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준만, 『한국 근대사 산책 1』 천주교 박해에서 갑신정변까지
[제3장] 대원군의 척화투쟁
01. 병인양요를 불러온 병인박해
프랑스로 러시아를 막는 이이제이(以夷制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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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의 집요한 통상요구(1864-1865)... 천주교인이자 정부관리인 김면호ㆍ홍봉주 등이 이이제이 방어책을 대원군에게 건의 (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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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주교는 프로테스탄트를 ‘분열시키는 종교’라는 뜻으로 ‘열교(裂敎)’라 부르며 배척했으며 급기야 교세를 보호받으려고 대원군에게 접근하기까지 했다. 대원군이, 승지를 지낸 천주교도 남종삼으로부터 교리를 들은 뒤 던진 질문은 왜 제사를 지내지 않느냐는 것이었다. (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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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종삼(1817-1866)은 대원군의 위기의식을 간파하고 대원군에게 조불조약을 체결하여 나폴레옹 3세의 위력을 이용, 러시아의 남하정책을 막는 정책을 펴도록 건의했으며 이를 위해 조선에 잠입해 활동 중이던 베르뇌 주교와의 만남을 주선하게 되었다. (94)
대원군의 결백 콤플렉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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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66년 1월에 베이징 사신 이홍민이 편지를 보내옴... 청나라가 천주교를 탄압하기 시작했다는 내용... 대원군은 프랑스의 두 주교 베르뇌와 다블뤼를 만나려고 했지만 조정대신들의 반발이 거셌다. 1866년 1월 영의정 조두순과 좌의정 김병학 등은 두 주교를 만나서는 안되며 남종삼을 비롯한 천주교도들을 전부 죽이라고 요구하고 나섰다. (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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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원군은 천주교도들을 잡아들이라는 지시를 내렸다(1866년 병인박해)... 전택부는 “대원군의 이러한 결정은 아마도 자신의 정권을 보존하기 위함이었을 것이다. 이것은 빌라도가 예수의 무죄를 알면서도 민중이 무서워서 그를 십자가에 못박은 것과 흡사하다고 할 수 있다”고 했다. 또 이는 먼 훗날 좌익 출신 박정희가 자신의 우익사상을 입증받기 위해 가혹한 ‘빨갱이 사냥’에 나선 것과 비슷했다. (95-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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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66년 2월 베르뇌를 비롯해 홍봉주ㆍ남종삼ㆍ김면호를 포함한 수많은 천주교인들이 체포되어 순교했다. 국내에 잠입한 열두 명의 프랑스 신부 가운데 베르뇌ㆍ다블뤼 등 아홉명은 서울 새남터와 충남 보령의 갈매못에서 순교했다. (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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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39년 기해박해 때는 앵베르 등 프랑스 선교사 세 명을 국문하면서 처음부터 그들에게 배교를 강요했고 다른 신도들을 밀고하면 본국에 송환해줄 용의가 있다고 제안했지만 병인박해 때는 배교를 강요하지 않았으며 아무 조건도 달지 않은채 원한다면 본국으로 송환해주겠다고 제의했다. 물론 프랑스 선교사들은 스스로 순교의 길을 택했다. 연갑수는 이런 변화가 1846년 세실 소장이 이끄는 함대가, 이듬해에는 라피에르 대령이 이끄는 함대가 조선 해안에 나타나서 프랑스인 처형을 항의했기 때문에 나타난 것으로 보았다. (96)
