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굉일, 『일제하 북간도 기독교 민족운동사』
제2부. 북간도 기독교인들의 민족운동의 실태
제2장. 역사교육
1. 문제의 제기
-
일제하 서북간도의 민족운동은 신민회의 자강론적 민족주의를 계승한 실력양성운동으로 전개되다가 3ㆍ1운동을 계기로 무장독립의 항일운동으로 발전하였다. (137)
2. 행동과 실천의 교과
-
역사교육의 목적은 주지주의에 입각한 역사지식의 습득보다 민족의식, 민족정신, 민족애를 보다 중시하는 주정주의적 입장이 강조되었고 나아가 실천적 역사교육이 요구되었다. (138)
-
민족주의적 애국심 계몽은 이미 1906년 이래 실시된 철두철미한 반일민족교육, 자강주의의 국혼적 국사관에서 비롯하며 서북간도 독립기지에 세워진 이주 한인들의 민족학교의 민족사교육을 통해 뿌리깊이 내면화 되었다. (138)
-
서북간도 지방의 민족주의 교육이념의 사상적 연원... 1) 의병계열의 민족주의 이념... 2) 신민회, 서북학회 계열의 애국계몽운동 세력... 3) 함경도 지역, 서북지역의 동학계열, 대종교계열, 실학계열 및 역사변혁을 기도했던 기독교 운동계열 등 민족이념을 견지한 다양한 사상계열... (139)
-
서북간도 민족교육 이념의 바탕에는 애국계몽적 개화사상과 함께 봉건왕조시대에 겪었던 서북지역 차별의 설움과 외세로부터 오는 고난의 체험이 바탕이 된 변혁사상이 있었다. (140)
-
독립전쟁론의 첫 실천방안은 항일민족 운동단체를 조직하고, 이주 한인사회에 민족학교를 건설하여 철저한 민족교육을 실시하는 것이었다. (140)
-
유하현 삼원보에 경학사를 건설한 석주 이상룡... (140)
-
신흥무관학교 교육과정에서도... 민족정신교육은 50%나 되었다... 민족의식의 고취만이 항일전을 수행하고 진정한 독립운동과 독립전쟁을 할 수 있게 만든 원천이었다... (141)
-
서북간도 내 모든 민족학교에서의 한국사 교육은 필수과목이었다... (141)
-
명동학교 역사교사 황의돈은 국권회복의 작문에 폭탄과 암살이 최선책이라고 쓴 답안지에 만점을 주었으며, 작문시험의 제목이 무엇이든지 간에 애국과 독립으로 결론내리지 않으면 성적을 주지 않았다. (142)
-
배일주의 사상학교로 지목된 훈춘현의 신농야소학교 교장 김진오... (143)
-
배일주의로 주목된 훈춘현 황구 동창학교(교장 김남극)도 교육과정은 유년필독의 역사교육과 병식체조의 군사교육 두 과목 뿐이었다... (143)
-
기독학교와 서북간도 교회에서는 단군초상과 태극기를 게양하고 예배를 보았으며, 대종교도들과 서로 교류함에 있어 아무런 신앙적 갈등을 갖지 않았다... 민족신앙을 바탕으로 서양의 기독교가 아닌, 민족기독교를 신앙하였으며... (144)
-
정재면이 이끈 북간도 교육단, 서일이 주도한 대종교의 민족교육기관, 이동휘의 삼국전도대, 김약연의 길동전도대, 이봉우의 간민자치회보다 더 조직적이고 효과적인 활동을 추진하고자 성립된 간민교육회, 간민회 등 모든 이주 한인단체들은 민족주의 교육기관 설립에 노력하였다. (145)
3. 민족사교육의 실제
-
국치 이후 서북간도 지역에서 전개된 교육구국운동은 독립전쟁론에 기초한 독립운동의 한 방향에서 이루어졌다. (145)
-
서북간도의 역사교육은 그 목적을 학생들에게 올바른 역사의식을 심어주는데 두었다. 올바른 역사의식이란 시대적 모순에 대한 투철한 인식을 기반으로 한다. (146)
-
