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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 자료실]/[논문 정리]

“토마스 뮌처의 영성과 사회변혁의 신학/윤리” – 정경호(1996)

by [수호천사] 2021. 2.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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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경호(1996). 토마스 뮌처의 영성과 사회변혁의 신학/윤리. 신학과 목회, 10, 84-122

 

 

  • 뮌처 : 급진주의 종교개혁자, 열광적인 신비주의자, 혁명의 투사 (84)

 

1. 뮌처의 다양한 얼굴들

 

  • 막스 쉬타인메츠 : 16세기 루터에서부터 공산주의자인 엥겔스에 이르기까지 뮌처에 대한 역사적 평가를 연구하면서, “뮌처에 대한 평가는 그때마다의 정치적, 신학적 흐름에 의해 영향받았음을 지적한 바 있다. (85)

  • 독일 종교개혁의 제 일인자인 루터는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컬으며 농민 봉기를 주도한 뮌처에 대하여 거짓 예언자로 단정하고 말았다. 종교개혁 실패에 대한 루터의 지나친 염려 때문 (86)

  • 가톨릭의 요한네스 코흐로이스는 루터야말로 농민 봉기의 장본인이라고 한다. 단지 뮌처는 루터가 닦아 놓은 길을 달렸을 뿐이라는 것이다. (87)

  • 루터는 뮌처보다 훨씬 더 해로운 사람이다. 왜냐하면 뮌처는 튀링겐에서만 폭동을 야기시켰지만 루터는 독일 전역에 폭동을 야기시켰기 때문이다”(요한네스 코흐로이스) - (87)

  • 고트프리드 아놀드는 <공평한 교회와 이단의 역사>에서 뮌처가 성령의 원리를 강조함으로써 종교개혁을 루터보다 더 발전시켰다고 조심스럽게 주장한다. (87)

  • 빌헤름 짐머멘, <위대한 농민 전쟁 개관사>에서 16세기 정치적 대립들이 독일 국민의 자유를 위한 투쟁의 일부로 제시되었다. 그는 뮌처에 대해 무제한적 긍정적인 평가를 내리면서 뮌처야말로 독일에 있어서 혁명적 전통의 대변자라고 강조하였다. (88)

  • 칼 마르크스와 프레드릭 엥겔스에게 가장 큰 관심을 불러 일으킨 종교개혁자는 단연 뮌처이다. 그들에게 있어서 중요한 것은 농민 봉기를 통한 사회 혁명의 전통을 재구성하는 일이었다. (88)

  • 온건한 교회사가 베인톤 : 종교개혁은 종교의 부활이었다. 종교개혁이 다른 영역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것이 사실이나 그것은 종교개혁의 부산물에 불과하다. (89)

  • 프란츠는 15-16세기 독일 농민 복지를 중심으로 연구한 바 있었으나 열악한 경제상황에 별다른 언급이 없었다. (89-90)

  • 브리콜 : 사회변혁을 향한 농민들의 봉기는 그것이 중세 남부 독일에서 사회ㆍ경제ㆍ정치적인 위기 속에서 발생하였다는 것을 특히 강조 (90)

 

2. 16세기 독일의 사회-경제-정치적인 상황

 

  • 14세기 이후의 위기의 시대에 영주들은 두 가지 방법을 통해 손해를 보상받으려 했다. 1) 소작인들의 자유 제한, 2) 농민들에게 강제로 부가세를 징수 (91)

  • 당시 사회-경제-정치적인 상황을 제쳐두고서 종교개혁을 이해한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닐 것이다. (91-92)

  • 농업제도와 길드 제도, 화폐경제로 상인들의 등장 (92)

  • 도시인들 (94-95)

  • 장인들 (95-96)

  • 기사들 (96)

  • 농민들 (96-97)

  • 토마스 뮌처는 구약성서에 나타난 이스라엘 왕국을 꿈꾸고 있으며 그리고 이 땅에서 평등하고 하나님의 의로운 사회 건설을 이룩해 나가고자 하는 종교가요 사회개혁가였다. (97)

  • 뮌처는 사회 개혁을 부르짖은 종교개혁자였으나 동시에 하나님의 깊은 신비의 세계를 경험한 신비주의자였다. 자신이 경험한 신비적인 신앙을 실천해 나간 실천적인 신비주의자였다. (98)

 

3. 사회변혁에 역점을 둔 성서 이해

 

  • 성서기자들은 어떤 성서 인용도 하지 않았으나 신앙으로 가득차 있었다. (98)

  • 하나님께서는 그가 과거에 하셨던 것처럼 지금도 인간과 더불어 말씀하신다. (99)

  • 참된 하나님의 살아있는 말씀은 보편적으로 역사하다고 한다. “설령 당신이 성서 그 자체를 그대로 받아들였다 하더라도 당신의 믿음이 없다면 그것은 아무 소용이 없다” (100)

  • 성서를 가지지 않거나 그것을 읽을 수 없었던 사람들이 있다는 사실은 활자로 기록된 성서를 통해서 믿게할 수 없을 것이라고 한다. 이는 곧 성서의 무능력성을 입증하여 준다고 보았다. (100)

