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준만, 『한국 근대사 산책 1』 천주교 박해에서 갑신정변까지
[제1장] 천주교 박해
03. 이양선의 출몰과 여항문화
아편전쟁과 태평천국의 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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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40년 중국의 아편전쟁... 청은 1842년 8월 굴욕적인 난징조약을 맺음으로 ‘잠자는 사자’가 아니라 ‘종이호랑이’임이 입증됐다. (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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숭문주의의 패배... 마루야마 마사오... “‘중화’라는 것은 근본적으로 예(禮)적인 문화질서라서 ‘문’(文)이 ‘무’(武)에 비해 우월하다는 관념이 바탕에 깔려 있습니다... ‘어차피 놈들은 오랑캐니까 완력은 강하게 마련이랴’라는 이유를 갖다 댈 수 있지요... 아편전쟁 때에도 ‘어차피 오랑캐니까 국토의 자투리쯤은 줘버려도 돼’하는 정서입니다. 국토가 넓은 탓도 있겠지요... 제일 옥신각신한 것이 ‘예’ 문제였고 어떤 의미에서는 토지의 할양보다도 더 중요한 문제였습니다.” (53-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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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이 조약을 맺으러 온 영국 사절에게 황제에 대한 예를 갖추라고 요구하면서 그걸 가장 중요하게 생각했다는 건 분명한 사실이다. 중국은 땅이라도 넓으니까 그럴 수 있다지만 조선은 땅도 넓지 않은 데다가 그걸 지킬만한 최소한의 무력조차 키우질 못한 탓에 이제 곧 중국보다 더 큰 치욕을 겪게 된다. (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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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은 쇄국의 빗장을 열어야 했으며 향나무를 실어내던 향기로운 섬 홍콩을 영국의 식민지로 넘겨줘야 했다. 난징조약은 홍콩 할양 외에도 청이 다섯 항구를 개방하는 동시에 영사재판권ㆍ최혜국대우ㆍ협정관세 등을 보장하는 불평등 조약이었다. 새로 개방된 상하이를 중심으로 아편 유입량이 증가해 1850년에는 5-7만 상자에 육박했다. (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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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44년 프랑스 황푸조약, 미국 왕사조약으로 중국 진출 기반을 만듬 (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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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48년 칼 마르크스(1818-1883)는 『공산당선언』 발표... 각국 정부는 내부갈등을 밖에서 해소하기 위해 약소국들을 희생으로 삼은 팽창주의 전략에 박차를 가하게 되었다. (54-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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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50년, 중국 태평천국의 난... 1865년 영불연합군에 의해 멸망... 2000만 명이 죽고 국토는 황폐해져 청조 멸망의 원인이 됨... (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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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평천국의 난... 김용옥, “그것은 조선반도 민중에게 있어선 그 반도가 소속되어 있는 대륙질서의 근원적인 붕괴를 의미하는 것이며 그것은 그들의 중화중심의 천지론적 세계관에 있어서 ‘땅의 꺼짐’을 의미하는 경천동지의 사건이었다.” (55)
1854년 일본의 개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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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는 1862년 베트남, 1863년 캄보디아를 집어삼켰다. 영국은 1858년 인도 전체를 식민지화... 미국은 1823년 이른바 “먼로 독트린” 이후 영토 확장을 도모하여 1840년대 캘리포니아 점령, 오리건 지역 병합, 1860년대의 알라스카와 하와이 등 진출로 태평양 세력의 기반을 구축하고 있었다. (55-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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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53년 7월 미국의 동인도함대 사령관 페리(Mattheu C. Perry, 1794-1858) 제독의 포함외교... “한 발의 포성은 200년의 긴 꿈에서 일본인을 깨어나게 했다” ... 1854년 250문의 대포로 무장한 열 척의 군함을 이끌고 일본을 다시 찾아왔다... 미일화친조약... 1858년엔 미일수호통상조약 체결... (56)
이양선은 충격과 공포의 대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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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양선(異樣船)은 ‘이상한 모습을 한 배’라는 뜻이다... 부호로 등 두 척의 프랑스 군함... 1787년(정도 11년) 5월 제주ㆍ울릉도 해역을 조사 측량... (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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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토 연안에 출현하여 최초로 조선 관원의 문정(問情)까지 받은 서양 선박은 1797년 9월 동래 용당포까지 온 영국 탐험선 프로비던스호였다... 동아시아 일대의 해도를 작성하다가 식량과 식수를 얻기 위해 온 것으로, 조선과 영국의 최초의 만남... (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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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16년 라이라(Lyra)호를 비롯한 세 척의 영국 군함이 측량을 위해 조선 서해안 일대로 왔다. 9월 8일 배질 홀(Basil Hall, 1788~1844) 함장 일행이 신안 앞바다의 한 섬에 내려 부녀자들이 모여 있는 골짜기로 가려 할 때 한 조선인이 홀을 팔을 꽉 잡아눌렀다. 다급해진 홀은 “페이션스 서(Patience Sir, 노형 참으시오)!”라고 외쳤다. 주민들은 한참 동안 “페이션스 서”라고 따라했다. 그날 홀은 어두워질 때까지 언덕 위에서 주민들에게 영어 단어를 가르쳐 줬는데 발음을 곧잘 흉내냈다. 