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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 자료실]/[도서 정리]

[한국 근대사 산책 1] 제3장 : 대원군의 척화투쟁 (06) 조선과 미국이 충돌한 신미양요

by [수호천사] 2021. 3.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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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준만, [한국 근대사 산책 1] 천주교 박해에서 갑신정변까지

 

[제3장] 대원군의 척화투쟁

06. 조선과 미국이 충돌한 신미양요

 

1871년 이필제의 봉기

  • 18688월 정덕기가 정감록을 이용하여 난을 일으키려다 체포되어 사형당했다. 18693월에는 전라도 광양현에서, 8월에는 경상도 고성현에서 민란이 발생했다. (124)

  • 1871310일에는 동학의 교조 최제우가 처형된 날을 기하여 이필제(1825-1871)가 제2대 교주 최시형과 함께 동학교도들을 이끌고 경상도 영해를 점거했다가 8월엔 문경에서 봉기했다. 이필제는 18711223일 체포되어 서울 서소문 밖에서 능지처참을 당했다. (124)

  • 이이화는 이필제는 죽음을 당하는 순간까지 당당하게 맞서 자신의 뜻을 진술했다그는 앞 시기의 홍경래, 뒤 시기의 전봉준과 같은 미완의 영웅이었다고 평가한다. (125)

  • 1871-18722년간은 천재지변으로 자녀를 쌀과 바꾸는 일이 빈번할 정도로 식량기근이 심했다. (125)

 

아시아에서 성조를 최초로 게양한 전투

  • 미국의 제너럴셔먼호 행방 수색... 1867123일 슈펠트(Robert W. Shufeldt, 1822-1895)가 이끄는 와추세트호가 제너럴셔먼호의 행방을 탐문조사하기 위하여 황해도 장연현 오차포 원래도 앞바다에 닻을 내렸다... 1868년에는 셰난도어호를 파견... 1869년 남북전쟁의 명장으로 야심만만한 그랜트(Ulysses Grant)가 대통령에 취임... (125)

  • 18715월 미국은 주청공사 로우(Frederich F. Low, 1828-1894)와 해군 제독 로저스(John Rogers II, 1812-1882)가 이끄는 아시아함대를 조선으로 파견했다. 콜로라도호 등 호위함 세 척에 1230명의 병력... 526일 작약도에 도착하여 주민들과 조선 정부의 문정관들을 접촉... (125)

  • 61... 강화해협을 침입, 탐사하다가 해협연안에 배치된 조선포대로부터 선제공격을 받은 손돌목 포격 사건이 일어남... 이에 미군은 보복조치로 610-12일 강화도 요새지에 대규모 상륙작전을 벌였다... 신미양요... (126)

  • 610(음력 423) 로저스가 내린 공격명령에 따라 450명의 미해군이 강화도의 초지진에 상륙한 뒤 덕진진까지 밀고 들어왔다... 611일 결사항전의 깃발을 올리고 있던 광성보 공략에 나서 2시간 동안 포탄을 퍼부었다. 조선군 지휘관 어재연(1823-1871)이 전사... 광성보 함락... 미국의 성조기가 내걸렸다... “이것은 미국이 남북전쟁 이래 처음으로 벌인 치열한 전투 끝에 점령한 아시아의 보루에서 미국 국기를 최초로 게양한 의미있는 전투였다고 회고... (126)

 

포와 총 대 칼과 창의 대결

  • 유병선... “미국과 조선이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무력충돌한 신미양요는 포와 총 대 칼과 창의 대결이었다” (126)

  • 슐레이 대령... “조선군은 용감했다. 그들은 항복 같은 건 아예 몰랐다. 무기를 잃은 자들은 돌과 흙을 집어던졌다.” .(126)

  • 조선군은 포로가 되는 걸 죽음보다 더 수치스럽게 여겼다. 미국 측 기록에 따르면 미군이 광성보를 점령하자 조선군 병사들은 강화해협에 투신해 죽음을 자청했고 부상을 당해 투신할 수 없는 병사들은 타고 있는 불 속으로 기어들어가 타 죽었으며 더러는 미군에게 손짓으로 자신을 죽여달라고 애원하기까지 했다. 미군 측이 부상 포로 서른 한 명을 데려가라고 통고했을 때 부평부사 이기조는 우리나라 사람이 이미 포로가 된 이상 죽이거나 살리거나 그 권한은 당신네들 손에 달렸느니 다시 묻지 않겠다며 인수를 거절했다. (126)

  • 김원모는 조선군은 대부분 솜 아홉 겹을 놓은 두꺼운 무명갑주를 입고 있어서 죽은 뒤 무명갑옷에 불이 붙어 시체 타는 악취가 광성보 안을 진동했다... 이들은 대개 옷에 불이 붙어서 몸이 뜨거워 엉겁결에 강물에 뛰어내렸고 이렇게 뛰어내린 시체로 바닷물을 핏빛으로 변했다. 그래서 광성보 전투에서 미군에 의해 희생된 조선군 전사자 수는 총 350명으로 공식집계되었다... 두꺼운 솜옷이 방탄에는 아무런 효능이 없었다. 이에 비해 미군의 사상자는 너무나 가벼웠다. 전사자 세 명, 중상자 다섯 명, 경상자 다섯 명뿐이었다.” (127-128)

