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준만, 『한국 근대사 산책 1』 천주교 박해에서 갑신정변까지
[제2장] 농민항쟁의 폭발
02. 고종 즉위, 대원군 등장
세도정치가 만든 어린 임금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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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63년 12월 8일 철종 사망... 박영규는 철종의 사망 원인에 대해 “안동 김씨 일파의 전횡에 대해 마땅히 대항할 방법이 없자 자연히 국사를 등한히 하고 술과 궁녀들을 가까이 했다. 술과 여색에 빠지게 되자 본래 튼튼한 몸을 가지고 있던 철종은 급속도로 쇠약해”진 탓이라고 했다. (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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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종... 이하응의 둘째 아들 명복(1852-1919)이 열두살의 어린 나이에 왕으로 등극... 이하응은 안동 김씨의 횡포에 짓눌려 지낸다는 점에선 동병상련인 조대비(신정왕후)와 접촉했다. (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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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가몽』... 고종은 옥좌에 앉아 제일성으로 계동에 사는 군밤장수를 잡아다 죽이라고 말한다. “다른 이유는 없다. 내가 여러 번 군밤 하나를 달라고 하였으나 한 번도 주지 않았으니 이 어찌 인심이 그럴 수 있단 말인가. 이같이 이익만 알고 의리를 모르는 자는 죽어 마땅하며 그럼으로써 다른 사람의 불선한 마음을 막아주어야 하는 것이다. 어찌 내가 사사로운 감정을 가지고 그를 죽이려고 하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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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훌륭하도다! 왕의 말씀이시여, 훌륭하도다! 왕의 말씀이여, 다른 사람의 불선한 마음을 막는다는 교를 내리시니 과연 임금의 도량에 알맞습니다. 그러나 일개 하찮은 군밤장수를 효수하라는 것은 전하께서 처음 등극하신 자리에서 혹 국가의 화평한 기운에 미안한 일인 듯 생각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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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에 수렴청정을 하게 된 조대비(신정왕후)는 “대신이 말씀드린 것은 금석과 같은 말입니다. 그 효수하라는 명령은 거두어들이시는 것이 타당할 것 같으니 짐짓 그만두고 논하지 않는 것이 옳을 것 같습니다”라고 최종 판단을 내렸다고 한다. (75-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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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비... 여흥 민씨 민치록의 외동딸로 열여섯 살 되던 1866년에 입궐, 8년 만인 1874년에 순종을 낳고 고종의 아버지인 흥선대원군을 몰아내는 등 1895년 을미사변까지 20년간 정국을 주도하게 된다. (76)
비변사 개혁과 서원 철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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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원군은 집권 초기부터 과감한 개혁을 단행하여 조선 민중들로부터 폭넓은 지지를 얻기 시작했다. (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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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종 원년인 1864년 벽두에 대원군은 갑자유신을 선언함으로써 구악을 일소하겠다는 걸 분명히 했다. “모든 공직자가 오로지 사욕을 채우는 데 급급하고 맡은 바 직무를 저버리고 있다. 이대로 나가면 곧 나라가 망한다. 이제부터는 모든 관리들이 유신정신으로 소임을 다하라”고 했다. (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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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변사... 국방경비를 위해 설립된 비변사는 임진왜란 이후 기능이 확대되었으며 19세기에는 군사권과 재정 및 인사권까지 통괄하며 권력의 중심에 자리잡았다... 대원군은 1865년 봄 안동 김씨가 쥐고 있던 비변사 개혁을 통해 세도정치를 타파하고 왕권을 확고히 하고자 했다. (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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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65년 『대전회통』, 1866년 『육전조례』 등 법전을 편찬했으며 ‘사색평등’(四色平等)을 내세워 안동 김씨의 세도정치를 해체하기 시작했다. (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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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원 철폐는 국가재정 확충 및 왕권강화를 위한 것이기도 했다... 1741년 영조는 양반과 유생의 힘을 누르고 당쟁을 극복하기 위해 3000여 개의 서원을 철폐하고 서원의 무단 신설을 금했으나 결국 600여 개의 사원을 폐쇄할 수 없어 근본적 해결에는 이르지 못했다... 노론의 영수인 송시열을 기리기 위해 세운 화양동서원의 횡포... 