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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독립운동의 역사 1] 제6장 : 후기(1931~1945)의 독립운동
[제1절] 1930년대 국내독립운동
- 1930년대의 세계는 경제공황에 대처한 미국, 영국, 프랑스의 블록 경제체제와 그에 편입하지 못한 독일, 이탈리아, 일본, 스페인의 파쇼체제에 의한 팽창 정책이 대립하는 두 유형의 자본주의 구도에서 출발한다. (199)
- 한편 사회주의 진영을 보면 경제공황이 극도에 달한 1929년부터 소련은 집단농장체제를 강화하고 세계적으로는 자본주의의 몰락을 점치면서 1920년대 민족진영과의 연합을 수정해갔다. (199)
- 1920년대의 민족운동을 단계적으로 보면, 민족주의 계열에서는 1923년경부터 송진우, 최린 등을 중심으로 타협적 노선인 실력양성론, 자치론, 민족개조론 등 민족개량주의 노선이 등장하였으며, 안재홍 등 비타협적 민족주의자들은 반자치운동을 전개하면서 민족운동이 분화되어 갔다... 사회주의 사상이 1923년을 전후하여 소위 신흥청년단체들이 대두하면서 신사상연구회, 서울청년회, 신흥청년동맹, 화요회가 탄생하였고, 지방의 개량적인 농촌계몽운동 단체도 사회주의적인 조직형태로 개편되기 시작... (200)
- 1925년 말경 일제가 자치론을 검토하게 되자 1926년부터 비타협적인 민족주의계열에서 민족적 단일운동 조직으로 정치투쟁을 벌이려는 시도가 대두... “방향전환론”... 신간회가 탄생... 신간회도 이상재, 권동진, 허헌, 김병로 체제로 이어지는 시련을 거듭하다가 1931년에 해체... 일제 식민통치 농간 탓이 컸지만 주체적 역량면에서 반성해야 할 점이 있다. (201)
1. 1930년대 독립운동의 추세와 특징
- 세계공황과 특히 농업공황을 맞은 일본 제국주의는 그 타개책으로 1931년 만주사변을 일으키고 그에 따라 1920년대 독립운동기지로 국내와 긴밀한 관계에 있던 만주지방의 위치를 돌변하게 만들었다... (201)
- 1920년대에 만주의 독립군과 연결된 국내 조직은 1930년대에는 성장할 수 없었으며, 국내의 민족적 시선도 중국 관내로 옮겨가게 되었다. (202)
- 1937년 6월 4일 보천보 사건을 동아일보와 조선일보에게 크게 보도함으로써 국내에서 만주에 대한 관심을 새롭게 불러 일으켰다. 그러나 다음달인 7월 7일에 일어난 중일전쟁과 더불어 전시체제가 강화되고 1938년 국가총동원법으로 사회 자체를 감옥처럼 통제하는 속에서 민족적 연결을 도모한다는 것은 불가능하였다. (202-203)
- 만주사변을 계기로 국내에서 해외독립운동에 대한 관심은 중국 관내 지방으로 옮겨가고 있었다. 거기에는 1932년 윤봉길 의사의 상해의거가 국내외 동포의 민족적 시선을 상해로 모았던 영향도 적지 않았다... 남경의 의열단 간부학교의 특히 제2기생 가운데에는 국내 지망생이 많았던 것을 비롯하여, 안재홍이 국내에서 이영여, 문학봉, 정필성, 김덕원을 의열단에 소개했다가 발각되어 옥고를 치른 일이나, 일본에서 흑우동맹에서 활약하던 나월환, 이하유 등이 중국으로 건너가 청년전지공작대에 이어 광복군으로 활약한 일, 윤세주, 한빈 등이 국내에서 활약하다가 중국으로 건너가 조선의용대에서 맹장으로 활약한 일, 만주에서 활동하던 청년들이 김구, 이청천, 김원봉을 따라 낙양군관학교를 거쳐 남경에 집결했던 일 외에도 1930년대 초반에 무수하게 중국 관내로 이동한 사례들이 그것을 말해주고 있다... 국내의 민족적 시선이 1920년대의 만주에서 중국 관내로 이동하고 있다는 것을 말해 주는 동시에 1930년대에도 국내외의 독립운동이 연결되고 있었다는 것을 증명하는 사례로 주목된다. (203-204)
