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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셉티미우스 세베루스 시대의 박해 [148]
- 셉티미우스 세베루스 황제는 제국 내의 종교적 통일성을 유지할 필요를 느껴 혼합절충정책을 수행하기로 했다. 그는 국민들에게 솔 인빅투스, 즉 정복되지 않는 태양을 예배하도록 명령했다. 이 태양이 지존의 신임을 인정하면 모든 다른 신들을 허용할 생각이었다. (148)
- 셉티미우스 세베루스의 칙령이 발해진 서기 202년은 기독교 박해의 역사에서 중요한 전환점을 이룬다. (148)
- 『퍼페투아와 펠리시타스의 순교』 (149)
- 펠리시타스 - “현재 나의 고통은 나의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내가 야수들을 대면할 때 또 다른 이가 내 안에 사실 것이다. 내가 그를 위해 고난을 당할 것이므로 그분이 내 대신 고통을 받으실 것이다.” (150)
- 사투르니누스, 레보카투스, 세쿤두루스의 순교 (150)
- 알렉산더 세베루스는 자신의 개인 제단에 다른 신들과 함께 그리스도와 아브라함의 성상들도 함께 모셨다고 한다. 그의 모친 줄리아 맘메아는 오리겐의 강의를 들으러 알렉산드리아까지 갔다. (151)
- 근거없는 전설에 의하면 244-249년까지 재위한 아라비아인 필립은 기독교 신자였다. (151)
# 데시우스 시대의 박해 [151]
- 149년 데시우스가 황제가 되었다. 기독교 역사가들은 데시우스를 잔인한 사람으로 묘사해왔으나, 그는 로마의 옛 영광을 회복하려한 전통적 로마인에 불과했다. (152)
- 기독교로 말미암아 쇠약해진 조상 전래의 종교를 회복하기 위한 종교 정책의 쇄신 : 데시우스의 박해는 이전의 것들과는 매우 다른 양상을 지녔다. 황제의 목적은 순교자들이 아닌 배교자들을 만들어내는 것이었다. (153)
- 당시 기독교인들은 새로운 도전에 대처할 준비가 되어 있지 못했다. 끊임없이 박해의 위협에 시달리던 시대는 지나갔고, 새 세대들은 순교의 준비가 되어 있지 못했다. (154)
- 데시우스 박해의 결과 교회 내에 “고백자”라는 새로운 칭호가 생겼다. (154)
# 배교자들에 관한 문제 : 키프리안과 노바티안 [155]
- 배교자의 문제를 ‘고백자들’에게 처리할 권위가 있다고 생각 (155)
- 원래의 교회 조직만 통일성 있고 정당한 방법으로 이러한 조처를 위할 수 있다는 감독들의 불만 – 키프리안과 노바티안의 논쟁 (156)
- 터툴리안의 제자 키프리안 (156)
- 키프리안이 배교자들에게 교회의 교제에 다시 참여할 수 있는 길을 열어 주기 위해 노력한 것은 그의 교회관 때문이었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며, 그 머리의 승리에 함께 참여할 것이다. 그러므로 “교회 밖에는 구원이 없으며”, “교회를 어머니로 가지지 않은 자는 하나님을 아버지로 가질 수 없다.” - 교회의 통일성이 가장 중요하다고 확신함 (157)
- 터툴리안이 숭배자로 배교자들의 복귀를 엄격하게 적용함 (157)
- 노바티안은 키프리안보다 더 엄격했다. 당시 로마 감독 코넬리우스와 정면 충돌 (158)
- 히폴리투스와 칼릭스투스 감독 사이의 갈등 – 간음죄를 범한 자가 회개했을 때에 칼릭스투스는 다시 교회에 받아들이려 했으나 히폴리투스는 반대 – 로마에 두 명의 감독이 존재 (158)
- 교회를 사랑의 공동체로 유지하면서 순수성을 유지하는 방법과 관련된 논쟁을 벌임, 배교자들의 복귀는 일찍부터 서방교회의 주된 관심사였다. - 고해제도 발전, 프로테스탄트 종교개혁은 어떤 면에서 볼 때 이러한 제도에 대한 반항이었다. (1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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