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굉일, 『일제하 북간도 기독교 민족운동사』
제1부 : 북간도 민족교회 구형(構形)과 성격
서론 – 북간도 민족교회 구형과 성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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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관리들은 북간도의 기독교도들을 친중ㆍ친미파로 인식하였다. 그 이유는 교회에 모인 한인들은 일반적으로 배일주의를 표방하였고, 이러한 일본을 적대시하는 태도는 당시 중국인들과도 동일한 처지였으므로 이런 의미에서 기독교도는 친중파로 환영받았다.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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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중국 관리들은 국제적으로 기독교도들의 배후에 있는 영미의 외국인 선교사들을 두려워했기 때문에 동 교파의 한인에 대해서도 불법적 행위를 자행하지 않았다. 한인들은 1) 중국 관리들로부터 생명과 재산을 보호받기 위한 자위수단으로 기독교에 입교하였다... 2) 이주 초에는 호구지책에 전념하다가 차츰 마을을 이루고 생활의 안정을 얻게 되면서 자녀교육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한인들은 교회에서 경영하는 학교를 찾게 되었고 기독교 학교의 종교교육은 자연스럽게 그들을 교회로 인도했다. 3) 한인들은 정신생활의 안정을 얻기 위해 입교하기도 하였다... 4) 북간도 한인들은 자위단체의 필요성에서 교회를 형성하였다. 5) 경제적 자립은 이주민 개개인으로는 불가능했으므로 교회라는 신앙공동체를 중심으로 노동력과 재력을 집결하여 자립을 이룩할 수 있었다. (13-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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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간도에 교회가 형성되고 항일 민족활동을 전개하게 된 중요한 원인으로는 당시 북간도 교회의 중추세력인 기독교도 민족주의자들의 활동을 간과할 수 없다... 그들은 종교가 지닌 신성불가침의 영역과 영미 선교사들의 치외법권적 입장을 가장 적절히 활용할 수 있는 교회를 사회결사체의 모체로 삼았다.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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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동휘는 평안도, 함경도, 강원도, 간도, 훈춘 등지에 순회하면서 “무너져가는 조국을 일으키려면 예수를 믿어라, 예배당을 세워라, 학교를 세워라, 자녀를 교육시켜라, 그래야 우리도 서양 문명국과 같이 잘 살 수 있다. 삼천리강산 한 마을에 교회와 학교를 하나씩 세워, 삼천 개의 교회와 학교가 이룩되는 날이 독립되는 날이다”라고 설파하였다. 그는 기독교를 서양문물의 전달자, 애국계몽운동의 수단, 구국운동의 방법으로 인식하였다. 1911년 이동휘가 간도에 와서 부흥사경회를 인도하자 많은 한일들이 기독교에 입교하였다. 그때 그는 “신도 100만 명이 이룩되는 날이 한국이 독립하는 날이다.”라는 구호를 내걸어 기독교 운동이 곧 민족 독립운동임을 말해 주고 있다.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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규암 김약연... 규암재(圭巖齋)... 서전서숙... 명동학교 설립... 명동학교는 신교육을 실시하기 위하여 상동청년학원을 졸업한 정재면을 교사로 초빙하면서 그의 권유를 받아들여 기독교학교로 전환하게 되었다... 당시 한인사회를 이끌어간 민족지도자들로서는 김약연, 문치정, 박무림, 김하규, 김영학, 남위원, 유찬희, 구춘선, 강백규, 마진 등이 있었다... 김약연은 기독교를 민족구원의 종교로 인식하였고, 용정 남쪽 4개 촌을 명동이라 명명하고 마을 공동출재로 학교와 교회를 설립하고 전도인을 청하여 촌락민 모두에게 집단 입신을 권하였다. (16-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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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에서는 선교사들이 미국정부의 비정치화 정책에 맞추어 독립운동을 적극적으로 후원하지 못했지만 북간도 한인교회와 관계가 깊은 캐나다 선교부 선교사들은 배일적 태도를 분명히 표명했고, 한인들의 배일행동을 직접ㆍ간접으로 지원해 주었다. 1909년 성진을 중심으로 이동휘가 교회의 조사로서 애국운동에 헌신하자 그리어슨(Robert G. Grrierson, 具禮善) 선교사는 이동휘의 활동을 적극 후원하였고, 김약연이 간도에서 한인들을 중심으로 교육운동ㆍ사회결사운동에 전념하자 선교사의 바커(A. H. Barker, 朴傑), 푸트(W. R. Foote, 富斗一), 스코트(W. Scott, 徐高道), 마틴(S. Martin, 閔山海) 등은 자신들의 위해를 돌보지 않고 한인들의 민족운동에 도움을 주었다. 북간도의 선교를 맡았던 푸른 눈빛의 한국인 이들 선교사들은 민중들의 가슴속에 불붙고 있는 민족의식을 외면하지 않았다. (17-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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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2년 105인 사건이 발생하자 북간도 교회에도 영향이 미치었다. 105인 사건은 일제가 신민회를 타도할 계획으로 조작한 것인데, 북간도 교회는 신민회 이동휘와 관계가 깊고, 간도 훈춘 지역의 기독교 민족주의자들 간에는 평양의 대성학교, 정주의 오산학교, 선천 신성학교, 평양 숭실학교 출신들이 많았기 때문이다. 안명근 사건과 105인 사건에 관련된 간도 기독교인들 가운데는 도망, 전거 또는 탈교자도 있었다.