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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 자료실]/[도서 정리]

『일제하 북간도 기독교 민족운동사』 제2부 : 제4장 - 북간도 3ㆍ1운동과 무장투쟁

by [수호천사] 2021. 2. 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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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굉일, 일제하 북간도 기독교 민족운동사

 

제2부. 북간도 기독교인들의 민족운동의 실태

제4장. 북간도 3ㆍ1운동과 무장투쟁

 

1. 역사적 배경

 

  • 1910년대에는 애국계몽운동과 의병들의 항일운동을 합일된 이념의 방향에서 추진시킬 수 있는 방안이 모색되어야 했다. 그 결과 동일한 노선의 항일투쟁론이 대두되었다. (201)

  • 신민회의 최대의 목표는 독립전쟁에 있었고, 그 시기를 중일, 노일, 미일전쟁에 두었다. 또한 신민회는 국내에서 실력양성 운동을 전개하면서 한편으로 국외에 무관학교를 설립하고 독립군 기지를 창건하여 기회가 오면 국내 진공을 하겠다는 독립전쟁 전략을 채택하였다. (201)

  • 밀산부의 한흥동... (202)

  • 19153월 일본이 21개조 요구안을 중국에 제출하여 중일간에 교섭이 이루어지고 있는 중에 간민회 회원인 이봉우, 윤해 등은 국자가교회를 중심으로 훈춘, 노령, 연추 방면의 과격파 기독교도 이동휘, 황병길 등과 연결하여 거병의 국권회복운동을 일으키고자 하였다. (202)

  • 이봉우는 만일 중일 간에 국교가 단절되면 양국 간에 전란이 일어날 것이며, 간도는 전란의 요충지로서 양국 군대가 출동할 것이다. 그러므로 노령에서 기회를 기다리는 동지들과 연결하여 이 기회를 이용하여야 한다고 동녕현 삼차구에 있는 이종호에게 알렸다. 이종호는 만일 중일 교섭이 이루어지는 경우가 되면 이주 한인들의 민족독립운동은 와해될 것이며 독립의 기회는 영원히 상실될 것이다. 그러므로 지금 우리들은 생사 선택을 결정할 때다. 살려 해도 살 수 없고 물러갈려 해도 물러갈 수 없다고 이봉우의 뜻에 동의하면서 거병의 계획을 수립하자고 했다... 중일전쟁이 발발하면 일본에 최후통첩을 발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202)

  • 191559... 중국의 굴복... 중일분쟁은 평화적으로 해결되었고 중국은 일본의 21개조 요구안을 수락하자 북간도 기독교도들의 실망은 실로 컸다... 중일교섭이 체결되자 중국 관헌들도 이주 한인들의 민족운동을 탄압하기 시작하였다. (203)

  • 이동휘, 정안립, 전일, 백옥보, 최빈, 김강 등은 중국 관헌의 추방명령으로 노령이나 중국 오지로 피하였고, 김하석과 계봉우는 체포되었다. 간민회 지도자 중 온건파였던 김약연, 김회림, 이동춘, 박동원 등은 교회를 지키면서 사태를 관망하는 입장이었으며 과격파였던 훈춘의 황병길, 양하구는 정치적인 행동을 중지할 수밖에 없었다. (203)

 

2. 3ㆍ1운동의 태동

 

  • 1차 세계대전이 끝날 무렵인 1918년 캐나다 장로파 선교사들은 독일 오스트리아군이 궤멸하고 소수 민족들이 독립하게 되었다는 세계 정황을 북간도 교회에 알려왔다... 미국 윌슨 대통령의 민족자결주의는 시대의 논리로써 북간도 기독교들에게 충격을 주었고, 이 기회에 독립을 쟁취하고자 하는 일대 민족운동을 전개할 기운을 촉성시켰다. (204)

  • 19181225일 용정교회에서 전 간도 기독교인들이 모여 연합기도회를 개최하였는데 이 기도회에서는 선교사와 북간도 4현 모든 교회의 목사, 장로, 전도사 등 대표자와 일반 평신도 민중들이 참가하였다... 이 기도회의 목적은 5년여의 1차 세계대전이 끝남으로써 전세계적으로 인종차별이 철폐되고, 불평등조약이나 영토침략주의가 종식되었기 때문에 이제 자유, 평등, 박애의 공동 친애주의가 맹아되었음을 하나님께 감사드리자는 것에 있었다. (204)

