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굉일, 『일제하 북간도 기독교 민족운동사』
제2부 : 북간도 기독교인들의 민족운동의 실태
제1장 : 교육운동
1. 문제의 제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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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하 북간도지역의 민족해방 교육운동은 일제의 식민지배로부터 자주독립과 국권회복을 쟁취하는 일이며, 또한 민족운동의 내부적 과정으로써 봉건제적인 사회체제를 극복하고 국민국가 형성을 위한 사회변혁적 실천을 이룩하는 일이었다. 북간도의 민족운동은 실력양성의 민족운동과 무장독립의 항일운동으로 그 맥락이 이어졌다. 대체로 3ㆍ1운동까지는 사회교육운동이 주류를 이루었으며, 3ㆍ1운동을 계기로 무장독립운동으로 전환되었다. (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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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0년대 국외 북간도에 전개된 반제 민족해방을 위한 민족주의 교육운동... (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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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운동사 연구에 있어서 무장운동보다는 그 배경이 되는 이주 한인사회를 기반으로 한 전반적 민족운동에 대한 이해가 선행되어야 한다는 가정 하에, 3ㆍ1운동 이후 활발해진 북간도지역 무장독립운동은 그곳 한인사회를 민족운동가들이 꾸준히 벌인 민족주의 교육운동을 통하여 축적된 민족의식이 그 원동력을 이루고 있었음을 밝혀 보려는 데 목적이 있다. (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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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권이 강탈된 상황에서 한민족의 영토였던 북간도 지역에서 이주 한인들은 망명촌락을 형성하면서 민족주의 교육운동을 시작하였는데, 그것은 당시 이주 한인사회의 역랑이 다른 어떤 본격적인 저항 형태의 민족운동을 전개하기에는 역부족이었고, 민족 역랑을 성장시키기 위해서는 교육 이외의 다른 부문에서 기대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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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간도 지역의 교육운동에 대한 고찰은 열악한 조건 속에서 무장독립운동을 전개할 수 있었던 역사적 힘의 원동력에 대한 추구인 것이다. (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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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하 한민족이 주체가 되어 실시한 민족주의 교육운동의 이념은 반제 민족해방교육일 수밖에 없었으며, 또한 민족사의 내재적 진행과정에서 보이는 근대 지향 의식은 국민국가 수립의 공화제의 성취였다. (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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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간도 지역은 일제에 있어서는 만주와 중국대륙 침략의 교두보가 되는 곳이었기에 일제의 자본 축적과 간도 침탈은 철저하였고, 이에 대항하여 중국인의 저항과 간섭도 만만치 않았다. (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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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간도 이주 한인들은 1910년대뿐만 아니라 1920년대, 1930년대에도 식민지 교육을 거부하고 민족독립 교육, 민족주체 교육에 철저하였다. (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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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간도 지역의 교육운동은 애국계몽과 의병투쟁의 두 노선이 합일되는 방향에서 추진되었으며, 그 결과 독립전쟁론이 대두하였고, 독립전쟁론의 구체적 실천을 위한 방안으로 제시된 것이 북간도의 민족주의 교육운동이었다. (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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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간도에는 독립전쟁론에 입각하여 명동촌, 용정촌, 밀산부 한흥동, 나자구, 동불사 등 많은 이주 한인마을이 형성되었으며, 한인사회는 독립운동 기지로 발전되었다. 그 기지를 중심으로 정규적인 학교교육과 비정규적인 사회교육, 민중교육, 의식화교육, 지력의 교육, 정의(情意)의 교육이 실시되었으며, 또한 3ㆍ1운동 이후 무장독립운동기를 당하자, 교육의 성격은 행동의 교과로 또한 역사의식의 실천교육으로 전환되었다. (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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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0년대... 북간도의 경우는 민중교육이 확산되고 지속적으로 진행되어 민중들의 조직적 참여가 가능했다. 또한 항일의 성격이 국민국가 형태의 민족사상이었기 때문에 전민족적, 전민중적 모든 계층의 참여를 바탕으로 국권회복운동이 전개되었다. (93)
