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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 자료실]/[도서 정리]

[한국독립운동의 역사 제4권] 제1장. 조선총독의 식민통치와 통치기구

by [수호천사] 2021. 4.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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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절. 조선 총독의 권한과 일제강점 초기 조선총독

1. 조선총독의 권한

 

  • 1910년대의 조선총독은 일본 천황에 의해 칙임되어 그 위임의 범위 내에서 조선의 방비를 위한 군사권을 행사하면서 내각 총리대신을 경유하여 조선에서 행정권ㆍ입법권ㆍ사법권을 행사하는 절대적인 권력을 갖고 있었다. (3)
  • 1906년 통감부를 설치하면서 통감의 지위를 문관직 통감(이등박문)에게 한국주둔일본군의 지휘권을 양도했던 기억... (3)
  • 조선총독은 천황의 친임관으로서 천황에게 직접 예속되는 독립기관(조선총독부)의 책임자로서 일본 수상 및 각 대신들과 동격의 지위... (4)
  • 조선총독은 현역 육해군 대장 중에서 임명한다고 규정되어 있는데 이는 문관직(행정관)인 총독에 무관을 임명한다는 것을 의미... 일본 군부, 그중에서도 당시 산현유붕(山縣有朋)이 중심이었던 일본 육군이 주도권을 장악하면서 조선에서의 식민통치기구의 정비에 착수하게 되었다.
  • [역대 조선총독 일람] (5)
    1: () 사내정의(1910.10.1) : 자작, 백작, 육군대장, 육군대신
    1: 사내정의(1911.8.30) : 백작, 육군대장, 원수, 수상
    2: 장곡천호도(1916.10.16) : 백작, 원수, 육군대장
    3: 재등실(1919.8.12) : 남작, 자작, 해군대장, 수상
    3: () 우원일성(1927.4.15) : (육군대장)
    4: 산리반조(1927.12.10) : 육군대장
    5: 재등실(1929.8.17) : 자작, 해군대장, 수상
    6: 우원일성(1931.6.17) : 육군대장
    7: 남차랑(1936.8.5) : 육군대장
    8: 소기국소(1942.5.29) : 육군대장, 수상
    9: 아부신행(1944.7.24) : 육군대장, 수상

 

2. 일제강점 초기 조선총독

 

1) 무단통치의 초대 총독 사내정의

  • 사내정의(데라우치 마사타케, 1852~1919)는 장주번의 하급무사 우전(宇田) 집안의 3남으로 지금의 산구시에서 태어났고 나중에 외가인 사내 집안의 양자가 되었다. 1865년에 장주번의 제대에 들어갔으며, 명치유신 직후 내전인 무진전쟁에 종군... 1869년에 육군소위로 임관하였다... 1877년 서남전쟁에서 총상을 입고 오른팔을 못쓰게 되었고 이후 프랑스에 군사 유학을 경험한 다음 육군 내에서 출세가도를 달리게 된다. 1887년 육사교장... 1894년 청일전쟁에서 병참부분을 담당하여 공을 세움... 1902년 제1차 계태랑 내각에서 육군대신이 되어 교육총감도 겸임하면서 러일전쟁을 지휘... 1906년 육군대장이 되고 전쟁에서의 공훈을 인정받아 자작(子爵)을 받고 화족(귀족)이 되었다.... 19105월에는 육상의 이쥐에 있으면서 한국통감의 지위도 겸임하여 한국병합을 적극적으로 추진하였다. 1911년 한국병합의 공로로 백작으로 승작되었으며 1916년에는 원수의 칭호를 받게 된다... 191610월에는 천황으로부터 조각의 대명을 받아 정당세력을 무시하고 관료중심의 거국일치내각을 수립하였다... 1917년 러시아에서 2월 혁명이 발생하자 이듬해인 1918년에는 러시아혁명 간섭전쟁(시베리아 출병)에 적극적으로 나서 가장 많은 군대를 파견하였고, 이로 인해 발생한 일본 국내의 전국적 봉기사건인 쌀소동에 대해서는 계엄령을 선포하여 강제진압도 불사... ‘쌀소동의 책임을 지고 19189월에 내각 총사직... 이듬해 191911월에 68세로 병사... ‘조선총독암살 미수사건을 날조하여 신민회를 비롯한 기독교계의 운동가 및 조선의 국권회복, 독리운동사상에 대해 대대적인 탄압을 가함... 2차 세계대전 시기의 일본 육군의 서열 1위여썬 원수로 육군대장 사내수일은 그의 장남이다. (6-8)