서북간도 역사교육의 특징은 지적 교육이라기보다는 가치교육이었다. (146)
-
명동학교는 “한뫼가 우뚝코 은택이 호대한 한배검이 끼치신 이때에…”라는 교가와 “잘 즈믄번 익힌 힘줄 벌떡거리고 절절 끓는 젊은 피는 넘치려누나 한배묏재 비낀 달에…”라는 응원가는 한글학자 박태환과 장지영이 작사한 것이었다. 그들은 교가와 응원가 속에서도 백두산, 단군성조 등 조선민족의 얼과 이상을 표현하였으며, 우리말과 글에 사상으로 민족이념을 공고히 하였다. (147)
-
창가를 이용한 민족정신의 고취, 국민정신의 일깨움은 폭넓은 역사교육의 일환이었다... “앞마을 논밭에 신작로 나더니…김서방, 이서방 북간도 가네(북간도행가)”에서는 일본의 근대화에 밀려 간도로 유망하게 된 정황을 정확한 역사인식으로 인지하고 있다. (147-148)
-
신흥무관학교에서도 교직원 전체가 매일 아침 조례를 하였는데 학생들은 우렁차게 애국가를 부르며 조국광복을 맹세하였다. “화려강산 동반도는 우리 본국이요, 품질 좋은 단군자손, 우리 국민일세(애국가)”, 또한 “우리 우리 배달나라의 우리 우리 자손들이라, …칼춤 추고 말을 달려 몸을 단련코 새론 지식, 높은 인격, 정신을 길러 썩어지는 우리민족 이끌어내어 새 나라 세울이 늬뇨(신흥무관학교 교가)”라고 노래하였다. (148)
-
서간도에 경학사(부민단), 한족회를 설립한 이상룡은 유학자로 을사조약 이후 애국계몽운동에 투사하여 대한협회 안동지회장으로 활약하다가 국치 이후 서간도로 망명하여 신민회 회원 및 대종교도와 함께 광복운동에 참여하였고, 박은식, 신채호, 김교헌 등 서간도 지역에서 역사를 담당하였던 인물들은 모두가 애국계몽 운동계열이었다. 북간도에 서전의숙을 시작한 이상설, 여준과 서전의숙의 역사담당 황달수, 정순만, 박정서, 이동녕 등도 모두가 신민회 출신의 신지식계층의 인물이었다. (149)
-
명동서숙을 명동학교로 발전시킨 정재면, 또 초기 명동학교의 역사담당 황의돈, 윤리담당 박태환, 국어담당 장지영 등은 상동청년학관과 관계가 깊은 신민회 계통이었으며, 소영자의 광성중학에 참여한 이동휘, 계봉우, 김립 등은 서북학회 회원이었으며 역사교사로 청빙된 장도빈은 애국계몽운동시기 대한매일신보에 논설을 담당한 바 있는 신민회 회원이었다. 북간도 각 지역에 민족학교를 설립했던 인물들은 초기 서전의숙 졸업생이며, 명동출신이 대부분이었다. 서간도 지역에 경학사, 신흥학교 출신들이 활동한 바와 동일하다. (149)
-
이동휘 계열과 제휴한 김약연, 문치정, 김정규, 김하규 등 관북의 실학계열, 동학계열의 인물들은 북간도에 이주하여 이주 한인사회를 중심으로 사회운동을 전개하다가 이동휘의 기독교전도단, 또는 정재면의 북간도교육단을 맞이한 후 민족교육운동으로 그 방향을결정하게 되었다. 대종교계열의 나철, 서일, 계화, 현천묵 등은 구한말 애국계몽운동을 전개하다가 민족종교운동, 교육운동으로 전환 민족학교 설립을 최우선으로 하였다. (149-150)
-
서북간도 민족학교에서 사용한 역사교과서... 1) 구한말(1905-1910)에 편찬된 망국사, 건국사, 국난극복사 등의 교재를 이용... 2) 대종교는 민족독립운동의 한 방략으로 민족사를 연구하였고 이런 관점에서 많은 국사교과서를 편찬하였다. (150)
-
북간도지역 사립학교 배일교육의 총아는 무엇보다도 한국사 교육이었다. 일제는 국치 이후 한국사교육을 엄금하였지만 간도에서는 한국사 교육이 핵심교과로 등장하였다. (151)
-