2. 반제(反帝) 민족교육운동을 위한 항일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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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민족의 문화와 민족의식의 말살까지 도모하는 일제에 대항하여 민족독립의 큰일을 이룩할 수 있는 길이란 그들이 세력권 밖에 한민족이 집단적 세력권을 만드는 것이었다. (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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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간도에 독립운동의 기지를 설정할 수 있는 조건... 1) 압록강과 두만강 너머의 남북 만주와 노력 시베리아 지역에는 이미 1860년대부터 한인이 많이 이주하여 상당한 기반을 닦고 있었다. 2) 남북 만주와 시베리아 지역은 미처 개척되지 않은 기름진 땅이 개간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 개척을 위해 중국 및 러시아 정부에서는 비교적 관대하게 한인이 이주를 받아들이는 형편이었다. 3) 남북 만주와 시베리아 지방은 한민족에게는 역사적으로 연원이 깊은 민족의 옛 땅이었다... 한민족의 활동무대로서 민족의 발달과 더불어 민족문화 형성의 중심지였다는 점에서 다른 나라의 영토아고 생각되지 않는 애착심이 있었다. (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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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간도에서 항일 독립운동 기지로서 개척된 대표적인 곳을 찾아본다면 명동촌, 용정촌, 밀산부, 한흥동, 청산리, 적안평 등지가 있다. (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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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동은 명동학교와 명동교회가 그 중심을 이루면서 1900년경부터 일제시대를 통하여 이주 한인들의 민족운동, 독립운동, 문화운동, 교육운동, 신앙운동을 폈던 중심지로 북간도 지방과 만주 노령, 연해주 등지를 연결하는 곳이었다. 본래는 두만강 북쪽 화룡현 지신사 장재촌이라 했으나 한인들이 입주하여 개척한 뒤부터 명동마을로 불리우기 시작했다. (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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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동촌은 본래는 황무지였는데, 1899년 회령에서 살던 김약연을 비롯하여 김하규, 종성에서 살던 문정호, 남위원 등이 141명의 대가족을 이끌고 이곳에 들어와 새로운 민족공동체 운동을 전개하였다. 그리고 이보다 앞선 1896년 두만강 건너편에 있는 자동이란 곳에 이주해 살던 윤재옥이 가족을 데리고 1900년부터 이들과 합류함으로써 이들 5개 가문이 마을의 개척자가 되었다. (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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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말의 동학농민전쟁, 명성황후시해, 만민공동회 사건 등 격동하는 국내외 사회변동과 기근, 빈곤, 민생고의 민중들의 삶을 체험하면서 이들은 북간도에 이주하여 기름진 땅에서 경제적 해방을 이룩하고, 민족의 옛 땅인 간도를 우리 영토로 만들며 또한 무엇보다도 인재를 양성하여 교육구국운동을 전개하고자 함이 그 목적이었다. 이들의 일차적인 관심은 민생고의 해결이었고, 다음으로 새로운 민족공동체의 삶을 이룩하는 이상향의 건설이었으며, 그 다음으로는 자녀교육이 큰 관심거리였다. (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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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약연과 김하규... 사숙을 차려 자녀 교육에 힘썼다... 규암재를 집중적으로 육성, 명동마을의 모든 아동을 교육대상으로 삼았을 뿐 아니라 인근 10여 개 한인마을 아동들도 전부 규합... 규암재가 번창하게 되자 1908년에 명칭을 명동사숙(明洞私塾)으로 개칭, 1909년에는 명동학교로 다시 개칭하게 되었는데, 이 학교를 중심으로 해서 이주 한인들의 큰 공동체가 형성되었던 것이다. 이것이 곧 명동마을이고, 이 명칭은 규암재를 명동사숙으로 바꿀 때부터 부르기 시작했던 것이다. (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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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동이란 이름은 해동(海東), 동국(東國), 대동(大東) 등 옛 고유명칭에서 동(東)자를 취하였고, 명(明)자는 ‘새’ 또는 ‘밝힌다’는 새 민족공동체의 뜻이다. 이렇듯 명동촌은 민족주의로 이념화된 독립운동의 확고한 전초기지였고, 마을 전체가 민족의식으로 공동체를 이루었으며, 북간도에서 대표적인 한인사회가 확실하게 자리잡은 곳이었다. (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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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두레촌으로 불리우는 용정(龍井)은 원래 국내에서 동학운동에 가담했다가 실패한 후 북간도로 쫓겨간 세력들이 천주교로 개종한 후 북간도 이주 한인사회의 한 구심세력으로 형성되었는데, 이주 한인 천주교도들의 교우촌(敎友村)으로 개척된 곳이었다. 명동촌이 북간도 문화의 발상지라면, 용정은 북간도 문화를 꽃피운 곳이었다. 특히 용정은 간도 교육의 심장부로서 은진, 영신, 명신, 동흥, 대성 등 민족주의 교육이념을 지향하는 중학교가 설립되어 학교를 중심으로 발전한 도시라 하여도 손색이 없을 정도였다. 용정은 1906년 이상설, 이동녕, 이회영, 정순만, 여준 등 신민회 회원들에 의하여 국외 독립운동 기지로 선정되었다. (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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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6년 8월 이상설... 용정촌 서전대야에 자리 잡고, 그곳에 민족주의 교육의 요람인 서전의숙을 열었다. 이 서전의숙은 북간도 최초의 신학문을 가르친 학교였으며, 철두철미한 반일 민족주의 교육을 실시한 학교였다. 1907년 개신교 선교사인 이화춘, 안순영, 정재면, 이응현 등은 캐나다 선교부와 함께 용정을 거점으로 북간도에 기독교를 전파하였으며, 그 이후 용정은 자연 북간도지역의 종교 문화의 중심지가 되었다. 용정중앙교회, 동산교회는 민중교육ㆍ민중계몽운동의 산실로서 당시 청소년들이 신사조를 접할 수 있는 유일한 곳이었다. (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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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도 안순영은 양무정자에, 김연보, 한학열은 광제암에, 이웅현은 모아산에, 최봉렬은 호천포에, 오병묵, 황병길은 훈춘에, 한수현은 만진기에, 김동현은 대황구에, 김강ㆍ김명규는 차대인구에, 이춘은 경신향 옥천동에, 양진섭, 양형식은 장은평에, 이종식은 구세동에 각각 이주하여 마을을 개척하였다. 