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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 자료실]/[도서 정리]

[틸리히 신학 되새김] 노트 7 : 종교적 상징

by [수호천사] 2021. 3.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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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재, 틸리히 신학 되새김

 

노트 7 : 종교적 상징

 

틸리히의 상징신학에서 강조하는 점은 상징과 표지의 차이를 깊이 생각하라는 것이다... 표지는 주로 지시 기능을 하기 때문에 합의에 의해 변경할 수 있다... 그러나 상징은 합의에 의해 쉽게 바꿀 수 없다. 상징은 당순히 지시 기능이 아니라, 상징하려는 어떤 실재의 의미와 힘지시(pointing to)하면서 동시에 그 의미와 힘에 참여(participation)하는 기능을 지니기 때문이다... (상징은 순교도 불사하게 만든다) (93)

 

상징은 단순한 기호나 평면적인 표지 기능을 뛰어넘는다. 상징은 실재계의 다양한 양태와 구조를 드러내는 기능을 한다... 종교사에는 우주목 상징’(宇宙木 象徵, the symbol of cosmic tree)이 있다. 성경에서는 생명나무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가 에덴동산의 한가운데에 있다고 말한다. 마을 한 가운데에는 사람들이 신성시하는 중심 나무가 있다. 그때 나무는 단순한 나무가 아니라 우주의 중심을 상징한다. (94)

 

상징은 단순한 단어나 문장이 수행하지 못하는 다의적 의미를, 혹은 실재가 지닌 다차원을 의미를 하나의 상징물로 드러내는 기능을 한다. (94)

 

중세의 가톨릭 교회뿐만 아니라 현대의 가톨릭 교회에서는 개신교에 비해 훨씬 더 상징신학이 발전했으며 교회의 모든 예전에 성례전적 비의(秘議)를 보존한다. 가톨릭 교회 전통의 성례전과 상징신학에 비해 종교개혁 이후의 개신교에서는 성례전과 상징신학은 약해지고 말씀 중심과 신자 개개인의 인격적 결단과 의지의 선택이 강조되었다. 한마디로 말해서, 중세 기독교와 현대 가톨릭은 보다 성례전적 상징신학 체계로 이루어져 있으며, 종교개혁 이후의 개신교는 보다 의지적 윤리 종료로서 말씀 중심의 신앙 체계로 이루어져 있다. (95)

 

가톨릭 교회와 개신교 교회의 특징은 서양 철학사에서 보편자’(the universals) 논쟁이라고 일컫는 실재관 논쟁에서 관점의 차이, 곧 중세적 실재론과 근대적 유명론의 차이에서부터 유래한다. 철학적 개념은 시대에 따라서 정반대 개념으로 변하기도 해서 혼동을 일으킨다. 토마스 아퀴나스(1225~1274)로 대표되는 중세의 실재론은 현대사상에서 보면 관념론에 해당하고, 윌리엄 오캄(1285~1349)으로 대표되는 유명론은 현대 과학의 객관적 실재론에 해당한다... (95)

 

토마스 아퀴나스를 대표하는 중세 기독교 신학자들 대부분은 실재론자(중세적 의미에서)였다. 실재론에 의하면 김 아무개, 박 아무개, 최 아무개 등 수많은 개인이 존재하지만 그들이 구체적인 개인으로 존재하기 전에 인간이라는 실재, 혹은 인간성, 인간임이 실재하는 것이라고 강조한다. 개별자는 그 보편자 인간, 인간성, 인간임의 속성을 분여받고 인간 본질 혹은 본성에 참여하기 때문에 인류적(人類的) 의식이 가능하다. ‘사람이라는 보편자는 개인들의 마음이나 의식 밖에 이미 앞서서, ‘사물에 앞서서실제로 존재한다고 보는 입장이다. 보편 본질이 단지 추상적 호칭에 불과한 것이 아니라 존재의 힘을 가지며, 따라서 실재성을 갖는다는 신념이다. (95-96)

 

유명론은 개별 사물과 개별 인간만이 실제로 존재하고, 보편자 곧 인간이라는 보편 개념은 개별적 사물과 개인들의 실재성 이후에 인간 의식이 이름 붙여놓은 추상적인 집단 명칭에 불과하다는 입장이다. 즉 보편자는 사물 이후에인간이 사유 속에서 종합한 개념에 불과하다고 보는 것이다. 유명론적 실재관은 개개인의 개체성, 인격성, 사유 능력과 의지적 판단, 개인의 주체적 수용과 참여 등을 중요하게 여긴다. 종교개혁자 마틴 루터는 오캄의 유명론을 지지했다. (96)

 

틸리히는 상징론에서 본다면 중세 실재론의 입장을 지지하면서 새롭게 계승하고 있다. 틸리히의 상징론에서 근본 명제, 상징은 상징이 상징하려는 실재의 존재론적 힘과 의미에 참여하고 있다는 것을 강조한다. 그러면서도 틸리히는 개신교 신학자로서 개신교 원리를 존중한다. 상징이 지시하고 매개하는 그 힘과 의미에 개인 인격체가 응답하는 참여적 결단 의지, 믿음과 신뢰를 강조하는 것이다. (96-97)

 

