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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 자료실]/[도서 정리]

곤잘레스, 『초대교회사』 제2부 제17장 : 아리우스 논쟁과 니케아 공의회

by [수호천사] 2021. 2.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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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바울 시대의 가장 중요한 문제는 유대인과 이방인 개종자들의 관계였다. (265)

  • 키프리안이 카르타고의 감독으로 있던 3세기 논쟁의 초점은 배교자들의 복원 문제였다. (265)

  • 콘스탄틴의 회심 이후 신학적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국가 권위를 동원할 수 있게 되었다. 제국은 콘스탄틴이 제국을 결속시키는 기반으로 작용하기를 바랐던 교회의 통일에 큰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265-266)

  • 많은 인사들이 자신의 적들이나 교회를 설득하고 납득시키기보다는 황제를 설득하려 했다. 결국 신학적 논쟁들이 정치적 음모의 침해를 받기 시작했다. (266)

  • 아리우스 논쟁 : 정치적 술수로 점철된 신학적 논쟁 자체가 아니라 이처럼 험난한 상황에서도 교회가 기독교 메시지의 핵심을 위협한 이론들을 배척할 수 있는 힘과 슬기를 유지했다는 데 있다. [* 집단적 지성이 힘을 발휘했을까?] (266)

 

# 논쟁의 발단

  • 아리우스 논쟁은 실제로 저스틴,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트, 오리겐 등 여러 학자들의 사역을 인하여 기독교인들이 하나님의 본질을 생각하게 된 방식의 직접적 결과였다. (267)

  • 유식한 기독교인들은 많은 이들에 의해 지혜자로 존경받는 고전적 철학자들의 권위에 호소했다... 철학자들이 소개한 지존의 존재가 하나님이다! ... 이것은 위험한 이론이었다. 자기들의 신앙과 고전적 철학자들 사이의 유사점을 밝히려는 열심 때문에 신자들은 선지자들과 성경 저자들의 방법이 아니라 플라톤과 플로티누스를 비롯한 철학자들과 같은 방법으로 하나님에 관해 말해야 한다고 확신하게 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 (267-268)

  • 철학의 지존의 존재와 하나님과의 조화를 위해 사용된 방법 : 성경구절의 풍유적 해석과 로고스 교리 (268)

  • 저스틴, 클레멘트, 오리겐 등에 의해 발전된 로고스 교리 : 지존의 존재-성부-가 불변이요 고정적이지만 동시에 세상 및 인간들과의 직접적 관계를 가능하게 하는 인격적 존재, 즉 로고스, 말씀 혹은 하나님의 이성이 있다는 것이다... 당시에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진 관념은 불변의 존재와 변화하는 세계 사이에는 말씀 혹은 하나님의 로고스가 위치한다는 것이다. (269)

  • 알렉산드리아의 감독 알렉산더와 아리우스(장로)와의 충돌 : 논쟁의 초점은 과연 하나님의 말씀인 로고스가 하나님과 함께 영원한가의 여부였다. 그 후 아리우스파의 모토가 된 그분이 존재하지 않을 때가 있었다”(there was when He was not)는 구절은 이 문제를 정확하게 표현해준다. 알렉산더는 말씀이 성부와 함께 영원히 존재한다고 주장했다. 아리우스는 말씀이 성부와 함께 영원히 존재하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말씀의 신성이 여기에 달려 있었다. 엄밀히 말해 아리우스는 말씀은 하나님이 아니라 모든 피조물 중 으뜸 되는 존재라고 주장했다. (269-270)

  • 아리우스의 이론은 이 세상의 모든 것이 만들어지기 전에 말씀이 하나님에 의해 창조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알렉산더는 말씀은 신적인 것이므로 창조될 수 없고, 성부와 함께 영원한 존재라고 주장했다. (270)

  • 아리우스는 알렉산더가 기독교적 유일신론을 부인한다고 주장했다. 알렉산더는 아리우스의 이론이 말씀의 신성을 부인하므로 예수님의 신성이 부인된다고 했다. (270)

