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굉일, 『일제하 북간도 기독교 민족운동사』
부록 : 참고문헌ㆍ색인
북간도 기독교 민족운동가 정재면(1884~1962)
1. 머리말
2. 정재면의 성장배경(1884~1907)
1) 서북기독교 신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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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4년 2월 14일 평남 숙천에서 부친 정학전과 모친 김성약의 아들로 출생... 본명은 정병태, 호는 벽거, 일광, 우산 등으로 불리웠다... 모친 김성약은 서양 선교사들의 기독교 전파 이전에 만주를 통해 주체적으로 수용된 개신교에 입신한 한국 최초의 개신교 신자 그룹에 속했다... (2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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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천지역... 정학전은 장손으로 평양신학교에는 입학하지 못했지만 김찬성(김인식 목사의 부친이며, 작곡가 김동진의 조부) 목사와는 절친한 신앙동지... 유교적 유일신론적 신앙... 김성약의 신앙은 종말론적이며 메시아적 신앙... (2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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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약이 수용한 신앙은 역사적 현실을 극복할 수 있는 시대 변혁적인 신앙이요, 민중구원의 대망인 메시아사상이었다. (2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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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북지역의 배경... 무조건적인 신앙 열정이 일생을 좌우하는 바탕이 되었기 때문에 그의 민족독립 운동의 승패는 어디까지나 구속사ㆍ섭리사적인 판단에서 이루어졌으며, 인간적인 성패나 득실에서 결정된 것이 아니었다... 정치운동가 사회운동가가 되지 않고 목회자가 된 것은 이러한 신앙훈련이 그 원형을 이루었기 때문 (276-277)
2) 상동파와 민족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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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3년 정재면은 19세의 나이로 상경하여 상동교회 전덕기 전도사를 만나, 애국사상ㆍ민족의식ㆍ개화사상의 영향을 받게 되었다... 최병헌 목사... 1903년 상동교회 내 세워진 중등교육기관인 상동청년학원에 입학... 상동청년학우회 활동에 가담... (2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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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시경의 국어, 장도빈의 민족사, 남궁억ㆍ현순ㆍ조성환 등의 신문화교육, 이필주의 체육, 전덕기의 종교 강연에서 감화를 많이 받음... (2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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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시경의 제자로서 장지영ㆍ박태환 등과 교우... 장도빈의 발해문화사, 육당의 고대사 강의... 만주지역이 우리 민족사의 터였음을 확인... 현순과 남궁억에게 배운 영어... 1906년 22세 때 상동청년학원을 졸업한 정재면은 상동파에 합류... (2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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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5년 상동파는 전덕기, 정순만을 중심으로 구국기도회를 개최... 진남포 감리교회의 청년회 총무 김구, 헤이그 밀사 주인공이 된 이준, 후에 신민회 주동인물이 된 조성환, 이동녕 등과 교유... (2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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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7년 상동파를 근간으로 신민회 결성... 신민회 회원이 됨... 양기탁ㆍ이갑ㆍ유동열ㆍ이동휘ㆍ이동녕ㆍ전덕기ㆍ임치정ㆍ정순만ㆍ이준과 함께 미국에서 귀국한 안창호의 협조자가 됨... 1907년 12월 신민회의 파송으로 원산 보광학교 교사로 임명... 정재면은 보광학교로 전임하여 캐나다 선교부의 협조로 브라스 밴드의 행진을 할 수 있는 여러 가지 악기를 준비하는 한편, 교육구국운동에 뜻을 같이하는 동지을 모으는 일에 전력... 1908년 신민회의 함경지방 책임자인 이동휘와 이동녕이정재면을 찾아옴... 북간도 용정의 서전서숙... 북간도 교육단의 조직은 단장 정재면, 고문 이동휘ㆍ이동녕, 재무담당 유기연, 의무담당 한봉의, 종교담당 배상희 전도사... (279)
