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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 자료실]/[도서 정리]

[한국 근대사 산책 1] 제1장 : 천주교 박해 [02] 당파싸움으로 증폭된 신유ㆍ기해박해

by [수호천사] 2021. 3.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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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준만, 한국 근대사 산책 1천주교 박해에서 갑신정변까지

 

[제1장] 천주교 박해

02. 당파싸움으로 증폭된 신유ㆍ기해박해

 

주문모ㆍ강완숙의 활약

  • 179412월 중국인 신부 주문모가 조선 천주교인 지황(池璜) 등의 안내로 조선인 역부로 가장해 조선에 들어왔다... 배교장 한영익의 밀고로 체포령이 내려지자 강완숙(1760~1801)의 집 광을 은신처로 삼았다. (37)

  • 주문모는 강완숙에게 영세를 주고 조선 교회 최초의 여회장(女會長)으로 삼아 여인들의 전도를 맡게 했고 그녀는 자기 집을 거점으로 삼아 신앙공동체를 꾸려나갔다. (38)

  • 당시 경희궁에는 은언군의 부인 송() 씨와 그 며느리 신() 씨가 살고 있었다. 은언군은 강화도에 귀양 가 있었고 그 아들은 사형되었으므로 양반가에서 태어나 왕실로 시집온 이 여인들에게 현실은 절망뿐이었다. 강완숙은 주 신부를 모시고 가서 현실에서 절망한 이 여인들에게 영세를 주게 했고 두 왕실 여인을 정약종이 주재하던 교리연구단체 명도회에도 가입시켰다...” (38)

  • 은언군(1755~1801) 이인... 사도세자와 숙빈 임씨 사이에서 난 정조의 이복동생이다. 정조의 비 효의왕후 김씨가 후사를 낳지 못하자 홍국영은 은언군의 아들 상계군 이담에게 정조의 뒤를 잇게 하려다 상계군은 사형당하고 은언군은 강화도로 귀양 갔다. 노론 벽파의 계속된 사형 요구를 정조가 거부함으로써 목숨을 부지한 셈... (38)

  • 주문모 입국할 때 4000여 명이었던 신자 수는 5년 후인 1799년엔 1만 명에 달하게 되었다. (38)

 

신유박해와 오가작통법

  • 1801(순조 1) 신유박해... (39)

  • 정조의 부친인 사도세자의 죽음을 계기로 당쟁의 판도는 시파와 벽파로 나뉘었는데 사도세자를 동정하고 정조의 정치노선을 지지하는 사람들이 남인 시파였다. 벽파는 시류는 무시하고 당론에만 치우쳐 있다는 의미로, 시파는 시류에 영합한다는 의미로 붙여진 이름이었다. 이제 남인 시파를 두둔하던 정조가 죽자 외척세력인 노론이 다시 집권하여 세도정치를 하게 되었고 그 와중에 천주교를 탄압하는 피바람이 불게 된 것이다. (39)

  • 정조... 유교 즉 정학을 분명히 하면 그것은 저절로 없어지게 된다고 보는 교화주의 실시... 18012월 정순대비는 정조의 교화주의를 비판하면서 오가작통법을 실시하여 천주교를 발본색원하라고 지시... (39)

  • 오가작통보다 더 무서운 건 포졸들의 부정부패... 무고한 사람을 신도로 몰아세우는 일... 20냥만 포졸 손에 쥐어주면 탈옥도 쉽게 할 수 있었다... 사형된 유체를 팔아먹는 포졸도 있었다. (40)

  • 신유박해 때 이승훈ㆍ이가환ㆍ정약종ㆍ주문모ㆍ강완숙 등 300여 명이 처형되고 정약전ㆍ정약용 등 수많은 사람들이 유배를 당했다. 주문모는 1801419일 한강의 새남터에서 참형당함으로써 최초의 외국인 순교자가 됐다. 은언군과 부인 송씨ㆍ며느리 신씨는 모두 사사(賜死)당했다. (40)

 

동정녀 신드롬과 도모지 사형

  • 정해은... “동정녀들의 독신 고수는 사회윤리에 직접적으로 반기를 드는 패륜적인 행동으로 여겨졌다.” (41)