- 1930년대 국내외 독립운동의 연결은 사회주의운동 선상에서 이루어진 사례도 적지 않았다... 1928년 코민테른의 ‘12월테제’... 국내외에서 전개된 조선공산당재건운동을 계파별로 살펴보면 ML당계는 길림에서 1929년 1월 고려공산청년회, 그리고 같은 해 5월 조선공산당재조직중앙간부를 각각 조직... 공산청년중앙간부 원태희, 박문병 등이 같은 해 6월을 전후해서 국내로 들어와 조선공산당 제4차 검거를 피한 인정식 등과 결합하여 국내 조직에 착수하였다... 서울ㆍ상해계... 김규열, 이동휘는 김철수, 윤자영, 김일수, 최동욱 등과 협의하여 1929년 6월 25일 길림에서 조선공산당재건설준비위원회를 설치, 8월에는 고려공산청년회준비회를 결성하였다. 1930년 봄부터는 국내조직에 착수하였으며, 7월 이후로는 오산세를 비롯하여 김일수, 이철영, 박봉관 등 지도적 활동가들이 대거 입국하였고, 8월에는 함경남도 함주군 신흥에서 재건준비위 중앙간부를 선정하여 책임비서 밑에 조직부ㆍ선전부ㆍ공청부를 두었다... 화요계에서도 제1ㆍ2차 조선공산당에 관계한 박민영 및 김한, 정재달을 중심으로 한 활동가들은 1928년 8월 고려공산청년회 후계간부 조직회를 조직하여 활동하던 중 1929년 7월에 모스크바 동방노력자공산대학 졸업생들과 함께 입국한 김단야에 의해 추진되는 당재건운동에 흡수되었다. (205-206)
- 국내외 독립운동의 연계는 1937년을 고비로 한산해져갔다. 그 이유는 국내에서 중일전쟁을 계기로 식민지 통제가 더욱 악랄하게 강화된 데도 있었다. 그러나 1937년 12월 13일 남경함락 이후 독립운동의 중심지가 중국의 오지로 이동하게 되어 서로 연락하기가 어려웠고 독립운동단체들도 중일전쟁 전에는 동포들이 많이 사는 국내는 물론 만주나 일본에서 인력을 공급받던 방법을 중국 현지에서 조달하는 방식으로 변화되면서 국내에 대한 주목이 약화된 데도 그 이유가 있었다. (207)
- 1937년 연해주 동포의 강제이주 문제도 국내외 독립운동의 연결이나 인력공급의 측면에서 고려해 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207)
- 1930년대 혁명적 농민조합운동... (208)
- 혁명적 농민조합운동이 종전과 다른 특징... 1) 노농소비에트의 건설과 토지혁명 등 혁명적 슬로건을 제기하였으며, 2) 계급ㆍ계층별 조직원칙을 강조하면서 농업노동자부, 그리고 청년부ㆍ부녀부 등 새로운 독자부서를 결성하고, 또 빈농계급을 중심으로 한 조직개편을 서둘렀다. 3) 일상적인 경제투쟁을 정치투쟁과 결합하고자 하였다. 4) 합법주의에 매몰되어 있었던 종전의 운동의 한계를 탈피하여 비합법투쟁의 전국적인 전개를 도모하고자 하였다. 5) 개량적인 농민운동을 개조하거나 아니면 이를 아예 분쇄하고자 하였다. 6) 자신들의 운동을 당시 공산주의운동의 당재건운동과 결합시키고자 했다는 점 등이 종전의 합법농조운동과 구별되었다. (208-209)
- 1930년대 학생운동의 특징... 1930년대 전반기는 학생운동이 활발한 시기... 이때의 학생운동은 학생만의 독자적인 운동이라기보다는 사회운동과 관련을 맺고 민족 운동의 지성을 대표 대변하는 반전ㆍ반재운동의 공간으로 발전되어 갔다. (209)
- 1930년대 각 단체의 인원을 검토해 보면 동일인이 중복되는 경우가 없다. 그것은 일체의 탄압으로 조직이 파괴되고 감옥에 가면 새로운 조직이 새 인물에 의해서 결성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외형은 분산적이었지만 질적 통일을 도모할 정도로 민족적 역량이 축적되어간 것은 학생계였다. 1940년대의 학생운동단체를 보면 8ㆍ15를 전망하듯이 독립군적 조직이 결성되고 있었다. (211)
- 1940년대의 독립군적 분위기는 해외독립운동과 연결되어 일어난 것이 아니라 국내에서 자생하고 있었다는 점이 주목되는 것이다. (211)
- 1930년대의 국내 독립운동의 추세는 지하조직을 통하여 혁명성을 고양하다가 1940년대에는 독립군을 방불하는 조직성을 보였다. 조직의 분산성은 군국주의 통치 상황에서 당연한 현상으로 이해된다... 군국주의 통치 아래서는 분산과 통일의 문제는 조직이 아니라 이념의 측면에서 검토되어야 할 것으로 안다. (212)
2. 사회운동에 대한 이해
- 1930년대에 들어서면서 가장 심각한 사회문제는 농민문제였다... 8할의 농업인구에서 농민계급의 양극화 현상이 더욱 심화되고 있다... 1930년에 이르면 학생ㆍ언론인ㆍ종교인ㆍ지식인ㆍ사상가도 농민을 위하여 농촌에 몸을 던졌다... 농민을 위한 운동이기는 해도 농민에 의한 운동은 아님... (212-214)
- 지식인의 깊은 관여로 말미암아 농민운동의 주체성격에는 한계가 있으므로 사회운동 측면에서는 재검토되어야 한다. (215)
