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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 자료실]/[도서 정리]

곤잘레스, 『초대교회사』 제8장 : 신앙의 결정

by [수호천사] 2021. 2.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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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다양성 (103)

 

# 영지주의 (104)

 

  • 1945년 이집트의 낙 함마디에서 영지주의 저술들이 발견 - 도마 복음, 그리고 보다 후기의 영지주의자 지도자인 발렌티누스의 진리의 복음이 포함되어 있었다. 이단 연구자들은 발렌티누스의 가르침들을 묘사하고 어느 정도 왜곡했다. (105)
  • 영지주의라는 명칭은 지식을 의미하는 헬라어에서 파생된 것이다. 영지주의자들의 주장에 의하면 그들은 특별하고도 신비로운 지식을 소유하고 있었는데, 그것은 진정한 이해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을 위하여 구별된 것이었다. 이 지식은 구원에 이르는 비밀의 열쇠였다. (105)
  • 영지주의자들의 최종 목표는 몸 및 우리가 유배되어 있는 곳인 물질세계에서 탈출하는 것이다. 이 해방을 위해 메신저가 필요하고, 기독교적 영지주의에서 이 메신저는 그리스도였다. (106-107)
  • 영지주의자 - 극단적 금욕주의자와 방종주의자 (109)
  • 영지주의 집단에서 여성들은 일반적으로 사회에서 누리지 못하는 탁월한 지위를 누렸다. 정통 기독교가 교회에 내에서의 여성을 역할을 제한하기 시작한 것은 부분적으로 영지주의의 특징에 대한 반응이었을 수 있다. (109)
  • 기독교의 창조, 성육신, 부활 등 그리스도교 핵심교리들이 부인되는 것을 발견 (110)

 

# 마르시온 (110)

 

  • 마르시온은 눈에 보이는 세계가 악한 것이라고 확신했으므로 그 창조주가 악하거나 무지하다고 결론지었다. (110)
  • 마르시온이 제시한 여호와는 인류 중 특별한 민족만 선택한 독선적인 신이요, 자기에게 불순종하는 자들을 기억하고 반드시 복수하는 모진 신이었다. 따라서 히브리 경전들을 부인했다. (111)
  • 마르시온은 영지주의자들보다 더 큰 위험을 교회에 가져왔다. 왜냐하면 그는 영지주의자들처럼 창조, 성육신, 그리고 부활의 교리 등을 부인하거나 극단적으로 재해석했을 뿐만 아니라 한 걸음 더 나아가 독자적인 감독들과 성경을 갖춘 교회를 조직했기 때문이다. (112)

 

# 교회의 반응 : 정경, 신경, 사도전승

 

  • 마르시온의 목록은 소위 신약성경을 집대성하려 한 최초의 노력이었다. (112)
  • 일부 영지주의자들과 마르시온 추종자들을 제외하고는 대부분이 히브리 경전을 기독교 정경에 포함시키는 데 동의했다. 구약성경은 기독교의 도래를 준비하신 하나님의 경륜에 대한 증거로서 중요했으며,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계시된 하나님의 성품을 이해하는 데 필수적이었기 때문이다. (113)
  • 하나 이상의 복음서 : 마르시온과 영지주의의 도전에 대한 직접적 반응이었다. 교회들은 일반적으로 자기들의 교리가 단지 한 사람의 사도나 복음서에 의해 제안된 증언에 기초한 것이 아니라 전체 사도들의 전통이 합의한 바에 기초하고 있음을 주장하고자 했다. (113-114)
  • 요한계시록에 대한 반대 (115)
  • 4세기 후반에는 신약 정경에 어떤 책들이 포함되고 어떤 책들이 제외되어야 하는지에 대해 완전한 합의가 이루어졌다. 이 과정에서 주도적 관심사는 추상적인 의미에서의 신학이 아니라 예배 생활이었다. 이는 주된 질문은 교회가 예배를 위해 모일 때에 이 책을 읽어야 하는가?”였기 때문이다. (115-116)
  • 이단에 대한 교회의 반응들 중 하나는 특히 세례 때에 다양한 신조들을 사용한 것이다. (116)
  • 사도신경이라 불리는 것의 초기의 간략한 형태 사도신경의 골격은 150년경 로마에서 이루어진 듯하다. 이 신경을 고백할 수 있는 신자는 영지주의자나 마르시온주의자일 수 없었다. 세례 때 사용된 삼위일체 공식을 중심으로 작성 (116-117)
  • 전능자”(117), 신경이 자세히 다루는 부분은 성자에 관한 대목이다(118). “거룩한 교회”(118), “몸의 부활”(119)
  • “R”은 사도신경, 가이사랴의 세례 신조, 혹은 동일한 가정의 다른 신조의 기초였으며, 4세기에 작성되어 가장 널리 받아들여지고 있는 고대 신경인 니케아 신경의 기초였다. (119)
  • 사도 전승의 개념이 중요해졌다. 사도전승 이론을 쉽게 이야기한다면, 만일 예수께서 그의 제자들에게 전달해야 할 비밀의 지식들을 가지고 계셨다면 이러한 가르침을 그가 교회를 맡긴 사도들에게 전달하셨을 것이라는 주장이다. (120)
  • 2세기에 처음 발전될 때에는 사도전승 이론의 원칙이 배타적이라기보다는 포괄적이었다. 즉 폐쇄적인 비밀의 전통을 주장하는 영지주의 교사들에 대항하여 이 이론은 예수님의 비밀 제자 한 사람이 아니라 모든 사도들의 증언에 기반을 두는 개방적이고 통합적인 전통을 제공했기 때문이다. (121)

 

# 옛 가톨릭교회 (122)

 

  • 전체에 의한”, 즉 모든 사도들의 전체적인 증언에 의한 교회. “가톨릭교회, 전체에 의한교회만 사도적 증언 전체에 대한 권리를 주장할 수 있었다. 이것은 교회의 정통성의 보증이었고, “가톨릭이라는 단어가 정통적인이나 바른 가르침과 동의어가 된 이유였다. (122)

 


 

초대교회는 로마제국의 박해를 견디어내면서 안으로는 영지주의와 같은 이단적인 사상과 투쟁해야 했다. 영지주의와 싸우는 과정에서 기독교는 정통 신앙이 무엇인지 대답해야 할 필요를 느꼈으며, 신앙의 규범이 되는 정경의 결정에 대해서 합의를 도출해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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