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준만, [한국 근대사 산책 1] 천주교 박해에서 갑신정변까지
제4장 : 강요된 개항 근대의 시작
(3) 조선을 강제 개항시킨 병자수호조약(강화도조약)
페리함대의 일본판(日本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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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76년 2월 4일 강화도 초지진 앞에 출현한 일본 군함... 일본 정부의 특명전권변리공사이자 육군 중장인 구로다 기요타카를 포함한 800여 명의 병력... 6개월 전에 발생한 ‘운양호 사건’을 빌미로 조선과 강제로 수교조약을 맺으러 온 것... (1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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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월 27일 구로다는 조선측 대표 판중추부사 신헌을 상대로 수교조약을 강제로 체결했다. 총 12조로 구성된 이 조약은 국제법적 토대 위에서 양국 간에 이뤄진 최초의 외교행위이자 최초의 불평등조약... (1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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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영배... “조선의 집권자나 조약에 나선 교섭대표들이 일본의 속셈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을 뿐 아니라 통상에 대한 기본적 인식이 없었던 반면, 일본은 조약체결 이전에 청국이나 러시아의 반응은 물론 조선 정계의 내분 상태까지 사전에 파악하고 협상을 이끌었다... 나중에 신헌은 조약을 맺고 나서 고종으로부터 수고했다는 격려와 함께 무위도통사라는 벼슬까지 제수받았고 1882년 미국과 조약할 때 통상교섭 대표자로 나섰으니 한심한 일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156-1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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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태진... “일본 외무성 기록에 의하면 조선 정부는 일본 측을 두려워하여 그들의 요구를 다 들어준 것이 아니라 반대로 일본 측이 준비해온 13개조 중 최혜국조관을 거부하고 나머지 12개조 중 9개조에 대한 수정을 요구해 관철시킨 것으로 되어 있다... 국왕이 조정회의를 통해 주도한 것... 고종의 능동성...” (157)
조선 사대부의 통상에 대한 경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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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관세” 조항... 1883년 7월에 수정될 때까지 7년간 지속... 무관세는 치외법권ㆍ일본화폐유통권 등과 더불어 개항 직후 일본세력의 조선 침투가 파괴적 결과를 낳게 한 주요 이유... (1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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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재언... “일본은 미국과 통상조약을 체결하기까지 애매하고 복잡한 교섭 과정을 4년이나 끌면서 자기 요구를 관철시키기 위해 끈질기게 버텼으나 조선은 실로 논의다운 논의도 전혀 없이 곧바로 조인하고 말았다... 조선은 일본상품에 대해 무관세... 개항지에서의 일본화폐유통권까지 인정... 사대부는 ‘덕치’에 대해 말해야 하고 주산을 놓는 것과 같은 비천한 통상은 ‘모리배’인 상인에게 맡기면 된다는 것...” (1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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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원호... “관세 자주권(무관세 무역)을 상실... 결국 자본재 공산품의 침투로 국내 산업을 보호할 수 없었을 뿐 아니라 후일 자주적 식산흥업 추진에도 장애가 돼 민족자본이 육성되지 못하는 결과를 낳고 말았다. 일본화폐를 조선에서 유통할 수 있게 됨에 따라 일본 은행이 조선에 진출, 일본 상인은 자본력 면에서 조선 상인을 압도할 수 있었고 양국 간 환시세를 조작해 수출품을 염가 매입하는 한편, 일본 은행에서 대부받은 자금을 조선 상인에게 대부하고 환차익까지 챙기는 등 횡포를 부렸다.” (158-1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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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화도조약... ‘병자수호조약’... ‘조일수호조규’... ‘조규’ 선례는 1871년 청일수호조규... 청의 이홍장은 ‘동문의 나라’라는 특별한 관계의 일본이기에 서양과 체결한 불평등조약과는 달리 대등한 조문임을 고려하여 ‘조약’ 아닌 ‘조규’를 선택했다... 중국은 서양과 일본 중 서양을 상대적으로 존중하는 일본 멸시관을 ‘조규’라는 단어에 저장시킨 것... 5년 뒤 조선과 불평등조약을 맺을 때 사용 원조인 중국의 ‘조규’을 역차용한 것이다. 조선과 청을 동시에 경멸하는 탈아입구(脫亞入歐) 외교의 전형을 만든 것이다. 동양은 ‘야만’이고 서양은 ‘문명’이라는 자본주의 선진국의 야만적 침탈성을 일본 정부는 채택한 것이다. (159)
최익현과 김인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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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익현의 도끼 상소... 1876년 2월 17일(음력 1월 23일)... 물자 교역... 일본은 서양 오랑캐에 편승하는 나라로, 청나라보다 더욱 위험한 존재라고 주장... 흑산도로 유배... 최익현의 상소는 대원군을 내모는 일을 했을 때에만 유효... (1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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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인승... 당시 구로다 일행 가운데 일본인 복장을 한 조선인... 일본이 고용한 2000명의 외국인 고문 중 한 명으로 일본에 조선 관련 정보를 제공... 친일파 연구가 임종국은 그를 ‘친일파 1호’로 꼽았다. (160-1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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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운현... “조선의 전통적 선비정신의 소유자 김인승... 당시 일본의 속셈을 헤아리지 못한 채 ‘일본과 조선은 상맹상통의 나라’로 보고 일본의 강화도조약 체결 추진에 협조를 아끼지 않았다... 도코에서 남긴 한 편지에서 ‘거리에서 듣기 불편한 말들이 들리고 길을 걸으면 조심스럽고 두려운 마음이 든다’고 적었다...” (161)
1876년은 근대의 시발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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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76년 부산 개항... 1897년 원산.. 1880년 인천 개항... 개항을 통해 새로운 서구 중심의 국제질서에 편입한 1876년을 근대의 시발점으로 보고 있다... (1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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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용하... “개항이 바로 근대사의 시작이라고 보는 것은 문제가 있다...” (1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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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동걸... “근대사의 시점을 1860년대... 1860년대 정치적으로 대원군의 개혁정치는 중세 보편주의와 관련시켰을 때 국가 특구성의 강조라고 평가... (1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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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창순... 서세동점... 1860년대... 외북적 충격에서 근대 민족의식, 저항 민족주의가 생겨났다고 보면 1860년대... (1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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