3. 북간도에서의 교육운동(1908~1918)
1) 용정에서의 기독교 전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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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8년 북간도 용정에 도착... 1908년 북간도 용정(한인 8만 2천, 중국인 2만 7천)... 당시 중국 관리 연길도윤 도빈은 일본의 침략을 경계하면서 한인들을 두둔하였기 때문에 민족운동 세력들을 친중국을 견지하며 민족운동을 활발히 전개하고 있었다. (2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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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9년 간도협약 이후... 이범윤처럼 포수를 모아 무력항쟁... 육영사업으로 민족의 힘을 기르자는 노선... 신민회의 파송자 이상설, 명동의 개척자 김약연, 국자가 북쪽의 석해일 등은 민력 양성을 통한 구국의 방량을 추진한 인물들... (2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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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두레촌으로 불리우는 용정은 원래 국내에서 동학운동에 가담했다가 북간도로 쫓겨난 세력들이 천주교로 개종한 후 북간도의 천주교 세력으로 형성되었는데, 이주 한인 천주교도들의 교우촌으로 개척된 곳... (2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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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6년... 신민회 간부이던 이상설ㆍ이동녕ㆍ여준 등이 북간도에 망명, 용정에 서전의숙을 설립하고 간도 일대의 젊은이들 교육에 전념하게 되었다... 이상설이 헤이그로 떠남에 따라 문을 닫게 됨... 정재면은 감리교의 이화춘ㆍ이용현과 장로교의 안순영과 함께 구별 없이 같이 모여 예배하며 전도활동을 전개... 용정 이북은 이화춘이 맡아 모아산 교회... 용정 이남은 안순영의 전도로 양무정자교회가 설립... (2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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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재면은 명동촌이 기독교화되는 것이 전 간도가 기독교화 되는 길의 첩경임을 확신하였고, 명동촌은 유학적 전통으로 전 촌락이 무장화되어 있었기 때문에 그 유학적 전통과 함께 정신적으로 기독교로 전환도 어느 곳보다 용이하리라 생각하였다. (281)
2) 명동학교와 민족교육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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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재면의 기독교와 김약연의 민족사상의 공감... (2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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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7년 이상설의 서전의숙이 폐교되자 서전의숙에서 교육을 받던 김약연의 동생 김학연은 규암재를 학교로 변경시킬 것을 주장... 1901년 건립된 규암재는 명동서숙으로 발전시킴... 1908년 4월 27일 개교한 명동서숙은 정신적으로 서전의숙의 후신... 1909년 명동서숙은 명동학교로 이름을 바꿈... 박무림이 교장, 김약연은 교감, 재무 문치정, 이사는 김정규ㆍ김하규ㆍ남위언, 정재면은 교무주임... 정재면은 명동학교에 부임하는 조건으로 학교에서 성경을 가르쳐야 하고, 또 매일 예배를 보아야 한다는 조건을 제시하였다. (2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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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동학교의 가장 큰 특징은 기숙사 제도... 1910년 명동중학 설립, 1911년에는 명동여학교 설립... 정재면은 상동파의 박태환(윤리 및 국어), 황의돈(한국사), 장지영(한글)을 교사로 처청, 후에는 법학의 김영구, 체육의 김홍일도 교사로 부임... (283)
