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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 자료실]/[도서 정리]

[한국 근대사 산책 1] 제4장 : 강요된 개항 근대의 시작 (1) 대원군 퇴진과 의자 뺏기 놀이

by [수호천사] 2021. 3.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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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준만, [한국 근대사 산책 1] 천주교 박해에서 갑신정변까지

 

제4장 : 강요된 개항 근대의 시작

(1) 대원군 퇴진과 의자 뺏기 놀이

 

최익현의 탄핵소

  • 1868(고종 5) 궁녀 영보당 이씨가 왕자(완화군 이선)을 낳음... 1880년 홍역으로 의문의 죽음... 민비는 1871년 어렵게 얻은 왕자를 출생 5일 만에 잃음(대원군의 산삼 때문에 죽었다는 속설로 민비와 대원군의 관계를 최악으로 몰고 감) (135)

  • 1873(고종 10)... 고종은 22살의 성년이 됨... 187310월 면암 최익현(1833~1906)은 대원군을 비난하는 탄핵소를 올림... 만동묘 철거로 임금과 신하의 윤리가 썩었고 서원 철폐로 스승과 제자의 의리가 끊어졌고 청나라 돈을 써서 중화와 오랑캐의 분열이 어지러워졌고 원납전은 백성과 나라에 재앙을 끼치는 도구가 되었다... (135-136)

  • 경기도 포천 출신의 최익현... 화서 이항로(1792~1868)의 제자... 만동묘 철거 반대... 이항로의 제자들은 화서학파를 형성해 위정척사론을 주도했는데 최익현ㆍ유인석의 경우처럼 과격한 행동파’ (136)

  • 주자학적 민족주의’... 화서학파의 소중화론은 송시열의 강렬한 존화양이ㆍ숭명벌청 정신에 근거를 둠... 명이 멸망된 이후 조선은 천하에서 유일하고도 당당한 소중화가 된 걸로 보았다... (137)

  • 이이화... “이양선 출몰과 서양세력의 침공을 겪으면서 군비를 마련하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재정확충을 도모한 부분에 대해서는 거의 언급을 하지 않았다. 누구보다도 척사의 선봉에 섰던 그(최익현)로서는 논리적으로 맞지 않는 지적을 하였다고 볼 수 있다. 흥선대원군이 펼친 개혁정책에 대해서는 한마디 언급도 없었으니 그의 논리는 설득력을 지니지 못한다.” (137)

 

최익현ㆍ이항로를 어떻게 볼 것인가?

  • 이이화는 최익현의 1873년 상소를 민씨 척족세력의 공작의 결과로 보았다. (137-138)

  • 이태진은 최익현은 소신대로 상소한 것... “왕비의 획책과는 무관하다고 주장했다. (138)

  • 정옥자... “최익현은 왕권의 전제화에 반대하는 조선 사대부의 기본적인 의식을 대변한 것... 이 상소로 인하여 대원군의 10년 세도가 무너졌다는 것은 최익현이 일반 지식인인 유림의 위기의식을 대변한 것이며 그들의 반발이 그만큼 치열하였다는 입증이다.” (138)

  • 이항로는 상인(常人)들이 가난과 착취에 시달리는 반면 소수의 양반계층이 풍족한 물질생활을 누리는 것은 부당하다고 본 인물이었다. 그는 토지는 경작자에게 주어져야 하며 어떤 종류의 염출도 민간생산의 10퍼센트를 넘어선 안 된다고 했다. (138-139)

  • 이항로... 민중의 대변자... 화서학파의 애민정신은 기존의 강력한 사회신분제를 전제로 한 것이었으며 이들은 사회신분제가 무너지면 세상이 끝나는 걸로 아는 사람들이었다. (139)

  • 유초하... “그가 가장 우려한 것은 국가의 존망이 아니라 도학의 존부(存否)였던 것이다.” (140)

  • 이항로의 천주교 탄압 의지... 유초하는 대외적 현실 특히 서양세력의 침투에 관한 이항로의 사고에서 우리는 주자학자다운 그의 융통성 없고 무조건적인 집착을 볼 수 있다... 역사의 지진아” (140)

 

호포법과 사색당쟁의 영향

  • 한홍구는 대원군의 하야엔 호포법이 큰 영향을 미쳤다고 보았다. “강력한 쇄국정책으로 보수적 양반의 지지를 받은 대원군이 실각한 결정적 요인은 민감한 호포법의 시행, 곧 양반들이 자신의 신분적 특권의 상징이라 여기는 군포를 부과시켰기 때문이다.” (141)