『오수불망』은 수신을 겸한 역사교과서로 1910년대 북간도 항일민족교육을 대표하는 책이다. 목차만으로도 이 책은 일본은 우리의 적이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동일한 성격의 역사교과서로 『필수불망(必須不忘 )이 있었다. 그 내용은 금수회의록과도 같았는데 이러한 역사교과서는 모두가 일본의 침략주의, 자본주의, 제국주의를 경계한 것이다. (152)
-
1912년 간민교육회에서는 계봉우(소영자학교, 광성학교, 길동사범학교 교사), 정재면(명동학교, 대광학교 교사), 남공선(와룡동 창동학교 교사) 등 3인을 교과서 편찬위원으로 임명 각 학교마다 유능한 인사를 초청, 초등중등학교 교과서를 꾸미도록 하였다. 이때 완성된 『최신동국사(最新東國史)』는 북간도 민족교육가에 의하여 집필된 역사교과서란 점에서 그 의의가 크며, 독립의식이 반영된 역사서이다... 명동, 창동, 광성, 영신, 덕흥중학에서 사용... 발간은 하르빈의 보문사였고 계봉우가 저자로 되어 있다... (152)
-
서북간도 대종교계 학교의 역사교과서로서는 신단실기, 신단민사, 조선상고사, 몽배금태조, 초등대동역사 등이 있었고, 대종교의 역사교육계 책임자는 김교헌, 신채호, 박은식 등을 들 수 있다. 특히 이상룡, 박은식, 김교헌은 국외망명 직후 역사교과서 저술에 전념하였다. 이상룡은 서서록(1911), 대동역사(1913), 봉기자우조선(1915), 요동평양(1915)을, 박은식은 몽배금태조(1911), 동명성왕실기(1911), 발해태조건국지(1911), 천개소문전(1911), 명림답부전(1911), 대동고사론(1911), 한국통사(1915), 발해사ㆍ금사(역술, 1918), 단기사고(1914), 배달족역사, 진단사승 등을, 유인식은 대동사(1917) 등을 집필하였다. (153)
-
대종교는 종교 포교 활동과 함께 민족교육기관의 설립과 독립단체조직에 주력하였기 때문에 서북간도 지역의 민족교육가, 독립운동가들의 대부분은 대종교와 관련을 맺고 있었다. (153)
-
윤세복이 설립한 동창학교... 대흥학교의 역사교육... (153)
-
신흥무관학교 역사교과서로서는 석주 이상룡이 저술한 대동역사를 이용하였다... 북로군정서에서도 민족주의 사상의 고취와 민족사관 정립을 위하여 신담민사를 교재로 하였고, 일반적으로 재만한국인 사관학교 독립군양성소에서는 김교헌의 신단민사와 이원대의 배달족 강성형세도를 민족사의 교재로 채택하였다. (154)
-
김좌진의 왕청현 십리평의 북로군정서 사관학교에서도 신흥무관학교에서 사용한 교재를 이용하였는데 세계각국독립사와 한일관계사 등이 첨가되었다. (154)
-
서전서숙은 역사, 지리, 수학, 정치학, 국제공법, 헌법 등 교과목을 개설하였다... 서전의숙은 민족독립과 자주권은 신교육의 지식으로부터 얻었지만 그 정신은 민족사의 교육으로 시작된다고 믿었기 때문에 황공달을 역사교사로 임명하여 항일 민족교육에 치중하도록 하였다... 서전의숙이 폐교된 후 그 민족저인을 계승하고자 하였던 명동학교는 근대 신학문 교과목과 함께 특히 민족의식을 강조하는 교과목을 채택하였는데 명동학교에는 황의돈, 조극 등 역사교사가 전임제로 민족사 교육을 담당하였다... 명동학교에서는 민족독립운동사로서 『신한독립사』가 독립교과로 운용되었다. (154-155)
-
와룡동의 창동학교에서는 민족사 외에도 내외역사라는 과목을 개설하였다... 대종교 계통의 동일학교에서는 동국역사와 함께 지나역사를 교육하였고, 중국사는 사략으로, 우리나라 역사는 조선역사 과목으로 개설되었다. (155)
