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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 자료실]/[도서 정리]

[한국근대사 산책 1] 제4장 : 강요된 개항 근대의 시작 (5) 1870년대의 생활문화

by [수호천사] 2021. 3.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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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준만, [한국근대사 산책 1] 천주교 박해에서 갑신정변까지

 

제4장 : 강요된 개항 근대의 시작

(5) 1870년대의 생활문화

 

천연두와 종두법 실시

  • 당시 가장 무서운 전염병은 두창ㆍ손님ㆍ마마ㆍ홍역 등 많은 이름으로 불리는 천연두... 천연두의 예방접종은 정조 때에 정약용에 의하여 처음으로 도입되었으나 서학 배척 분위기에 밀려 중단되고 말았다. 천연두는 당시 조선인 사망원인의 50퍼센트를 차지했다는 설이 있을 정도... (171-172)

  • 박영선은 제1차 수신사 김기수의 수행원으로 일본에 건너가 종두법을 배워 돌아온 후 이를 지석영에게 전수했다... 1875년생인 이승만은 여섯 살 때 천연두를 앓고 병발증(倂發症)으로 몇 달 동안 실명 상태에 빠졌다... 이승만의 부모는 아들을 일본인 의사에게 데려가 실명을 면할 수 있었다... 1876년생인 김구도 백범일지에서 나는 서너 살 때에 천연두를 앓았는데 어머님께서 보통 종기를 치료할 때와 같이 대나무 침으로 따고 고름을 파내어서 내 얼굴에 마마 자국이 많다고 했다. (172)

 

수십만 명의 생명을 앗아간 콜레라

  • 1660년에서 1864년 사이의 약 200년간 전염병으로 인해 인구가 10만 명 이상 죽은 경우는 모두 여섯 차례였으며 50만 명 이상(인구의 7~8퍼센트)이 한꺼번에 사망한 해도 있었다. 1807(순조 7) 인구는 7561463명이었는데 28년 뒤인 1835(헌종 1)에는 인구가 6615407명으로 거의 100만 명 정도가 준 것도 전염병 때문이었다. (172-173)

  • 콜레라... 1821년 최초 발병... 주로 중국을 통해 들어옴... 1821~1822년에는 13만 명, 1859~1860년에는 40만 명이 죽었다... 쥐 귀신이 사람의 몸 안에 들어갔기 때문에 콜레라가 발생하는 것으로 간주해 쥐의 천적인 고양이 그림을 집 앞에 붙여놓는 걸로 대응... 정부는 감염된 마을을 폐쇄하고 마을 전체를 불살라 버리는 게 고작이었다. (173-174)

  • 1880년대 중반 콜레라가 엄습해오자 평안감사는 이 괴질은 만주쪽에서 오는 것이니 그 길목에다 장승을 새워라. 띄엄띄엄 한길을 가로질러 개골창을 파서 오다가 빠져 죽게 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이에 선교사 마펫이 그것은 어리석은 짓입니다. 날것을 먹지 말고 설익은 참외도 먹지 말고 물은 반드시 끓여서 먹어야 합니다. 옷을 깨끗이 빨아 입고 집 안팎을 청결하게 해야 합니다라고 했지만 민중은 코웃음만 칠 뿐이었다고 한다. (174)

 

신재효의 판소리

  • 신재효(1812-1884)는 경복궁 중건 축하공연을 계기로 대원군 정권과 긴밀한 관계를 맺으며 판소리계에서 두각을 나타냈다... 1868년 경복궁 낙성 기념공연... <명당축원> <성조가> <방아타령>을 지어 여류광대 진채선으로 하여금 대원군 앞에서 부르게 했다. 그는 이 공로로 정3품 당상관에 상당하는 명예직을 하사받았다. (174)

  • 신재효는 1866년 병인양요 승리 축하하는 <괘씸한 서양 되놈>이라는 노래를 만들기도 했다. 이 노래는 괘씸하다 서양 되놈 / 무군무부 천주학을 네 나라나 할 것이지라고 질타하면서 남은 목숨 도생(逃生)하여 바삐바삐 도망간다며 프랑스군을 조롱했다. (174-175)