성진 교인 양진섭이 개척한 이도구 장은평과 이종식과 이경수 집사가 개척한 화룡현 삼도구 구세동은 그 부근 백운평과 합하여 통칭 청산리라고 하였다. (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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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도 4현에는 각지에 한인마을이 건설되고 한인사회가 형성되었으며, 교회와 학교가 설립되었다... 북간도에는 천주교, 개신교, 천도교, 대종교, 시천교, 원종교, 공교, 청림교 등 각종 종교가 성행하였는데 개척 이주촌은 종교를 구심점으로 발전하였고, 또한 포교의 수단으로 교육기관을 설립하였다. (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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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민회 회원이며 관북지방에서 기독교 전도운동과 독립운동을 일치시켰던 이동휘는 1911년 북간도에 와 부흥사경회를 개최하였고, 1913년 망명하여 명동촌의 김약연과 함께 전도운동ㆍ교육운동 등 실력양성운동을 일으켰다... 이동휘는 자동, 와룡동, 소영자 등지에 교회와 학교를 개척하도록 하였는데, 교회와 학교는 명동촌의 경우처럼 새로운 공동체의 중심이 되었고, 이 공동체는 주위의 여러 마을을 규합하여 더 큰 공동체로 발전되었다. 자동의 정동학교, 와룡동의 창동학교, 소영자의 길동사범학교(광성중학) 등은 명동학교처럼 민족독립운동가들에 의하여 설립되고 운영되었던 학교였다. (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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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영자의 길동학교는 이동휘 계열의 김하석, 김립, 윤해, 이동춘, 계봉우, 장기영 등이 설립하였으며, 교사 양성의 속성 사범학교 과정을 병설하였다. 또한 오상근, 오병묵, 이병휘, 신흥남, 김종만 등은 연길현 와룡동에 창동소학교, 창동중학교를 증설했다. (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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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격적인 사관학교 건립을 위하여 개척된 곳은 동북만수분대전자의 나자구와 밀산부 봉밀산 부근의 한흥동이 있다... 밀산부의 한흥동을 건설하기 위해 1910년 이주 한인사회에서는 태동실헙주식회사가 조직되어 모금운동이 전개되었다. (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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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0년 4월 청도회의... 국외 독립운동기지 건설이 독립운동의 당면과업으로 결정됨... 신민회의 이동휘, 안창호, 신채호, 조성환, 이종호, 이강 등은 한인촌락을 개척하여 학교를 설립하되, 특히 군사훈련을 위주로 하는 사관학교를 세우고자 밀산부 봉밀산 부근의 미개간된 땅 10만 평을 사들였던 것이다. 한흥동이란 이름은 한국을 부흥시킨다는 뜻이며, 독립운동가 이승희는 이곳에 학교를 세워 한민학교라 불렀다. 특히 이승희는 손수 동국사략을 저술하여 민족의 역사를 가르쳤으며, 민약(民約)을 제정하여 한인들의 단결을 꾀하기도 하였다. (99-100)
3. 북간도 민족주의 교육이념과 특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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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간도 민족주의 교육운동은 민족독립운동가, 또는 배일주의, 항일주의를 실천하는 인간형의 배출을 그 교육의 목표로 삼았다... 북간도의 민족주의 학교들은 민족이념을 중심으로 교육시켰는데, 그 결과 학생들은 누구나 자기의 주체성 확인에 철저하였다... 한민족에게 비극을 가져다 준 실체에 대해서 깨닫고 아울러 일제의 침략과정의 방법을 고찰하며, 또한 저항방법에 대한 연구가 교육의 중요 목적이었다. (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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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측은 1914년 1차 대전이 발생하기까지는 교육에 관여치 않았다... 일제는 1907년 용정에 통감부 임시파출소를 설치하면서 한인교육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그 중요성을 인식하고 있었다. 일제는 해마다 북간도 지역에서 전개되고 있는 한인들의 교육운동에 대해 조사하여 그 복명서를 작성하였다. (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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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0년대부터 북간도 지역은 많은 독립운동가와 애국지사들이 집결하여 이주 한인사회의 2세 교육에 힘써 그 내용도 서당교육이 아닌 새로운 근대교육의 내용이면서 민족주의 이념을 나타내었기 때문에 일제는 그에 대한 봉쇄 방침과 대항책을 모색하였다... 서전서숙이 1907년 문을 닫게 되자 임시 간도파출소 소장은 매월 20원의 보조금을 교부할 뜻을 표명하였다. 즉 서전서숙을 매수하여 민족주의 교육에서 그 방향을 친일적으로 또는 중립적인 것으로 바꾸려 하였으나, 그 제안은 거절당하였다. 서전서숙의 그 정신적 계층은 명동촌의 김약연과 연결되어 명동학교가 계승하였고, 1908년 재학생들은 훈춘현 탑도구 부근으로 옮겨 일 년간 교육받은 후 졸업식을 거행하고 완전히 해산하였다. 1909년 간도협정으로 일본 영사관이 간도에 진출하자 일제는 적극적으로 민족교육에 대해 매수와 회유공작을 전개하였고, 그 결과 21개소의 일제 보조금을 받은 서당이 출현하였고, 이러한 일제의 통제 하에 있는 학교에서는 조선총독부 편찬 교과서가 사용되고 일본어 보급이 독려되었다. 반면 항일 민족적인 교과서 내용이 금지되고, 민족주의적 교육이 중지되었다. 일본 제국은 한국 내에서 실시중인 조선총독부 교육정책을 북간도 지역 한인들까지 확대 연장시키고자 하였던 것이다. (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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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5년 일제는 중국정부에 압력을 가하고, 중국정부로 하여금 한인교육에 적극적으로 간섭하도록 하였다. 이에 중국정부는 일제의 간도침략이 우려되었기 때문에 간도 이주 한인들에게 ‘획일간민교육법’을 강요하였다. (1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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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학교를 운영해 왔던 김약연은 중국 측의 의견을 수용하면서도 민족주의 교육을 계속하도록 조처하였다... 