화양동서원 옆에 있는 만동묘는 송시열의 유지에 따라 명나라 신종과 의종을 제사지내는 등 존명사대의 상징적 존재가 되어 그 위세가 당당했다... ‘임금 위에 만동묘지기가 있다’ (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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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원군은 1865년 만동묘의 철폐를 단행한 뒤 1868년 서원에도 남세의 의무를 지우고 1871년 679개소의 서원 중 47개소만 남겨놓고 모두 철폐시켰다... “유생들은 유학이 어떻고 교화가 어떻고 도학이 어떻다는 따위의 문장으로 엮은 상소문을 들고 떼를 지어 광화문으로 몰려와서 거적을 깔고 도끼를 옆에 놓고 엎드려 호곡하였다. 자기네 뜻이 관철되지 않으면 죽음도 불사하겠다는 각오였다... ‘민란’이 연달아 일어나도 예전 선비들처럼 의병에 나서지 않고 서원에 죽치고 앉하서 입씨름만 벌이던 자들이 이 일만큼은 그 누구보다 적극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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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원군은 “진실로 백성에게 해가 된다면 공자가 다시 살아서 와도 결단코 들어줄 수 없다. 하물며 서원에서 지난 훌륭한 유학자를 제사지내게 하였는데 도둑의 무리로 변하여 공자에게 거듭 죄를 지었으니 어찌 내버려 둘 수 있는가”라고 말하면서 강력하게 밀어붙였다. (79-80)
경복궁 중건의 명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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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복궁 중건은 왕권을 강화하고 국가적 위엄을 살리는 데엔 기여했지만 그 부작용이 컸다. (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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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65년 4월 영건도감(營建都監)을 설치해 중건에 착수했다. 자금 조달을 위해 일종의 의연금으로 원납전(자원하여 바치는 돈)을 모집했는데 돈을 낸 사람에겐 명예직이나마 벼슬을 내리는 특혜가 주어졌다. (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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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66년과 1867년에 일어난 두 차례의 큰 화재는 재정상의 어려움을 가중시켜 돈을 모으는 데 엄청난 무리를 범하게 만들었다. 원납전의 강제 배당... 원납전(怨納錢, 원망하여 내는 돈)이라는 말을 듣게 되었다. (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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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67년 1월 당시 유통되던 상평통보의 100배 가치를 가지는 당백전을 발행했으니 이 또한 인플레이션을 유발시켜 민생고만 더하게 만들었다... 구리와 쇠붙이 징발령... 절의 종 도둑이 설칠 정도... 위조 당백전... 시행 6개월만에 당백전 정책이 실패한 것이 명백해지자 대안책인 청전(淸錢)의 수입으로 방향을 바꾸었지만 이 또한 통화량을 증가시켜 당백전과 마찬가지로 인플레이션을 유발했다. (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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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67년 3월부터 서울 도성문을 출입하는 사람들에게 통행세를 징수... 경복궁은 1868년 7월 고종이 이어할 정도로 완성되었고 1872년에 최종 완공되었지만 통행세는 대원군이 물러난 뒤인 1874년 10월까지 계속돼 악명을 떨쳤다. (81)
사치 금지령과 호포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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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67년 4월 사치 금지령... 벼슬아치의 당상관은 표범가죽과 모직과 비단과 말안장의 장식을 일체 금지한다. 벼슬아치의 당하관은 명주옷을 일절 금하되 저고리만은 허용한다. 일반 서민을 비롯해 서울과 지방을 가릴 것 없이 서리와 하인과 상민ㆍ천민은 명주옷을 절대 금지한다... (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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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67년 7월 말썽 많던 환곡제를 사창제(社倉制)로 바꾸었다. 사창은 각 면의 인구가 많은 동리에 설치해 면민 중에서 근면성실하고 비교적 생활이 풍족한 사람을 사수(社首)로 택하여 관리하도록 했다. 근본적 해결책은 아니었으나 농민의 부담이 경감되는 효과를 냈다. (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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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70년 양반의 호구도 평민과 마찬가지로 군포세를 납부하도록 하는 호포법을 시행... 호포법은 국방력 강화를 위한 군역 관련 세금인데 17세기 말부터 거론되었으나 양반들의 저항으로 시행되지 못하던 것... (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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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양반들에겐 ‘국가’보다는 ‘가문’이 훨씬 더 중요했다. (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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