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준만, 『한국 근대사 산책 1』 천주교 박해에서 갑신정변까지
[제2장] 농민항쟁의 폭발
01. 삼정문란으로 수탈당하는 백성
전정ㆍ군정ㆍ환정의 문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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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래 세도정치란 조광조(1482-1519)가 도학의 원리를 정치사상으로 심화시키면서 주창한 것으로, 사림파가 표방했던 통치원리였지만 이것이 변질되면서 전혀 다른 의미를 갖게 되었다. 사림 정치가 지향했던 본래의 ‘세도’(世道)와는 본질적으로 다른 ‘혈연 패거리 독재정치’가 발호했던바 표기도 ‘세도’(勢道)로 바뀌었다. (67-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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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정은 정부수입의 근간을 이루는 것으로, 토지세인 전정, 군역을 포로 받는 군정, 정뷰의 구휼미제도로 사실상 고리대가 돼버린 환정 또는 환곡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한홍구는 “이 가운데서 가장 무거운 부담이 군정이었다”고 말한다... 황구첨정... 백골징포... 족징ㆍ인징... (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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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곡... 대동법... 1608년(선조 41년)에 경기도 지방부터 시작되었다... 대동법은 조세제도 일원화 차원에서 꽤 합리적인 것이었는데 보릿고개라고 하는 계절적 빈곤 때문에 대동법은 백성들의 짐이 되기 시작했다. (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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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말에 이르러 환곡은 사실상 합법적인 수탈제도로 변질되었다. (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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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 실학자 정약용이 하늘 아래 환곡처럼 나쁜 것은 없다며 환곡은 비록 부자간이라도 시행할 수 없는 법이라고 개탄... 신복룡은 “환곡은 그 당시로서 달러 빚과 같은, 세계에서 가장 높은 악덕 이자놀이였지 결코 백성을 위한 것이 아니었다” ... “초야권... 소작농의 딸이 시집가기 전 순결을 지주에게 먼저 바쳐야 하는 악습” (70)
농민의 간도ㆍ연해주 이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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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곡의 폐해는 조선 후기 숱하게 발생한 민란의 주요 이유가 되었다. (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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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11년 홍경래의 난... 1863년(철종 13년) 2월에 일어난 진주민란... (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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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식적으로 국경을 넘는 행위는 참수형에 처해졌으나 가난과 학정과 수탈을 못 이겨 압록강과 두만강을 건너 간도(젠다오)와 연해주(옌하이저우)로 이주하는 농민들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간도와 연해주 이주는 1860년 무렵부터 시작되었다... 1869년을 전후로 한 함경도 지방의 대흉년으로 이주자가 크게 늘었다. 1869년 한 해동안 연해주로 이주한 함경도 가구수는 776가구에 이르렀다. (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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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60년... 러시아와 청국이 베이징조약을 체결, 광활한 우수리 지역이 러시아 영토로 편입되면서부터 조선과 러시아는 두만강 유역을 경계로 국경선을 맞대게 되었다. 당시 청의 속국으로 여겨졌던 조선은 협정대상에서 아예 배제되었으며, 토자비를 두만강 연안에 세울 때까지 조선은 이 같은 사실을 까많게 몰랐다. (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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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해주가 러시아 영토가 되면서 1872년 러시아 극동함대가 니콜라예프스크에서 블라디보스토크로 옮겨왔다. ‘블라디보스토크’의 블라디는 러시아어로 ‘정복하다’는 뜻이고 보스토크는 ‘동쪽’의 의미인바 블라디보스토크는 러시아가 동쪽으로 와서 정복한 도시인 셈이다. 이전 이 땅은 발해의 중요한 거점 지역이었고 이후로는 여진과 거란의 땅이었다. 조선시대에는 이 땅을 한자로 해삼위(海蔘威)라고 표기했는데 바닷가에 ‘해삼’이 많아서 해삼위라고 했다는 설이 있다. 블라디보스토크는 4-5개월간 결빙하기 때문에 부동항을 얻으려는 러시아의 남하정책은 이후에도 계속된다. (72)
민란상사(民亂常事)의 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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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62년 한해동안 37회 봉기... 농민봉기의 직접적인 이유... 환곡... 황현(1855-1910)이 말한 이른바 ‘민란상사’의 시대... (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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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란상사’가 백성들의 의식에 미친 영향... 고은은 “각지의 민란은 그것이 아무리 과감한 정의에 입각한 저항운동이었다 하더라도 한 번도 성공해본 일이 없고 반드시 패산된다고 마는 자기부정과 연결된다”고 주장했다. (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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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꺽정ㆍ홍경래 들도 결국은 왕조적 부패의 무력을 반증했을 뿐이다. 그들은 사회적인 실패자에 지나지 않았다. 이런 전통은 한말의 혼란 가운데서도 그대로 받아들여졌다... 민란은 그것이 삭막한 시골에 자극을 주는 반면 패배에 대한 경험을 가중시킨다.” (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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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중된 패배의 경험... 벼슬에 대한 집착... 가짜 양반을 양산하는 ‘과잉 순응’으로 나타났다. 당시 권력을 잡기 위해 과도기적 ‘과잉 순응’ 전략을 쓰고 있는 인물... 이하응 (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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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하응... 1820년(순조 20년)에 태어난 이하응의 아버지는 남연군 이구로 인조의 동생인 인평대군의 6대손이었는데 정조의 이복동생인 은신군의 후사로 입적된 인물이었다. 이하응은 남연군의 4남 1녀 중 넷째 아들로 24살 때인 1843년(헌종 9년) 흥선군에 봉해졌다. (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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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주민란(일명 임술민란) 직후의 경제는 특히 어려웠다. 흥선군도 양반집 구걸을 하러 다녀야 했다. 이조판서 홍종응의 집을 찾았을 땐 거절당하고 하인들이 발길로 협문의 판자를 차는 바람에 조각이 흥선군의 손을 내리쳐 피를 보기도 한다. (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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