일제는 민족부르조아 계층과 무지 몽매한 사회계층을 회유하여 친일세력의 거점을 확보하고자 하였고, 반제 민족학교는 항일민족운동가와 학생, 그리고 민중 층이 서로 연계하여 이에 대항하였다. (1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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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가 운영하는 학교에서는 일제의 국가정책에 적극 협력하는 인간형이 생산됨... 북간도 민족주의 교육이 초래한 영향력은 반일ㆍ항일적 인간을 창출하고, 나아가 반제 민족해방운동에 참가할 수 있는 인간형이 창출된다. (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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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간도지방의 민족주의 교육이념의 사상적 연원... 1) 의병계열의 민족주의 이념... 일반적으로 의병은 군주 중심의 근왕적 성격을 표출하였으나 북간도는 홍범도 의병의 민중적 성격과 공화제적 국민국가체제를 지향하였다. 2) 관북지방의 애국계몽운동 계열... 서북학회, 한북흥학회의 회원들은 합병 이후 북간도로 그 거점을 옮겨 교육운동을 전개하였는데, 그들은 철저한 민족주의를 지향하였다. 이동휘, 황병길, 또는 신민회의 정재면 등은 본격적인 북간도 민족교육 계획을 수립한 후 두만강을 건너 북간도에 민족해방을 위한 교육기지를 건설하였다. 3) 함경도 지역, 서부지역의 동학계열과 실학계열 및 역사변혁을 기도하던 예수교운동 등의 사상계열을 들 수 있는데, 실학이 철저한 현실인식을 사회과학적으로 규명한 변혁사상이라면 동학사상과 기독교의 메시아 신앙은 해방과 구원을 희구하는 사상으로서, 평안도ㆍ함경도 등 서부지역에는 현실사회의 폭압과 그 고통에서 해방되기를 갈망하는 사회변혁의 욕구가 일반민중의 심성 속에 자리잡고 있었다. 그러므로 북간도 민족교육 이념의 바탕에는 애국계몽적 개화사상과 함께 변경지역의 생활에서 당한 고난의 체험을 바탕한 서부지역의 변혁사상이 있었다. (103-1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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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간도 교육이념은 학교 설립자, 교사들의 민족주의 성향에 그 바탕을 두었다... 남인상, 김약연, 남세극, 김진오, 양하원, 오병묵, 마진, 강백규, 이동휘 등은 간민교육회의 회원들로서 학생들에게 사상적으로 절대적인 영향을 끼친 인물들이다. 이들은 국내에서 신민회, 서북학회, 한북흥학회 등에서 교육구국운동에 매진하던 인물들이었으며, 국내의 숭실학교, 오산학교, 대성학교, 서울 기독청년회관, 상동교회청년강학당, 또는 북간도 서전서숙이나 명동학교 출신이었다. 서전 출신인 윤정희, 남세극, 구자승, 김학연, 오병묵이나 명동 출신인 문재린, 윤영석, 김광선, 홍우만, 김덕승, 최인묵, 이정준, 문성린, 김석관 등은 모두 교육사업, 종교사업에 종사하였다... 북간도 전역에 민족주의 교육이 단시일에 파급될 수 있었던 까닭은, 교육기관이 많아 교사양성이 빨리 이룩되어 이주 한인들에게 교육의 기회를 제공한 점과, 애국애족의 민족주의 사상을 뼈대로 한 철저한 교육이념이 있었던 점이다. (104-1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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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간도 민족이념의 철저함... 북간도 민족주의 학교에서는 연호를 사용함에 있어서 ‘단군기원’, ‘서력기원’ 외에도 ‘국치’(國恥) 몇 년이라는 연기를 사용하였다. 이것은 합방된 해를 잊지 말고, 늘 국권회복을 염두에 두자는 뜻이었다. 또 해마다 8월 29일에는 ‘국치일’의 행사를 거행함으로써 민족의 설원을 풀고자 맹서하였고 북간도 민족주의 학교에서는 각종 행사 때마다 태극기를 내걸고 애국가를 제창하였다. 만주국이 성립된 1931년까지 북간도 민족학교에서는 개천절과 3ㆍ1절이 되면 단군의 초상화를 정면에, 그 옆에 태극기를 내어걸고 애국가를 부르며 조국광복이 속히 오기를 기원하였으며, 명동학교는 국경일과 국치일마다 태극기를 걸어놓고 김약연 교장은 고요히 민족애를 설파하였다. 작문시간에는 어떤 제목이 나오든 조국독립으로 결론을 내리지 않으면 점수를 안주던 이기창 선생이 있어 명동학교 학생들은 민족의식과 애국심을 배웠다. (1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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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는 수차례에 걸쳐 김약연에게 ‘명동’이란 이름을 고칠 것을 종용하였는데, 일제는 ‘명동’이라는 학교 이름이 두려웠던 것이다. (1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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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간도 각 학교에서는 역사현장의 답사를 통해 애국심 교육을 실시하였다... 역사적 유물이 발견되는 고장이면서, 안중근 의사가 이등박문을 저격하기 위하여 권총사격 연습을 하던 문안골도 명동학교 부근이었다. (1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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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3년 단오 날, 명동학교를 비롯한 민족주의계 학교는 용정 부근 합성우 뜰에 모여 연합대운동회를 개최하였다. (107)
4. 기독교 민족주의 학교와 그 교육과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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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간도에 있어서 교육운동은 1906년에 시작되었다... 이상설... ‘서전서숙’... 1907년 10월 경 이상설이 헤이그 밀사사건에 연루되어 해삼위로 피난하자 문을 닫았고, 그 전통을 계승하여 1908년 김학연, 김약연이 화룡현 태랍자 명동촌에 신식학교인 ‘명동서숙’을 설립하였다. 서전서숙은 1년 미만의 짧은 역사로 끝나버렸으나 항일 독립운동사상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107-1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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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전서숙의 뒤를 이은 명동서숙은 1901년 4월에 창설된 김약연의 규암재가 발전한 것이었다... 명동서숙은 1909년 4월에 ‘명동학교’로 개칭되었고, 1910년 3우러에는 중등교육과정에까지 확장, 발전되어 명동중학교가 병설되었으며, 또한 여성교육의 필요성이 절감되어 1911년 3월에는 명동여학교까지 병설되었다. 