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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 자료실]/[도서 정리]

『일제하 북간도 기독교 민족운동사』 제1부 : 제1장 - 사회적 배경

by [수호천사] 2021. 2. 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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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굉일, 일제하 북간도 기독교 민족운동사

 

제1부 : 북간도 민족교회 구형(構形)과 성격

제1장 : 사회적 배경

 

1. 인문ㆍ지리적 고찰

 

  • 1910년 당시 간도 거주 이주한인의 50%가 연길현에 살고 있으며, 36%가 화룡현, 10%가 훈춘현, 4%가 왕청현에 분포되어 있다. 간도에서 시가라 칭하는 곳은 국자가, 두도구, 훈춘, 백초구, 용정촌 등지이다. (30)

  • 한인들이 가장 많이 살았던 곳은 연길현 용정촌, 국자가 두 도시였다. 용정과 국자가는 상업 도시였으며 교육의 중심지였다... 왕청현의 하마탕은 수토(水土)가 불량하여 한인 이주민이 극히 적었다. (31)

 

2. 이주 한인사회의 형성

 

  • 한인들이 북간도 이주를 하게 된 중요 동기는 경제적 어려움에 있었으며 농업이민이 대종을 이루었다... 합방 전후기에 이르면 이주의 양상이 달라진다. 경제난 등의 이유 뿐만 아니라 일제 통치로부터 탈출하고자 하는 정치 사회적 성격의 이주도 행하여졌으며, 의병항쟁이 독립전쟁으로 전환되고 신민회의 같은 비밀결사의 애국계몽운동단체가 국외에 망명하여 독립운동기지를 건설하고자 하는 계획을 실천함으로써 이주가 행해지기도 하였다. 또한 전혀 다른 차원으로, 종교적 신앙의 자유를 얻고자 하는, 즉 이상촌 설립을 위한 이주까지 행하여졌다. (32)

  • 년차별 간도 이주자수(1910~1920), 간도 조선인 인구(1907, 1908, 1909, 1910)... (32-33)

  • 김약연과 장재촌... 김영학(한학자)은 국자가, 구춘선(한의사)은 합막당, 마진(중국어에 능하여 공서관리)은 태랍자, 유찬희(실업가)는 국자가, 강백규(한의사, 한학자)는 호천가에 이주하였는데 이들은 그곳을 중심으로 한인들을 지도하였다. (33-34)

  • 1906년 이상설은 독립운동 기지를 개척하기 위하여 용정촌에 망명해와 이동녕, 정순만, 박무림, 여조현, 김우용, 황달영 등과 함께 서전서숙을 열러 교육에 착수하였다. 그 목적은 근대교육을 실시하는 학교를 설립하고, 그 다음 민족정신이 투철한 한인들을 집단적으로 이주시켜 한인사회를 형성하는 데 있었다. (34)

  • 신앙적 동기에서 출발한 종교적 측면의 이주... 함북성진국 학서면 구서동의 기독교인 이종식 장로, 이권수 장로, 이경수 집사는 20여 가구를 인솔하여 자유를 찾아 화룡현 삼도구에 집단 이주하였다. 정착지 이름을 구세동(救世洞)이라 칭하고 가옥, 교회당, 학교를 세웠다... 구세동교회 (34)

  • 1911년 성진인 양진섭 장로, 양형식 장로는 가족을 영솔하여 성진 학중면 달리동으로부터 화룡현 이도구 남쪽에 이주하여 장은평이라 이름 짓고 교회와 학교까지 지어 개척마을을 건설하였다... 장은평교회 (34)

  • 1906년부터 1911년 사이에 이주된 기독교 촌락집단... 안순영은 양무정자에 김연보, 한학렬은 광제암에, 1908년 이응현은 모아산에, 1909년 최봉열은 호천포에, 오병묵, 황병길은 훈춘에, 1910년 한수현은 만진기에, 김하정, 김동현은 대황구에, 김강, 김병현, 김명규는 차대인구에, 이춘은 경신향 옥천동에, 1911년 이은향, 조덕수, 오주섭은 장백현에, 양진섭, 양형식은 장은평에, 1912년 최석화, 김순문은 의란구 남양동에, 1913년 이종식은 구세동에 각각 이주하여 마을을 개척하였다. (35)

 

3. 이주민의 상황

 

  • 북간도 이주 한인들이 겪은 여러 가지 어려운 사항... 1) 생계의 곤란, 2) 잉여금의 저축이나 농경 이외의 득전(得錢)의 불가능, 3) 중국관헌, 일본 영사관 경찰의 감시 감독, 4) 정치적 불안, 마적의 습격에서 오는 생명의 위험, 5) 불법과세, 중국관헌의 불법 주구, 압박, 폭행, 강제 귀화, 강제 탈거, 6) 동족 간의 불화, 7) 개척 변경지대에서의 생명의 위험... 특히 이주 농민의 경우 조동(중국인 지주)와 조호(이주 한인 소작인) 간에 소작료의 비율에 대한 횡포가 심하였다. (36)

  • 1909년 청일 간에 체결된 간도협약은 외면상 한인 이주 농민들이 간도에 자유로이 거주, 왕래할 수 있도록 되어 있었으나 중국 측에서는 이주 한인들을 일제의 만주 침략주구로 간주하고, 한인의 배후에 일본세력이 잠재하여 있다고 의심하여 한인들의 권리 행사를 막았다. (36)

  • 일제는 이주 한인들을 그들의 만주 침략 제국 신장을 위하여 이용하려 하였고, 중국은 일본의 만주 침략정책이 적극적으로 추진될 것이 두려워 여러 가지 구실로 이주민에게 부당한 벌금과 갖가지 탄압을 가하였다. (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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