-
서간도 통화현의 양성중학은 역사교과서를 유년필독으로 정하였고, 홍경현의 홍동중학은 『유년필독』과 함께 『대한역사』를 채택하였다... 훈춘현의 동창학교(교장 김남극)는 기독교 배일주의 사상을 가진 학교인데 유년필독과, 병식체조 두 과목만을 가르쳤고, 신풍야소학교(교장 김진오)도 마찬가지로 기독교 배일주의 학교로 대한역사, 대동역사략, 동양역사, 최신대한역사, 월남망국사를, 훈춘현의 기독동명학교(교장 양하원)도 배일주의 학교로 이름이 높았는데 유년필독, 동국사, 오수불망 등 역사과목만 개설하였다. 의신학교(교장 강사언)는 역사와 지리 과목만 가르쳤다. (156)
-
역사과목이 중요시된 것은 국혼과 민족의식을 일깨워 독립전쟁을 수행하기 위해서였다. (156)
-
당시 중학교의 학생들은 연령이 평균적으로 20세 내외의 청년유지들이었기 때문에 역사교육을 통해 민족적 자아를 깨닫게 되면서 모두들 민족의 지도자로 차처하고 행동하였다. (156-157)
-
북간도 소영자의 길동사범학교(교장 이동휘)는 교사양성을 목적으로 설립되었으며, 애국심을 가르칠 수 있는 교사를 양성하고자 하였다... 소영자의 길동사범학교를 졸업한 학생들은 북경, 미국, 일본 국내의 경성 등지에 유학한 후 서북간도로 돌아와 민족주의 교육, 사회운동 등에 투신하기도 하였다. 1916년 당시 일제가 조사한 서북간도 한인학교 총수는 182개교였다. 이 모든 학교에서 민족사 교육은 필수과목으로 지정되었다. 밀산부 한흥동에 세워진 이승희의 한민학교에서도 동국사략이 역사교재로서 채택되었는데 이주 한인사회를 묶는 민약(民約)이 행하여졌고 그 내용은 민족사를 바탕으로 한 것이다. (157)
-
민족지향의 역사교육은 가장 중요한 교과목으로 위치하였다. (158)
4. 역사교육을 위한 한국사연구
-
북간도 지역에서의 명동학교 역사교사 황의돈... 광성학교 역사교사 장도빈이 쓴 역사서... (158)
-
혜원 황의돈(1884-1964)... 명동학교의 민족교육을 담당... 국사교육을 위하여는 우선 교재의 필요성을 느껴 『대동청사』 2책을 저술하여 학생들에게 보급하였다... 황의돈은 작문시간에 독립으로 결론이 나오지 않으면 점수를 주지 않을 만큼 철저하게 독립정신을 강조하면서 역사교육의 중요성을 강조하였다... 황의돈은 국치 이후 국내로 다시 되돌아가 정주 오산학교, 가산 육영학교, 안주 일흥학교, 평양 대성학교 등지에서 국사교사로 민족의식과 독립사상을 고취하는 데 주력하였다... 1922년 『조선신사』를 1923년에는 『신편조선역사』, 1925년 『중등조선역사』를 저술 간행하였다. 그는 계몽주의적 민족주의 사학에서 출발하였으나 실증적 과학적 연구로써 국사연구방법을 개선하였고, 특히 고구려의 수군 연구라는 새경지를 개척하기도 하였다. 이승휴의 제왕운기를 학계에 소개하였으며, 토지제도사의 기본사료인 양안을 발굴하여 사회경제사연구의 중요자료로서 그 가치를 부여하기도 하였다. (159-160)
-