처음 명동학교는 숙장에 박무림, 학감에 김약연, 재무에 문치정, 교원에 김학연, 남위원이 취임하였다... 명동학교의 임원이 서전서숙에 참여했던 인물들... 서전서숙의 박정서(박무림)는 명동학교의 숙장이 되었고, 여준은 교원이 되었으며, 서전서숙에서 수학한 김학연과 남위언이 명동학교의 교원이 되었다. (1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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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동학교는 1909년 서울 상동청년회관 출신 정재면을 교사로 초빙하면서부터 그의 권유를 받아들여 기독교 교육을 실시하게 되었다... 기숙사 제도... 명동학교는 서전서숙을 계승하였고, 창동학교도 서전서숙 출신에 의하여 설립되었다. 창동학교는 1910년 창동소학교로 기독교인 남공선에 의하여 연길현 와룡동에 설립되었고, 1912년에 창동중학으로 발전하였으며, 서전 출신의 오병묵과 이병휘가 교사였다. 와룡동은 명동촌과 마찬가지로 망명촌인데 창동학교도 명동학교처럼 열렬한 민족교육을 실시하였다. (1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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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동은 종성 간도 개운사... 민족주의자 김성래, 김윤승에 의하여 정동중ㆍ소학교가 발전하였다. 3ㆍ1운동 당시 독립운동을 전개하지만, 일군의 간도출병에 의해 폐교당하였다. (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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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룡현 소영자에게 이동휘 계열의 인물들에 의하여 1911년 길동기독학당이 설립되었다. 길동소학교라고 불리운 이 학교의 설립인은 이동휘, 김하석, 김립, 윤해, 이동춘, 계봉우, 장기영 등이며 교장은 이동춘, 교감 및 재무는 김하석, 교사는 김립, 윤해, 장기영, 계봉우 등이었다. 이들은 교육자 양성을 위하여 6개월 속성사범과를 병설하였고, 1912년 광성중학을 또한 병설하였다. (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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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ㆍ1운동 이후 북간도 무장운동을 전개한 이동휘계의 김병흡, 이종식, 이태현, 이홍준, 김상호, 이번, 유예균, 김립, 김하석, 오영선, 서인한, 최빈, 최봉우, 조필우, 장석함 등은 소영자, 적안평, 동불사, 구세동 등지를 중심으로 교회운동과 교육운동을 병행하여 독립운동의 책원지를 조성하였다. (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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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6년 일제에 의하여 조사된 전간도 한인학교 총수는 182개 학교였는데, 그 중에 일반 민간인이 설립한 학교는 83개교였고, 각 종교계에서 설립한 학교는 99개교였다. 이를 각 종교별로 구분하면 기독교(개신교) 계가 71개교, 천주교계 9개교, 단국교계가 5개교, 대종교계 3개교, 시천교계 2개교, 천도교계 1개교였다... 연길현 70개교 1,370명, 화룡현 66개교, 1,219명, 훈춘현 33개교 757명, 왕청현 13개교 490명... 한인학교 182개교의 생도수는 총 3,836명이었다. (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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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간도 민족주의 학교들은 두 가지 방향으로 교육목표를 설정... 1) 신학문과 신문화의 수용과 발달을 위한 근대지향적 측면이며, 2) 민족의 자주독립과 보존을 위한 민족지향적 측면이었다. (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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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의 자주독립을 쟁취하기 위해서는 저항운동과 함께 개화자강의 신문화운동이 동시에 요청되었다... 개화자강, 근대지향의 목표를 위하여 1) 인간 덕성교육, 2) 실업교육, 3) 민주시민교육, 4) 법률ㆍ경제교육, 5) 과학교육, 6) 사범교육, 7) 외국어교육, 8) 한학교육 등 여러 가지 교파를 교육내용으로 삼았다. 그리고 이와 병행하여 국혼과 민족의식을 일깨워 독립전쟁을 수행하기 위해 1) 국어교육, 2) 애국심교육, 3) 신앙교육, 4) 역사교육 등이 강조되었다. (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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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간도 민족주의 학교에서 가장 중요시한 교과과목은 병식체육교육과 학사교육, 국어교육 등이었다. (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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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민교육회’는 북간도 한인학교 중 소학교 상급반부터는 군사훈련을 하도록 결정하여 목총을 사용한 군사훈련을 실시하였다. (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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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에서는 1915년 ‘개정 사립학교 규칙’에 의해 역사교육은 정규교과에서 엄금되었다. (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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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간도 민족주의 학교에서는 『대한역사』, 『유년필독』, 『대동역사략』, 『월남망국사』, 『내외역사』와 같은 국내에서 사용 금지된 교과서를 사용하였다. (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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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일주의로 지목된 훈춘현의 신풍야소학교(교장 김진오)도 역사과목을 중요 학과목으로 인식하여 역사 교과서를 다섯 권이나 배우도록 하였다... 배일주의로 지목된 훈춘현 황구 동창학교(교장 김남극)의 교과과정도 『유년필독』의 역사교육과 병식체조의 군사훈련 두 과목 뿐이었다. (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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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북간도 민족주의 학교의 역사교재로 많이 쓰인 교과서는 『유년필독』, 『월남망국사』, 『오수불망』, 『최신동국사』 등이었다. (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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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간도 민족주의 학교의 민족주의 교육운동은 그 이념과 체제에 국내의 경우와 비슷했으나, 일제의 감시가 비교적 한산했기 때문에 1910년대 그 교육내용은 민족이념에 철저를 기할 수 있었다. (114)