- 1930년대 농조운동이 조선공산당재건운동과 맞물려 있던 것은 12월 테제 후 코민테른에서 조선공산당의 승인이 취소되었기 때문에 발생한 사회주의 운동의 시련이 문제이다... 식민지에서 민족문제보다 계급문제를 앞세워 계급해방론이 노동운동의 제일차적 구호로 부각되고 있었던 점... 계급해방론이 사회운동의 중심개념으로 부상했다는 것은 민족주의보다 국제주의가 상위개념으로 인식되고 있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시기문제와 상대성도 이해하지 못하는 맹목적이고 형식적인 국제주의는 진정한 국제주의와 우리의 독립운동의 시각에서는 철저히 반성되어야 할 문제이다... (216)
- 일국일당의 원칙 아래 국제주의가 악용되고 있었던 사례도 한국 사회주의운동 선상에서는 물론, 국제주의의 관점에서도 엄격히 반성되어야 할 것이다. 그것은 만주의 민생단사건에서도 남겨진 교훈... (216)
- 이러한 국제주의나 계급해방론만의 교조적 명분론은 유럽 사회주의 운동에서는 쉽게 수용되지 않았고 식민지 또는 반식민지 상태의 아시아 민족운동에서도 외면당하는 수가 많았다. 그리하여 1935년 코민테른 7차 대회에서는 인민전선방략을 채택하지 않을 수 없었다. (217)
- 1930년대 후반에 고조된 민족주의 사조를 코민테른 제7차 대회의 산물로 단정하는 경우가 있는데 당시 사회주의 지식인의 대변자를 자처하고 있던 『비판』에 제7차 대회의 노선변화 소식이 없는 것으로 보아 국내에서는 국제당의 노선의 변화를 감지하지 못한 것 같다... 1930년대 후반에 고조된 민족주의는 1930년대 전반에 나타난 국제주의에 대한 내재적 반성의 결과라는 측면에서 검토할 필요가 있는 것... (217-218)
- 1930년대 전반기에 배성룡, 최익한 같은 1920년대 조선공산당 요인이 국제주의가 아닌 민족주의자의 행보를 걸었던 사실에 주목... 안재홍이 1930년대 중반에 계급해방론과 국제주의를 수용한 민족주의의 새로운 진로를 제창하고 있던 사실도 주목... 그 무렵에 일제의 민족말살정책이 강요되어 그에 대한 반사적 민족의식도 고양되고 1930년대 후반에 민족주의가 부상하게 된 요인을 이루었다는 점도 주목... 코민테른에서 ‘12월테제’의 조선문제 입안자로 아시아 사회주의자로부터 존경을 받던 일본인 좌야학이 1933년에 전향하는 등 일본사회주의 일각이 무너지고 있어 사회주의에 대한 매력이 삭감되고 있던 사실도 다소 작용... (218)
- 1930년대 후반에 민족주의가 고양되고 있던 사실... (218)
3. 문화운동의 위치
- 1930년대 민족운동의 또 다른 특징은 국학이 체계를 갖추며 발전하였다는 점... (219)
- 1930년대 문화계가 정돈되어 갔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1920년대 업적의 기초 위에서 이루어진 성과라는 점은 유의할 필요가 있다. (219)
- 조선어학연구회가 1931년 조선어학회로 개편발전하면서 1933년에는 ‘한글맞춤법통일한’을 제정하고 이어 조선어사전 편찬사업에 착수하고 있던 사실... 1933년 이순탁, 백남운을 중심으로 경제학계를 망라한 조선경제학회가 결성된 사실... 30년대에 들어와 유심론사학과 유물론사학이 고양되는 배경 속에서 1934년에 이윤재, 이병도를 중심으로 진단학회가 결성된 사실... 김용관, 이인을 중심으로 과학지식보급회를 결성한 사실... 1934년 정인보, 안재홍을 중심으로 조선학운동이 일어났던 사실... (219-220)
- 1936년 1월 1일 동아일보... 백남운이 ‘중앙아카데미’ 창설을 제의... 거족적인 중앙학술원을 제창하였다는 역사성... (220)
- 1930년대 학술지 외에 교양지... 민족주의 성향이 강한 『신조선』, 민족개량주의적인 『동방평론』, 사회주의 대변지를 자처하던 『비판』, 사회개량주의의 『신계단』ㆍ『대중』 등 간행... (221)
- 1930년대 사회주의자들은 조선공산당재건운동을 위하여 사회운동에 투신하여 수많은 혁명적 농조와 노조운동의 전위인물로 파악한 반면에, 사회민주주의 또는 사회개량주의자는 위에 소개한 교양지를 통해 사회주의 계몽에 이바지하고 있던 현상도 1930년대 새로운 특징이라 할 수 있다. 그래서 혁명적 사회주의를 표방하고 있던 측, 가령 이재유 그룹에서는 사회개량주의적 성향의 배성룡, 김세용, 김약수, 노동규, 이청원, 여운형, 이여성, 김태준, 인정식, 최익한 등의 문필활동자를 카프계와 함께 공산주의운동의 탈락자로 민족개량주의자에 못지 않게 맹박했던 것이다. (221)
- 1933년... ‘한글맞춤법통일안’... 1931년부터 신채호, 백남운, 문일평, 정인보 등에 의해서 역사학이 새롭게 개발되고 있던 사실... 사회주의 이론도 1930년대에 이르러 본론을 이해할 정도로 향상... (222)
