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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 자료실]/[도서 정리]

곤잘레스, 『초대교회사』 제2부 제16장 : 분파주의적 반작용 : 도나투스주의

by [수호천사] 2021. 2.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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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도나투스주의 논쟁은 배교자 처리 문제로 교회가 분열된 또 하나의 사례였다. 박해가 끝난 후면 교회는 박해 때에 신앙을 저버렸으나 다시 기독교 공동체로 돌아오고자 하는 자들의 처리 문제에 직면했다. 3세기에 이 문제로 로마에서 노바티안 분파가 생겼고, 북아프리카에서는 카르타고 감독 키프리안이 배교자 처리 문제를 결정한 권한을 가지고 있다고 주장하는 고백자들에 대항하여 그의 감독으로서의 권위를 수호해야 했다. 4세기에 배교자들의 복원 문제에 관한 논쟁이 북아프리카에서 격렬하게 진행되었다. (256)

  • 고백자배반자” (256)

  • 카르타고의 감독 카이실리안 vs 마조리누스 도나투스 (257)

  • 도나투스파가 발생한 원인

  • 신학적 이유 : 분파의 직접적 원인은 박해 때 신앙을 버렸던 자들의 처리와 관련된 문제와 관련이 있었다. (258-260)

  • 도나투스파의 초기 지도자들 중 하나인 푸르푸리우스는 조카 둘을 살해한 자였다. (260)

  • 이 두 집단은 사회적ㆍ지리적 분계선을 따라 분리되었다. 카르타고와 인근 지역, 즉 총독령 아프리카에서는 카이실리안과 그의 지지자들이 득세했다. 서쪽의 누미디아와 모리타니아에서는 도나투스파가 우세했다. 누미디아와 모리타니아는 농경 지대였다... 누미디아와 모리타니아는 카르타고 및 인근 지역에 비해 덜 로마화 되어 있었다. 로마화 되지 않은 지역의 주민들은 조상 전래의 언어와 전통을 유지하고, 로마 및 이와 관련된 모든 것을 외부로부터 침입해온 세력으로 보았다. 반면 카르타고 시내에는 라틴화된 계층의 지주들과 대상들과 장교들이 존재했는데, 이들은 로마와의 교역 및 접촉을 통해 이익을 얻는 계층이었다. (260-261)

  • 콘스탄틴의 등장으로 상류층이 교회로 몰려들었다. 하류층 출신의 기독교인들은 새로운 사건의 전개를 교회가 부패해가는 과정으로 해석했다. (261)

  • 카이실리안은 로마화 된 카르타고 기독교 신자들의 지지를 받아 선출되었다. 반면 그의 선출은 총독령 아프리카의 하층 계급들과 누미디아의 거의 모든 신자들과 성직자들의 반대를 받았다. (262)

  • 초기 도나투스주의자들은 제국이 아니라 세상을 대적했다. 이들이 볼 때 제국이 행하는 많은 행동은 세속적이었다. 초기 도나투스주의자들은 콘스탄틴이 카이실리안을 지지하기로 한 결정이 실수였음을 납득시키려 했다. (262)

  • 340년 경 도나누스파에서 키르쿰켈리온이라 불리는 집단이 등장했다. 이 명칭의 기원은 확실치 않으나 순교자들의 유적지에 본부를 두었다는 데서 연유된 듯하다. 이들은 주로 폭력에 호소한 누미디아와 모리타니아 출신의 도나투스파 농부들로 구성되었다. (262-263)

  • 도나투스주의, 특히 극단적 분파인 키르쿰켈리온은 콘스탄틴의 회심에 의해 발생한 새로운 상황들에 대한 반응이었다. (263)

  • 어거스틴을 비롯한 여러 사람들이 교회에 대한 교리, 성례전의 정당성에 대한 견해, 정전론(Just War Theory)을 발전시킨 것은 부분적으로 도나투스파에 대한 반응이었다. (2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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