  • 선교사들의 견해로 말미암아 북간도 교회 지도자들은 한족의 독립문제는 파리강화회의에서 결정되어야 한다고 믿게 되었다... 대표자를 선출하여 강화회의에 파견해야 된다는 의견에 일치를 보게 되었다. (205)

  • 미국과 노령에서 재주 한인 대표자 선정... 미국에서는 안창호, 이승만, 노령에서는 이동휘, 동녕철도연선 대표자로는 백순이었으며 이들의 수원으로는 명동학교 교사를 지낸 박상환이 선출되었다. 시베리아 대표자로는 러시아 귀화 한인이며 연추한족회 회장인 최재형이 선출되었다. 이들은 곧 파리강화회의에 파견되어 한족의 독립문제를 제기하기로 결정되었다는 내용을, 남공선을 통해 국자가교회의 박경철, 이성근에게 속히 대표자를 선출할 것을 전해 왔다. (205)

  • 간도 지역 대표... (206)

  • 1919125일 국자가 소영자에서 20명의 각 지역위원들이 모였다. 이 자리에서 간도의 대표자로 명동학교 교장 김약연 장로, 용정교회 정재면 전도사, 국자가 지부 권학소 학무원 이중집을 뽑았고, 그 수원으로 국자가 와룡동 사립학교 교사 정기영 집사를 선출하여 이들을 간도지방 노령 특파원으로 결정하였다. (206)

  • 훈춘은 황구교회 양하구 장로와 박태환 전도사를 선출하였다... 간도 총대표는 노령 대표 이동휘, 동청철도연선 대표 백순을 국내 대표로 선출된 이용과 함께 파리강화화의에 파견하기로 결정하였다. 그런데 훈춘지역 노령 파견원으로 뽑힌 양하구, 박태환은 훈춘의 만세시위운동을 지도하기로 하고 그 대신 동문 내의 문병호와 윤동철로 결정되었다. (206-207)

  • 북간도 시위운동과 국내와의 연락은 명동교회 강봉우 장로가 맡았다. 그리하여 명동여학교의 교사였던 강봉우는 김약연의 명으로 함흥 영생학교에 가서 국내의 독립운동 조직과 연락을 취하였고 자금의 모금과 선언서 발표 이후의 운동방법 등에 대하여 논의하였다. (207)

  • 2월 중순 국자가 적안평 이동식 장로집에서 결혼식을 이용하여 각지 대표들이 모여 비밀회의를 개최하였는데... 1) 중국 관헌들로 하여금 간도지방의 일제 치외법권 철폐운동을 일으키도록 한다. 2) 일본 영사관의 경찰배치에 대하여 방해운동을 전개한다... (207)

  • 218일과 20일에는 국자가 하장리 연길도윤 공서 외교과원 박동원 집에서 북간도 민족자결 운동자 33인의 모임이 있었다... 1) 간도내 각 교회 단체는 서로 단결, 협력, 일치하여 독립운동에 전력을 다한다... 2) 노령에서 독립선언서를 공표함과 동시에 간도내 각 단체는 일제히 시위운동을 개시한다... 3) 독립선언서를 발표한 후 간도내 각 단체의 대표자가 용정에 집합하여 독립선언의 기세를 양앙시킨다... (207-208)

  • 북간도 광복단... 1) 국자가에 이홍준, 이성근, 박동원, 김영학, 2) 용정촌의 김정, 3) 종선간도 자동 백유정, 4) 팔도구 유예균, 5) 평강 고동환, 6) 그 외로도 박경철, 김순문, 강용헌, 구춘선, 이성호, 고평, 최봉렬, 박정훈, 이동식 등이었다. (208-209)

  • 간도의 학생과 청년... 명동학교 유익현, 국자가 도립중학교 최웅렬, 김필수, 소영자 광성학교 김상호, 정동중학교 송창문... 명동학교 유익현을 전 간도 한인학생 대표자로 선출하여 노령의 한족 독립회의에 참석토록 결정하였다. (209)

  • 229일 밤 학생들에 의하여 국자가 일본 영사관 방화 미수사건... 31일에는 용정촌 기독교 학교와 용정교회에서 3회에 걸친 만세사건... 228일 이래로 국민회 회장 구춘선의 이름으로 된 격문이 용정, 국자가 등에 배포... (209)