- 일제가 조선을 완전 식민지, 영구 식민지화를 꿈꾸며 민족동화를 획책하고 있었고 그러한 동화정책은 언어와 역사의 말살을 통한 식민문화수호와 개발ㄹ에 대한 민족문화운동은 값있는 것으로 평가되어야 할 것이다. (222)
- 1939년을 고비로 민족적 의미가 있는 분야는 침몰... 1930년대 가장 강력한 저항논리를 폈던 『비판』이 변질하여 개량의 길을 걷는 데에서 알 수 있는 일... (223)
4. 이념과 방략의 극단적 변화
- 1929년 12월 민중대회사건을 계기로 신간회 허헌 체제가 끝난 후에 조공계열 인사는 조선공산당재건작업에 박차를 가하며 신간회 해체를 추진하였다. 그후 1931년 신간회가 해체될 때까지 1년 반 동안은 신간회의 일각의 무너지면서 조공재건 작업이 확산되어 갔다... 신간회 산파역을 담당했던 안재홍 등은 신간회 재건을 위해 노력했지만, 1932년 3월 재만동포구호의연금 사건으로 구속되는 등 일제의 분열정책의 농간이 겹쳐 재건 노력은 성공할 수 없었다. (223)
- 1920년대에는 민족주의도 사회주의도 각기 분명하게 정체를 드러내고 있지 않았다... 1930년대에 이르러 조선공산당재건문제와 더불어 혁명적 노동운동을 추진해 간 사회주의 노선과 민주사회주의로 일컫던 사회개량주의가 분리되어 갔고, 혁명적 사회주의 인사는 민주사회주의자의 개량적 행적에 대하여 신랄히 공박하고 있었다. (223-224)
- 30년대 전반기에 가장 격렬한 노동운동, 이른바 적색해방운동은 계급해방을 외치며 국제주의이론을 수용하고 있었다. 그러므로 신간회 방식의 민족통일전선은 점점 멀어져 갔다. 이것은 코민테른 노선을 비판없이 수용한 민족적 과오로 지적되어야 할 것이다... 코민테른의 국제주의가 러시아 민족주의를 대변한 성향이 짙었다고 하는 논의도 일고 있음... (224)
- 기독교를 중심으로 한 종교적 국제주의도 1930년대에 확산되고 있었다. 인권의 보편성 원칙을 내세운 자유주의의 명분 아래 또 인류보편주의의 형식논리에 입각하여 자유주의적 국제주의가 종교단체를 중심으로 확산되어 갔다. 사회주의적 국제주의는 1935년 코민테른 제7차 대회의 인민전선 노선의 채택으로 반성되어 갔지만 자유주의적 국제주의는 1940년 루스벨트의 동양삼국에서 미국인 철수령에 이르러 반성의 기미를 보였다. (224-225)
- 1930년대 전반기 국제주의 또는 계급해방을 상위개념으로 한 민족운동은 잠정적 현상에 불과하고 대하의 물줄기는 민족통일전선을 주류로 한 것이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225)
- 사상을 구분할 때는 먼저 자유주의와 사회주의로 분류하고 민족주의와 국제주의는 시기에 따라 자유주의와 사회주의 어느 것도에 해당된다는 관점에서 검토하는 방식이 고려되어야 할 것이다. (225)
- 스탈린은 소련의 많은 민족 단위의 가맹공화국과 자치공화국, 그리고 자치주의 독자성을 희석시켜야 할 과제를 해결하는 정책추진에서 민족을 자본주의의 산물인 동시에 자본주의의 수탈단위로 이해하면서 민족지향성을 마멸하고자 했다. (226)
- 민족은 고대에 철기문화가 확산되면서 통일국가가 성립하는 가운데 생활공동체가 형성되고 그것이 의식공동체로 성장하면서 민족이 형성된 것... 서양은 게르만 민족의 이동으로 말미암아 시기를 놓쳤던 것이다... (226)
- 서유럽을 제외하면 민족 형성이 고대부터 추진되고 있었다. 민족이 영원한 가치를 가진 존재는 아니지만 역사적 산물로 실재한 것을 외면하고 사회문제를 해결하려고 하는 것은 과학적인 방법이 아니다... 1930년대 전반기에 혁명사회주의측에서 식민지 문제를 민족혁명이 아닌 계급혁명으로 해결하려고 판단했던 사상동향은 적어도 식민지 민족문제에 관한 한 오류로 지적되어야 할 것이다. 오히려 식민지시기의 계급문제도 민족혁명을 통해서 해결한다는 논리가 필요했다. (227)
- 1930년대 민족운동은 일본 제국주의가 경제공황을 맞아 군국주의를 강화하면서 식민지 수탈을 더욱 악랄하게 확대하고 심화하는 속에서 자율ㆍ타율간에 선별적으로 발전하였다. (227)
- 1930년대 전반기의 사조는 학생운동에도 그대로 반영되어 있었다. 그러나 후반기부터 민족혁명론이 강조되면서 1940년대 해외독립운동과 관계 없이 국내 자체에서 독립군적 조직이 학원에서 발생하고 있던 사실은 식민지 36년간 독립운동 의지가 팽배하고 있었다는 현상으로 기억되어야 한다. (228)