  • 성서를 통하지 않고서도 얻을 수 있는 믿음의 다른 길을 제시 (100)

  • 뮌처는 1520년 대 독일 사회의 교회와 정치적 현실의 부패 때문에 루터의 성서 권위의 교리를 거부해왔다. 그 부패는 성직자들에 의한 성서 남용의 결과였다고 그는 생각했다. (100)

  • 뮌처는 발람 지혜의 가르침을 루터의 성서 이용에서 발견하고 있다. (101)

  • 루터는 도둑과 강도들에 대해서 마땅히 벌해야 한다는 것을 왕들과 영주들에게 이야기한다. 그러나 그 근본 원인은 오히려 그것을 조장하고 있는 왕과 왕자들 그리고 영주들인 것이다. 뮌처는 이러한 사회-경제-정치적인 현실 속에서 루터의 성서 이해에 결코 동의할 수 없었던 것이다. (101)

  • 뮌처는 성서의 잘못된 이용을 단순히 수정하기보다는 차라리 성서의 권위 대신에 성령의 권위를 대체하고자 한 것이다. 그러나 그는 결코 성서를 무용지물한 것으로 무시하지 않는다. (101)

  • 성령을 받지 않은 자는 비록 성서를 백권이나 삼켰을지라도 하나님께 대하여 깊이 있게 말할 줄 모른다” (103)

  • 뮌처의 성서 해석은 자신의 천년 왕국 사상과 매우 밀접한 연관이 있는데 당시로서는 매우 급진적인 종말 사상이었다. (103)

  • 루터는 로마서 131-2절을 위의 권세에 대한 복종의 의미로써 사용하고 있으나 뮌처는 오히려 133-4절을 더 중요하게 여기면서 급진적인 사회변혁 또는 사회 황거의 성서적 근거를 제공하기도 한다. 권위는 하나님을 거역하는 자에게는 두려운 것이며 불경스러운 것이어서 타락한 자들을 통치자들의 검으로 쓸어버리는 하나님의 도구인 것이다. 세상의 지배자가 의무를 게을리한다면 그 검을 빼앗아 갈 것이다. (104)

 

4. 영성과 해방

 

  • 해방신학의 영성 : 해방의 신학 자체가 진정한 영성에 바탕을 두고 있으며, 역사 속에서 하나님과의 진정한 만남을 통해서 이루어지는 것이라고 강조한다. 구티에레즈 이웃과의 관계를 무시하는 신앙은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을 수 없다. (106)

  • 중세 신비주의 : 1) 개인적이며 명상적인 신비주의, 2) 실천적인 신비주의 (107)

  • 뮌처가 가장 최대의 강조점을 두고 있는 것은 인간의 마음 속 한 복판에서 경험되어지는 하나님이었다. (107)

  • 뮌처에게 있어서 성령은 인간들의 고난을 통해서 경험되고 이해되어지는 하나님의 활동으로 이해되고 있다. (108)

  • 뮌처에게 있어서 십자가의 신비적인 신앙과 혁명적인 실천은 뗄레야 뗄 수 없는 관계였다. (113)

  • 해방의 영성이란 반드시 정의의 실현이 뒤따라야 하는 것이다. (114)

 

5. 사회변혁의 신학/윤리

 

  • 뮌처에게 있어서 농민 봉기는 구조악으로 가득찬 당시의 사회를 변하게 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라고 믿었다. (115)

  • 뮌처의 신비주의 신학 곧 뮌처의 영성 신학은 깊은 내면의 신비한 세계에서부터 사회-경제적으로 모순된 현실의 외면의 세계로 향하고 있다. 그의 영성은 명상적이며 개인적인 것이 아니라 당시의 사회-경제적 고통을 외면할 수 없는 도시 빈민과 농민들의 고통에 동참하는 실천적인 영성이었다. (116)

  • 뮌처는 신앙이 억압과 착취의 구조 속에서 적당하게 야합하거나 또는 세속주의의 가치관과 타협해 나가는 것은 허구적 신앙이라고 지적한다. (116)

  • 뮌처에게 있어서 그리스도를 본받는다는 것은 철두철미 그의 제자가 되는 것을 의미하였고, 제자됨은 신비적이고 혁명적인 해방의 행동인 것이다. (119)

  • 제자됨에 있어서, 하나님은 인간 속에서, 인간을 통하여, 인간과 더불어 행동하신다.” (119-120)

  • 뮌처는 정의를 행하는 일에 있어서 단순히 행위가 없는 믿음만을 요구하는 달콤한 꿀과 같은 그리스도를 전하는 루터를 공격한다. 이러한 값싼 은혜쓰디 쓴 그리스도와 십자가의 제자됨을 회피한다. (120)

  • 뮌처는 신앙의 신비적인 경험 속에서 더욱 하나님과 가까이 하려고 한 영성 신학자요, 당시의 허구적인 신앙에 대한 종교개혁자요 그리고 비인간적인 모순의 사회 속에서 하나님의 의로운 나라를 오늘 여기에서 세워 나가려고 한 사회 변혁의 신학자였다. (121)

 


 

** 누군가는 그들 편에 서 있어야 했다. 그가 토마스 뮌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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