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준만, [한국 근대사 산책 1] 천주교 박해에서 갑신정변까지
[제3장] 대원군의 척화투쟁
03. 병인박해를 악화시킨 병인양요
서울을 공포로 몰아넣은 50여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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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인 주교 및 선교사 아홉명의 처형소식이 전해지자 텐진에 있던 극동함대사령관 로즈(Peirre Gustave Roze, 1812-1883)는 기다렸다는 듯 무력보복을 결심했으며 청나라의 거중조정 제의를 거부했다. 조선 정부가 “선교사들은 조선의 국법을 어긴 것이며 프랑스 정부에 대한 적대적인 정책은 아니다”라는 뜻을 청나라를 통해 프랑스 측에 알리면서 재교섭을 시도했으나 그 역시 거부됐다. (1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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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66년 9월 26일, 로즈가 이끄는 프랑스 군함 세 척이 병인박해 때 조선을 탈출한 신부 리델(Felix Clair Ridel, 1830-1884)과 조선인 신도들의 안내를 받아 한강 어귀를 정찰했다. 두 척은 양화진을 거쳐 서강까지 올라와 정박했다가 다음날 고양군 행주 방면으로 이동했다. (1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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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 13일(음력 9월 3일) 프랑스 군함 일곱 척(1500명의 병력)이 다시 나타났다. 로즈는 10월 15일 강화부를 공격, 점령하고 한강을 봉쇄한 뒤 조선 측에 신부들을 살해란 책임자를 엄벌하고 조약을 체결할 것을 요구했다. (1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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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 8일(음력 10월 3일) 정족산성의 양헌수(1816-1888) 부대를 공격했지만 조선군의 저항은 상상외로 거셌다. 프랑스군은 적지 않은 사상자(사망 6명, 부상 30여 명)를 내고 후퇴했다. 이 싸움에서 조선군은 한 명의 사망자와 세 명의 부상자를 냈다. (1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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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수를 결정한 로즈는 11월 10일 강화읍의 방화와 파괴를 명하고, 약탈해두었던 걸 군함에 운반케 했다. 강화 이궁(임금이 거동할 대 임시로 머무는 궁궐)과 외규장각(규장각의 귀중한 책을 별도로 보관하는 곳) 등에서 각종 무기, 수천권의 전적, 국왕의 인장, 19만 프랑 상당의 은괴를 약탈함... (1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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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 18일(음력 10월 12일) 한강 봉쇄를 해제하고 물러갔다. 33일간의 한강 봉쇄... 서울에 들어오는 물자보급로가 막혀 서울에선 소동이 벌어짐... 물가상승... 피난길로 서울 시내의 집 7000여 호가 텅텅 빌 정도... 열 집 가운데 아홉 집은 피난... (107)
천주교도 8000여 명을 죽인 학살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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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66년 9월 기정진(1797-1876)은 서양 오랑캐에게 오염되지 않은 청정한 지역은 오직 조선뿐... 그들과 교통을 용납해서는 안된다는 상소를 올림... (1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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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함대가 강화도를 침공하자 화서 이항로(1792-1868)는 주전ㆍ척화의 상소를 올렸다. 명은 중화, 조선은 소중화, 청은 중국을 지배하고 있으나 이(夷), 서양과 그 앞잡이인 일본을 금수(禽獸)로 인식... 서양물건을 찾아내 불태울 것을 요구... (1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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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원군은 양이와의 화친이나 교역은 매국이자 망국이라고 재천명했다... 프랑스 함대는 사정이 여의치 않자 스스로 알아서 물러갔지만 조선은 양이를 물리쳤다고 주장했다. 권희영은 “이는 천주교도를 탄압하는 데는 효과적이었지만 국가를 살리고 민족을 살리는 데는 아무 소용없는 일이었다”고 평가했다. (1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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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화진... 서울시 마포구 합정동의 절두산 일대... 조선 정부는 수도 방위를 위하여 한강 주변에 송파진, 한강진, 양화진의 삼진을 두었는데 그 삼진 중 하나인 양화진은 나루터 구실뿐 아니라 외침이나 민란에 대비한 상비군 주둔지로 가능했다. (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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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0년 7월 28일 미국인 선교사 헤론(1856-1890)이 최초로 묻히면서 ‘서울외국인선교사묘지공원’이 만들어졌다. (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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탄력을 받은 병인박해는 1870년까지 지속되었다. 천주교 기록에선 1870년까지 8000여 명이 죽었다고 했으며 황현의 『매천야록』은 이시기 앞뒤로 2만여 명이 죽었을 것이라고 기록했다. 박은식은 『한국통사』에서 팔도에 명을 내려 교도 12만 명을 잡아들였는데 더러 억울하게 걸려든 자도 있었다고 썼다. (110)