  • 강범석... “역사적으로 노론과 남인은 한반도에서 정치적으로 양대 산맥을 이루어왔다고 볼 수 있다... 1863년의 고종 등극과 함께 10년간 계속된 흥선대원군 이하응의 섭정은 역대 노론세력 간의 타협의 산물이었다. 대원군은 양반의 거점이기도 했던 서원의 정리, 세제개혁을 포함한 획기적인 구조개혁을 추진했으나 대원군 정권이 궁극적으로 의지해야 했던 세력관계는 노론세력이었으므로 제약을 받아야 했고 그로 인해서 퇴진해야 했다.” (142)

 

고종의 생각이 결정적 이유

  • 대원군 하야의 주동은 민승호(1830-1874), 민규호(1836-1878), 조령하(1845-1884) 등 민씨 척족세력이었다. 이들을 배후에서 도운 이는 대원군의 정적인 전 좌의정 이유원(1814-1888)이었는데 이유원은 고종의 친정(親政)과 동시에 영의정으로 발탁되었다. (143)

  • 민씨 척족은 대원군에게 불만을 품은 자들을 중용했으며 대원군의 맏아들 이재면과 친형 이최응까지 포섭했다.... 국외정세에 밝은 박규수를 우의정이 임명... (143)

  • 대원군 세력이 최익현을 향해 역공을 퍼부을 때 고종은 1873114일 밤 친정하교(親政下敎)를 내림으로써 오히려 대원군세력을 처벌하게 만들었으며 내내 최익현을 싸고돌았다. (143)

  • 제임스 버나드 팔레... “성년에 이른 국왕으로서 자신의 권위를 독립적으로 행사하려는 고종의 결정은 대원군의 은퇴를 초래한 가장 중요하고도 직접적인 요인이다.” (143-144)

 

한국의 권력 탐욕 문화

  • 18731210일 미비의 침전에 폭약을 설치해 경복궁에 대화재를 일으킨 세력의 배후인물로 대원군이 의심을 받았다.... 187411월 민승호 집의 폭약이 터져 민승호의 어머니와 아들이 폭사... 배후에 대원군이 있다는 의심... (144)

  • 서영희... “민씨 일족은... 안동 김씨 세도에 비하면 매우 취약한 세력이었다. 명성황후라는 구심점이 없으면 바로 붕괴될 수밖에 없는 운명에 처해 있었다... 명성황후 자신이 직접 권력에 나서 국정운영에 간여... 권력을 탐한 여인으로 부각시킨 원인...” (145)

  • 강상규... 대원군의 선친 남연군과 자신이 모두 여흥 민씨와 결혼하였음에도 불구하고 같은 가문인 민치록의 딸 민비를 간택하였다는 것은 스스로가 세도정치를 혁파하려 했으면서도 자신의 경우에 대해서는 객관적이지 못한 권력가로서의 한계를 드러내는 것으로 보인다...” (145)

 

공조판서 평균 재임기간 52일

  • 가문의 이익이 국익을 능가했던 조선... (146)

  • 1864년에서 1873년까지 이조판서에 임용된 사람은 48명으로 한 사람의 평균 재임기간은 76... 공조판서의 경우 82명이 임용돼 한 사람당 평균 재임기간은 52일에 불과... (146)

  • 판서 가운데 노른자위인 이조판서나 호조판서로 가는 디딤돌일 뿐 실속이 없었던 한성판윤 자리도 갑오개혁 이후 일제강점기까지 16년간 70명이 거쳐갔다. 평균 재임기간은 80일이었으며 갑오년 한 해엔 스물한 명의 판윤이 갈려 평균 재임기간 보름을 기록했다. (146)

  • 표영삼... 일종의 대금업자... 관직을 사려는 이에게 돈을 빌려준다. 그런 매판자는 부임하면서 고리대금업자가 딸려 보내는 사람에게 지방관청의 회계관을 맡기게 된다... 뇌물이 들어오는 대로 빌려준 돈을 먼저 거둔다... 수령의 임기는 3년이지만 1년도 못 채우고 바뀌는 예가 많다... 그래서 부임하자 매일 먼저 챙기는 것은 돌아갈 여비이다. 다음은 매관비용을 챙기기 시작한다. 그 다음은 자리보전을 위해 상납뇌물을 만든다. 고을의 백성을 위해 베풀 짬이 없다. 돈을 주고 산 자리라 본전을 빼고 그 위에 앞으로 살아갈 소득을 챙겨야 하기 때문이다... 아전에게는 봉급이 없다. 세미를 거둘 때 몇 말씩 얹어서 받는다...” (1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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