여성 순교자가 더 많은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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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70년까지 지속된 병인박해... 여성 우위... 검거된 천주교도 407명 중 남녀 비율은 남자 셋에 여자 하나... 순교한 78명 중 남녀 비율은 남자 하나에 여자 둘... (96-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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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66년에 처형된 베르뇌...“조선 민중의 성격은 매우 단순하여 사리를 깊이 따지길 싫어한다. 성교(聖敎)의 진리를 가르치면 곧 감당하여 믿음에 들고 어떠한 희생이라도 무릅쓴다. 하지만 진리를 풀이하면 잘못 알아듣는다. 특히 부녀자들과 천민층 남자들이 그러하다”고 했다. (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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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68년 감옥에 갇힌 학식 많은 여신도 한성임은 “미련한 여인들은 겨우 한 구절의 성서만을 외우고는 바로 세례를 받는다. 그리하여 천당에 갈 줄 알고 기꺼이 죽임을 당한다. 마치 불꽃 속에 뛰어드는 부나비들과 같다”며 우매한 부녀자들의 값싼 신앙 태도를 한탄했다. (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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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규태... “이처럼 터무니 없이 빈약한 동기와 목적을 가지고서도 그 가혹한 형벌을 이겨내고 웃으면서 죽을 수 있었던 신앙심의 원천은 도대체 무엇이었을까? 그것은 한국 여성이 대대로 감수해온 수난의 역사를 모르고서는 이해하기 곤란하다”... “한국에 천주학이라는 신교가 들어오자 한국 여성들은 오랫동안 막연하게 그려오던 탈출구에 눈을 떴다. 유식하고 무식하고는 문제가 될 수 없었다. 그리하여 그들은 억눌려온 ‘모럴’에 저항했고 또 그토록 가혹한 고문을 감당해냈으며 사지를 찢기우면서도 웃으며 죽어갈 수 있었다. 즉 교리엔 무식하면서도 신앙심이 깊었던 것은 한국 여성이 당한 사회적 구속에 대한 반발이요 저항이었다. 천주학은 말하자면 그 레지스탕스에 어떤 계기를 만들어주었다고도 볼 수 있다.” (97)
조선에서 22년을 지낸 다블뤼의 변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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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45년 10월 12일 조선에 들어와 1866년 3월 30일 순교... 22년 동안 조선에서 생활한 다블뤼... 조선에 그의 인식이 시간이 흐를수록 긍정적인 방향으로 바뀜... (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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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국한 지 10개월만인 1846년 7월 15일 파리외방전교회 본부로 보낸 편지... “물리적인 힘이 유일한 법률이고 범죄를 부끄러워하지 않고 이해관계에 따라서만 행동하며 조국에 대한 사랑조차 알지 못하는 이 야만적인 나라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를 가지고 판단하라.... 조선인들은 반야만 상태에 있기 때문에 성격이 매우 까다롭다. 이 나라에는 교육이란 것이 전혀 없다... 조선인들은 화가 나면 공격적으로 돌변한다. 여자들도 뻔뻔스러우며 말이 매우 모질다. 조선인들은 대단한 수다쟁이들로서 대화를 할 때에는 마치 아이들처럼 말한다.” (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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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블뤼는 1860년에 작성한 것으로 추정되는 『조선사 입문을 위한 노트』에선, 여전히 조선인들의 문화에 대한 비판도 했지만, 조선인들의 상부상조 정신에 크게 감동하면서 서구인들의 ‘근대적 이기주의에 대해 증오와 가증스러움’을 느낀다고 자괴의 심정을 털어놓았다. (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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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나라에서는 자선 행위를 진정으로 존숭하고 실천한다. 사랑방에서 받는 대접 이외에도 적어도 식사 때 먹을 것을 달라면 거절하지 않는다. 심지어 어떤 경우에는 일부러 그를 위해 다시 밥을 하기도 한다. 들에서 일하는 일꾼들은 식사하다가 지나가는 사람에게 즐거이 자기 밥을 나누어준다. 뱃사공들은 밥을 먹지 않고 배 타러 나온 사람과 나누어 먹는 것을 철칙으로 한다. 잔치가 벌어지면 언제나 이웃 사람들을 초대해서 형제처럼 모든 것을 나눈다. 여비가 없이 길을 떠나는 사람은 엽전 몇 닢의 도움을 받는다. 없는 사람과 나누는 것, 이것이 바로 조선인이 가진 덕성 중의 하나이다.” (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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