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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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동교회에서는 여전도회와 삼국부인전도회를 조직하여 크게 활동하였고, 용정교회는 영신학교를, 명동교회는 명동중학을 설립ㆍ운영하였다. 캐나다 선교부에서도 제창병원의 의료사업을 통하여 크게 공헌하였고 선교부 경영 은진, 명신 등 학교는 교육에 큰 역할을 수행하였다.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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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2년 함경노회가 설립된 지 6년 만인 1917년, 함경노회는 지리적 형편과 모임의 편리를 위하여 남북 분립의 방법으로 종성 이북 간도 일대는 함북노회로, 명천 이남과 해삼위는 함남노회로 결정되었다. 이에 따라 1917년 11월 20일 「조선예수교장로회」 함북노회가 북간도 용정노회에서 조직되었다.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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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8년 9월 말부터 11월까지 함북노회 특별회가 국자가교회, 관도구교회, 용정교회, 투투거우교회에서 4회의 모임이 있었다. 함북노회 제3회 회록에 의하면, 특별회에 참가하여 북간도 교회의 3ㆍ1독립운동 모의에 가담한 교회, 목사, 선교사, 장로들은 다음과 같다. 즉 교회로는 국자가교회, 잠전동교회, 간장임교회, 와룡동교회, 관도구교회, 동불사교회, 태양동교회, 명동교회, 용정교회 등이었으며, 목사들로는 김내범, 이하영, 최덕준, 박예헌, 강두화, 선교사로는 푸트, 스코트, 장로들로는 유찬희, 남인상, 이봉구, 김약연, 이종식, 이순창, 양형식 등이었다. 북간도 한인사회의 대표적 인물이었던 김약연 장로, 강봉우 장로, 정재면 장로 등과 북간도 전 교회는 민족자결주의를 시대의 논리로 삼아 간도 한인들을 모두 단결시켜 독립운동에 매진할 것을 합의하였고, 교회는 그 중추세력이 될 것을 결의하였다. (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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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9년 3월 13일 만주에서의 3ㆍ1독립선언은 그 첫 봉화가 북간도 용정촌에서 올려졌다. 이 첫 거사를 위하여 북간도 교회의 민족운동가들과 평신도, 목사, 장로, 선교사들은 세 시찰구역의 각 교회들을 중심으로 협력하였고 선교에 나섰다. 교회는 대종교, 천도교와 합동으로 또는 독자적으로 독립운동을 준비하였고, 또 그 거사에 앞장섰으며 그 희생도 컸다. 용정의 독립선언식이 전역에 교회나 학교가 서 있는 곳이면 어느 곳이나 독립운동의 시위가 있었다. 용정 시위를 준비한 구춘선 장로, 마진 집사, 배형식, 박예헌, 김내범 목사, 김약연, 정재면, 유찬희 장로들과 이밖에도 기독교학교 교사 김정, 김상호, 이태현, 김순문, 기독청년회의 대표 서성권, 이홍준, 선교부의 스코트, 푸트, 마틴 등 선교사들은 교인들과 기독교학교 학생들을 이끌고 민중들을 지도하였다.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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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ㆍ1운동 이후 북간도 각지에서 전개된 시위운동이 무장운동으로 발전이 되자, 1920년 일제는 훈춘사건을 계기로 조선독립군을 토벌한다는 구실을 내세워 간도 방방곡곡 교회와 학교가 있는 곳이면 한 곳도 제외함이 없이 잔인스런 만행을 저질렀다. 3ㆍ1운동 후 청음으로 열린 함북노회 제4회(1919년 9월 13일, 와룡동교회)모임에서 북간도의 세 시찰 구역이 보고한 그 참상은 이러하다. 먼저, 간북시찰은 “금년 독립만세 사건에 우리 교인 중에 죽은 자가 최익선, 장학관, 최광범 삼인이요, 중상된 이가 김진서, 원용석, 이명찬 삼인이요, 옥중에 있는 자가 십인, 구속되었다 풀린 자가 십이인이라.” 또한 장은평 교회, 구세동 교회, 영생동 교회, 천보산 교회가 속해 있는 간서시찰회에서도 “금년 만세사건에 관계하여 죽은 교인이 박문협, 리요섭, 채창홍 삼인이요, 중상자는 전창조, 리봉섭이며, 감금자도 수인이라.” 명동교호, 용정교회가 소속된 간동시찰회의 보고는 “만세사건에 죽은 교인은 이유주, 김병연 2인이요, 갇힌 자 32명 중 6인이 구속 중”임을 보여준다. 이와 같이 간북ㆍ간서ㆍ간동시찰회의 보고와 함께 총회록에도, “금년 봄 독립만세사건으로 교인 중 총화 창에 별세한 이가 9인인데, 그 중에서는 교사와 학생이 많다. 중상자는 10인이요, 일 년 반 이하 징역으로 선고 받고 감옥 중에 있는 이가 아직도 30여 인인데, 그 중에 명동교회 김약연 장로는 국자가에 갇혔고, 또 얼마동안 감금되었다가 태형만 믿고 석방된 자가 용정 등지에서 여러 사람이요, 설유만 받고 풀린 자도, 회령, 용정, 두도구, 국자가 등지에 백 명가량 된다. (22-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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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북노회 제7회록의 피해 상황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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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정교회의 이태준은 기독청년들을 중심으로 전도대를 조직하여 간도 서부지역을 순행하면서 환난당한 교회와 학교 개척마을을 방문하여 그들을 위로했다.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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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는 한인들의 비참한 현실을 신앙으로 극복하면서 1921년 간도노회를 설립하였다. 