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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 자료실]/[도서 정리]

[한국 근대사 산책 1] 제3장 : 대원군의 척화투쟁 (05) 오페르트의 남연군묘 도굴사건

by [수호천사] 2021. 3.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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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준만, [한국 근대사 산책 1] 천주교 박해에서 갑신정변까지

 

[제3장] 대원군의 척화투쟁

05. 오페르트의 남연군묘 도굴사건

 

통상과 신앙의 자유를 얻기 위한 만행

  • 병인박해 때 조선을 탈출해 병인양요 시 프랑스 함대의 뱃길을 안내했던 프랑스 신부 페롱(Stanisas Feron, 1827-?)은 독일의 무역상인인 오페르트(Ernst J. Oppert, 1832-1903)를 끌어들여 대원군을 공격할 궁리를 했다. 오페르트는 18663월과 8월 두 차례에 걸쳐 충청도 홍주목 해미에 타나나 통상을 요구했으나 실패한 뒤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119)

  • 페롱은 오페르트를 책임자로 하여 대원군과 정치적 교섭을 벌이기 위해 대원군의 아버지 남연군 이구(李球)가 묻혀 있는 충남 예산군 덕산면 상가리 가야사 옛터의 무덤을 파헤쳐 시체와 부장품을 미끼로 대원군과 통상문제, 천주교 신앙의 자유를 흥정하겠다는 계획을 세움... (119)

  • 오페르트는 자금을 담당할 미국인 젠킨스(상하이 미국총영사관의 통역관)를 끌어들였다.... 140명의 도굴단... 1868510(음력 418) 충남 덕산군 구만포에 상륙... 자신들을 러시아인이라고 말하면서 민가를 습격하고 난동을 부림... 도굴 실패... (120)

  • 대원군은 석수(石手)들을 동원하여 바위로 된 그곳을 열 자도 넘게 파고 관을 모신 뒤에 석회를 300포대나 퍼붓고 그걸로도 모자라 심지어 쇳물을 끓여서 붓기까지 했었다... (120)

 

배외감정의 격화

  • 오페르트는 실패하고 돌아가는 길에 인천 앞 영종도에서 프랑스 제독 알리망 명의로 된 협박장을 대원군에게 보냈다. 남연군의 시체와 부장품이 그들 손아귀에 있으니 교섭에 응하라는 내용... 협박문을 접한 영종첨사 신효철은 대응가치가 없다며 협박문을 되돌려 주었다. (121)

  • 그리피스(William Elliot Griffis, 1843-1928)는 이 사건을 시체강탈원정이라 불렀다... 외국인들 모두가 야만인이요 그들의 대부분은 절도나 강도에 지나지 않는다고 한국인들은 믿게 되었다... (121)

 

오페르트의 『금단의 나라 조선』

  • 1880금단의 나라 조선이라는 책을 출간... 신복룡... “동양의 인종에 대하여 누구보다도 해박한 인류학적 지식을 가지고 있었고 쇄국으로 인하여 세계 대세를 외면하는 한국의 지배자에 대해 짙은 연민을 가지고 있었으며 한국에 대해 서방에 알려진 바가 없던 1860년대에 이미 한국의 역사ㆍ언어ㆍ풍습ㆍ제도에 대해 깊은 이해를 가지고 있었던 오페르트는 어쩌면 굴절된 한국 근대사의 가장 억울한 희생양인지도 모른다... 그가 해미에 나타났을 때 많은 천주교 신자들이 박해로부터 구원해달라고 부탁했다... 언어가 소통되지 않는 상황에서 천주교도들은 땅바닥에 십자가를 그려보임으로써 자기들의 의사를 전달했고 오페르트는 진심으로 그들에게 먹을 것을 제공하고 함께 아픔을 위로하기도했다. 이런 상황에서 그로서는 대원군의 천주교도 탄압을 용서할 수도 없었고 묵과할 수도 없었기에 왕릉의 도굴이라는 극단적인 방법에 따를 수밖에 없었던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122)

  • 1994년 현지를 둘러본 안천은 그 풍경을 다음과 같이 묘사했다... “이제 이곳이 급속도로 공동묘지화되는 출발선에 서 있는 것이었다... 그곳을 둘러보는 나에게 더욱 씁쓸한 마음을 더해주는 것은 둘레에 비집고 들어온 염치없는 무덤의 비석에 쓰인 집안이 모두 대한제국 황실을 망국으로 이끈 척족 세도집안이었다는 사실이다.” (123)

  • 가문 중심의 탐욕과 경쟁이 국익으로 연결될 수 있는 구조하에선 한국은 세계에서 둘째 가라면 서러워할 정도로 막가안 저력을 갖춘 나라이지만 그렇지 못한 구조하에선 정반대의 결과를 초래한다. (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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