- 1930년대 문화운동이 예술이나 종교, 그리고 교육과 언론분야는 오히려 퇴조하였고, 학술과 문학도 1938년부터는 침몰함에 따라 문화운동 담당자인 지식인의 나약한 체질 때문이라고 해야 할는지, 이는 반성할 문제다. (229)
[제2절] 조선학운동의 전개와 민족주의의 정착
1. 문화운동과 국학
- 1923년 신채호... 「조선혁명선언」... 식민지 아래서 문화운동을 부정적으로 평가... 문화운동자는 식민지 지배 아래서 기생하려는 자로서 ‘우리의 적’이라고 선언... (230-231)
- 식민체제 속에서 문화활동으로 안주한다는 것은 식민통치를 묵시적으로 용인한다는 자세였던 것도 틀림없었다... 안창호도 1926년에 국내에서 대두한 자치론과 실력양성론을 통박... (231)
- 독립운동 단체의 출판물을 중심한 독립운동을 지향한 문화운동과 민족보존을 위한 문화운동이었다면 긍정적으로 평가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231)
- 일본의 식민통치에는 제국주의 일반론 외에 1910년 사내정의 총독 취임 당초부너 일시동인으로 묘사되어 후일에는 내선일체라고 이름한 민족동화를 표적한 민족말살정책의 특수성이 있었다... 민족말살에 항거하고 민족보존을 위한 문화운동은 긍정적으로 평가되어야 하는 것이다. (232)
- 어학과 역사학을 함께 연구한 권덕규, 신채호, 정인보, 안재홍, 백남운 등이 역사해석에서 어의를 중시한 것도 그것이지만, 그 외에 안확은 문학과 역사학을 복합 연구했고, 러시아에서 활약한 계봉우는 어학, 문학, 역사학, 세 가지 저술을 함께 남겨 놓고 있다... 국학민족주의의 요구에 대응하기 위하여 연구하다가 보니 국학 각 분야를 서로 넘나들게 되었던 것... 민족보존이라는 측면에서 보면 어학이 국학민족주의의 핵심인 것 같다... (232-233)
- 식민정책에 대응한 문화운동은 무엇보다도 어문운동이 민족보존을 위한 마지막 방패로서 중요했다. (233)
2. 국어학
- 국어연구소와 국어연구학회... 1921년 조선어연구회 결성... 1931년 최현배, 이극로, 권덕규 등의 조선어학회로 개편... 1931년에는 조선어문학회와 조선어학연구회도 탄생... (234)
- 조선어문학회는 조윤제, 이희승, 이재욱, 김재철 등이 창립... 김태준, 방종현, 이승녕 등이 가입함으로써 경선제국대학을 졸업한 신진학자의 동인회 분위기를 느끼게 했지만, 얼핏 보기에 참신한 인상의 매력을 가지고 있었다. (234)
- 조선어문학회는 1933년에 핵심인물인 김재철이 사후하고 그해 7월에 『조선어문학회보』를 『조선어문』으로 바꾸어 제7호를 간행하고 자취를 감추어 어학연구자는 조선어학회로 합류... 1930년대에 들어서면서 국학연구 분위기를 고양했다는 업적은 높이 평가되어야 한다. (235)
- 최현배... 박승빈... 두 학회가 논쟁하는 가운데 국어학이 크게 성장했고 논쟁의 파급에 따라 국어에 대한 관심과 이해공간이 확대되었다는 점에서 그의 업적을 외면해서는 안될 것... (235-236)
- 조선어학회와 조선어학연구회가 벌인 논쟁은 맞춤법에 대한 의견 차이에서 나온 것... (236)
- 민족이 생활공동체 또는 의식공동체로 형성되고 성장할 때, 공동체 형성에서 가장 큰 역할을 한 것이 언어ㆍ국가ㆍ종교였다는 것이 세계적 추세였다. 그러나 한국의 경우는 종교는 제외되고 언어와 국가의 역할이 가장 컸다. (236)
- 일제 지배 아래서 국어학이 가지고 있던 민족적 책임과 임무... 동시에 식민지시대 국어학의 영광... 이러한 성격의 국어학이었으므로 민족동화를 획책한 일본 식민통치자들이 방관할 수 없어 1942년에 조선어학회 사건을 일으킴... 반대로 한국민족운동에서는 그러한 한글운동을 민족보존을 위하여 고집스럽게 추진했던 것... (237)
- 민족말살과 민족보존의 문제가 민족어문의 존속여부로 결정된다는 사실이 서유럽의 내셔널리즘과 다른 동양민족주의적 특성이기도 했다. (237)
3. 국문학
- 민족은 현실적으로 정치, 경제 등에 의한 국가생활의 보장과 민족정서 또는 민족의식에 의해서 존속해 나간다. 따라서 식민지시기에 정치는 박탈당하고 경제는 수탈당한 위기 속에서 민족정서나 민족의식을 키워 간다는 것은 민족보존을 위하여 소중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237)
