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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 역사를 위해 가장 중요한 것은 콘스탄틴의 신앙이 얼마나 진실했는가, 혹은 그가 기독교 신앙을 얼마나 잘 이해했는가 하는 문제가 아니고, 그의 회심과 통치가 그의 생애와 그 이후에 미친 영향이다. (193)
# 로마에서 콘스탄티노플로 [1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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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키니우스의 종교 정책 – 리키니우스 영토 내의 기독교는 여러 가지 문제로 분열되어 있었으며, 이러한 분열은 공공질서를 위협했다. 리키니우스가 질서를 유지하기 위해 친위대 병력을 동원하자, 자기들이 천대를 받았다고 생각한 일부 기독교 집단은 콘스탄틴을 진정한 신앙의 수호자요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황제”라고 생각하기 시작했다. (1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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콘스탄틴은 단지 권력을 누리기 위해 절대 권력을 추구한 것이 아니었다. 그는 이전의 데시우스나 디오클레티안처럼 옛 로마의 영광 회복을 꿈꾸었다. 차이점은 데시우스나 디오클레티안이 이교의 복구를 통해 목적을 이루려 했던 데 반해, 콘스탄틴은 기독교 토대 위에서 이를 성취하려 했다는 점이다. (199-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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콘스탄티노플로 옮겨진 조상들 중 가장 유명한 것은 역사상 가장 뛰어난 조각가들 중 하나로 일컬어지는 피디아스의 작품은 아폴로 상이었다. … 원래의 머리를 자르고 대신 콘스탄틴의 두상을 올려놓았다. (201-2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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콘스탄틴은 이곳으로 이주하는 주민들에게 납세와 국방의무 면제 등 각종 특권을 부여했다. 또 콘스탄티노플 시민에게는 기름과 식량과 포도주 등을 무상으로 배급했다. (202)
# 정복되지 않는 태양으로부터 예수 그리스도에게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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콘스탄틴의 회심은 다른 신자들의 회심과 달랐다. … 콘스탄틴은 자기의 신앙생활을 독자적으로 규정했으며, 또 스스로를 “감독들 중의 감독”이라고 생각했으므로 교회 생활에 간섭하기를 서슴지 않았다. 또 그는 회심한 후에도 기독교인이 참여해서는 안 되는 이교도 제전에 참석했는데, 감독 중에 이를 정죄한 이가 없었다. (2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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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를 선호하는 정책, 그리스도의 능력을 고백했음에도 불구하고 세례를 받지 않았으므로 기술적으로는 기독교인이 아니었다. (2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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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를 선호하는 정책이나 칙령들은 기독교에 우호적인 인물의 행동이었지 신앙적 결단을 내린 신자의 그것으로 교회에 의해 받아들여질 수는 없었다. (2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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콘스탄틴에게 있어서 기독교의 하나님은 그가 기독교인들을 옹호하고 지원하는 한 그를 도울 강력한 존재라고 할 수 있었다. 따라서 콘스탄틴이 기독교를 옹호하는 법률들을 만들고 교회들을 지을 때에도 그가 추구한 것은 기독교인들의 지원이 아니라 그들이 믿는 하나님의 도움이었다. (2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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콘스탄틴은 정치 생애 대부분을 통하여 정복되지 않는 태양과 기독교 하나님이 공존할 수 있는 존재라고 생각한 듯하다. 어쩌면 동일한 지존의 신을 서로 다른 각도에서 바라보는 것으로 여겼는지도 모른다. (2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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콘스탄티노플 건설 - “새 로마”를 만드는 행위 자체가 대부분 이교도들로 이루어진 옛 로마의 귀족 집안들의 세력을 약화시키려는 시도였다. 또 새 수도를 장식하기 위해 이교 신전들의 각종 조각들과 장식품들을 몰수해 왔으므로, 이는 이교를 보다 약화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207)
# 박해에서 지배로 [2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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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91년 테오도시우스는 이교도 제사를 불법으로 규정하고 신전들을 폐쇄하거나 공적인 용도로 사용할 것을 명했다. 392년에는 공적으로든지 사적으로든지 모든 이교 예배가 금지되었다. (2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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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교에 대한 폭력 (209)
# 콘스탄틴의 영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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콘스탄틴의 회심의 가장 직접적인 결과는 박해의 중단이다. (2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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콘스탄틴의 회심 이후 기독교 예배는 황실 의식의 영향을 받기 시작했다. (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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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인들과 신약 시대의 성유물들이 기적적인 능력을 가지고 있다고 믿어지기 시작 (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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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 많은 신자들이 교회로 밀려들어왔으므로 세례준비교육을 제대로 할 수 없었으며, 세례를 받은 후에 기독교인의 생활로 인도하는 것은 더욱 어려웠다. (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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콘스탄틴의 어머니 헬레나 - 베들레헴에 예수탄생교회 세웠고, 감람산에서 교회를 건축했다. (2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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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실리카’는 원래 중심부의 거대한 방이 둘 혹은 그 이상의 선들을 이루고 있는 기둥들에 의해 나뉘어진 공공건물이나 개인 건물을 가리키는 고어였다. 그러나 콘스탄틴의 회심 이후 교회 건물들이 대개 이러한 형태를 따랐으므로 이러한 교회당들은 그 후 “바실리카”라고 일컬어지게 되었다. (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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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실리카 내부는 대리석, 램프, 그리고 수놓은 융단 등으로 화려하게 장식되었다. 이 시기에 기독교 예술의 특징을 이루는 것은 모자이크 양식이었다. (2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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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 교회는 전통적 관습을 유지했다. 성찬의 예배의 중심으로 매주 행해졌다. 세례는 물속에 들어가는 형태를 취했고, 옛 상징적 의미를 대부분 유지했다. (218)
# 새 질서에 대한 반응들 [2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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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상황이 초래한 결과들 중 하나가 “어용신학”이라는 경향이다. - 가이사랴의 유세비우스 (2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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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이들은 극단적으로 반대 태도를 취했다. 이들은 황제가 스스로 기독교인임을 선언하고 그 때문에 많은 이들이 교회에 모여든 것이 축복이 아니라 커다란 손해라고 생각했다. 사막으로 은거하여 묵상과 금욕의 생활을 했다. … 이제 순교할 기회가 없었으므로 수도생활을 통해 단련되어야 한다. (2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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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위일체 교리에 관한 논쟁을 불러 일으킨 아리우스 주의 (2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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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제 줄리안 (2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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