3) 북간도 독립운동의 준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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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9년 정재면은 김약연ㆍ박태환과 함께 명동학교 학생, 명동교회 교인, 명동촌의 주민을 동원하여 길동 기독전도회를 조직... 계봉우ㆍ남공선과 함께 북간도 기독교계 한인 학교를 위한 교과서 편찬위원회를 조직하고, 각 학과마다 유능한 인사를 초청하여 교과서를 직접 편수... 정재면은 상동청년학원에서 주시경을 통해서 영향 받은바 나라말, 나라글을 중시하여 역사교육, 창가교육도 애국심 배양의 일환으로 강조하는 한편 애국심 교육과 함께 근대지향의 실업ㆍ법률ㆍ정치ㆍ사범 등 과학교육도 충실하게 실시하였다. (2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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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9년 정재면은 김약연의 주도로 계몽단체 성격의 북간도한인자치회를 조직하였는데, 계봉우ㆍ최공일 등이 이에 합류하여 함께 간도 각지를 다니면서 유세하고 지부를 설치하기도 하였다. (2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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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재면이 시민회에 파송되어 1910년 나라 밖 북간도에서 전개한 애국계몽운동은 민중을 기반으로 한 한인사회의 민중조직화운동이요, 일제에 저항하는 세력을 성장시키는 민족운동이었다. (2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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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1년 기독교 민족운동가 이동휘의 망명과 함께 많은 독립운동가들이 간도로 들어왔다. 김립ㆍ윤해ㆍ서상룡ㆍ박찬익ㆍ장기영ㆍ유예균ㆍ오영선ㆍ장석함ㆍ김하석ㆍ이홍준ㆍ강봉우ㆍ김병흡 등인데 이들을 맞이하여 용정과 명동지역으로 새로이 소영자를 독립운동의 거점으로 개척하게 되었다. 특히 장석함ㆍ강봉우는 이동휘가 설립한 함흥 보창야학교 출신으로 단지동맹을 결성한 신민회의 회원이었는데, 이때부터 정재면과 함께 북간도 독립운동의 중요한 맴버가 되었다. (2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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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1년 정재면은 교사양성을 위해 연길사도학교에서 교사로 활동하다가 일본 영사관 경찰서에 체포, 서울로 압송되었다... 연길도윤 오록정이 서울 중국 총영사에 연락하여, 국자가로 압송되도록 조치하였다... 입간(入墾) 즉시 중국국적에 입적되었으므로 중국법에 의하여 처벌됨이 원칙이라는 주장을 내세워 사면... (2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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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2년 정재면은 김약연ㆍ이동휘ㆍ계봉우ㆍ이태현ㆍ조극 등 북간도 교회 대표 16명의 명의로 캐나다장로회 선교부에 청원서를 제출하였다... 캐나다 선교부의 선교사들은 스코틀랜드 출신으로 종교의 현실참여를 신학적으로 긍정하면서 한민족의 독립운동에 대한 지대한 관심과 동정을 가지고 적극적으로 지원하였다. 선교부는 명신여학교ㆍ제창병원을 설립하였는데, 제창병원은 독립군의 피난처요, 휴식처가 되었다. (285-2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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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3년 정재면은 이동휘ㆍ박찬익ㆍ이동춘과 함께 북경으로 대총통 여원홍을 방문하여 중화민국 신생국가 탄생을 축하하면서, 북간도 한인의 실정을 소개하였다. 여기에서 논의된 가장 중요한 사항은 한족공동기관의 조직과 중국 정부와의 친선을 도모하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간민자치회를 간민회로 구체화시켰고, 새로운 임원조직을 구성하여 회장에 김약연, 부회장 김영학, 정재면은 간민회의 총무로 임명되었다. (2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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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4년 정재면은 명동학교를 떠나 본격적으로 독립운동의 표면에 나서게 되는데, 이것은 용정 신촌 영신학교 교사로 재직하다 독립운동 전선에 나선 강봉우와 그 행적을 함께 한다. 이들은 김약연을 핵심으로 적극적인 독립운동을 펼치게 되었다. 1914년 제1차 세계대전이 일어나자 간민회는 독립전쟁론을 실천하기 위하여 왕청현 봉미산자에 군관학교 설립을 계획하였고, 정재면은 이 사업에 매진하였다. (286)
4. 북간도 민족운동(1919-1930)