  • 기독동지청년회... 간도 한인 청년들의 정신수양과 청년 간의 단결을 도모... 1회 강연회... 민족자결운동의 추진자 중 한 사람이었던 김신근... 제목은 간도의 장래’... 청년회의 대표로 명동학교 출신인 임국정을 선출하여 노령독립회의에 파견... (209)

  • 은진중학 지하실에서 등사한 31독립선언서와 통지서... (210)

  • 경성에서의 독립선언 발표 소식은 37일 밤에야 북간도에 전달... 38일부터 간도 각지 교회에는 본격적인 집회가 시작되었고, 310일에는 각 사립학교가 휴교 조치 후 만반의 조치를 갖추었다. (210)

  • 조선독립기성총회’... 상해 임정 수립 후에 대한국민회로 개칭하여 총본부를 국자가에 두고 장래 분회를 각지에 두어 지회를 설치하기로 하였다. (211)

  • 용정교회 박예헌 목사는 선교부의 스코트 선교사를 방문하여 13일 용정촌에서 거행될 독립선언 축하회 및 시위운동 상황을 북경 주재 미국공사와 상해 외인 기독교 목사단에 전보로써 통보하여 줄 것을 의뢰하자 스코트는 이를 승낙했다. 국민회에서도 연길도윤 도빈에게 313일 독립선언식을 개최한다는 설명을 하고 식장의 경비를 부탁 교섭하여 허락를 받았다. (212)

 

3. 3ㆍ1운동의 발발

 

  • 313일 용정촌... 동명학교 및 정동학교 학생들로 조직된 충열대원 320명 중 과반수는 권총까지 휴대... (212)

  • 용정독립선언식에 참가한 학교 및 학생 수... (212-213)

  • 대회장 김영학, 회장 구춘선 장로, 부회장 배형식 목사를 비롯 김내범 복사, 정재면 전도사, 신학봉 집사, 강백규 장로, 마진 집사 등 국민회 지도자들이 참석... 대회장 김영학의 독립선언포고문의 낭독으로 시작 (213)

  • 독립선언포고문... (214-215)

  • 유예균, 배형식 목사, 황지영 여사 등 3인의 비분강개한 연설... (216)

  • 중국 관헌들은 한족의 독립운동을 동정하는 입장이었으나 시위운동의 기세가 점차 앙양되면 일본의 군대가 간도에 침입할 것이 두려워 시위운동을 제지코자 하였다. (217)

  • 313일에 있었던 중국 군대의 사격이 일본 관헌의 사주에 의한 것이라 판단한 군중들은 총기로써 일본 영사관을 습격할 것을 모의하는 한편 길림성장과 북경 정부에 항의문을 제출하였다. 구춘선, 이봉우, 강봉우, 고용환, 강구우, 박승필 등 국민회 지도자들은 중국 군대의 발포사건에 대하여 배상과 관계자의 처벌을 도윤 공서에 포섭하였다. (217)

  • 북간도 31운동 일지의 장소와 참가인원... (217-218)

  • 315일 회령과 용정 사이에서 기독교학교 학생들은 교사의 지휘 하에 지방민들이 소지하고 있던 러시아식 납총을 13정이나 수집하여 무장화에 착수하였다. (218)

 

4. 시위운동의 무장화

 

  • 평화적 시위가 무장화하자 용정 재류 일인과 친일단체 조선민회는 생명과 재산의 불안감 때문에 재향군인을 중심으로 자위대를 조직하고 일군의 간도 출병을 영사에게 요청하였다. )219)

  • 320일 훈춘에서도 시위운동... 황병길... (219)

  • 313일 이래로 4월 초순에 이르기까지 북간도 전역에서는 끊임없이 만세시위가 전개되었다. 그러나 일제에게 사주 받은 중국 군경들의 발포, 감시 검색만이 가중되었을 뿐 조국 독립은 목전에서 다시 멀어져 갔다. (220)

  • 임병철... “장터에서 만세를 부르다가 쫓기어 산에 올라가면 중국 경관대는 진격하여 산하에서 발포한다. 그러나 내려오면 검거되어 갖은 악형을 당하였다.” (220)

  • 간도의 독립운동가들은 평화적인 만세시위운동이 민중의 희생만 더할뿐 효과가 적음을 체험하였다. (220)

  • 국내에서나 간도에서 민조군동가들은 보다 조직적이고 무력적인 성격의 운동만이 일제에 대항할 수 있는 길임을 절감하였다. (221)