 

2) ‘한국보호국화’에 앞장선 2대 총독 장곡천호도

  • 장곡천호도(하세가와 요시미치, 1850~1924)1868년의 무진전쟁에서 소대장으로 참전... 18871년 육군대위로 임관... 2년뒤 연대장(중좌, 중령)으로 승진... 1877년 서남전쟁에도 참전... 1886년에 육군 소장이 되었고 보병 12여단장으로 10년간 재임... 청일전쟁에도 출전하여 그 전공으로 남작의 작위를 받았다. 1896년에 중장으로 승진하여 제3사단장이 되었다. 19046월에는 대장으로 승진하여 9월에는 한국주차군사령관이 되었다... 철저히 야전으로만 돈 전형적인 야전군인... 러일전쟁 후 자작으로 승작... 1912년에서 1915년까지 참모총장을 지냄... 31운동 탄압으로 총독을 사임... 같은 장주번 출신의 사내정의나 계태랑과는 달리 정치에는 관여하지 않음... (8-10)

 

3) 유일한 해군대장, 문화통치의 3대와 5대 총독 재등실

  • 해군 군인이자 정치가인 재등실(사이토 마코토, 1856~1936)... 1882년 해군 소위로 임관... 1884년에는 미국으로 유학하여 1888년까지 주미공사관 주재무관으로 근무하게 되는데 그가 최초 미국 주재무관이었다... 청년사관 시절부터 그의 천재적인 작전능력과 행정능력을 인정받은 미래 일본 해군의 주역이었다... 1893년 소좌가 되었고 청일전쟁 시에는 천황의 시종무관으로 근무... 189712월에 중좌와 대좌로 승진... 1898... 해군차관이 되어 7년간 해군의 대확장 계획과 러일전쟁의 해군경영을 한 손에 쥐고 추진... 1912년에 대장으로 승진... 19198월 원경(原京)내각의 요청을 받아 조선총독으로 부임하여 이른바 문화통치에 힘쓰게 된다. 조선통치에서 육군의 발언권을 억제해 보려는 원경내각의 시도... 1929년부터 약 2년간 재등실내각하에서 다시 조선총독으로 부임... 1932515 쿠데타 사건으로 정당내각이 무너지는 등 정국이 경색되자 중간내각으로 재등실을 수반으로 하는 내각이 성립되었다... 1934년 내각 수상 사임 후 내대신이 되어 직접 천황을 보좌하는 역할을 담당하였으며, 혁신 우익들로부터는 현상유지파의 촌본산이라고 지탄을 받았다. 1936년 청년장교들의 쿠데타인 226사거이 터지면서 재등실은 동경 자책에서 청년장교들의 습격을 받아 살해당했다... 조선총독이란 지위가 향후 일본 내각 수상으로 가는 과정이란 인식이 사내정의를 거쳐 재등실에 이르면서 보다 강력하게 부각이 되었고 최고의 군인 정치가가 거쳐야 할 코스라는 인식이 이때부터 일반화되어 갔다... (10-12)

 

제2절. 일제 식민통치론 - ‘일선동조론’ㆍ‘문명개화론’

1. 일제의 ‘한국식민지’ 구상 방안

  • 19108한일합방을 이끌어낸 사내정의는 조선총독부의 초대 총독으로 자리를 옮겼다. 19105월 병약한 증미황조를 대신하여 통감에 임명되었고 한일병합을 위한 책무가 주어졌다... 19097한국병합에 관한 건대한시설대강이 일왕의 재가를 통해 결정... 2차 러일협상을 통해 러시아의 병합 양해를 얻어냄... 190912월 일진회는 백만 회원의 언명이라 칭하고 한일합방성명서를 중외에 발표... (13-15)
  • 일제는 한국을 일본에 병합하지 않고서는 통치의 책임은 도저히 충족할 수 없다19106합병 후의 조선에 대한 시정방침을 결정... 병합할지라도 한국에는 일본제국 헌법을 시행하지 않고 일본과 차별하여 통치하며... 일체 정무는 무관총독이 독재하며... 한국인을 하급관리로 채용토록 하였다. (15-16)
  • 한국의 황실 및 공신의 처리... (17)
  • 1910816일 사내정의 통감은 총리대신 이완용으로 하여금 내각 대신회의를 개최토록 한 뒤에 미리 준비한 합병방침을 안건으로 채택하여 이를 통과시킨 뒤에, 20일에는 순종 임석하에 어전회의를 열어 한일병합조약을 강제로 체결하였다. 이러한 사실은 1주일 뒤인 1910829일에 공식 발표되었다. (18)
  • 사내정의는 동화정책의 지표로 우선 1) 식민지의 안정화, 2) 문명화, 3) 일본화를 꼽았다. 식민지의 안정화는 동화정책의 전제조건이며, 문명화는 동화정책을 가능케 하는 명분이며, 일본화는 동화정책의 궁극적인 목적이라 할 수 있다. (18)