불안과 공포로 인한 자신감 상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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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1년 연갑수는 병인양요가 대원군의 프랑스 선교사 처형 때문에 일어난 것이라는 통설을 반박했다. (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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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희영은 병인박해는 강경파의 명분에 밀려 벌어진 일로, ‘불안과 공포로 인한 자신감의 상실’이 그 원인이었다고 진단한다. 그는 “이들은 자기들의 신념으로 조선왕조를 지탱하고 발전시킬 수 있었다고 생각했는가? 강경한 주장과 허풍 뒤에 이들의 허약성과 겁이 숨어있었다. 이들은 이미 자신들의 나약함을 알고 있었지만 그러나 그것을 인정하려 하지 않았다. 중국이 이미 서양세력에게 굴복해 있는 상태였고 일본 역시 굴복해 개항을 했는데 조선이 어찌 서양 근대문명의 강대함을 모를 수 있었을까?”라는 물음을 던졌다. (110-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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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제는 천주교도들을 희생양으로 삼은 것이다. 천주교 박해는 비열하고 광기 어린 행동이었다. 그것은 권위와 권력에 아무런 자신감도 없는 자들이 하는 협박이었고 그 공포를 통해 체제를 유지하려는 것이었다. 여기에서 우리는 중세 말기 유교의 한계를 본다. 인(仁)의 정치는 실종되고 제사와 전례 문제를 핑계로 수천의 백성을 학살하는 유교문명의 한계인 것이다.” (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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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재언은 “조선의 비극은, 외압에 의해 쇄국에서 개국으로 전환할 수밖에 없었던 바로 직전까지 천주교 탄압이 계속되었고 이와 더불어 18세기 후반기부터 겨우 싹터온 서양의 사정 및 학술에 대한 연구가 1801년부터 70여 년간 절멸했다는 데 있다”고 주장했다. (111)
돌아오지 않는 외규장각 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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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인양요 당시 참전했던 프랑스 해군 견습사관 주베(M. H. Zuber)는 1867년 잡지 기고문에서 “강화에서 은으로 가득 찬 상자 20여 개를 발견했는데 이것으로 우리는 원정비용을 뽑고도 남으리라 생각한다”고 말했다... 강화도 한 촌락의 초라한 집에서 공부에 열중하고 있는 조선 선비의 기개있는 모습을 1873년 프랑스의 여행전문잡지 『르 투르 뒤 몽드(세계일주)』에 스케치 그림과 함께 글로 표현했다. (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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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과 같은 먼 극동의 나라에서 우리가 경탄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은 아주 가난한 사람들의 집에도 책이 있다는 사실이며 이것은 선진국이라고 자부하고 있는 우리의 자존심마저 겸연쩍게 만든다. 조선사회에서 문맹자들은 심한 천대를 받기 때문에 글을 배우려는 애착이 강하다. 프랑스에서도 조선에서와 같이 문맹자들을 가혹하게 멸시한다면 경멸을 받게 될 사람이 허다할 것이다.” (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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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규장각 서적 약탈... 1377년에 간행된 『백운화상초록불직지심체요절』, 특히 『직지심경』으로 불리는 책도 포함... (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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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찬... “우리는 미테랑이 문화재 반환의 제스쳐를 쓰자 고속철도 공사를 가격 등의 불리한 조건을 감수하면서 프랑스와 계약하였다. 그러나 TGV(프랑스 고속철도)를 주면 돌아올 것으로 알았던 외규장각 도서는 돌아오지 않았다. 고속철도 계약에서는 손해를 보고 외규강각 도서 반환에서는 거의 사기를 당했다. 외규장각 도서는 별개의 사안으로 다루더라도 우리가 결코 불리할 게 없는 사안인데 고속철도 계약이라는 어마어마한 이권과 연계시켰으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속철도 계약과 외규장각 도서 반환 문제 둘 다 손해만 보았던 것이다.” (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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