  • 훈춘 시위 이후로 중ㆍ일 관헌이 저지할 때는 폭력을 저항하겠다는 생각을 가지고 군중들은 각자 총기 또는 칼 등을 휴대하였다. (221)

 

5. 국민회의 무장활동

 

1) 무장운동의 동기와 초기의 상황

  • 국민회는 시위운동이 시작되자 국자가에 의사부를 설치하고 조선독립신문을 발행하여 민심을 촉구하면서 독립운동에 관한 구체적 방안을 수립하였다. (222)

  • 1기 평화적 시위운동을 끝내고 제2기 무력항쟁이 시작... (223)

  • 훈춘현의 황병길은 왕청현, 나자구의 강택용, 무산간도의 황용주 등과 연락하여 모병과 무기 수집에 애쓴 결과 훈춘현, 동구, 황구 및 나자구 방면에서 총기 1,200정을 모았다. (223)

  • 훈춘현, 흑정자 및 연통뢰자에서도 무기를 휴대한 결사대가 편성되었고 흑정자에서는 한형권을 지도자로 대원이 약 400명에 이르렀다. (223)

  • 훈춘 각지의 무장대... 무력으로 국경을 넘어 함경북도에 한국공화가정부’(韓國共和假政府)르 ㄹ수립하고자 하였다. 이러한 상황에 대처하여 일제는 보병 1중대, 기병 2분대, 기관총 1소대 전병력 300여 명을 경원에 파견하였다. (224)

  • 함경도의 일부지역이라도 무력으로 점령하여 가정부로 수립하게 된다면... 파리강화회의에 한민족 대표가 참가하게 될 것... 이범윤, 최재형, 이동휘 등 노령의 무단파와 이동식, 황병길, 김약연, 유찬회, 김영학 등 국민회 지도자들은 무력에 의한 운동만이 독립을 쟁취할 수 있다고 믿었다... 이주 한인들에게 한족의 세력을 키우기 위하여 러시아군대에 입대하도록 권장... 이들의 활동상황을 국내와 연락하기 위해 간도ㆍ노령지역 경성 파견원으로 뽑힌 김하석은 경성에 상주하여 기독교도들을 중심으로 활동하였다. (224-225)

 

2) 명동학교 학생들의 항일운동

  • 간도의 독립운동 간부 중 훈춘지방으로 간 이외에 잔여세력인 국민회의 편집부원 김정, 통신부원 김상호, 정동학교 교사 백유정과 지송 등은 화룡현 태납자의 마진을 중심으로 활동을 전개... 운동의 기지는 명동학교... (225)

  • 명동학교... 비밀 결사 충열대 조직... 충열대 대장 김학수는 중국인 배일단체 백용단으로부터 기관총 1정을 구입하여 명동학교 부근에 보관하였다... ‘충열대에 뒤이어 암살대조직... 소영자(광성학교) 교사인 김상호... (226)

  • 훈춘지역 국민회 소속 결사대는 탑두구의 황병길이 지도... 간도지역은 명동학교를 중심으로 김상호, 마진 등이 지도... (226)

  • 용정총 거류민회장 친일파 이회덕을 명동학교로 납치... (226)

  • 학생의 권유를 받은 순사들이 사표 제출... 일제의 경찰력 약화... (227)

  • 명동학교 자유의 종이라는 신문, 구도구 부근 한교 학생들은 태극기라는 지하 신문 발행... 국민회에서 제작한 조선독립신문과 함께 간도에 배포된 한인 사회에 독립운동 소식을 전해 주는 신문들 (228)

  • 일제는 527일 명동, 정동학교와 인근 부락을 완전히 폐쇄시키고 중국 군경으로 하여금 교사, 학생들을 체포하도록 하였다. 이로 인하여 결사대, 충열대 등 과격파 민족운동학생들은 노령 및 수분전자 방면으로 이동하였다. 그러나 명동 부근 벽지에 유하천, 유예균 등 국민회 의사부 임원들은 남아서 계속하여 명령서를 발부하면서 연락 및 독립운동에 매진하였다. (228)

  • 1925년 명동학교가 폐쇄되자 명동학교의 항일운동은 선교부 경영 영신학교, 은진중학교, 명신여학교로 계승... (228)

 