  • 조선은 병인양요의 경험을 되살려 지구전으로 버티기로 했다... 광성보를 함락시키면 태도가 달라질 것이라 기대했던 미국은 더욱 강경해진 조선의 태도에 놀랐다. 전면전은 훈령 밖의 일인데다 그렇게 하기엔 병력도 부족했다. 결국 미국 함대는 작약도 정박지에서 3주일간 기다리다가 73일 철수했다. 조선은 큰 희생을 치렀음에도 불구하고 미국을 이긴 것으로 생각했다. (128)

  • 김원보... “한미전쟁은 미국 측의 압도적 전승으로 끝나버렸음에도 불구하고 이를 단순한 양요로 취급하는 이유는 바로 조선 측이 패배를 인정하지 않고 미군함대의 73일 철수가 곧 패퇴라는 고정관념을 버리지 못한 데서 비롯된 것이다” (128)

 

박규수의 예의지방 비판

  • 박규수... 척화의 명분 중 하나로 즐겨 내세운 예의지방(禮義之邦) 개념에 대해 비판적... 그는 미국 함대가 철수한 직후 친아우 박선수(1821-1899)에게 보낸 서신... “걸핏하면 예의지방을 일컫는데 이 말을 나는 본래 비루하게 생각한다. 천하만고 어디에 예의가 없는 나라가 있겠는가? 이것은 중국인들이 이적(夷狄) 중에 이러한 것이 있는 것을 가상히 여겨 예의지방이라 칭찬한 데 지나지 않는 것이니 본래 수치스러운 말이요 천하에 자랑할 것이 못된다. 조금 지벌(地閥)이 있는 자가 걸핏하면 양반 양반이라 하는데 이것은 가장 수치스러워해야 할 말이며 가장 무식한 소리다. 이제 걸핏하면 자칭 예의지방이라 하는데 이것은 예의가 어떤 물건인지도 모르는 자의 입에서 나오는 소리인 것이다.” (129)

  • 박규수의 개국론은 대원군이 하야하고 조선이 일본의 강요에 따라 조약체결 협상을 벌일 때부터 전개되었다. (129)

  • 김명호... “박규수는 미국과의 대화와 협상을 일절 배격하는 조선 조정의 강경 분위기에 대해 우려를 나타내거나 조선만이 예의지방은 아니다는 식으로 불만을 드러냈다... 하지만 이런 사실을 확대해석해 병인년 또는 신미년에 이미 박규수가 대미수교를 원하고 있었다고 주장하는 것은 근거가 박약한 근대 앞당기기로 비판될 여지가 있다... 당대의 조선인 중 가장 해외사정에 밝았던 개명적 인물인 박규수조차 암중모색을 하고 있었을 뿐 천하의 불가피한 대세로서 대외개방을 받아들이는 결정적인 일보를 내딛지는 못했다.” (130)

 

신미양요는 우발적 사건?

  • 신미양요 때에 미국 군함에 동승한 이탈리아 사진작가 펠리체 베아토는 한국에 온 최초의 외신기자... 미국 하퍼스 위클리는 미해군이 광성보에 성조기를 꽂는 베아토의 삽화를 게재하며 한국인들에게 외국인들에 대한 의무를 좀더 잘 이해시키기 위해...”라고 의미를 달았다. 뉴욕헤럴드미개인들과의 작고 사소한 싸움으로 보도했다. (130)

  • 신미양요는 우발적 사건... 로저스는 처음엔 무력을 행사할 뜻이 없었기 때문에 주민들과 술도 나누며 수화로 친교를 나누었고 주민들은 함께 술을 마신 후에 남은 맥주병을 신기하게 바라본 다음 소중하게 신문지에 싸가지고 돌아가는 등 우호적... 일행 중에 주청공사 로우가 로저스에게 조선을 정복하자고 꼬드겼고 미국 수병들이 배를 이끌고 광성진 포대 쪽으로 올라갈 때 포대에서 장탄하고 있던 사냥꾼들이 총을 발사했는데 공교롭게도 총알이 기함에 꽂혀있던 성조기의 깃대를 명중시켜 부러뜨렸다는 것... 이에 분노한 미국 수병들이 미국의 역사상 이토록 성조기가 모독을 당한 일이 없다고 외치며 포대를 향해 돌격... (131)

  • 김원모... “미국 장병은 5년 전 프랑스 함대가 패주한 곳에서 무력적 힘으로 조선을 압도할 수 있다고 자신하고 있었다. 사실상 아시아함대 내의 장병들이 품고 있었던 마음의 자세는 로우 공사의 평화적 의도와는 정반대였다며 로우에 대해 다른 평가를 내렸다. (131)

  • 피할 수도 있었던 무력충돌... 미군의 탐사에 대한 사전허락 여부가 쟁점... 조선군은 불법침입으로 간주했고 미군은 허락받았다고 주장했다. 김원모는 조미 양측은 다 같이 상대방의 문화적 전통과 관습을 너무나 몰랐다상호이해의 결여로 인해 무력적 충돌이 발생했다고 볼 수 있다고 말했다. (132)

 

어재연의 수자기(帥字旗)를 돌려다오

  • 2007425일 문화재청 관계자들은 미국 해군사관학교박물관을 방문, 신미양요 때 미군이 전리품으로 가져간 장수 깃발의 반환을 요청했다... “한국에서 보존과 전시를 잘할 수 있다면 장기대여가 가능하다는 입장도 미국 측에서 말했다”... 20071022어재연 장군기136년 만에 돌아와 환영식이 열렸다. (1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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