 

2. 일선동조론

  • 일선동조론은 한국과 일본이 같은 조상으로부터 피를 나눈 근친관계에 있고, 태고 이래로 한국이 일본의 지배하에 있어서 한국에 대한 일본의 가부장적 지배가 가능한 것이라면, 한국은 이제 일본에 대해 외국ㆍ외민족은 될 수 없으므로 일본에 흡수되지 않으면 안 된다며 일제의 한국 강점을 합리화한 것이다. (19)
  • 일본서기에 따르면 일본의 시조신 가운데 하나인 주솨지남명이 신라 땅을 다스렸고, 신공황후는 신라와 고구려를 정벌하여 한반도에 이르는 대통일제국을 건설하였다고 한다. 따라서 한일합방은 침략이 아니라 지금까지 내려온 숙원사업을 해결한 것일 뿐이라는 논리를 내세우게 된 것이다. (19)
  • 일선동조론은 침략ㆍ지배논리로 재기... 조선은 태고 이래 일본에 복속하고 있었다는 것... (20)
  • 한일간의 근친성과 일본의 우월성을 주장... ‘임나일본부설’... 한일합방 이후, 조선총독부는 한일 양 민족이 태고적부터 동일민족이었음을 증명해 보이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이를 위해 조선총독부는 1911년 이후 참사관실의 주도하에 바도사편찬을 추진토록 하였다. (21-22)

 

3. 문명개화론과 ‘독립불능론’

  • 일선동조론문명개화론을 강하게 내세웠던 것은 조선의 독립불능론을 전제로 주장된 것... 조선은 일본을 믿고 일본에 의뢰하는 것이 자국의 행복을 위한 최상의 방책이라는 궤변을 늘어놓았으며, 한국병합 취지 자체도 양국의 상합일체로 피아차별을 없애고 상호 전반의 안녕 행복을 증진하는 것이었다. (22)
  • 일제는 과거 조선사회를 야만약정으로 매도하였으며, ‘정체된 역사상을 가진 민족이라 비하하였다... 현재의 일본은 조선의 미래라는 침략논리를 펼쳤다... 조선이 고대국가 체제에 머물러 있다는 정체론을 언급... (23)
  • 1910년대 일제는 조선의 산업ㆍ교육시설 등이 부재하고, 인민이 나태하고 게으른 원인을 조선정부의 악정에서 찾고, 이의 해결이 당면 과제라 선전하였다... 효과적인 식민통치의 기반을 마련하고자 하는 목적에서 추진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일제는 조선을 문명화시키고자 한 것이라며 선전하곤 하였다... (23-24)
  • 윤치호는 19191월 신한청년단이 김규식을 파리강화회의에 파견해 한국의 사정을 알리고 독립을 쟁취하고자 하는 것에 부정적인 입장을 드러냈다. “조선의 실정과 일본의 유능한 행정 간의 차이가 너무나 뚜렷하고, 이는 세상에 잘 알려져 있기 때문에 조선인들이 전보다 더 못살고 있다는 것을 강화회의에 납득시키는 것이 실질적으로 불가능할 것이다라는 입장... (24)
  • 친일세력들은 일선동조론과 문명개화론을 수용하면서 독립불능론ㆍ실력양성론을 펼쳐나갔다... 매일신보1915218일자 사설... 한일병합은 조선의 국토를 방위하고 조선의 민족을 보호하기 위한 것이라 궤변을 늘어놓았다. (24-25)
  • 조선귀족회... (25)
  • 일제는 문명개화론을 통해 식민통치의 명분을 얻기위해 박람회ㆍ공진회 혹은 일본시찰단을 파견하였다... 박제순... 조중응... “조선민족은 일심으로 문명개발에 향하여 할터인데, 그 방법은 동양에서 문명 선각자 된 일본 국기 하에서 천황 폐하 일시동인하시는 그 대성의를 봉체하여 국가의 충량의 신이 되는 것이 제일이라.” (26-27)
  • 조중응을 중심으로 1916문명사회를 이루기 위한 대정친목회 조직... 1920년대 중반에 접어들면서 내선융화운동을 정치운동으로 전환하여, 사회주의를 격렬히 비판하였으며 일본의제국의회 의원도 뽑자는 참정권운동에 적극 나섰다... 스스로를 일본 국민의 일원으로 생각하면서 일제의 만주침략을 옹호하는 한편, 민족말살정책의 하나로 진행된 창씨개명에 적극 환영하기도 하였다. (27)