3) 국민회 각 기관들의 항일전

  • 북간도 독립운동의 길잡이가 된 것은 31운동과 동시에 전개된 독립신문의 발간... 국내외 64... 서북간도 등 만주에서만도 13종이나 되었다... 국민회에서는 5종의 독립신문을 발간... 국민회의 김영학은 국자가에서 3월 중순부터 조선민보, 통신부장 이홍준은 무산간도 삼도구지방에서 우리들의 편지19194월 초순에 발행... 연길현, 합막당에서도 김립, 김하석등이 애국신문을 발간... 연길현, 국자가 국민회 의사부에서도 조선독립신문을 간행... 창간호는 191938일 용정촌에서 비밀리에 지하신문으로 제작되었고 주필은 유하천... 1,500부 발행... 용정촌에서는 31운동 직후에 대한 독립신문의 발간이 있었는데, 국민회 회장 구춘선과 청년회의 이익찬, 윤준회, 방원성에 의해 주간으로 발행... 선교부의 제창병원 지하실에서 등사판으로 인쇄... (228-229)

  • 대한독립신문 191965일자 논설... 근고해외동포형제라는 제목하에 조국의 광복을 기원... 내외전서구라는 난에 해외 각지 독립지사들의 활동상황과 외신을 전달... (229)

  • 19201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체코군이 귀국하면서 무기를 매각... (230)

  • 1920711일 회장 구춘선은 동부지방회에 무기 구매에 관한 통달문을 발송... 주건, 최봉렬... 박호일... 서상룡... (230)

  • 국민회의 군자금 모집이 용이하였던 까닭... 국민회는 군자금 모집을 실업인 중심으로 계획... (231)

  • 192014, 국민회의 청년들이 조선은행 15만원 탈취사건’... 무기구입의 자금확대... (232)

  • 임국정, 윤준희, 한상호... (233)

  • 국민회의 여러 단체 중 청년회는 맹호단, 결사대를 조직하여 간도 한인들에게 경고문, 비격문 등을 발포하였다. 청년회에서는 103일을 건국 기념일로 정하고... 토벌령을 발포... 19202군적등록령을 발포하여 독립전쟁에 나아갈 장정을 모집... (233)

  • 국민회는 포고문 제3호에서 공화정부의 가치와 군적등록의 중요성을 설파... (233)

  • 임시정부에 사진을 송부하는 독립전쟁의 홍보활동도 국민회가 담당... 무관학교의 설립을 위해 주건, 이용이 힘썼으며 당시 상해임정 간도 특파원이던 이용이 교장으로 일하였다... 용정 만세운동에 순국한 사람들을 포상... (234)

  • 국민회의 연락 장소는 캐나다 선교부의 제창병원이었으며 상해임시정부 등 외부와의 연락 장소는 명월구 옹성랍자의 사일상회... (234)

 

4) 국민회 무장군의 항일전

  • 무장군 자체가 자발적으로 분산 조직되어 있어서 통일체로 만드는 데에는 어려움이 많았다... 191911월 대한국민회장 구춘선은 북간도 각 단체에게 보내는 고유문을 발포하여 각 단체의 통합을 제의하였다. 구춘선은 고유문에서 대한국민회가 정부의 인가를 받은 통일기관임을 공표하고 있다. (235)

  • 국민회는 19201580여 지회의 대표회의를 개최하고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각 군단을 통일할 수 있는 기관을 설치할 것을 건의... 임시정부는 이용과 왕삼덕(안공근)을 파견... 국민회는 홍범도의 대한독립군과 최진동의 군무도독부와의 통합을 시도... 행정기관은 국민회가 맡고 군사기관은 북로독군부로 개칭... (235-236)

  • 홍범도 휘하의 대한독립군에 의하여 전개된 국내 진입작전... 1919년과 1920년에 걸친 함북지방에서의 독립군 활동은 대부분이 홍범도와 최진동 휘하의 독립군에 의하여 전개... 19198월 홍범도 휘하의 대한독립군은 두만강을 건너 국내 진입전을 벌였다... 홍범도 부대는 일제의 저지선을 뚫고 국내에 진입하여 혜산진을 점령하고 갑산을 공격하였다.... 그해 10월에는 강계와 만포진에 진입하여 그곳을 점령하였고, 자성에서 일군과 격전을 벌여 일군 사상 70명의 전과를 올렸다... 독립선언 1주년 기념일인 192031일부터 6월초까지 임정에서 호가인된 전투만 하여도 34회에 달하였고, 일군경 파출소와 총독부 하급관서를 파괴한 것만도 34건에 달하였다. (237)