5. 민중의식의 선양과 사회교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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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0년대... 북간도에서 민족운동가들은 신민회의 목표대로 사회결사와 교육계몽 등 민족운동을 활발히 일으켜 무장독립전쟁의 원동력을 양성하였고, 여기에서 비축된 힘은 계속적인 독립운동의 큰 원천이 되었다. 기독교 민족운동가들은 전도운동을 한 축으로 하고, 거기에 사회교육운동을 또 한 축으로 삼았다. (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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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6년 간도에 최초의 교회가 성립되고 1921년 간도노회가 조직될 때까지 간도 4현에는 당회 조직교회 30개 처, 미조직교회 57개 처, 기도회, 처소(개척교회) 28개 처 등 모두 백여 처의 교회가 형성되었다. (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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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 민중들의 교회 입교 동기는 이주지인 북간도의 역사적 상황과 관련된다... 1) 중국 관리들로부터 생명과 재산을 보호받기 위한 자위 수단으로 기독교에 입교하였으며, 2) 자녀들의 교육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입교하게 되었는데... 3) 정신생활의 안정을 얻기 위해 입교하기도 하였다... 4) 북간도 한인들은 자위단체의 필요성에 입교하고 교회를 형성하였다... 5) 경제적 자립은 이주민 개개인으로는 불가능했으므로 그들은 교회라는 신앙공동체를 중심체로 해서 노동력과 재력을 집결하여 자립을 이룩할 수 있었다... (116-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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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간도 이주... 그들이 처한 모든 문제를 자력으로 해결해야 할 처지에 있었다... 조직체의 필요성을 절감... (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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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는 민중들의 신앙공동체이기 이전에 경제적, 사회적 생활공동체였음이 시사되며, 또한 민중의식화의 학교였다고 생각된다. (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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규암 김약연... 1868년(고종 5년) 회령군 동촌에서 출생... 명동촌에 이주... 규암재... 1909년 김약연 나이 41세... 유교사상에서 기독교로의 개종... 구한말 지식인들이 구국일념으로 기독교로서 입신하는 경우가 많았던 것과 같이 김약연도 기독교를 근대문화의 매체로써 관심을 갖게 되었으며, 그의 입교는 간도지방 민족지도자들의 집단적인 개종을 초래하였다... 김약연, 문치정, 박무림, 김하규, 김영학, 남위언, 유찬희, 구춘선, 강백규, 마진... (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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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간도에서 장로교가 인기 있는 것은 장로교의 진수와 자유, 평등주의이며 합중국이 영국 식민으로부터 독립하여 부강한 나라가 된 것은 신앙으로 단결하였기 때문이라는 신념이 북간도 기독교인들의 뇌리에 깊이 새겨 있어서 이들은 기독교 신앙의 최종 목적을 제2의 미국이 되어서 한국이 일본으로부터 독립하는 일로 삼고 있다”(일제의 북간도 기독교 상황 보고서)... (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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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간도 교회가 형성될 수 있었던 가장 중요한 조건은 민중들의 자주ㆍ자립의식과 민족운동가들의 자치의식이 신앙공동체인 교회를 통하여 구현될 수 있었던 점이다. 또한 전도인과 선교부의 헌신적 활동이 교회 형성의 원동력이 되었다. (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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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간도의 기독교 전파는 신민회의 파송을 받은 정재면에 의하여 신학문을 가르치는 동시에 명동촌, 용정 등지에 복음의 씨앗을 뿌리게 된 데서 비롯되었다. (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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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간도의 기독교는 서양선교사의 힘으로 전도된 것이 아니고, 순 우리 민족의 힘으로 한국인의 손으로 전도되었다. (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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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는 북간도 기독교 운동을 독립운동의 일환으로 이해하였다. 