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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 자료실]/[도서 정리]

곤잘레스, 『초대교회사』 제2부 제19장 : 알렉산드리아의 아타나시우스

by [수호천사] 2021. 2.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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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검은 난쟁이아타나시우스 (291)

 

# 초기 생애 [291]

  • 헬라인과 로마인들에 의해 거듭 정복된 콥트 족이요 이집트의 하층 계급 출신이었을 가능성이 크다. (292)

  • 제롬은 아타나시우스가 은자 폴에게 겉옷을 준 적이 있다고 기록했다. 아타나시우스는 성 안토니의 생애에 자신이 직접 안토니를 방문하여 그의 손발을 씻어준 일이 있다고 기록했다... 아타나시우스가 평생 자기를 지지하고 피신처를 제공한 사막의 수도사들과 긴밀한 연락을 취했음은 의심할 바 없다. (292)

  • 수도사들로부터 엄격한 규율을 배우고 지켰는데, 이러한 엄격성 때문에 친구들의 존경을 받았고 일부 적들이 경탄을 자아냈다. (292)

  • 아타나시우스는 주의 사람들과 밀접한 유대를 유지했으며, 아리우스파의 교묘한 이론이나 다른 중요한 교구들의 감독들처럼 사치에 빠지는 일 없이 신념과 신앙에 따라 산 인물이었다. 그의 수도적 신앙훈련, 민중들 가운데 뿌리박은 기반, 불같은 영, 그리고 심오하고 흔들리지 않는 확신이 그를 무적의 존재로 만들었다. (293)

  • 이방인들에 대항하여, 말씀의 성육신에 관하여... 클레민트와 오리겐의 사변적 경향이 발견되지 않음 인간 역사 뿐만 아니라 기독교 신앙의 중심 사건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발생한 하나님의 성육신이라는 깊은 확신을 보여준다. (293)

  • 인류 가운데 인간으로 내재하시는 하나님의 존재, 이것이 아타나시우스가 이해한 기독교의 핵심이었다. (293)

  • 아타나시우스는 성육신을 황제가 도시를 방문하는 것에 비유했다. (293)

  • 역사 속에 계신 하나님의 임재가 아타나시우스의 신앙의 핵심이었다... 아리우스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에게 온 존재가 참 하나님이 아니라 이보다 낮은 피조물이라 가르쳤다. 이러한 관념은 아타나시우스로서는 용납할 수 없는 것이었다. 기독교 메시지의 핵심이 걸려 있는 문제였다. (294)

 

# 많은 시련을 통하여 [294]

  • 마술에 탐닉하고 있으며 이집트의 기독교인들을 탄압하는 독재자라는 소문 (295)

  • 콘스탄틴은 니코네디아의 유세비우스의 보고를 근거로 아타나시우스를 알렉산드리아로부터 서방의 트리어로 유배시켰다. (296)

  • 알렉산드리아로 귀환한 아타나시우스는 아리우스파의 감독인 그레고리와 갈등 (296)

  • 아타나시우스는 로마 생활을 통해서 로마 성직자들의 지지를 얻는데 성공함... 서방을 다스리게 된 콘스탄스는 동방을 통치하던 콘스탄티우스에게 아타나시우스의 알렉산드리아 귀환을 허락하도록 요청함... 형제의 지원을 필요로 했던 콘스탄티우스가 요청을 받아들여 알렉산드리아로 귀환함... 시민들의 환영 (297)

  • 열성적인 아리우스주의자인 콘스탄티우스 황제는 니케아 신앙의 수호자를 제거하려 했다... 마침내 353년 전체 제국을 통치하게 된 콘스탄티우스는 친 아리우스 정책을 수행하기 시작했다. 아타나시우스 정죄를 위한 종교회의 소집을 거절하는 감독들에게 협박함. “나의 뜻 역시 교회의 법이다”(My will also is a canon of the church). (298)

  • 콘스탄티우스는 아타나시우스가 알렉산드리아에서 발휘한 영향력을 두려워했기 때문에 아타나시우스를 추방하지 않고 도시에서 제거하려 했다. (299)

  • 아타나시우스는 5년 동안 사막의 수도사들과 함께 거주했다. 5년 동안 니케아 정통주의는 큰 타격을 받았다. (300)

  • 시르미움의 신성 모독” (300)

  • 콘스탄티우스가 사망하고 줄리안이 감독들에 대한 유배령을 철회... 그는 자신이 이교의 부흥을 위해 힘쓰는 동안 논쟁의 양 파가 서로 싸워 둘 다 약화되거나 자멸하기를 기대했다. 그러나 그의 이러한 조치의 결과 아타나시우스는 다시 알렉산드리아로 돌아와 당시 시급했던 신학적 외교를 시작할 수 있게 되었다. (300)

 

# 신학적 합의 [300]

  • 아타나시우스는 예수가 인류의 구세주, 타락한 것을 회복하시는 분이라는 기독교의 핵심교리에 관심을 두었다. 아리우스주의가 초기 단계에서는 구원의 교리에 관심을 두었지만 곧 사변적인 논증 분야로 옮겨갔을 수도 있다. 이것은 아리우스주의의 장점인 것처럼 보였지만 실제로는 몰락이 되었다. 왜냐하면 그로 인해 아타나시우스와 그의 지지자들이 구원의 중심 문제를 소유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301)

  • 동일본질”(호모우시오스)이라는 표현보다는 유사본질”(호모이우시오스)이라는 표현을 사용함. (301)

  • 아타나시우스도 초기에는 유사본질을 주장하는 이들이 아리우스파와 마찬가지로 이단적이라는 니케아 공의회의 선언을 고집했었다. 그러나 시련 속에서 원숙해진 그는 아리우스주의를 배격하는 동시에 성부와 성자 사이의 구별을 포기하려 하지 않는 다수의 기독교인들의 정당한 우려를 이해할 수 있었다. (302)

  • 362년 알렉산드리아에 소집횓 회의에서 아타나시우스와 그의 지지자들은 성부와 성자와 성령 사이의 구별을 무시하지 않는 한에서 성부, 성자, 성령을 가리켜 동일본질이라고 표현할 수 있으며, 동시에 마치 세 신들을 주장하는 것처럼 이해되지 않는 한 세 본질들이라는 표현을 사용할 수 있다고 선언했다. (302-303)

  • 니케아파의 삼위일체 교리 찬송가 : 암브로스가 작곡한 찬란한 주의 영광은”(찬송가 42), 아우렐리우스 프루덴티우스가 작곡한 아버지의 사랑으로” (303)

  • 니케아 공의회의 교리는 결국 AD 381년 콘스탄티노플에 소집된 제2차 보편공의회에서 비준되었다. 그러나 아타나시우스는 생애 대부분을 바친 교리가 최후의 승리를 거두는 것을 보지 못한 채 사망했다. (303)

 

# 그 후의 시련들 [303]

  • 황제 줄리안의 박해를 피해 사막의 수도사들에게로 피신하려 함... 줄리안의 뒤를 이은 조비안은 아타나시우스의 지지자였다. (304)

  • 조비안의 뒤를 이은 열렬한 아리우스파 발렌스가 황제가 되었다. 그러나 발렌스는 콘스탄티우스와 줄리안을 이겨낸 감독을 건드리려 하지 않았고, 아타나시우스는 알렉산드리아로 돌아와 AD 373년 숨을 거두기까지 그곳에 머물수 있었다. (3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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