  • 봉오동 전투는 국경선 수비의 일군이 봉오동을 독립군의 책원지로 여겨 이를 격멸코자 하다가 도리어 그들이 대패한 것이었다... 상해 임시정부의 군무부에서는 19201112일자... (238-239)

 

6. 일본의 간도 침략

 

  • 대중 21개 조항’... 대전 후 베르사이유강화회의에서 일제는 중국의 강력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산동반도에서의 독일의 권익을 양도받았다. (239)

  • 일제는 19205월부터 8월까지 조선총독부 경찰국장과 동삼성의 숭열사 장작림과의 3회에 걸친 봉천회담을 통해서 서간도 지방의 독립군에 대한 학살작전을 강행할 것을 결정... ‘중일 합동수색’... 친일단체 보민회... 일본군의 간도출병은 이미 용정촌 독립선언 때부터 움트고 있었다. (240)

  • 일제가 간도 출병을 위하여 조사한 비밀 조사표... (241-246)

  • 일제의 간도지방 불령선인 초토계획총칙 출병의 근거는 대정 8(1919) 912조삼밀 제906호 대()불령선인 작전에 관한 훈련 제2에 두고 있다. 일제의 간도출병은 이미 19199월부터 계획되어 온 것이었으나 병력 출동은 19201013일 나남 제19사단 훈련 훈춘 간도 방면 비적 및 불영선인 초토 계획에 있었다. (246)

  • 배일 마을로 주목된 기독교 촌이거나 국민회 지회가 설치된 곳과 배일주의 학교가 있는 곳에 집중적으로 퍼부은 간도출병의 초토작전으로 인하여 교회와 교인들이 입은 피해는 실로 큰 것이었다. (247)

 

7. 간도ㆍ훈춘사건

 

  • 1920912(1)102(2) 두 차례에 걸쳐 마적들이 훈춘을 습격한 사건이 발생... 일제가 미리 계획한 음모... 마적 두목 장강호와 밀통... 중국군 70명과 한인 7명이 죽고 미리 피난한 일본 영사관이 불탔다... 이 사건을 일제는 조선, 일본 그리고 만주 및 간도 내의 각 신문에다, 훈춘사건을 과격적 색채가 농후한 서상렬 지휘 하에 독립단 수십 명과 러시아인 탈영병 수삼명이 가담한 중국인 마적단 약 600명이 훈춘 서문 밖에도 침입하여 훈춘, 일본 영사관을 습격하고 방화하였으며, 시내에도 방화하여 일본인 사망자 10명과 사상자 20명을 내었으며 주로 일본인을 해치려고 한 사건이라고 대서특필하여 민심을 소동시켰다... 103일 경원 일본 수비대는 군사령부의 명령으로 일본 거주민 보호라는 미명하에 훈춘에 도착하여 연길현까지 경계병력을 배치하였다. (247-248)

 

8. 교회의 수난

 

  • 일제는 모든 사실을 은폐하였으므로 일제의 간도출병으로 야기된 자세한 피해 기록을 찾아보기는 힘들다... 조선예수교장로회 총회록 함북 교회 보고서... (249-250)

  • 두만강 대안의 촌락... 회령 대안 송언평에서 일본군은 독립군 토벌보다도 먼저 양민을 학살... 23동의 가옥과 대종교계의 거성학교가 방화를 당하였고, 국민회의 특파원인 박용훈과 막대한 군자금을 내었던 김형중을 비롯한 많은 사람들이 총살당하였다...칠도구에서 똑같은 만행을 자행하고 용정에 도착... (250)

  • 용정에서는 성서 행상인(매서인, 전도사) 이근식을 군도로 참살하여 평청리 천변에 매장하였다... 이근식은 원산 교인으로 당시 55... 18년간을 북간도 일대에서 전도사업에 종사했고 마을에서는 유지에 속하였다... 국민회 양도현의 밀정으로 일제의 행동을 탐지하여 독립군에게 전달한 통신원이라는 것... (251)

  • 종성에서 도강한 일본군은 석건평, 개산툰, 명당현에 이르러 계속 학살을 자행... 국민회 회원 김사범을 체포하려 했으나 붙잡지 못하자 마을을 포위하고 그의 아들과 동리 사람들을 학살... 간도의 관문인 장재촌에 가서 명동중학을 방화하고 많은 촌민을 학살, 길동중학교가 있는 소영자, 와룡동, 정집강, 광제촌에는 교회와 배일학교가 있어 일제의 토벌 대상이 되었다... 와룡동 교사 정기선은 기독청년회 회원으로 활동하다가 피살... 의란구교회 일대인 구룡평, 의림평, 소의란구 유동구에서도 장로 이협수 등 97인의 학살이 있었다. (251)