- 민족음악은 성장하지 못하였다. (237-238)
- 미술도 거의 조선총독부가 주관한 조선미술전시회 체제에 흡수... (238)
- 근대문학은 신문학이라고 불리며 고전문학과는 별도로 이루어졌다는 것... 신문학 또는 현대문학은 전통시대의 고전문학에서 발전한 것이 아니라 외래 이식문학으로서 존재... 이인식, 이광수 등 구한말 이래의 신문학... 박영희, 김기진 등 1920년 이래의 카프문학... 국문학이라고 하면 고전문학을 일컬을 때가 많게 되었다... 그런데 고전문학을 계승발전시키는 것은 아니었다. 기껏해야 시조 창작이 시도되었을 뿐이다... 창작문학에서는 민족주의가 뿌리내리기 힘들었다... (238-239)
- 김동인, 박종화, 현진건, 홍명희 등의 역사소설이나 채만식, 박태원 등의 세태소설과 이효석, 김효정 등의 토속소설 같이 민족주의 성향이 짙은 경우가 있었다... 작품에서 식민지 현실인식이 나타나고 있었다는 점과 민족역사와 민족사회에 근거한 문제의식이 호소력을 가지고 묘사되어 있다는 점에서 확인할 수 있는 것... (240)
- 카프... 카프의 탈퇴자 가운데 민족의 양심을 버리고 친일문학에 참여한 이가 많았다. 중심없는 세계주의자가 사상성을 상실했을 때 갈 수밖에 없는 친일의 길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 (241)
- 문인들의 최소한의 민조지로 1939년 2월과 10월에 창간한 『문장』과 『인문평론』이 1941년 4월에 일어 사용 요구를 거부하고 해산한 뒤에는 민족문학의 광장은 일어나지 못하고 현대문학의 작가들은 거의 변절하고 말았다.... ‘친일문학’ (241)
- 현대문학가들은 거의 친일문학에 참여... 변절한 이유가 현대문학이 고전문학과는 별도로 생성한 현대문학의 비역사적주의적 인식과 태도 때문이 아닐까 한다. (242)
- 전통시대에 문학이 정치나 윤리도덕에 예속되었던 것과는 달리 예술이나 문학의 독립성을 강조하는 것은 근대문학의 출발이다... 식민지시기에 현진건 같이 문학을 거시적으로 본 몇 인사를 제외하면 이광수처럼 순수예술론에 묶여 있는 경우가 많았다. 그러다가 그만 친일문학에 몸을 맡기고 말았던 것이 아닌가 한다. (242)
- 현대문학이 이식문학으로 자만하고 있을 때 고전문학은 창작활동이 아닌 작품정리에 골몰하였다... 문학의 창작활동이 아닌 문학사의 학술활동... (242)
4. 국사학
- 구한말의 계몽주의사학을 거쳐 1908년 신채호의 『독사신론』과 1909년 황의돈의 『대동청사』로서 궤도에 올랐다. (243)
- 박은식, 장도빈... 1920년대에 이르러 일제의 조선사편찬위원회와 그를 이은 조선사편수회의 식민사학이 조직적으로 확산되면서 큰 위기를 맞게 되었다... 1923년을 전후하여 황의돈의 『신편조선역사』, 장도빈의 『조선사요령』, 안확의 『조선문명사』, 권덕규의 『조선유기』 등이 간행되어 민족사학의 체면이 유지... 이들의 역사방법론은 문화사학으로서 식민사학의 동조동근론과 타율성론에 대해서는 방패논리가 되었지만 정체성론에 대해서는 속수무책이었다. (243)
- 1931년 조선일보에 연재한 신채로의 ‘조선사’와 ‘조선상고문화사’는 유심론사학의 결정판으로서 1936년에 동아일보에 연재한 정인보의 ‘오천년간 조선의 얼’로 계승되었다. 1933년에 백남운의 『조선사회경제사』가 출간되면서 유물론사학이 개척되어 1937년 『조선봉건사회경제사』로 이어졌지만, 그 밖에도 이북만, 이청원, 김광진 등에 의해서 유물론사학이 발전하게 되었다... 문화사학... 후기문화사학... 문일평, 앙재홍, 최익한, 손진태... (243-244)
- 실증사학의 대두... 1934년에 결성한 진단학회... 실증사학을 민족사학 측면에서 보면 역사연구를 원점에서 새롭게 점검한다는 뜻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일제 식민통치의 비위를 거스르지 않으려는 비민족적인 처신이었다는 비난도 받고 있다... (244-245)
- 1930년대 역사학 계보... (244)
- 민족주의사학은 유심론사학과 문화사학의 방법을 통하여 달성한다는 의미를 나타내고 있다. 그 가운데 유심론사학이 국혼, 낭가사상, 얼 등 정신적 일원론에 근거한 논리이기 때문에 민족주의 강도가 좀더 강하게 표현된 역사학이었다. (245)