  • 정약종의 딸 정엘리자베스는 이성에 대한 욕망에 사로잡혀 동정을 파계할 위기를 느낄 때마다 벌거벗은 등짝에 피가 나도록 매질을 했다... (41)

  • 도모지’(塗貌紙)... 오늘날 아무리 해봐야……라는 뜻으로 쓰이는 도무지라는 말의 어원이 된 도모지는 몇 겹의 종이에 물을 묻혀 얼굴에 발라 숨이 막혀 죽도록 하는 사형 방법이었다... 천주교를 믿는 가족을 집 기둥에 묶어두고 이런 방식으로 죽였다는 사례가 많이 수집되고 있다. (42)

 

황사영 백서 사건

  • 주문모를 따라다니며 전도를 하던 양반 신도 황사영(1775~1801)은 베이징에 있는 프랑스인 주교에게 무력을 동원하여 조선에서의 신앙과 포교의 자유를 보장받아 달라는 서신을 보내려다 발각되었다... 18019월에 일어난 황사역 백서(帛書, 비단에 쓴 글) 사건... (42)

  • 13000여 자에 이른 장문의 서한... 청의 황제를 통하여 선교의 자유를 주도록 조선 국왕에게 압력을 가할 것, 청조가 친왕(親王)을 조선에 파견하고 조선 국왕을 청의 공주와 결혼시켜 조선을 청의 영토로 병합할 것, 서양에 요청하여 무력으로 위협해서라도 선교사를 받아들이도록 조선에 압력을 가할 것 등이 포함... (42)

  • 황사영... 16살에 진사시에 합격한 수재... 정약용의 큰 형인 정약현의 사위가 되면서부터 천주교에 경도돼 주문모로부터 세례를 받은 인물... (42)

  • 정약용은 신해박해 이후 천주교와의 관계를 청산했지만 최초의 세례를 받은 이승훈은 그의 매형, 최초의 천주교 교리 연구회장으로 순교한 정약종은 셋째 형, ‘진산 사건으로 순교한 윤지충은 외사촌 형이었다. (43)

  • 정약용은 75세의 나이로 죽을 때까지 500여 권의 저작을 남겼다. 1885~1886년에 고종은 여유당집을 진상하도록 명하고 정약용과 동시대에 살지 못한 것을 개탄했다는 말이 있다. (44)

  • 정약용의 둘째 형인 정약전은 전라도 흑산도로 유배를 가 16년에 걸친 고독한 생활 끝에 1816년 유배지에서 생을 마쳤는데, 흑산도의 어류생태를 조사, 분류한 자산어보(玆山漁譜)를 저술했다. (현산어보로 읽는 게 옳다는 주장도 있다)

 

신유박해(신유교난)가 식민지화 원인의 시작

  • 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 “정치적으로 볼 때 신유박해로 남인 시파는 전멸하여 재기불능의 상태에 이르렀다. 박해를 주도한 노론ㆍ남인 벽파로 보아서는 완벽한 승리였다” ... “... 천주교에 대한 사회 전반적인 배척의 분위기가 성숙된 것이 보수세력으로서는 큰 소득이었다. 천주교를 무군무부의 종교, ‘대역무도한 사학의 무리로 규정한 정부 측 입장은 황사역 백서와 같은 증거로 보장을 받게 된 셈이다.” (44-45)

  • 신유박해 와중에 박제가도 봉변을 당한다. 1801년 베이징 여행에서 돌아온 박제가는 신유박해의 주모자의 한 사람인 임시발이 무고하여 천주교와는 관계가 없는 이유로 체포돼 장형(杖刑)을 받고 조선반도 최북단인 경성 유배에 처해졌다. (박제가는 18053월에 석방되었지만 그 후의 소식은 자세히 알려져 있지 않다.) ... “... 박제가의 사상은 우리보다 장점이 있다면 오랑케라도 스승으로 받들어 배워야 한다고 한 박지원의 사상을 계승한 것이라 하겠다”(강재언). (45)