  • 간도에서 가장 초기에 설립된 양무정자교회... 이도구의 장은평(일명 예수촌), 구세동(온 마을 사람이 기독교인), 어량촌, 청산리의 백운평, 대랍자의 일대는 국민회의 서부지구의 본거지이며, 기독교인들이 개척한 망명촌... 간도 출병전부터 일제의 초멸 목표 대상지... (252)

  • 김좌진, 이범석의 북로군정서... 19201020일에 일제의 동지대와 개전, 23일까지 대소 10여 차에 걸쳐 전투를 전개하여 일본군을 궤멸시켰다. 독립군에게 패전한 일제는 그 보복을 백운영, 구세동, 청산리의 양민들에게 행하였다. (252)

  • 109일부터 115일까지 27일 간 동지대는 화룡현, 연길현 지역에서 교회와 학교가 있는 촌락을 대상으로 만행을 계속하였다... 김정주 편 간도출병사... (253)

  • 일본군들은 교회와 학교의 혐의가 있고 성서가 발견되면 그 가옥은 무조건 소각의 대상으로 삼았다. 청산리, 간장암, 구세동, 명동 등 기독교 촌락은 일본군의 간도 작전계획서에 이미 소각의 대상이 되어 일차적으로 토벌 당하였으며, 그 희생은 재흥하기 어려울 만큼 큰 것이었다. (255)

 

9. 명동학교의 소각

 

  • 19201020일 오전 11시 일본군 수비대의 행동 개시... 김약연, 마진... 명동교회 교인인 허익근, 이용훈, 최홍택... 교인 한상수, 장성순을 사형을 당하였고 기병영은 중국군에게 총살... (256-257)

 

10. 장암촌교회의 2중 학살

 

  • 장암촌(일명 샛노루바위)는 연길현 용지사 간장암에 위치하여 용정에서는 동북쪽 약 25리 지점으로 주민의 대부분이 기독교 한인 마을... 간장암에는 기독교계 배일학교, 홍동학교가 있고 허문동에는 배영학교가 있어 이들 지역은 출병 전 토벌계획의 대상이 되어 있었다. (257)

  • 국민회 경호구장 엄주철은 일본영사관 밀정을 체포하여 중상을 입힘... 국민회 동부지방회 회장 양도헌은 간장암의 국민회 회원을 중심으로 국내에서까지 군자금 모집활동을 전개... 간장암의 홍동학교 교사 이충열은 대한학생광복단을 조직하고 무장활동 전개... 사체에 대한 존엄성을 가지고 있던 당시의 한인들에게 이중 학살을 감행한 것은 우리로 하여금 분노와 원통함을 절감하게 한다. (258)

  • 선교사의 보고서와 일제 기록에의 장암촌의 이중 학살 사건... 일제 토벌군에 의한 장암촌 소탕작전... 일본군 19사단장 고도우무의 명령으로 보명 15연대 3대대장 대강육구가 용정촌 주둔 동지대의 일부 병력을 동원하여 개시... (259)

  • 선교부 마틴의 참상 보고... 캐나다 선교부 부두일 목사의 보고... 선교부 박걸 선교사의 장암촌의 이중 학살 사건 보고... 19211월경 동아일보의 장덕준 기자는 일본 토벌대의 만행을 조사하기 위하여 북간도에 갔다가 일본군에게 살해... (259-261)

 

11. 캐나다 선교부의 항의

 

  • 캐나다 선교부의 바커, 푸트, 마틴... 일본영사관 경찰들은 선교사들의 동정을 감시... 토벌 사령부에서는 선교사들이 거짓 보고를 하였다고 비난하면서 선교사들에게 금족령을 내림... (261-262)

  • 푸트선교사에게 보낸 일본 군사위원회 의장인 수정대좌의 공개서신... (263)

  • 당시 일제의 압력이 두려워 교인 가운데는 출교하거나 청림교 등으로 전교하는 자도 있었다... 경성에 있던 캐나다 선교부의 선교사 맨스필드와 대구에 있었던 선교사 부두엔에 의해서도 규탄되어 널리 보도... (2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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