1) 3ㆍ1운동과 정재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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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5년 5월 일제는 21개조 요구안의 승인을 얻게 되자 간민교육변법에 대한 한인들의 교육활동에 물질적 공세를 가하여 친일학교를 만들고자 하였다... 간민교육회의 김약연ㆍ정재면 등은 자치적인 민족주의 교육을 실시하려면 중국 측과 타협하여 변법의 지시를 받는 것이 유리하다고 판단하게 되었다. (2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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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북간도에서 발행된 신문 중 명동ㆍ정동의 학생들에 의해 발간된 「자유의 종」과 「우리들의 편지」는 김정ㆍ마진이 지도를 맡고, 그 재정은 정재면이 책임 맡았다. 또한 정재면은 남세극 등 재정지원자의 후원으로 무기를 구입할 수 있는 군자금을 수합하였다. (2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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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3년 용정교회에서 장로로 장립된 후 정재면은 노회의 주일하교 위원ㆍ학무위원으로 황약하였으며, 1915년 4월에는 간도지방 전도사로 임명되었다. 1919년 3ㆍ1운동이 발발하자 용정교회의 전도사로서 북간도의 전교회가 독립운동에 참가할 수 있도록 조직화하는 데도 노력하였다. (287-2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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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재면은 1918년 11월 13일 북간도 대표로서 김약연ㆍ강봉우ㆍ김영학 등과 함께 ‘무오독립선언서’에 참가하였고, 12월에는 전간도 한인의 독립운동에 합의하였다. (2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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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9년 1월 정재면은 북간도 독립운동가로서 상해에 가 있는 정안립의 추천으로 자신이 여운형의 신한청년단에 가입된 사실과 해삼위에서 열리는 전로한족중앙총회에 동만대표로서 김약연과 함께 선출된 사실을 연락받았다. (2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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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9년 2월 7일 김약연ㆍ정재면ㆍ강봉우 등 3인은 강봉우의 집에 모여 간도 독립운동 계획 사실을 국내에 연락하기로 결의하고, 이 책임을 강봉우가 맡아 국내의 이승훈ㆍ조만식에게 알리기로 하였다. 김약연과 정재면은 대한국민의회에 참석차 노령으로 떠나기 전, 1919년 2월 18일 국자가 하장리 박동원 집에서 박동원ㆍ이홍준ㆍ이성준ㆍ박경철ㆍ김영학ㆍ김순문ㆍ구춘선ㆍ이성호ㆍ백유정ㆍ최봉열 등과 함께 구체적인 북간도 3ㆍ1운동 거사 계획을 수립하였다. (2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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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약연과 정재면은 북간도의 한인들이 가진 민족독립의 강경한 의사를 노령의 회합에서 발표... 이때 상해파ㆍ노령파의 분열된 싸움을 체험... 기독교 이념을 바탕으로 독립운동을 전개하고 있었던 자기들의 입장과 레닌을 추종하며 독립운동을 하는 사람들과는 많은 차이가 있음을 발견하게 되었다. 정재면은 이 회합에서 민족을 먼저 생각하는 민족주의적 사고방식을 주입하였다. 그러나 그는 독립운동을 위한 통일연합전선의 어려움을 깨달았다. 정재면은 상해에서 온 여운형을 만나 차기 상해에서 열리는 회합에 북간도 대표로서 참석할 것을 내략하고는 훈춘현과 왕청현을 경유하여 용정으로 돌아왔다. (2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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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간도 3월 13일 용정의 만세시위... 한인대표로서 중국 관헌에게 불상사에 대한 책임을 묻는 이의를 제기하였으며, 상해 임시정부가 수립되자 조선독립기성총회를 북간도대한국민회로 개칭하였다. (2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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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9년 7월 정재면과 김약연은 상해에 가서 임정 조직에 참가하였고, 정재면ㆍ계봉우는 북간도 특파원으로 임명받았다... 4ㆍ1상회... 연락사무소... 1920년 10월 29일 간도출병이 있기까지 운영... 임정에서 온 왕삼덕ㆍ안정근이 정재면과 같이 활동... (2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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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0년 5월 국민회는 정규사관학교 설립을 결정하고 명우러구 동북지역 이정배에 군관학교를 설립하였다. 정재면은 이 군관학교의 행정을 담당하면서 상해에서 온 이용(이준 열사 장남)을 도왔으며, 국민회의 민정조직은 식량, 군복, 건물, 건축 등을 담당하였다. (2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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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선택적 상황적 폭력수단은 하나님의 뜻에 의해 정당화된다고 고백하였다. (290)