  • 강재언... “손자가 상대를 알고 자기를 알면 백전백성이라고 한 바와 같이 서양의 외압에 적절하게 대처하기 위해서는 서양을 연구해서 알아야 할 것이 아니겠는가. 조선의 자주적 근대화의 좌절, 그로 인한 식민지화의 원인이 1801년의 신유교난에서 시작된다고 나는 보고 있다.” (45)

 

부정부패와 1811년 홍경래의 난

  • 공명첩... 이름을 밝히지 않는 관직 임명장으로, 어떤 신분이거나 돈으로 살 수 있는 사람이면 다 구입할 수 있었다. 세도가문은 한 번에 수천 장씩 공명첩을 팔아먹었는데 1809년 전라도 1000, 충청도 700, 경기도 900, 수원에 200장을 팔았다는 기록이 있다. (46)

  • 이태진... 공명첩이 1530년대로부터 시작된 제도로, 자연재난으로 흉년이 들었을 때 곡식을 내는 사람들에게 그 대가로 준 것이라며 공명첩제도 운영에는 비리도 많았지만 이처럼 공익성을 지니고 시작된 점을 유의할 필요가 있다고 주장했다. (46)

  • 공명첩을 산 부친 이외의 조상들은 양반이 아니었기 때문에 공명첩을 산 양인의 자식들은 과거에 응시할 수 없었다. 공명첩은 양반에겐 면제였던 군포 납부의 의무에서만 벗어나게 해줬을 뿐이다. 오히려 문제는 공명첩보다 그런 실속 없는 공명첩이라도 필요했던 엄격한 신분제였다. (47)

  • 사조단자... 과거에 응시하는 거자들은 친가와 처가쪽의 증조부ㆍ조부ㆍ부친ㆍ외조부의 명단과 이력이 담긴 사조단자를 제출해야 했다... 부패관료들의 명단인 장오인녹안에 기록된 인물의 자손의 관직 진출을 막으려는 뜻도 있었지만 본질은 양반 사대부 가문이 관직을 독점하려는 의도였다... 실력보다 신분만을 중시했던 조선의 국력 약화는 필연이었다. (47)

  • 진짜 매관매직은 비공식적으로, 그것도 연고 중심으로 이루어졌기에 문제가 더욱심각했다. (47)

  • 조병갑도 자기 가문에선 예의 바르고 의리있는 인물로 통했을 것... 신복룡은 조병갑이 물욕에 눈이 뒤집힌 것은 자신의 개인적인 영화를 위해서도 필요한 것이었지만 그를 그곳에 심어준 문족(門族)들에게 상납하기 위해서도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고 했다. (47-48)

  • 1811(순조 11) 128, 평안도에서 일어난 홍경래의 난... 정주성에 들어가 18123월까지 싸우다 함락... 농민군 3000명 중 약 2000명이 처형되었다. (48)

 

개신교 선교사 귀츨라프의 충청도 방문

  • 서양의 1830년대는 신문 혁명의 시대이기도 했다. 신문의 대중화 단계... 노동자들까지 신문을 접할 수 있게 만들었다. (48-49)

  • 한국이 처음 외신에 등장한 것은 18245, 미국 오하이오주의 한 일간지에 실린 인어(人魚)’ 기사... 한국 연안에서 빗과 거울을 든 인어가 산 채로 잡혀 미국 버지니아주 리치먼드에서 전시되고 있다는 황당한 내용... (49)

  • 한국 땅을 밟은 최초의 개신교 선교사... 네덜란드 선교회 소속의 귀츨라프(Karl F. A. Gutzlaff)... 중국에서 활동하던 귀츨라프는 영국 동인도회사 소속의 상선 로드 애머스트호를 타고 1832(순조 32) 725일 충청도 홍주만 고대도 앞바다 금강 입구에 정박했다. (49)

  • 국왕에게 서한과 선물을 보내려고 한나절 넘게 짐을 꾸렸다. 린제이 선장은 내가 갖고 있는 성서 한 질과 전도문서 전부를 함께 쌓아 국왕에게 선물하라고 아주 정중하게 요청했다. 갑판 위에 찾아온 사람들에게 성서를 주어 기뻐하였고 이로써 나는 아주 만족하였는데 이제는 외로운 나라의 통치자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읽어 유익을 얻으리라고 갈망하게 된 것이다. 이 나라 통치자에게 많은 사람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보다 더 귀한 선물이 있을까?” (49)