함북노회는 교통의 불편, 재정상의 관계, 기타 사정에 의하여 간도 및 회령구역을 서로 나누고, 간도는 독립하여 ‘간도노회’가 되고, 회령구역은 함남노회 구역인 성진시찰구역과 합하여 함북노회에 소속시키기로 하였다...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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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간도에 교회를 세운 이래, 중국인과 일제에 의한 온갖 시련을 극복하고 간도노회가 독자적으로 조직되었음을 하나님께 감사하고 감격한 마음으로 간도노회록 서문에 신앙을 고백하고 있다.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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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1년 12월 1일 간도노회는 조직회로 토성보예배당에서 회집하였다... 간도노회 제1회 회집이 토성보교회에서 열렸을 때 양형식 장로는 「율법의 의와 신앙의 의」에 관하여 설교하였다. (25-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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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간도에 있어서 기독교인들은 민족운동의 주동적 세력이 되었고 북간도 교회, 북간도 기독교학교, 배일주의는 삼위일체로 북간도 교회가 민족교회로 구형되는 요소가 되었다. (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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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사5조약을 전후한 시기부터 합방을 거쳐 3ㆍ1운동까지의 1910년대 북간도지역 민족운동의 맥락은 교육운동과 독립전쟁을 준비하는 항일운동으로 추진되었으며, 3ㆍ1운동을 계기로 무장항쟁의 독립운동으로 전환되었다고 볼 수 있다.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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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0년대 국외 북간도에서 발전적으로 전개된 애국계몽운동은 사회결사의 민족운동으로 발전되었다.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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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간도의 독립운동의 연구는 먼저 그것을 뒷받침해 준 북간도 이주 한인사회의 민중운동 연구가 선행되어야 한다.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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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간도의 독립운동은 연길, 화룡, 왕청, 훈춘 등 4현의 수십만에 달하는 이주한인사회를 기반으로 이루어졌다. 러일전쟁 이후 북간도에서 민족운동이 추진될 수 있었던 것은 한인들의 이주촌락이 일찍부터 형성되어 있어 그것이 국외독립운동기지로 발전되었기 때문이다. [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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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간도에 있어서는 이주한인사회의 종교운동을 독립운동, 교육운동, 사회결사운동 등과 서로 구분하여 생각할 수 없었다. 이곳의 민족주의자들은 교육자인 동시에 종교인이며, 또 이주한인사회의 지도자였던 것이다.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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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9년 용정촌 독립선언식을 시발로 간도 각처에서 3ㆍ1운동이 전개되기까지 북간도 이주 한인들이 사상, 문화, 종교, 교육 등을 지도하여 온 민정 조직체는 북간도 국민회였는데, 국민회를 이끌어온 민족독립운동가들은 대부분 기독교인이었다. 이들은 합방을 전후한 시기부터 북간도 각처에서 이주한인사회를 개척하여 새 민족공동체를 세우고 간민자치회, 간민교육회, 간민회 등을 이끌어 자치와 민족교육을 실시하였다.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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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0년대 북간도에 전파된 기독교는 서양문명을 전파하는 근대주의와 민족해방을 위한 항일 민족주의를 지향함으로써 북간도 이주한인사회 안에 가장 큰 영향력을 끼친 세력으로 성장하였다.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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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신대학을 세운 송창근 목사는 북간도 기독교 독립운동가 이동휘의 비서였으며, 명동중학과 광성중학에서 수학하였고, 한신대학의 거목이셨던 김재준 목사 또한 명동학교의 이념을 계승한 북간도 용정 은진중학의 성경교사였다. 그가 가르친 학생들은 후에 역사신앙을 바탕으로 한국기독교장로회를 이끌어간 목회자와 신학자로서 크게 성장하게 되었다.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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