 

제3절. 식민 통치기구와 행정 제도의 변화

 

1. 일제 무단통치기의 통치기구와 행정제도

  • 조선총독부의 관료기구 편성은 이전의 한국통감부 기구를 계승하고 동시에 대한제국 정부 소속 관청도 적당히 축소ㆍ흡수함으로써 급격한 변화를 피하는 과도적 성격을 가지고 있었다. (29)
  • 중앙과 지방의 행정기구 정리를 단행한 후 조선총독은 정치적 인사충원에 착수하였다. 즉 한일합방 후의 총독 통치체제의 유지와 적응에 적극 기여하도록 행정요원의 배치ㆍ감시와 통제를 강화하였다. (32)
  • 종전의 도 관찰사를 도장관이라 개칭하여 칙임관으로 임용하고 도를 관할케 하였다... (33)

 

2. ‘문화통치’기의 행정제도의 변화

  • 총독부의 31운동에 대한 생각... 31운동은 1차 세계대전 종결 후 전개되는 국제정세를 오인한 해외의 조선인과 외국 선교사를 포함한 조선 내부의 일부 불량한 무리가 서로 호응하여 학생, 종교인 그리고 무지한 하층 민중을 선동하고 협박하여 일으킨 소요”... 이 사건이 전국적으로 확대된 것은 조선인의 민족성인 부화뇌동차별 대우에 대한 평소의 불만이 함께 터져 나왔기 때문인 것으로 설명... (35)
  • 식민정책을 위한 몇 가지 개혁방안을 제시... 조선에서 종교 특히 기독교의 주도권을 일보이 장악할 것... (35)
  • 31운동을 무력 진압한 조선군사령구... 31운동의 원인과 대책을 종합한 비밀보고서를 독자적으로 작성... ‘소요의 원인을 합병에 대한 불평, 자유사상에 현혹된 분자들의 활동, 식민 통치에 대한 불만, 일본인의 압박에 대한 불평, 민족자결주의에 대한 오해, 미국 선교사의 선동, 천도교의 배외적 사상이 결합된 데서 찾았다. ‘소요가 표면적으로는 수습되었으나 언제 또 다시 일어날지 모르기 때문에 한편으로는 불평의 원인을 속히 제거함과 동시에 다른 한편으로는 기존의 동화정책을 보다 치밀하게 지속할 것을 강조... (36)
  • 조선총독부 정무총감 산현이삼랑에게 원경 수상은 일본이 취해야 할 조선정책의 골격을 제시... “문관본위의 제도로 개선하고 교육은 일본과 동일한 방침을 취하며, 헌병제도를 경찰제도로 바꾸어야하지만 통치의 근본은 내지의 연장이라고 인식하고 조선을 동화하는 것이 필요하다.” (36)
  • 조선통치사견’... 일본식민지 지배정책의 근본적 잘못은 일본이 유럽의 식민지정책을 참작했기 때문이고, 조선에서의 31운동도 이러한 잘못된 지배정책의 결과였다... 역사적으로나 문화적으로 또는 인종적으로 전혀 다른 유럽의 식민정책을 일본이 그대로 모방한데서 찾았다... 내지연장주의에 의한 동화정책을 실현하기 위하여 15개 항목의 구체적방안을 제시... 반일 종교단체를 효과적으로 관리하여 동화정책을 보다 강화한다는 것... (36-37)
  • 재등실의 문화통치... 조선통치의 기본방침은 일시동인과 내선융화이고, 목표는 조선인의 생활안정과 복리증진과 문화향상에 있으며 이를 위하여 모든 통치는 문명적 정치에 기초한다고 밝혔다. 그리고 적절한 시기를 선택하여 지방자치제도를 실시할 것을 약속... (37)
  • 재등실 총독이 표명한 시정계획... 1) 일제는 총독의 임용자격 범위를 문관으로까지 확대하는 한편, 정치와 군사권을 분리시켜 총독의 군사력에 대한 통솔권을 약화시켰다... 그러나 이 조항은 사실상 유명무실한 허울... 의회의 총독에 대한 통제는 사실상 유명무실... 조선총독은 일본군부의 영향 아래 놓여 있었기 때문에 사실상 식민통치기조의 변화에도 불구하고 실질적으로는 큰 변화가 없었다... 2) 재등실은 헌병경찰제도를 폐지하고 보통경찰제도로 전환하였으며, 일반 관리와 교원 등의 금선제복과 검을 착용하는 것을 금지하였다... 실제로 조선총독부는 보통경찰과는 다른 별개의 체계를 지닌 특별고등경찰제도를 마련하여 특고형사ㆍ사복순사ㆍ밀정 등 경찰병력을 대대적으로 증강하는 한편, 이들을 중심으로 독립운동가 사찰ㆍ검문ㆍ예비검속ㆍ사상탄압 등의 업무에 종사시켜 독립운동의 근절에 주력하도록 하였다... 3) ‘문화정치를 실현하기 위하여 총독부 중앙과 지방기구의 직원을 증원하고 조선인과 일본인의 차별을 철폐한다는 구실 하에 조선인 관리임용의 범위를 확장하였다... 4) 총독부는 법령의 간소화와 사무처리의 신속화를 위해 중앙기구의 개편을 단행... 5) 총독부는 지방분권화의 일환으로 지방쩨도를 개편하여 중앙권력의 일부를 지방에 분산 위임함으로써 권력을 분권화하고, 지방 행정부의 간소화 조치로 지방관청의 권한 확장, 보고 제도의 감축, 위임사상 규정 등을 마련하였다... 지방 행정사무의 확충은 말단직에 조선인을 채용함으로써 전국 각 지방에 친일세력을 육성하기 위한 일환이었다... 31운동 이후 채용 된 조선인 관리의 대다수가 경찰과 지방 군ㆍ면의 하급관리... 이들이 일본 식민통치권력의 하수인 역할을 수행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37-43)