2) 한인사회와 민중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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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재면은 3ㆍ1운동 이후 노령ㆍ상해ㆍ명월구 및 북간도 전역을 순회하면서 민족운동에 매진하였으나 간도 출병 이후 무장운동이 산간지역으로 철수함에 따라 두도구 지역에 목회활동의 터를 준비하면서 사태를 관망하다가 1923년 용정 캐나다 선교부 소속 은진중학교 교감으로 부임하였다. (2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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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국적... 법적으로 중국인... 연변독판 오록정의 보호... (2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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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낭인 일고병자랑(日高丙子郞)은 정재면을 견제하였고, 두 사람 사이에는 보이지 않는 긴장과 갈등이 지속되었다... 교육적 분위기 및 수준이 서울ㆍ평양과 대등....은진학교는 1932년 일본이 만주를 완전히 석권할 때까지도 애국가를 부르고 태극기를 게양... (2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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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이규식 선생의 화학실험실은 당대 우리나라 최고의 수준... 1925년 명동중학이 폐쇄되자 그 재학생을 전부 인수... “발해나라 남경터에 흑룡강을 등에 지고...”의 교가에서 보듯이 은진의 정신은 민족혼을 지키는 것이었으며, 젊은 배달을 키우는 민족주의를 지향하는 것이었다. (2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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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5년 정재면은 김약연을 용정으로 이주하도록 권유... 박예헌 목사ㆍ김약연ㆍ정재면ㆍ임뵈뵈 할머니 등 당시 기독교 민족주의 지도자들은 표면적으로는 독립운동을 할 수 없었지만, 간도 전 지역을 통하여 구석구석까지 서로 연락하며 교회를 중심으로 민족진영이 주도권을 행사하도록 하였다. (2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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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3년 2월 간도 용정에서 한인 청년 최창호가 중국 군경에 의해 사살된 사건... 정재면은 주민대회를 개최하고 조선인 자치운동을 일으켰다. (2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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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5년 정재면이 조직한 한족생계회는 국민회의 지하조직을 활용한 것이었으며, 이러한 조직을 지속시킴으로써 1927년 연길현 용성나자에서 강백규ㆍ마진 등이 국민회의 재건을 추진했을 때 용정을 중심으로 한 세력인 김영학ㆍ정재면ㆍ김약연ㆍ구춘선 등과의 연락이 가능했다. (2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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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5년 41세의 나이로 남경 금릉대학 신학부에 유학... 함북노에서 신학생청원서를 제출한 지 8년 만에 이루어진 것... 백낙준과 교우, 장개석의 북벌을 경험... 1927년 신학을 끝내고 돌아온 정재면은 1928년 평양신학교에 입학, 1년간 수업으로 동만노회에서 목사 안수를 받음... (2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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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이놀즈와 함께 Charles Hodge의 책을 우리말로 번역... 한국어로 된 조직신학서.. 평양신학교의 조직신학 교재... (2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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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9년 정재면은 은진학교 교목으로 있으면서 『비ᄃᆞᆰ기』라는 잡지를 간행... 민족의 독립ㆍ평화를 뜻하는 민중계몽 성격의 잡지... (292-2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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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산주의 운동은 주도권을 장악하기 위하여 학교, 교회ㆍ사회단체 등 모든 곳에서 민족운동을 견제하였다... 조선공산당 사건과 관련하여 1925년부터, 27, 28년에 걸쳐 간도지역에도 간도공산당 사건이 발생... 민족운동보다는 계급운동... 1930년 젊은 청년들을 중심으로 일어난 공산당 운동은 명동을 오염시켜 한때는 명동소학교가 인민학교로 변하기도 하였다... (293)