  • 아리우스 논쟁에서 문제의 핵심은 그리스도의 구원 방식의 문제였다. (270)

  • 콘스탄틴은 우선 종교문제에 관한 고문이었던 코르도바의 감독 호시우스를 파견하여 양 파의 화해를 꾀했다. 호시우스가 양자 간의 갈등이 중재로 해결될 수 없다고 보고하자 콘스탄틴은 제국 전역으로부터 교회의 감독들을 소집하여 총회를 열었다. (272)

 

# 니케아 공의회

  • 가이사랴 유세비우스의 콘스탄틴의 생애“... 콘스탄틴은 이 평화의 매는 줄로 하나의 화관을 엮어서 대적들을 물리치게 해 주신 승리에 대한 감사로 구세주에게 바친 최초의 통치자였다.” (273)

  • 니코메디아의 유세비우스가 이끄는 소수의 철저한 아리우스주의자(아리우스가 제출하는 입장을 대변) vs 알렉산드리아의 알렉산더(알렉산드리아의 아타나시우스) (274-275)

  • 성부고난설” : 성부와 성자는 동일하므로 성부가 고난을 받았다는 것. 이 감독들은 아리우스주의가 오류라는 데 동의했으나, 이들의 교리도 그 후 교회가 삼위일체 교리를 명확하게 정의하는 과정에서 정죄되었다. (275)

  • 니코메디아의 유세비우스 : 말씀, 혹은 성자가 아무리 지위가 높다 하더라도 피조물에 불과하다는 주장은 많은 감독들의 분노를 일으켰다. (275)

  • 교회의 신앙을 표현할 신경을 작성하는 데 합의 : 가이사랴의 유세비우스는 자기 교회에서 사용할 신경을 작성했다. 콘스탄틴은 그 신경에 호모우시오스, 즉 동일본질이라는 단어를 삽입하도록 종용했다... 가이사랴의 신경을 기초로 하되 아리우스주의를 분명히 거부하는 내용이 다수 추가된 신경에 합의했다. - 니케아 신경의 모체 (276-278)

  • 원래 로마에서 기원한 사도신경은 가톨릭교회와 프로테스탄트 종교개혁으로부터 비롯된 서방에 기원을 둔 교회에만 알려지고 사용되었다. 반면 니케아 신경은 서방 교회들뿐만 아니라 동방 교회, 즉 그리스 정교, 러시아 정교 등에 의해서도 인정되었다. (278)

  • 니케아 공의회에 참석한 감독들에 의해 채택된 신경을 읽어보면 이들의 가장 큰 관심이 성자 혹은 말씀-로고스-이 피조물이거나 신성에 있어서 성부보다 떨어진다는 개념을 배격하는 데 있었음을 알 수 있다. (278)

  • 논란의 대상이 된 것은 호모우시오스(“동일본질”)이라는 단어다. 이 단어는 성자가 성부와 동일한 신성을 지니고 있음을 분명히 전달하려는 의도를 지닌다. 그러나 이 구절은 그후 니케아 신경에 대한 반대를 불러일으키는 주된 원인이 된다. 왜냐하면 이 구절이 성부와 성자 사이의 구별을 부인함으로써 성부고난설을 시사하는 듯이 생각되었기 때문이다. (279)

  • 콘스탄틴에 의해 이단으로 규정된 감독들이 추방된다... 교회 문제에 세속적 처벌을 첨가한 행위는 그 후 심각한 결과를 초래했다. 왜냐하면 교리의 정통성 여부 문제에 관하여 세속 권력이 개입한 전례를 남겼기 때문이다. (279)

  • 니코메디아의 유세비우스의 복귀 콘스탄틴을 조종하여 알렉산드리아의 알렉산더를 계승한 아타나시우스를 유배시키는 데 성공함 (280-281)

  • 콘스탄틴은 임종 때 세례를 청하여 니코메디아의 유세비우스에게 세례를 받았다. (281)

  • 콘스탄틴의 후계자들의 성향으로 유배와 복귀가 결정됨. (281-2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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