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준만, [한국 근대사 산책 1] 천주교 박해에서 갑신정변까지
[제1장] 천주교 박해
01 : 동방의 조상숭배는 우상숭배다
장례문화와 천주교문화의 충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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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정부의 천주교 박해는 당파싸움으로 인해 증폭되었다. 이는 개화기가 결국 망국(亡國)으로 종결된 과정을 이해하는 데에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조선의 자폐적 시스템과 더불어 내부갈등이 나라의 진로를 결정하는 주요 변수였다는 사실을 폭로해 주기 때문이다.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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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혼상제(관례ㆍ혼례ㆍ상례ㆍ제레)는 대부분 조선시대에 형서오딘 것으로, 그 기준은 주희가 저술한 『주자가례』였다. 『주자가례』는 고려 말에 도입되었지만 16세기 들어 성리학적 소양을 강하게 지닌 사림(士林)을 중심으로 퍼지기 시작해 17세기 후반에 양반사회에 일반화되었으며 19세기에 사회 전체로 확산되었다. (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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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혼상제, 특히 장례문화와 천주교문화의 충돌... 1715년 교황 클레멘스 11세는 “동방의 조상숭배는 우상숭배다”라고 선언함으로써 사실상 그런 충돌의 문을 연 셈이었다. 이 선언은 1939년 교황 비호 12세가 동방의 조상숭배는 우상숭배가 아니라는 칙서를 발표할 때까지 계속되었다. (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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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복룡은 “여기에서 우리가 되돌아보아야 할 것은 1939년의 칙서가 조상숭배를 우상숭배가 아니라고 허락했다면 그 이전에 조상숭배 문제 때문에 배교했거나 순교한 그 수많은 사람들의 죽음의 의미는 어찌되는가 하는 문제이다... 왜 이 문제가 중요하냐 하면 당초에는 가톨릭에서 시작되었으나 이제는 개신교에서 오히려 더 완고하게 강요되는 조상 제례 배척의 문제가 이 나라의 신앙에 많은 혼란과 아픔을 안겨주고 있기 때문이다. 더구나 초대 교회의 목사들이 한국의 조상숭배를 하나의 문화로 이해했지 우상숭배로 몰고 가지는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지금의 한국 기독교는 이 문제로 너무 많은 대가를 치르고 있기 때문에 이 문제는 언제인가 풀어야 할 이 시대 기독교의 문제일 것이다.” (26-27)
1785년 천주교를 사교(邪敎)로 규정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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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주교는 18세기 후반 영조 말엽부터 종교화되기 시작했는데 실학자들의 일부가 신앙운동에 앞장섰다. 베이징에서 들어온 서학(西學, 천주학) 서적을 접한 소장파 학자 중 권철신ㆍ권일신ㆍ정약용ㆍ정약전ㆍ이가환ㆍ이벽ㆍ이승훈ㆍ이기양 등은 1777년 겨울 천주교 교리를 연구하기 위해 외딴 절간에 들어갔으며 혹시라도 관가에 발각될까 봐 1779년 겨울 경기도 양주 앵자산에 있는 주어사와 천진암을 오가면서 강학회(講學會)를 열고 천주교 신앙을 키워나갔다. (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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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벽의 ‘천주공경가’, 정약전의 ‘십계명가’... “어와 세상 벗님네야 이내 말씀 들어보소 / 집안에는 어른 잇고 나라에는 임금 있네 / 네 몸에는 영혼있고 하늘에는 천주있네”라고 노래했다(천주공경가). (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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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벽은 이승훈의 부친 이동욱이 부연사행 일행으로 베이징에 간다는 말을 듣고 이승훈(1756~1801)으로 하여금 부친을 따라 베이징에 다녀오도록 했던 바 1783년 12월 이승훈은 부친을 따라 베이징으로 떠났다.... 북천주당 그라몽(Jean Joseph de Grammont) 신부로부터 세례를 받고 베드로라는 세례명을 얻었다. (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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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이징에서 돌아온 이승훈은 1784년 최초로 조선 땅에 천주교회를 창설했다. (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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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의 천주교 열풍과 관련해 안정복(1712~1791)은 “계묘년(1783년)부터 갑진년(1784)에 이르기까지 젊은 층에서 재주 있는 자들이 천학(天學)의 설을 주창하니 마치 상제께서 친히 내려와서 그들을 사자(使者)로 임명해준 것 같았다”고 표현했다. (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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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85년 이벽(1754~1786)의 주재로 명례동(지금의 명동성당 자리)의 김범우 집에 모여 ‘설법 교회’를 열다가 모두 체포... 