  • 귀츨라프 일행의 서한은 통상 요청이었다. 89일 서울에서 통역관을 대동하고 내려온 특사는 귀츨라프 일행의 서한과 선물을 도로 돌려주면서 중국 황제의 허락이 없이는 외국과 통상할 수 없다고 말했다... 귀츨라프는 일본 류큐열도(현 일본 오키나와)로 떠나 그곳에서 정착해 선교활동을 했다. (50)

 

왕만 바뀌면 재개되는 천주교 박해

  • 1831년 로마 교황 그리고리우스 16세는 조선 신도들의 요청에 따라 조선교구를 독립시키고... 초대 교구장 브뤼기에르(B. Bruguiere) 임명... 조선에 부임하지는 않음... 파리외국전도회는 1836년 겨울에 신부 모방(1803-1839), 1837년 겨울에 신부 샤스탕(1803-1839), 1838년 겨울에 주교 앵베르(1796-1839)를 파견했다. (50)

  • 1834년 순조가 죽고 여덟살 헌종(재위 1834-1849)이 왕위에 오르고 궁정 내 연장자인 순원황후가 대왕대비로서 수렴청정... 헌종의 생모가 풍양 조씨였기 때문에 안동 김씨와 풍양 조씨 사이에 치열하던 싸움이 더욱 치열해졌고 그 와중에서 천주교 박멸이 다시 정치적 의제로 떠올랐다. (51)

  • 기해박해... 1839-18413년 동안 외국 선교사 3명을 포함해 순교자 70여 명, 고문으로 옥중에서 죽은 신자가 60여 명이 넘었다. (51)

  • 1836년 겨울 조선에 잠입한 모방은 조선인 신부 양성을 위해 김대건ㆍ최방제ㆍ최양업 등 세 명을 선발해 마카오에 유학을 보냈다. 김대건(1822-1846)1837년부터 5년간 마카오 포르투갈 신학교에 체류하면서 라틴어ㆍ프랑스어ㆍ영어 등 6개국 언어를 구사하는 천재성을 보이면서 18459월 조선 최초의 신부가 되었다. (51)

  • 김대건은 제3대 조선교회 주교로 임명된 페레올(1808-1858), 신부 다를뷔(1818-1866)와 함께 해로로 충청도에 잠입했다... 김대건은 지하활동을 벌이다가 황해도 연안을 답사하던 중 18465월에 체포돼 26의 나이로 20여 명의 신자와 함께 순교했다. 이를 병오박해라고도 하나 1839년 기해박의 연장으로 보는 것이 일반적인 추세... (51)

  • 기해ㆍ병오박해는 기존 안동 김씨 세도세력에 대한 풍양 조씨 세도세력의 도전이라는 정치적 상황 변화를 배경으로 하여 이루어진 천주교 박해 사건이었지만 1849년 헌종이 아들 없이 죽고 왕위 결정권이 다시 안동 김씨에게 넘어가 철종이 즉위함으로써 풍양 조씨 세력은 다시 몰락의 길을 걷게 되었다. (52)

  • 철종... 그는 신유박해 때 사사당한 은언군의 손자 덕완군이다. 강화도령이라 불렸던 그는 천주교를 둘러싼 이런 비극적인 가계 때문에라도 천주교에 비교적 관대했다. 천주교회는 유례없는 발전을 할 수 있었다. (52)

  • 페레올 주교가 1853년 병으로 죽자 베르뇌 신부가 4대 주교로 임명되어 1856년 황해도 장연을 통해 입국했다. 이후 10여 명의 프랑스 신부가 입국해 왕성한 선교활동을 폄으로써 기해ㆍ병오박해 직후 1만 명을 넘지 못했던 교인 수가 1865년에 이르러 23000여 명으로 증가했다. (52)

  • 그러나 베르뇌는 1846년 사목 서한을 통해 제삿상에 올랐던 음식을 먹는 것도 죄가 된다고 발표함으로써 천주교와 조선 문화와의 정면충돌을 예고했다. (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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