  • 신재효... 80여 명의 판소리꾼을 길러냈으며, 판소리의 기본인 열두 마당의 대본을 정리... 춘향가, 심청가, 배비장타령, 가루지기타령, 강릉매화전, 가짜신선타령, 흥부타령, 옹고집타령, 토끼타령, 무숙타령, 장끼타령, 적벽가... (175)

  • 신재효가 고창의 아전 출신이라는 사실에 근거해 신재효가 생동하는 민중성을 소거하는 대신 보수적인 성향을 강화시켰다는 주장도 있다. 동시에 1876년 대흉작 때 사재를 털어 구호활동을 했으며 대단한 부자였음에도 광대들의 교육에만 힘을 쏟았을 뿐 거만하지 않았다는 기록도 있다. (175)

  • 1876년 가객(歌客) 박효관이 제자인 안민영과 함께 엮은 시가집 가곡원류가 나왔다. 박효관도 대원군이 운애라는 호를 직접 지어줄 정도로 총애를 받았다. 안민영도 대원군이 불우한 시절에 대원군과 친교를 나누었던 바 대원군이 집권하자 그를 찬양하고 흠모하는 시조를 여러 편 지어 바쳤다. (175)

  • 가곡원류는 김천택의 청구영언, 김수장의 해동가요와 함께 조선시대 3대 시조집으로 꼽힌다. 김천택과 김수장은 중인출신으로 노래집을 펴내고 노래모임을 만들어 음악활동을 하면서 새로운 음악 환경을 조성하는 데 많은 역할을 했다. (175)

  • 백대웅... 1728년에 간행된 청구영언“18세기의 음악환경을 가늠하는 데 매우 중요한 단서가 되는데 그것은 새로운 노래를 즐기는 일부 중인들이 이제 모임을 가질 만큼 노래는 사회생활의 일부가 되었음을 의미하기 때문이다라고 평가했다. (175)

 

조선인은 착한 미개인?

  • 1874년에 출판된, 프랑스 선교사 샤를 달레(Charles C. Dallet)한국천주교회사는 한국인을 착한 미개인으로 묘사했다. (176)

  • “... 이들은 동물적 욕구밖에 모르며 야수의 본능으로 자신의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해 제일 먼저 만나는 대상에게 맹목적으로 달려든다. ... (한국인들은) 전반적으로 고집스럽고 까다로우며 화를 잘 내고 앙심이 깊은 성격이다. 이는 이들이 오랫동안 반()야만 상태에서 살아왔기 때문이다.” (176)

  • 왜곡된 한국 외로운 한국의 저자 이지은은 우리는 아직도 고요한 아침의 나라처럼 유럽인이 만들어낸 한국관을 그대로 반복ㆍ재생하고 있습니다. 이는 우리 스스로를 타자화하는 거예요. 그 같은 표현에는 유럽인의 지배욕과 이국성(異國性)에 대한 욕망이 반영돼 있어요라고 말했다. (176)

  • 이지은은 “‘한국관을 이루는 대표적인 구성요소가 황금의 나라’, ‘식인 악어가 사는 야만의 나라’, ‘미개한 사람등이었다. 상상되고 만들어지고 조작된 이 같은 이미지들이 한국성을 이루는 본질이 되어버렸다... 17세기 중반부터 한국관을 구성하는 요소들이 차곡차곡 쌓여서 나중에는 하나의 사실로, 누구도 벗어날 수 없는 선입견이 됐습니다. 그 속에서 조선은 1910년 망국의 길을 갈 수밖에 없게 된 것입니다라고 주장했다. “한국이 왜곡되고 국제적으로 고립된 이유 중의 하나는 국제 사회가 한국인은 미개한 인종이고 자치능력이 없다고 판단한 데서 연유한다는 것이다. (176-177)

 

양반의 백성 착취

  • 달레... “조선의 양반은 도처에서 지배자와 폭군처럼 행세한다...” (177)

  • 신복룡... 이런 착취의 배경으로 조선엔 봉록제의 기초가 되는 봉건적 장원경제의 경험을 가지고 있지 않다는 점에 주목했다... 따라서 관리의 생계비는 스스로의 수완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성호 이익(1681-1763)의 설명... (177-178)

  • 양반의 백성 착취가 한국인은 미개한 인종이고 자치능력이 없다는 대외 이미지보다 조선의 망국에 훨씬 더 중요한 이유였다고 봐야 하지 않을까? (1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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