 

제4절. 중추원관제

 

1. 중추원관제의 성립

중추원으로 존치시킨 이유... “한일병합의 공로자 및 우대 및 병합으로 인해 일단 관직을 잃게 된 구한국시대의 현관 요직에 있던 자들에 대해 지위, 명망을 보지하게 하고, 아울러 의식의 방도를 주며 관제에 명기된 바와 같이 조선총독의 자문에 응하는 것을 주목적으로 하여 설치되었다.” (44)

일제는 대한제국을 강제 합병하는데 혀력한 자들과 대한제국 고위 관료 가운데 조선총독부 관료로 충원되지 못한 자들에 대해서 지위와 명망을 유지하게 하과 동시에 조선총독의 식민통치 보조역할을 장치로 중추원을 설치하였던 것이다. (45)

중추원은 조선총독에 예속... 조직 구성은 기본적으로 통감부시기의 대한제국 중추원과 유사... 중추원의장은 조선총독부 정무총감이 당연직으로 겸직...(46)

총독의 자의적으로 이뤄지는 자문기관... (47)

중추원의 설치는 대한제국의 제도와 행정기구를 그대로 지속 유지시킨다는 인상과 함께 조선 민중의 의사를 표출하는 기관인 것처럼 위장하고, 일제의 식민지배에 협력하는 자들에 대한 예우와 함께 조선총독부의 한국인 관료에 대한 우대를 제도화하는 측면도 가지고 있다. (47-48)

1915430일 칙령 제62호로 부분 개정... 일제의 식민지배정책을 정당화시키고 선전할 뿐만 아니라 그 정책을 뒷받침하는 자료들을 수집하는 역할도 담당... (48)

 

2. 1910년대 중추원의 운영과 활동

  • 1910년 조선총독에 대한 자문기구로 설립... 일제가 중추춴을 설치한 것은 어떤 정당성도 지니지 못한 총독지배체제의 폭압성을 호도하기 위한 것... (49)
  • 대한제국 말기 일제의 침략과정에 협력한 고위관료들을 중추원의관에 임명하여 이들을 우대하여 협력을 끌어내려는 데 있었다. (49)
  • 초기 중추원회의는 조선총독의 시정에 관한 훈시나 일제의 제1차 세계대전 참전에 대한 설명, 식민지에 대한 시정방침 등 일제의 조선에 대한 식민정책을 듣고 홍보하는 자리... (50)
  • 1916년부터 정기적인 회의체를 운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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