- 문화사학은 다원론적이어서 민족주의적 응집력이 유심론사학보다는 약했다고 할 수 있다. 그리하여 최남선의 경우처럼 일본문화사학에 흡수되어 간 경우도 있었다. 유물론사학은 보편주의사학이어서 민족주의와는 상대되는 방법의 역사학이었다. (245)
- 유물론 사학자 가운데 ‘아시아적 생산양식론’에 묶여 정체성론을 수용한 경우도 있었다. (245)
- 실증사학은 어떠한 역사방법론에서도 기초 작업인 고증에 머문 것이므로 그것은 민족주의와 결합할 수 있었던 반면, 식민사학과도 결합할 수 있는 것이어서 민족주의 기준에서 보면 명암이 엇갈리는 것이었다. (245)
- 1940년대 전시체제... 박은식, 신채호, 문일평 등은 사별... 장도민, 안확, 황의돈, 정인보, 권덕규, 백남운, 이청원, 한흥수, 김태준 등은 은퇴하거나 해외로 망명... 신진학자로 등장한 홍이섭, 김석형, 박시형, 전석담 등이 새로 논문을 발표하고 있었지만 실증사학의 범위를 넘어선 것이 아니었다. (246)
- 장도빈, 안재홍, 손진태, 전석담... 8ㆍ15 후에 민족사학을 새롭게 발전시킨 연구기간... (246)
- 1940년대에는 모두 실증사학으로 후퇴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246)
5. 국학과 민족주의
- 국학... 민속학이나 국문학 분야에서도 가사와 민요에 대해서도 검토되어야 한다... 1931년 결성한 조선민속학회는 일본인도 참가하여 민속조사에 다소의 성과는 올렸으나 손진태의 업적 외에는 민족적 의미를 찾기에는 회의적이다. (247)
- 국어학자들은 조선어학회사건이 일어나 고문을 당하는 감옥에서도 변절하지 않고 민족학자로서 양심을 끝내 지켜왔는데 비하여 문학가들은 친일문학으로 변절한 사람이 많았다. 그런가하면 국사학자의 경우는 식민지 권력 앞에서 지조를 지킨 사람, 그렇지 못한 사람 등이 혼재했다. (248)
- 어문이 민족형성에 가장 큰 역할을 담당해 왔으므로 국어학의 독자성이 국문학과 국사학보다 더 선명하고 강했다는 점은 있었을 것... 식민지시대에 지식인들이 양심을 지키며 살아간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웠던가를 전해주고 있는 문제... (248)
[제3절] 해방 직전의 독립운동
- 8ㆍ15 후 미소 군정 아래서 한국인이 자유인이었다고 말할 수 없고, 또 지금까지 분단국가에 살고 있는 처지에서 8ㆍ15에 대하여 애매하다고 생각하는 것은 당연한 일일 것이다. (249)
- 한국은 광복을 쟁취하려고 쏟은 노력이 시간적 공간적으로 충분했다고 믿고 있으므로 미소에 의한 국제제패에 불만이 많은 것이다. (249)
1. 독립운동의 시기적 특성
- 한국독립운동의 특징은 1894년부터 1945년까지 시간적인 지속성, 국내외 걸친 공간적인 세계성, 독립운동 이념과 방략의 다양성, 독립전쟁을 주류로 한 민족주의의 심화과정이었다는 점이다. (251)
- 1910년대는 일제도 식민지 법령을 발포하고 토지조사사업을 마무리하는 등 식민통치의 기반을 조성하는 기간이었지만, 한국인도 독립운동의 체제를 정비하는 시기였다...1920년대는 3ㆍ1운동의 발전시기로서 민족총력전쟁의 시기였다. 정치적으로는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수립되었고, 만주에서는 여러 독립군 단체의 독립전쟁이 전개되었다... 1930년대는 1920년대의 산만했던 독립운동을 정리하여 한결 정비된 독립운동을 전개하는 시기였다. 국내에서는 이론의 정비가 추진되었고 해외에서는 통일전선의 정비가 꾸준히 추진되었다... 1938년 이후 중일전쟁 후 일제의 전시체제가 강화... 해외독립운동은 중일전쟁과 더불어 활기를 띠었다. (251-252)
2. 독립운동 이념과 방략의 정비
1) 독립운동의 방략
- 방략은 처음부터 끝까지 독립전쟁과 실력양성론으로 양립되어 있었다. 그 밖에 자치론이 있는데, 그것은 독립운동과는 성질이 다른 것이다... 준비론과 외교론은 전쟁론과 실력양성론, 자치론에 종속된 것이다. (253)
- 구한말의 의병전쟁과 계몽운동이 독립전쟁론과 실력양성론이 양립한 전형적인 경우인데, 의병전쟁은 위정척사사상과 민중항쟁 의식을 기반으로 한 독립전쟁론이었고, 계몽운동은 사회진화론을 기반으로 한 실력양성론이었다. (253)
- 식민지시기에 이르러... 독립전쟁론은 비타협적 민족주의로, 실력양성론은 개량주의로 정비되었다. 이때 개량주의는 사상적 원류로 보면 구한말 계몽주의 우파(대한협회)에 있었는데, 1910년대에는 조선산직장려계로, 1920년대에는 협동조합운동이나 물산장려운동으로 이어졌다. (253)