중인 김범우는 고문을 받고 밀양으로 귀양 가 죽음으로써 천주교 순교자 제1호가 되었다. (28-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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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벽의 아버지 이부만은 경주 이씨의 문중회의에 여러 차례 호출돼 족보에서 삭제하겠다는 위협을 받았다. 이부만이 아들을 설득하기 위해 대들보에 노끈을 걸어 목을 매달자 이벽은 “그럼 안 나가겠습니다”라고 한발 물러섰지만 15일간 식음을 전폐한 채 기도와 명상을 하다가 탈진해 죽었다. (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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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는 1785년 천주교를 사교(邪敎)로 규정하는 금령을 내렸다. 1786년 정월 박제가(1750~1806)는 정조에게 제출한 소회(所懷)에서 서양인 학자를 조선에 초빙해 젊은 학자가 그 학문을 배우도록 해야 한다는 담대한 제안을 했다... 이용후생(利用厚生)을 역설... (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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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주교는, 1787년 조정에서 한글로 번역된 천주교 서적의 폐해가 논의될 정도로 이미 널리 전파돼 있었다. (29)
1789년 프랑스혁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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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치호는 1895년 2월 18일자 일기에서 “그들(동학당)은 어디에서나 양반들에 대해 극도의 증오심을 나타내었다. 동학당들이 양반들을 다룸에 있어 보여준 잔인성은 (프랑스)혁명 당시 프랑스 귀족들이 겪었던 유혈적 폭력사태를 연상시킨다”고 썼다. (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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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길준은 『서유견문』에서 “근대 프랑스의 소란 대 고금(古今) 무비(無比)의 폭행을 마음대로 휘두른 무리들이 다 무식하고 방탕하고 어리석은 무뢰한들이라 좋은 정부 밑에 있었다 해도 그 생계를 유지하지 못했을 것이다”며 프랑스 혁명을 비판했다. 이에 대해 박노자는 “철저한 우민관(愚民觀)으로 무장했던 그가 동학의 무장운동을 진압한 일본군에게 감사의 뜻을 표했던 것은 강자(强者)에 대한 단순한 아부가 아니었다. 그야말로 그의 소신에 따른 행동이었던 것이다”라고 주장했다. (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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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신문』 1898년 7월 9일자 논설은 “백여년 전에 불란서에서 났던 민변이 대한에 날까 염려라 하니 …… 대단히 다른 것이 몇 가지라 첫째 법국(프랑스)은 본래 민회가 있던 나라이라 그런 고로 비록 압제가 심할 때에도 백성이 민권이 무엇인지 알았거니와 대한은 자고이래로 민권 이 자는 이름도 모르다가 겨우 근일에 와서야 말이나 듣고”라면서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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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국 민변 나기 여러 십 년에 유명한 학사들이 서책을 반포하여 연설과 신문으로 인민의 자유 권리와 정부의 직분 등사를 널리 교훈하야 백성들이 다만 자유 권리를 어찌 쓰는 것을 깨달은 사람이 많은 까닭에 압제 정부를 번복하고도 오히려 그다지 낭패 보지 아니하였거니와 대한에는 그러한 학사들의 교훈도 없었고 신문과 서책도 없어서 인민이 다만 자유가 무엇인지 알지도 못할 뿐 외라 자유권을 맡기더라도 쓸 줄을 몰라 어린아이에게 칼 준 것 같을 터이요. …… 법국 사람들은 나라를 사랑하여 사혐(私嫌)을 잊는 고로 평시에 서로 다투다가도 국가에 유사(有事)하면 모두 일심이 되야 민변 후에 능히 토지와 국권을 보전하였거니와 대한 사람들은 사사(私事) 싸움에는 용맹이 있다가도 나라 싸움에는 겁이 많으며 국가는 다 망하더라도 사사 애증(愛憎)으로 붕당만 일삼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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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논설에 대해 강만길은... “이 시기는 일부 젊은 층의 개혁운동가들에게서 국민혁명을 일으켜야 한다는 움직임이 있을 때였고 이 논설은 그것을 견제하기 위하여 씌어진 것이라 생각되지만 이 논설은 국민혁명이 시기상조라는 생각에서 나온 것이라기보다 오히려 철저한 국민주권의식이 없는 계몽주의사상만을 바탕으로 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가지게 한다”고 평가했다. (31-32)