가톨릭 교회... 정당하게 서품을 받은 성직자에 의해 집례되는 성례전은, 성례전 그 자체의 고유한 힘에 힘입어 그것에 저항하지 않는 사람들에게 효력을 미친다. 다시 말해 성례전에 참여하는 평신도의 주관적 입장, 태도, 역할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 서품을 받은 가톨릭 성직자에 의해 규정대로 집례되는 성례 의식 그 자체에 의해서 신비한 능력이 초자연적으로 작동하고 영향을 끼친다... 화체설... 교회는 그 자체로 거룩한 것’, 곧 그리스도의 구원 능력과 은총을 보관하고 관리하는 거룩한 실재다. 중세 가톨릭 교회에 있어서는 신적인 것이 성례전의 형식을 통해서 세계에 현존하는 것이다. (97-98)

 

틸리히의 상징론에 의하면, 특히 종교적 상징이 상징으로서 건전하게 그 역동성을 지속하려면 상징물이나 상징 행위가 지시하는 객관적 실재’(하나님의 은총, 그리스도의 속죄, 성령의 능력)와 그것을 수용하고 응답하고 참여하는 주관적 실재’(믿는 자의 신앙고백과 결단)가 밀접하게 상관관계를 이루며 함께 작동해야 한다. 후자가 무시되고 전자만 강조되면, 성례전은 유사종교적 마술로 변질될 위험이 있다. 반대로 객관적 실재가 약화되고 주관적 실재만 강조되면 성례전은 종교가 담당하는 상징적 성례가 아니라 기껏해야 역사적 기념식으로 전락할 위험이 있다. (98-99)

 

교리사는 츠빙글리의 입장을 기념설이라고 불렀다.... 루터는 성찬 예식의 빵과 포도주가 그리스도의 몸과 피로 변화되는 것(가톨릭의 화체설)은 아니지만, 성만찬의 떡과 포도주와 함께 계신다는 견해를 포기하지 않았다. 이른바 공재설이다. (99)

 

칼빈의 주장... 성령의 감동 감화에 의해 하나의 동시적 사건으로 통전된다. 이른바 성령감화설이다. (99)

 

성령의 감동 감화 안에서 이것은 내 몸이다. 내 피다라는 성찬식의 핵심 예전어 이것은 ~이다라는 말씀의 뜻이, 가시적 물질과 불가시적 영적 몸 사이에 분리나 동일화를 초극하면서 진정한 의미에서 상징이 된다. ‘상징안에서 초월적인 것과 내재적인 것, 영적인 것과 물질적인 것, 하늘과 땅, 신과 인간이 만나고 잠정적으로 하나가 된다. 그때 구원, 곧 치유와 자유와 해방과 샬롬이 현실화 된다. (100)

 

틸리히는 계시의 매개로 세 가지 범주를 제시한다. 첫째 범주는 하늘, , 나무, 바람, 계절의 훈환 등 자연의 사물과 사건이 계시의 매개들이 될 수 있다. 둘째 범주로는 혁명, 전쟁 등 역사적 사건이 계시의 매개들이 될 수 있다. 셋째 범주로는 영웅 탄생, 예언자 소명 등 인격적 존재들이 계시의 매개들이 될 수 있다. 어떤 매개라도 그것들이 계시로서 의미를 가지려면 언어에 담기고 언어에 의해 언표되고 언어로 해석됨으로써 계시 기능을 할 수 있다. (101)

 

언어 문법 체계와 발음 구조를 가능케 하는 존재의 집으로서 언어’(하이데거), 언어성이 신학적으로 중요한 담론 주제가 된다. 틸리히에 의하면 세상의 모든 다양한 언어들은 하나님의 언어성이랄 수 있는 로고스에 근거한다. 로고스는 실재와 사람 마음의 공통적인 합리적 구조이다. (101)

 

아무리 하나님의 특별 계시 말씀이라고 해도, 일반적인 인간의 언어학적 문법, 의미론, 언어 구조를 떠나서 우리에게 하나님의 말씀, , 계획 등이 전달되지 않는다. 기독교 신앙에 의하면 하나님은 단순한 우주 원리거나 자연법칙이 아니시다. 인간이 다 헤아릴 수 없는 지혜, 지성, , 사랑의 의지를 지니신 로고스적 신성이라고 믿는다. (102)

 

계시란 하나님이 자신을 스스로 계시하시는 사건이다. ‘하나님이 스스로 자신을 계시하시는 행위와 뜻과 문법이 로고스다. 이 로고스가 그리스도이신 예수의 생명체로 특별하게 육화되어 나타나셨다. 예수의 입에서 발화된 말씀들만이 아니라 예수라는 생명체 자체가 하나님의 말씀이었다... 상징은 그것 자체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상징하려는 본질적 실재가 중요하다. 그런 의미에서 개신교의 설교는 말씀을 매개로 하는 고도의 상징 행위이다. 그 말씀이 사람을 뒤흔들고 변화시키고 새롭게 거듭나게 하고 심판하고 구원하는 힘으로 작용할 때, 설교 말씀은 그 상징적 책임을 완수한다. 성례전은 시각적 눈으로 보고 마음의 눈으로 듣는 말씀이고, 설교는 청각적 귀로 듣고 마음의 귀로 보는 말씀이다. (1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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