당시 북간도에서 기독교를 믿는 것을 곧 애국운동이라고 생각할만큼 기독교는 반일 색체가 농후하였기 때문이다. (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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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간도의 교회는 민족의 독립을 위하여 먼저 이주 한인들에 대한 교회와 계몽의 필요성을 느꼈다. (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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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의료선교를 통한 민중운동... 연결현 용정촌 캐나다 장로파 선교부 경영 제창병원은 한인들이 이용받을 수 있는 유일이 근대식 의료기관으로서 민족운동가들의 정치적 피난처로도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2) 민중교육운동으로 교회의 전도활동... 3) 민중교육의 일환으로 토론회를 자주 개최하였다... 4) 교회는 기독청년회운동을 하였다... 5) 교회는 연극활동을 통한 민중운동도 하였다... 6) 교회는 야학을 열어 문맹퇴치에 앞장섰다... (121-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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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동촌을 중심으로 한 민중교육운동은, 북간도 독립운동의 준비작업으로써 1909년 정재면, 김약연, 박태환 등 민족운동가들이 명동학교 학생, 명동교회 교인, 명동촌의 주민을 동원하여 길동기독전도회를 조직하면서 시작되었다. 이로써 기독교 전도의 종교운동은 계몽운동, 교육운동과 함께 아울러 전개되게 되었다. (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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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9년 민중운동가들은 김약연의 주도함에 따라 계몽단체 성격의 북간도 한인자치회를 조직하였는데, 계봉우, 최공일 등이 이에 합류하여 간도 각지를 다니면서 유세하고 지부를 설치하기도 하였다. (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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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업교육의 일환으로 협동조합운동...화룡현 장재촌(명동학교)에는 1910년 ‘길동식산회사’가 설립되었다... (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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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2년 김약연, 이동휘, 계봉우, 이태현, 조극 등 북간도 교회 대표 16명은 캐나다 장로회 선교부에 청원서를 제출하였는데, 그 내용은 간도지역 의료기관과 남녀 중등교육기관 및 교회의 증설과 전도사업의 확장을 요청하는 것이었다. (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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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영국덕이”라 불렸던 캐나다 선교부 지역은 치외법권 지역으로서 일본 영사관의 힘이나, 중국 군경의 힘이 미치지 못하였다. 이 캐나다 선교부의 선교사들은 스코틀란드 출신으로 종교의 현시람여를 신학적으로 긍정하면서 한민족의 독립운동에 대한 지대한 관심과 동정을 가지고 적극적으로 지원하였다. 선교부는 명신여학교와 제창병원을 설립하였고, 여러 측면의 사회교육을 대대적으로 실시함으로써 민중계몽에 크게 공헌하였다. (123-124)
6. 무장운동기의 실천교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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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간도 지역의 3ㆍ1운동은 그 시작부터 무장운동으로 출발하였으며 기다리던 독립전쟁이 3ㆍ1독립만세 축하식에서 선포되었다... 북간도지역의 무장운동의 출현은 3ㆍ1운동의 혁명성을 확인시켜 주었고, 1920년대 국내투쟁에 새로운 발전단계를 제시하게 된다. 1920년대 소작쟁의 노동쟁의와 같은 민중적 투쟁은 북간도지역의 무장항일 투쟁의 영향으로 이룩된 것이다... 북간도의 무장운동은 1910년대 계속되었던 민족교육운동과 민중의식화의 사회교육운동의 축적된 결과가 나타난 것이 된다... 북간도 지역에서 3ㆍ1운동의 2대 지주는 총과 신문이었다. (1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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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간도지역의 3ㆍ1운동에서 가장 중추적인 역할을 감당한 것은 학생층이었다. 그 결과 명동ㆍ정동ㆍ북일학교 등 많은 학교가 소각되고 독립군양성소로 주목받던 민족주의 학교가 폐쇄되었다. (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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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ㆍ1운동이 일어나자 간도의 학생과 청년들도 독자적으로 독립운동을 모의하고 준비... 학생대표 선출... 명동학교의 유익현, 국자가 도립중학교의 최응렬과 김필수, 소영자 광성학교의 김상호, 정동중학교의 송창문... 명동학교 유익현을 전북간도 한인학생대표자로 선출하여 노령의 한족 독립회의에 참석토록 결정하였다... 2월 28일 이래로 국민회 회장 구춘선의 이름으로 된 격문이 용정, 국자가 등에 배포되었다... (125-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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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 13일 북간도 지방의 3ㆍ1독립만세운동의 첫 봉화는 용정촌에서 올려졌다.... 시위 행진... 행렬 선두에 섰던 기수 박문호(이도구 장은평학교 교사)가 현장에서 쓰러졌다. 뒤이어 연발되는 총성에 명동중학교 김병영이 순사... (126-1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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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9년 5월 간도의 독립운동 간부 중, 훈춘지방으로 간 이외의 잔여세력인 국민회의 편집부원 김정, 통신부원 김상호, 정동학교 교사 백유정과 지송 등은 화룡현 태랍자의 마진을 중심으로 활동을 전개하였다... 경성의학전문학교 학생 이봉수 외 2명은 명동학교에 잠복하여 길림 방면에서 한인들이 가져온 약품으로 폭열탄(다이나마이트)를 제조하였다.... 