힘을 다하여 싸우다가 죽었다. 임금이 칙명을 내려 영기의 목을 베고, 나이가 10여 세에 불과한 우연의 아들에게 아버지의 뒤를 이어 촌주가 되게 하였다.

【기원후 890년】 진성여왕 4년

  • 봄 정월, 햇무리가 다섯 겹으로 나타났다.
  • 15일, 임금이 황룡사에 행차하여 연등 행사를 보았다.

【기원후 891년】 진성여왕 5년

  • 겨울 10월, 북원(北原)의 도적 두목 양길(梁吉)이 그의 부하 궁예(弓裔)를 보내 기병 백여 명으로 북원 동쪽 부락과 명주(溟州) 관내 주천(酒泉) 등 10여 군현을 습격하였다.

【기원후 892년】 진성여왕 6년

  • 완산(完山)의 도적 견훤(甄萱)이 주에 자리 잡고 후백제(後百濟)라고 스스로 일컬었다. 무주(武州) 동남쪽의 군현이 그에게 투항하였다.

【기원후 893년】 진성여왕 7년

  • 병부 시랑 김처회(金處誨)를 당나라에 보내 정절(旌節)을 바치게 했는데, 바다에 빠져 죽었다.

【기원후 894년】 진성여왕 8년

  • 봄 2월, 최치원(崔致遠)이 시국에 관한 의견 십여 조목(時務一十餘條)을 작성하여 바쳤다. 임금이 기쁘게 받아들이고, 최치원을 아찬으로 삼았다.
  • 겨울 10월, 궁예가 북원으로부터 하슬라(何瑟羅)에 들어오니 따르는 무리가 6백여 명에 달하였다. 스스로 장군이라고 일컬었다.

【기원후 895년】 진성여왕 9년

  • 가을 8월, 궁예가 저족(猪足)ㆍ성천(狌川) 두 군을 빼앗고, 또한 한주(漢州) 관내의 부약(夫若)ㆍ철원(鐵圓) 등 10여 군현을 격파하였다.
  • 겨울 10월, 헌강왕의 서자 요(嶢)를 태자로 삼아 세웠다.
    처음에 헌강왕이 사냥을 관람하다가 지나는 길 옆에서 한 여인을 보았는데 그녀의 자태가 아름다웠다. 왕이 마음속으로 그녀를 사랑하여 뒤쪽 수레에 태우라 명하고 유궁(帷宮, 장막을 쳐서 임금이 임시 거처하도록 만든 곳)에 와서 야합하였는데, 곧 바로 임신하여 아들을 낳았다.
    그가 장성하자 체격이 크고 용모가 걸출하여 이름을 ‘요’라고 하였다. 진성왕이 이 말을 듣고 궁 안으로 불러들여 손으로 그의 등을 어루만지면서 말하였다.
    “나의 형제와 자매의 골격은 남들과 다른데, 이 아이의 등에 두 뼈가 솟아 있으니, 정말로 헌강왕의 아들이다.”
    곧 관리에게 명하여 예를 갖추어 높이 봉하였다.

【기원후 896년】 진성여왕 10년

  • 도적들이 나라의 서남쪽에서 봉기하였다. 그들은 바지를 붉게 물들여 스스로 남들과 다르게 하였기 때문에 사람들은 적고적(赤袴賊, 붉은 바지를 입은 도적)이라고 불렀다. 그들은 주와 현을 도륙하고, 서울의 서부 모량리(牟梁里)까지 와서 사람들을 위협하고 노략질하고 돌아갔다.

【기원후 897년】 진성여왕 11년

  • 여름 6월, 임금이 측근들에게 말하였다.
    “근년 이래로 백성의 생활이 곤궁해지고 도적들이 봉기하니, 이것은 내가 덕이 없기 때문이다. 숨어 있는 어진 자에게 왕위를 넘겨주기로 나의 뜻을 결정하였다.”
    그리고 왕위를 태자 요에게 물려주고, 당나라에 사신을 보내 표문을 올려 말하였다.
    “신하 아무개는 아룁니다. 희중(羲仲)의 관직에 있는 것이 저의 본분이 아니며, 연릉(延陵)의 절조를 지키는 것이 저의 좋은 방도입니다. 저의 조카 요는 죽은 형 정의 아들입니다. 나이가 열다섯 살 정도 되었고 종실을 흥하게 할 자질이 있기에, 밖에서 구하지 않고 안에서 선택하여 근일에 이미 나라 일을 임시로 맡겨 나라의 재난을 안정시키게 하고 있습니다.”
  • 겨울 12월 을사에, 임금이 북궁(北宮)에서 돌아가셨다. 시호를 진성(眞聖)이라 하고, 황산(黃山)에 장사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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