산운 장도빈(1883-1963)은 1912년 북간도 연길현 소영자로 망명... 장도빈은 광성중학의 역사교사로 부임하였다... 간도로 망명하기 전 대한매일신보에 신채호와 함께 일본제국주의를 비판하는 날카로운 논설을 집필하면서 역사의식을 키웠다... “나라가 망(亡 )한 후에 독립을 회복하려면, 무엇보다 애국적 민족의식, 조국지정(祖國之精)이 요청되는데 이것은 국사를 연구할만한 가능한 일이다”라고 하면서 국사연구에 평생을 바치기로 결심하였던 것이다... 그의 강의는 학생들에게 깊은 감동을 주었다. 그의 강의는 곧 창동학교, 명동학교로 알려져 많은 학생들이 산운의 강의를 듣기 원하였으며, 명동학교의 김약연 교장은 산운을 본교로 초청하고자 하였다... 이동휘 계열의 민족운동가들이 연해주로 그 거점을 옮기는 상황에 직면하자 산운은 그들과 함께 노령 신한촌으로 갔다. 당시 신한촌에는 이종호, 이상설, 정재관 등 독립운동가들이 1913년 신한촌으로 망명한 이동휘 계열 등과 함께 사회운동, 민족운동을 전개하고 있었다. 산운은 신한촌에서도 계속적으로 유적지를 답사하고 국사연구에 몰두하였다... 망명 이후 산운은 애국과 애족을 연구의 지표로 삼아 국가의 흥망성회의 발자취를 바르게 인식시킬 수 있는 교과서를 만들고자 국사연구에 전념하였다... 산운은 한국사의 시대사 중에서 고대사를 강조하였고 엄격한 문헌고증으로 한국고대사를 복원하는 데 심혈을 기울였다. (160-163)
-
석주 이상룡(1858-1932)은 애국계몽운동에 투신하여 활약하다가 국치 이후 1911년 서간도로 망명하여 신민회 회원 및 대종교도와 함께 광복운동에 참여하였다. 그는 독립운동단체 경학사(부민회, 한족회로 발전)를 운영하면서 신흥학교를 설립하여 독립군의 인재를 양성하였다. 이상룡은 독립운동에 참여하는 과정에서 박은식, 서일 등 대종교 교도와 또한 독립운동노선에서 무장운동을 지지하던 세력과 뜻을 같이하였다... 석주는 유학자로 출발하였으나, 애국계몽운동에 참여하는 과정에서 사회계약설, 사회진화론 등 근대 이념을 알게 되었고 근대적인 민주공화제를 지향하는 사상적 경향을 갖게 되었다. 또한 1910년대 간도에서 무장독립운동에 참여하면서 고대사에 관심을 갖게 되었고 민족학교에서 역사를 가르치면서 역사교과서를 집필하게 되었다.... 만주는 우리나라의 옛 영토요 만주인이 아족(我族)이라는 인식에서 국사의 중심무대를 만주에 설정하면서 숙신, 단군조선, 부여, 발해, 고구려의 역사에 주목하였다... 석주는 간도에서 독립운동의 일환으로 민족교육을 실시하게 되는 입장은 역사적으로 지리적으로 당연한 것으로 보았다. 만주는 현재는 중국영토지만 고대에는 한민족의 활동무대였기 때문이다... (163-165)
-
백암 박은식(1859-1925)... 국치 이후 1911년 서간도 환인현으로 망명하여 윤세복의 집에서 기거하며 고대사관계 논설들을 집필하였다... 윤세복은 1910년 대종교에 입교하여 1923년 대종교의 제3대 교주가 되었던 인물이다... 박은식은 대종교에 입교하는 한편 역사편찬에 전념하였다... 『몽배금태조』에서 그는 꿈속에서 금태조를 만나 문답을 통해 국망의 원인을 분석하였는데 여기서 그는 자강적 독립국가 건설의 방안을 제시하였다... 만주는 단군ㆍ부여ㆍ고구려ㆍ발해의 옛 영토로서 무수한 영웅호걸이 출현하며 강대한 국가를 건설한 곳이므로 이주 한인사회를 중심으로 국권회복의 좋은 결과가 맺어지기를 고대하면서 우수한 청소년 영웅이 출현할 것을 강조하였다. 이 글은 만주독립군들을 위한 정신적 지침서로서 쓰여진 역사교과서였다. 국가가 부강한 것은 애국자 충군자들의 골혈(骨血)로서 조성되며, 과거의 중화의식을 버리고 정신적으로 조선인은 자강자립의 정신을 길러야 함을 주장하였다... 박은식은 만주사를 국사의 중심으로 이해하였고, 고려, 조선사보다도 만주를 지배했던 고대사를 더욱 긍정적으로 인식하였다... 1915년 한국통사... 1920년 『독립운동지혈사』를 썼다... (165-167)
