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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 자료실]/[도서 정리]

곤잘레스, 『초대교회사』 제2부 제20장 : 카파도키아 교부들

by [수호천사] 2021. 2.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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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가이사랴의 바실(대 바실), 닛사의 그레고리(바실의 동생), 나지안주스의 그레고리, 바실과 닛사의 그레고리의 누나인 마크리나 (305)

 

# 마크리나 [306]

  • 약혼자의 사망 - 독신으로 살며 관상생활을 할 것을 서원함 (306)

  • 바실은 카파도키아 지방의 중심지인 가이사랴와 안디옥과 콘스탄티노플에서 공부했다. 마지마 아테네 유학 시절 나지안주스 감독이 될 그레고리와 대배교자라는 칭호를 받게 될 줄리안 왕자와 만남. (306)

  • 공부를 통해 교만해진 바실에게 충고한 마크리나, 세속의 명예를 버렸던 나우크라티우스의 사망으로 충격을 받아 마크리나에게 종교생활의 비밀을 가르쳐 달라고 요청함 (307)

  • 마크리나는 집안의 재산을 포기하고 가까운 안데사로 들어가 관상과 금욕의 생활을 하자고 제안하였다. 참된 행복은 세속적 영예가 아니라 하나님을 섬기는 데서 찾을 수 있다는 것이었다. 세상과의 유대를 단절할 때 진정한 헌신이 가능하다고 했다. (307)

  • 바실은 누나의 충고를 좇아 이집트로 가서 수도생활에 관해 더 배워오기로 했다... 바실은 헬라어 사용권 교회에서 수도원운동의 위대한 스승이 되었다. 마크리나는 수도생활에 관한 그의 흥미를 처음 일으켰던 만큼 헬라 수도원운동의 창시자라고 할 수 있다. (307-308)

  • 닛사의 그레고리, 영혼과 부활에 관하여: 마크리나의 죽음에 임박하여 방문한 그레고리에게 마크리나는 부활의 소망을 상기시켜준다. (308)

 

# 대 바실 [308]

  • 이집트, 팔레스타인 등지에서 수도 생활을 연구하고 안네시 근처에 공동체를 설립. 수도생활의 핵심은 남들에 대한 봉사라고 믿었다... 동방 수도원운동의 아버지... (309)

  • 바실과 의견 대립이 있었던 가이사랴의 감독은 아리우스주의와의 대결을 위해 의견 대립을 접어두고 바실을 초청했다... 가이사랴 감독이 사망한 후 감독으로 선출되었다. 황제의 관리들은 재산 몰수와 유배, 고문, 살해의 협박을 하였다. (310-311)

  • 당신이 몰수할 수 있는 나의 재산은 몸에 걸친 이 누더기와 서적 몇 권에 불과하다. 또 당신은 나를 유배시킬 수 없을 것이다. 왜나하면 내가 가는 곳마다 하나님이 나를 영접하실 것이기 때문이다. 고문에 관해 말하자면 내 육체가 이미 그리스도 안에서 죽었음을 알아야 할 것이다. 죽음은 나에게 큰 기쁨이다. 이는 하나님과 그만큼 더 빨리 만날 수 있기 때문이다.” 놀란 집정관은 아직까지 누구도 자기에게 이렇게 말한 자가 없다고 말했다. 바실은 다시 그건 당신이 이제까지 진짜 감독을 만나보지 못했기 때문일 것이다라고 말했다. (311)

  • 바실은 수도생활의 조직과 확장, 그리고 니케아 정통 신학의 전파에 심혈을 기울였다. (312)

 

# 닛사의 그레고리 [312]

  • 바실이 성급하고 완고하고 오만했던 데 반해 그레고리는 침묵과 고독과 익명성을 선호했다. (312)

  • 바실과 그의 친구 나지안주스의 그레고리가 수도생활에 헌신한 데 반해, 그레고리는 젊은 여인과 결혼하여 행복하게 지냈다. 아내의 사망 후 수도생활을 시작하고 동정에 관하여라는 논문을 남겼다... 그에게 있어 수도생활은 활동적 생활의 고통과 아픔을 피할 수 있는 방법이었다. (312-313)

  • 발렌스와 바실이 사망한 후 그레고리는 니케아파를 이끄는 지도자들 중 하나가 되었다. 그리고 지도자의 자격으로 381년 콘스탄티노플 공의회에 참석했다... 그의 상세한 니케아 교리 해설은 콘스탄티노플에서 승리를 가져오는 데 큰 몫을 담당했다. (313)

  • 총회가 끝난 후 테오도시우스 황제는 그를 자기의 신학 고문으로 삼았다... 니케아 정통 신학이 확립된 후 수도생활로 돌아갔다. (313-314)

 

# 나지안주스의 그레고리 [314]

  • 젊었을 때 학문에 전념했다. 그는 가이사랴에서 수학한 후 아테네로 가서 14년간 머물렀다. 그는 이곳에서 바실, 그리고 당시 왕자였던 줄리안을 만났다. 그는 30세에 고향으로 돌아와 바실과 함께 수도생활을 했다. (314-315)

  • 관상생활에 대한 관심 때문에 목회자로 봉사하기를 꺼려함 (315)

  • 친구 바실의 죽음으로 충격을 받음. 생전에 도움을 원했던 아리우스주의에 대항한 투쟁에서 지도적 역할을 해야 할 의무감을 느낌 (315-316)

  • 379년 정통신조에 기초한 예배를 드리기 시작함... 핍박... 380년 말 테오도시우스 황제가 콘스탄티노플로 개선하면서 반전... 성 소피아 성당에서 감독으로... 콘스탄티노플 공의회... 반대자들이 감독 자격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자 직분을 사임하고 고향으로 돌아감. (316-317)

  • 콘스탄티노플 공의회는 성자의 신성에 관한 니케아 교리를 재확인했고, 성령의 신성에 관해서도 동일한 내용을 추가했다. 따라서 이 공의회에서 삼위일체의 교리가 확실히 선포되었다. (317)

  • 서방 라틴권과 동방 헬라권은 세 위격 안에 있는 한 본질이라는 공통된 공식에 합의했다. (318)

  • 신학적 논쟁의 대중화... 궁극적인 문제는 로마제국에 의해 죄인으로서 십자가 처형을 받은 목수 안에 하나님이 현존하실 수 있는지, 또는 하나님이 보좌에 앉은 황제를 더 닮았는지의 문제였다. 그러므로 많은 황제들이 아리우스의 견해를 선호한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었다. 결국 절충안으로 목수인 예수가 참된 신이시지만 목수보다는 판토크라토스-보좌에 앉아 온 세상을 다스리는 높으신 황제-로서 표현되었다. (3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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