1791년 진산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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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91년 여름에 일어난 ‘진산 사건’ 또는 ‘신해박해’는 장례 문제가 빌미가 되어 일어난 사건이었다(‘迫害박해’는 ‘사옥邪獄’ 또는 ‘敎難교난’으로 부르기도 한다). 전라도 진산(지금의 충남 금산) 고을의 양반교인이었던 윤지충(1759~1791)이 모친상을 당했을 때 신주(神主)를 불사르고 제사도 드리지 않고 천주교식으로 장례를 치른 것이 문제가 되었다. (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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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지충의 외사촌이자 같은 천주교인인 권상연이 윤지충을 옹호하고 나서면서 이 문제는 당쟁으로 비화되었다. (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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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서학 탄압에 압장서온 홍낙안은 좌의정 채제공에게 보낸 글에서 “저들 지충의 무리는 제사를 폐한 것도 부족하여... 그 죄는 살인한 것과 같다”고 주장했다. 그는 윤지충의 체포와 사형을 요구하고 나섰다. (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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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지충과 권상연은 무군무부(無君無父)의 난행(亂行)을 범한 죄목으로 사형이 선고돼 1791년 12월 8일(음력 11월 13일) 전주 풍남문 밖 형장에서 참수되었다. 이때에 윤지충의 피가 튀어 붙은, 전주성의 주춧돌로 삼아 1908년 전주에 세운 성당이 그 유명한 전동(殿洞)성당이다. 전동성당은 명동성당ㆍ대구성당과 더불어 한국에서 가장 오래된 성당 건축물로, 국가기념물로 지정되었다. (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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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산 사건은 양반 신자들이 대부분 동요하여 떨어져나가는 계기가 되었다. (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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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는 “서학→천주학→천주교로 이행되는 과정에서 신앙 실천의 용기가 없었던 많은 학자들이 이탈되었으며 더욱이 진산 사건으로 인해 천주교가 종교적 정치적 탄압의 대상이 되자 역시 많은 양반계층 교인들이 배교하였다”며 “그 공백을 중인계층이 메우게 되었는데 이로써 조선 천주교회의 주체세력의 변화도 불가피하였던 것이다”라고 평가했다. (33)
문체반정 논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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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조가 직접 나서 서학 금단책의 일환으로 주도한 사건... ‘반정’(反正)은 ‘바른 곳으로 되돌린다’는 뜻이다. 그는 당시 유행하던 신체문(新體文)이라는 문제가 명나라와 청나라에서 유행하던 패관소설(稗官小說)의 영향으로 순정성을 잃고 잡문체로 전락하고 있다고 인식했던 바 순수한 고문(古文)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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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조는 문체와 문풍을 타락시킨 주범으로 박지원(1737~1805)의 『열하일기』를 지목했다... “성균관의 시험 답안지에 조금이라도 패관잡기에 관련되는 답이 있으면 그 전편이 주옥같을지라도 하고(下考)로 처리하고 이어 그 사람의 이름을 확인해 과거를 보지 못하돌고 하여 조금도 용서가 없어야 할 것이다.” (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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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지원은 신체문도 먼 훗날에는 고문이 될 것이라는 등의 논지를 내세우고 고문과 시문의 차이를 들어 반박하면서도 반성의 뜻으로 정조에게 순정한 문체의 『과농소초(課農小抄)』를 써 올림으로써 자숙의 뜻을 표했다. (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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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사순은 문체반정은 “비단 문예운동뿐만 아니라 당시 남인에 대한 노론의 탄압을 견제하려는 정조 나름의 탕평책의 일환으로 전개되었다”고 말했다. (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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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미숙은 “문체는 한 시대가 지니는 사유체계 및 인식론의 표현방식이다. 그것은 단지 내용을 담는 그릇이나 매개가 아니라 내용을 ‘선규정하는’ 표상의 장치이다” ... “...문체는 지배적인 사유를 전복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넘어야 할 ‘문턱’이기도 하다” (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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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체의 그런 규제력에 공감할 수 있다면 조선의 천주교 박해도 정신분석학적으로 고찰할 가치가 있는 사건으로 볼 수 있지 않을까. 우리 인간은 그 어떤 새로운 형식적 틀에 강한 거부감을 느끼며 그 거부감은 곧장 공포ㆍ증오와 뒤섞여 히스테리컬한 반응으로 이어지기도 한다. (35-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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