5. 해방 전후의 목회활동(1931~1962)
1) 청진과 원산에서의 활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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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1년 만주사변을 계기로 함경북도로 무대를 옮겼다... 1931년 청진의 신암동교회... 1898년 캐나다 선교부의 베커 선교사가 설립... 1935년까지 신암동교회를 섬겼으며, 1935년 노령의 이동휘의 영면소식을 전해들으면서 원산의 광석동교회로 옮겼다. 광석동교회는 북간도에 들어가기 전 그가 설립한 보광학교와도 관련이 있는 교회... 광석동교회는 캐나다 선교부의 게일 선교사의 전도에 의해 창진교회(창앞예배당)로 명명된 관북의 모(母)교회였는데, 관북지방에서는 한국인의 손으로 지은 최초의 교회요, 주위의 안변ㆍ덕원ㆍ문화 등지의 지교회를 거느리고 있는 큰 교회였다... 박예헌 목사ㆍ김영제 목사ㆍ홍순국 장로ㆍ김내범 목사 등 간도 교회의 개척자가 다수 배출된 교회... 석왕사 주지 이호재가 개종하여 장로로서 정재면을 보좌... 일제는 계속 노회에 압력을 가하여 사상이 불온한 정재면 목사의 사임을 요구하였다. 1943년 그는 광석동교회를 떠나 안변의 작은 교회로 옮겼다. (2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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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학전(부친)과 김약연은 신앙동지로서 깊은 정신적 유대감을 갖고 정재면의 민족운동에 정신적 물질적 협력자가 되어주었던 것이다. (2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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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는 1942년 10월 민족운동 혐의자 33명을 체포ㆍ수속하였다. 흥원에서 일어난 이 사건은 조선어학회 사건으로 알려져 있는데, 일제는 이 사건에 이어 1944년에는 영흥을 중심으로 함경도지역의 민족주의 색채를 가진 기독교 목사들을 유언비어 죄목으로 체포하였다... 정재면은 이규용 목사와 함께 체포되어 영흥경찰서에 피체되었다... 고원경찰서로 옮겨져 조사를 받던 중 해방을 맞게 되었다. (295)
2) 해방과 정재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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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촉성 기독교중앙협의회운동에 참가... 서북의 안창호 계열... 원산 광석동교회의 이승길 목사가 김구를 돕던 입장이었는데 정재면과 함께 일할 것을 권고하였으나 그는 정치에 뜻을 둘 수 없었다... 정재면의 항일운동은 민족운동이었지 정치운동은 아니었다. (295-2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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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마스 목사 기념전도회 사업에 관계하다가 곧이어 기독교공보사 사장으로 취임, 언론활동에 뛰어들었다. 주간으로 발간된 「기독교공보」는 해방 이후 기독교계의 대표적인 언론이었다... 이 신문은 흥사단으로 경영권이 넘어가 「한국일보」(현 한국일보와는 다른 신문)로 제호가 바뀌었고 정재면은 한국일보사 이사장을 역임하기도 하였다... 초대한중협회장ㆍ기독교반공총연합회 회장 등의 일에 참여... (2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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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서회출판사에서 『기독교입문』을 번역 출간... 『북간도독립운동사』 집필... 박계주가 「동아일보」에 ‘대지의 성좌’를 연재하면서 북간도 독립운동사 부분을 기술할 때 이 책을 인용 참조하였던 것으로 생각되나 이 자료는 현재 분실되어 남아있지 못하다... (2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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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장로회 교단에 소속되어 있는 송파중앙교회에서 원로목사로 시무하다가 1962년 79세를 일기로 타계하였다. (296)
규암 김약연 목사 연보... (297-299)
참고문헌... (300-3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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