-
김교헌(1868-?)은 1910년부터 대종교를 신봉하여 1916년 제2대 교주가 되었다... 김교헌은 대종교의 교리를 정리하는 데 있어서 중추적 역할을 담당하였고, 1914년에는 『신단실기』를 저술하여 대종교의 연원을 역사적으로 밝혀냈으며, 같은 해에 통사로서 『신단민사』를 저술하여 서북간도의 중학교 및 무관학교의 국사교재로 사용하였다... 그에 의한 종사(倧史)연구와 교사(敎史)편찬은 대종교 이론을 밝혀 대종교 이론을 밝혀 대종교이 중흥을 이룩하였을 뿐만 아니라 곧 우리나라 단군의 역사를 밝혀 항일독립투쟁에 있어서 민족적 이론을 제시하는 것이 되었다. 그는 재만한일의 항일구국투쟁에 있어서 정신적 기초를 준비하였다... 그는 국사를 단군족의 단일민족사로 체계화하였다. 요ㆍ금의 북방사까지도 국사에 편입시켰으며 단군민족주의적 국사상을 반영하였다... 김교헌의 『신단실기』, 『신단민사』는 항일 이론을 제공함으로써 독립운동을 촉진하는 활력소로서 크게 공헌 점을 높이 평가하지 않을 수 없다. (167-169)
-
김교헌, 황의돈, 장도빈, 박은식, 이상룡 등은 만주를 민족해방을 위한 독립운동기지로 설정하고 나아가 만주 자체를 점차적으로 영토화하려는 원대한 계획을 설계하고 있었다. (169)
-
대종교계 역사학자들의 역사서술은 바로 이러한 실천적 과제와 연결된 정신운동의 일환으로 나타난 까닭에 자연히 만주사를 중요시하였고, 만주지방에서 경영되었던 단군조선, 부여, 고구려, 발해, 숙신 등의 고대 국가를 국가상 중요한 위치로 승격시켰다. (169-170)
-
1910년대 국치 이후 서북간도로 망명한 역사학자들은 국치의 충격 때문에 국사서술은 사학을 위해서가 아니라 현실을 위해서 기술될 도리밖에 없었다... 역사서술에 이성과 냉정보다도 독립전쟁의 이념과 이론을 제공해야 하는 정열과 애정이 필요하였다... (170)
5. 역사교육과 독립전쟁
-
민족교육은 무장독립전쟁의 이념적 측면인 민족사상을 담당하였고 그 중에서 특히 대표적인 교과로서 역사교육이 중요한 위치에 있었다. (170)
-
각 민족학교 교과과정에서 역사교과는 필수교과였으며 국혼과 민족의식을 고취하는 중핵적 과목이었다. (171)
-
명동학교 역사교사 황의돈... 장도빈... 이상룡... 박은식... 김교헌... (171-172)
-
서북간도 지역 역사학자들의 공통점은 역사를 지식의 교과로 인식하면서도 민족사, 민족애의 가치교육에 중점을 둔 행동과 실천의 교과로서 취급하였다... 황의돈, 장도빈, 박은식, 이상룡, 김교헌의 역사서술과 역사교육은 서북간도의 무장독립전쟁과 깊이 관련되면서 전개되었음이 확인된다. (173)
'[기타 자료실] > [도서 정리]' 카테고리의 다른 글
『일제하 북간도 기독교 민족운동사』 제2부 : 제4장 - 북간도 3ㆍ1운동과 무장투쟁 (0) | 2021.02.28 |
---|---|
『일제하 북간도 기독교 민족운동사』 제2부 : 제3장 - 사회운동 (0) | 2021.02.28 |
『일제하 북간도 기독교 민족운동사』 제2부 : 제1장 - 교육운동 (0) | 2021.02.28 |
『일제하 북간도 기독교 민족운동사』 제1부 : 제2장 - 교회의 성립 (0) | 2021.02.28 |
『일제하 북간도 기독교 민족운동사』 제1부 : 제1장 - 사회적 배경 (0) | 2021.02.2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