미국 상항의 소동진, 북경 중앙법정학교 졸업생 서일보, 남경사관학교 졸업생 채극 등은 해외 또는 중국으로부터 명동학교를 거쳐 훈춘, 탑도구 무장대와 합류하기 위하여 출발하였는데, 그 길 안내를 명동학교 학생들이 하였다. 또한 명동학교에서는 비밀 결사대, 충열대가 조직되었다... 충렬대 대장 김학수는 중국인 배일단체 백룡단으로부터 기관총 1정을 구입하여 명동학교에 부근에 보관하였다. 또한 명동학교 교사 강봉우의 지도로 명동학교 충열대 대원들이 수집한 총기는 120정에 달했다. 명동학교에는 충열대에 뒤이어 암살대가 조직되었다. 이 암살대는 연길현 국자가 소영자 사립학교(광성학교)교사인 김상호가 명동학교 학생 15명, 정동학교 학생 10명, 국자가 중국 도립학교 한인학생 3명, 배영학교 학생 2명을 합한 30명으로 조직하였다. 이들의 목적은 일인과 친일파 한인, 즉 밀정이나 일본 영사관 근무 한인 순사 등을 암살하고 국내 진공 시에 결사대의 역할을 조직하였다. 충열대, 자위단, 암살대는 국민회의 명령에 따라 일제에 대항하는 저항운동을 전개했다. 훈춘지역 국민회 소속 결사대는 탑도구의 황병길이 지도하였고, 간도지역은 명동학교를 중심으로 김상호, 마진 등이 지도하였다. (127-1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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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동학교 부근 촌락과 회령, 용정촌 도로에서 통행하는 한인 및 중국인들을 불심검문하여 수상한 자를 감금하였고, 밀정 등 친일파를 색출하기 위하여 통행자들에게 몸수색을 실시하였다... 용정촌 거류민회장 친일파 이희덕을 명동학교로 납치, 명동학교 부근에 감금해 놓고 이희덕으로 하여금 민회의 해산선언에 날인토록 하였다. 이들은 계속적으로 용정촌 국자가 부근의 일본인 주택 및 영사관 건물에 방화하였으며, 용정촌 총영사관 부속건물구제회의 사무실과 숙직실 건물을 불태워 한인들에게 경각심을 일깨웠다. 또한 용정촌 동양척식주식회사 소유 건물(용정경찰관 관사)에도 방화하였다. ... 회령 헌병대 분대 소속 보조원이 종성대안 호천가를 밀탐하러 왔다가 정동학교 학생들에게 폭행당하여 중상을 입는 일도 있었다... 이 때문에 정동학교는 중국 관헌에 의하여 폐쇄령이 내려졌지만 이에 굴하지 않고 수업을 게속하였다. 당시 명동학교 학생들이 모집한 군자금은 20,000루불 이상의 큰 액수였다. (1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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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동여학교의 학생들... (1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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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동학교의 교사와 학생들은 <자유의 종>이라는 신문을 만들고, 두도구 부근 한교 학생들은 <태극기>라는 지하 신문을 발행하였다. 이것들은 국민회에서 제작한 <조선독립신문>과 함께 당시 간도에 배포된 한인사회에 독립운동 소식을 전해주는 신문들이었다... 일제가 발행하는 <간도 시보>의 구독이 많았으므로 학생들은 <자유의 종>, <태극기> 등 비밀리에 등사한 소형 신문을 간도 및 국내에까지 분포하였다. (1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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탄압을 강화하기 시작한 일제... 5월 2일 명동ㆍ정동학교와 인근마을을 폐쇄시키고 중국 군경으로 하여금 교사, 학생들을 체포하도록 하였다... 명동부근 벽지에 유하천, 유예군 등 국민회 의사부 임원들은 남아서 계속하여 명령서를 발부하면서 연락 및 독립운동에 매진하였다. 명동학교가 폐쇄되자 명동학교의 항일운동은 선교부 경영 영신학교, 은진중학교, 명신여학교로 계승되었다. (129)
7. 민족해방교육운동의 성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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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도는 일본 제국주의의 만주침략의 교두보... 따라서 중국관헌은 이주 한인들을 일본 침략의 구실이 된다고 생각하여 귀화를 강요하고 간섭ㆍ탄압하였다. 이주 한인들은 두 세력 사이에서 민족주의 학교를 운영하고자 최선의 노력을 다하였다. (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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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간도에서는 교육운동을 전개하기 위한 기지화 방략으로 독립전쟁론에 그 이론적 기초를 두었다. (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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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적으로 1910년대를 민족운동의 암흑기로 간주하여 왔지만 북간도 민족주의자들이 전개한 반제 민족해방운동의 사례는 우리 민족이 일제하에서도 건재하였음을 과시하였고 또한 민족역량의 성장에 대한 증거가 되었다. (1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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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민족교육 운동을 위하여 개척된 기지는 해방구로서 발전하였고, 새로운 삶을 추구하는 민족공동체 운동으로 발전되었다는 점이다... 2) 북간도 민족교육은 이념면에서 항일주의, 반일주의, 배일주의를 지향하는 민족의식이 투철한 인간형을 창출하였다.... 3) 북간도 민족주의 학교의 교육목표는 교육과정상 근대지향과 민족지향의 두 방면으로 추진되었다... 4) 북간도에서는 사회교육의 장으로 기독교회가 이용되었다... 4) 북간도 3ㆍ1운동의 특징은 무장독립운동이었으며 독립전쟁의 선포이기도 하였다. (131-1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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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9년 3ㆍ1운동 이후 북간도 4현에서는 30만에 달하는 한인사회를 기반으로 무장독립운동이 일어났는데, 그 힘의 근원은 1910년대 북간도 민족주의자들에 의한 민족주의 교육운동에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1910년대 민족주의 반제 민족해방 교육운동은 무장독립운동의 정신적ㆍ인적 자원을 공급하였던 것으로 보여진다. (1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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