한국인에게 ‘영어교육’이 이뤄졌다는 최초의 기록... (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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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32년 영국 동인도회사 소속의 로드 애매스트호가 황해도 장산곶과 충청도 고대도에 나타나 조선 정부에 통상을 요구하다가 돌아갔는데 통상요구로는 이것이 첫 번째 사건으로 기록되고 있다. (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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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45년 6월 24일부터 7월말까지 영국 군함 사마랑호가 제주도와 전라도 해안을 탐사하고 갔다. 그들은 7월 6일 여수 앞바다의 거문도에 도착하여 4일간 측량했는데, 이 섬을 자기들 멋대로 영국 해군성 차관의 이름을 따서 ‘해밀턴항’(Port Hamilton)이라고 명명했다. 영국은 이때의 측량과 그간 축적된 서양인들의 관찰을 종합하여 1849년 조선에 관한 가장 정확한 지도를 발간했다. 훗날(1885) 거문도 점령을 위한 사전 준비작업... (58-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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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46년 7월엔 세실 함장이 이끄는 프랑스 함대가 충청도 외연도에 나타나 1839년 기해박해 때 있었던 프랑스 신부 세 명의 처형에 항의하는 서한을 조선 정부에 전달하고 돌아갔다. (59)
시계와 피아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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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47년 여름 세실 서한의 회답을 요구하기 위해 온 프랑스 군함 두 척이 전라도 앞바다에서 암초에 걸려 만경과 부안의 경계인 신치도에 닿았다... 배에서 건져낸 물건을 거의 대포나 총이었는데 창고에 옮겨놓고 굳게 잠갔다. 창고 안에서 똑딱똑딱 소리가 새어나오는 바람에 공포에 사로잡혔다. ‘서양 귀신이 일부러 도깨비를 떨어뜨리고 갔다’고 생각한 동네 사람들은 용하다는 무당을 불러 굿을 했는데 우연의 일치로 시계 태엽이 다 풀어져 소리가 멈췄다. (59-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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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54년 러시아 군함 팔라다호... 조선 탐사... 러시아 문인 곤잘로프... 피아노 음악 연주... 조선인의 어리둥절한 표정... (60)
한양 중인계급의 여항문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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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항(閭巷)은 원래 사대부가 아닌 일반 백성이 사는 골목을 의미하는 말이었지만 대개 ‘일정한 지식을 소유한 서울의 저자 사람’을 지칭하는 경우가 많았다. 여항인은 시전상인층과 더불어 실무행정을 맡은 하급관리가 대부분으로 넓은 의미의 중인계층을 의미했다. 이들은 축적된 부를 기반으로 사대부와 같은 시간적 여유를 누리면서 이를 통해 여항문화를 형성해나간 것이다. (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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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폐경제가 한양의 모든 것을 지배하게 되자 남공철(1760-1840)은 이러한 사정을 “사람들이 살아가는 수단은 한양은 돈, 시골은 곡식이다”라고 표현했다. (60-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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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동환은 ‘여항문화’에 대해 “이들이 형성한 도시문화적 양상은 문화 예술적 욕구의 증대와 유흥문화의 발달로 대변된다. 여항인의 문화 예술적 욕구는 다양한 생활 취미를 추구하는 데서 잘 나타낸다”고 말했다. (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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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흥문화... 고동환은 “18세기 한양에는 술집과 기방이 번창하고 도박이 성행하였다. 술과 매음을 업종으로 하는 색주가나 음식점이 번창하였다”고 말했다. (61)
1860년 베이징 함락에 대한 낙관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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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로우호 전쟁(1856-1860)... 영국과 프랑스는 청국에게 텐진조약(1858)ㆍ베이징조약(1860)을 강요하여 개항장을 추가하고 공사관의 베이징 개설과 내지포교ㆍ통상권 등을 획득했다. 미국도 1860년 청국과 텐진조약을 체결하여 동등한 통상권리를 획득했다. (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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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황제가 열하(熱河, 러허)로 피난 간 사건... 동지사로 중국에 다녀온 신석우는 “양이(洋夷)가 조선에까지 쳐들어오지 않겠는가 하고 우려하는 이들이 있으나 저들은 교역이 목적이고 우리나라는 교역할 물건이 없으므로 우리나라에는 들어오지 않을 것”이라고 전망하고는 오히려 우려되는 건 국내의 일부 세력(천주교세력)이 저들을 불러들이지 않을까 하는 것이라고 보고했다. 문안가로 파견되었던 박규수(1807~1877)도 러허에 다녀와서 특별한 위기의식을 표명하지 않는 등 조선 정부는 중국 사태에 대한 위기감을 갖지 않았다. (62-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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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인성, “이같은 불감증은 베이징 조약 체결 후에 다소 안정을 회복한 중국을 보았기 때문일 수도 있고 국내의 정치적 혼란을 야기할 소지가 있는 대외문제를 과소평가하거나 축소해석하려는 관료들의 일반적 경향 때문일 수도 있다. 그러나 보다 중요한 이유는 현상유지의 심리가 ‘견문’을 무의미하게 만들거나 내용을 왜곡시켰다는 데 있다”... “한편 도쿠가와 일본의 정치가와 지식인들은 아편전쟁과 베이징 함락에 큰 충격을 받았다. 그들은 서세동점의 군사적 성격을 간파하였고 동아시아 국제 정치 현실에 주목했다. 특히 영국의 군사력과 일본 진출 가능성을 두려워했다. 그리고 영국에 대비해 해방(海方)의식을 다졌다.” (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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