- 민족주의 좌파에 해당하는 문화운동... 조선어학회의 한글운동... (253)
- 인도 같은 나라의 독립운동에서는 자치론이나 실력양성론이 긍정적 각광을 받았는데 한국독립운동에서는 비하되고 말았다. 이유는 식민 조건의 직접 통치와 간접 통치의 차이에 유래하는 것이다. (253-254)
2) 지도이념의 정착
- 독립운동의 지도이념은 정치이론을 중심으로 변천... 3ㆍ1운동 전까지는 복벽주의와 보황주의와 공화주의로 대입... 3ㆍ1운동을 계기로 복벽주의와 보황주의는 쇠퇴하고 공화주의만 남게 되었다... 공화주의는 자연 민주주의 사상속에 용해되었다. 민주주의는 다시 자유민주주의와 사회민주주의로 갈라졌으며, 그 가운데서 또 한 갈래가 무정부주의였다... 3ㆍ1운동 전에는 공화주의에 앞서 약육강식의 사회진화론이 지배적이었는데 3ㆍ1운동과 더불어 사회진화론이 일단 물러나고 약자의 생존권을 강조하는 인도주의가 부상하여 그 인도주의의 실현방법으로 자유주의, 사회주의, 무정부주의가 자리잡아갔다. (254)
- 1920년대가 사상논쟁이 만발한 시기라고 해도 수준은 팸플릿 수준을 면치 못하였다. 가령 민족주의도 국수주의와 분간되지 않는 경우가 많았다. (254)
- 1930년대... 사상이 한결 정비... 자유주의가 표방한 자본주의와 공산주의를 극우와 극좌로 한, 중도론으로서 수정자본주의와 민주사회주의가 중도우파와 중도좌파의 이념으로 대두하였다. (255)
- 만주의 1920년대 우파 독립운동을 대표하던 참의부, 정의부, 신민부가 진보성 강령을 표방하고 있던 사실, 국내 사회주의자 가운데 적지 않은 인원이 1930년대 극좌 노선을 포기하고 민주사회주의를 추구하고 있던 사실, 그리고 임시정부가 1930년대 대공주의 또는 삼균주의를 표방하던 사실 등이 당시의 사상 경향을 말해주고 있다... 좌우파가 서로 교류하는 가운데 얻은 결론이기도 했지만, 1929년부터 전 세계를 휩쓴 경제공황을 겪으면서 창출한 극복방안이기도 했다. 그래서 중국 관내 독립운동단체들은 우파로 자처한 임시정부의 건국강령이나 한국독립당의 강령과 좌파를 자처한 조선민족혁명당이나 조선독립동맹의 강령이 모두 큰 차이가 없었던 것이다. (255)
3) 통일전선의 모색
- 통일전선이란 다른 이념의 정당 단체가 당면한 과제, 즉 독립의 쟁취를 위하여 협동 연합 통일 등의 운동 전략을 취하는 것을 말한다. (255)
- 역사상 통일전선이 처음 모색된 것은 1923년 임시정부를 중심하 국민대표회의였다. 그러나 본격적인 것은 1926년 북경에서 결성된 민족유일당 북경촉성회에서 비롯... 각처에서 일어난 민족유일당 또는 민족대당결성운동으로 나타났다. 만주에서는 정의부ㆍ참의부ㆍ신민부의 3부 통합운동으로 성격이 바꾸어졌지만, 임시정부에서는 1927년 헌법까지 개정하여 이당치국을 위한 통일정당 형성을 지원하였다. (256)
- 국내 신간회... 상해 대일전선통일동맹, 남경 조선민족혁명당ㆍ한국독립운동단체연합회, 한구 조선민족전선연맹, 기강 7당회의 등이 모두 통일전선의 형성을 위한 조직이거나 모임이었다. (256)
- 통일전선은 1928년 코민테른 6차대회의 극좌노선으로 말미암아 한때 붕괴되기도 했다. 1931년 신간회 해체... 민생단 비극... 1935년 코민테른 7차 대회에서 그들 자신이 철회한 것을 보아도 얼마나 큰 오류였던가를 알게 한다... 만주에서 조국광복회가 결성되어 통일전선 모색... (256)
- 1942년 임시정부의 통합의회... 연안의 독립동맹과 교섭하여 1945년에는 장건상을 파견하여 독립동맹 위원장 김두봉과 통일전선 형성을 합의... 그것이 1948년의 남북협상으로 이어졌던 것이다. (257)
- 미국과 소련의 패권주의로 민족의지가 봉쇄당함... (257)
[제4절] 해방 직전의 민중결사
- 불특정한 대중 가운데 운동 주체로 성장한 지성적 대중을 민중이라는 개념으로 이해... (258)
- 1938년 이후의 일제말기에 국내지도층은 좌우를 막론하고 거의 붕괴되고 있었다. 동아일보와 조선일보도 친일화... 조선공산당 전향파나 수양동우회ㆍ흥업구락부도 일제의 강권에 굴복하고 말았다... 종전기의 국내 독립운동은 거의 민중 자체의 조직과 노력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 (258)
1. 학생운동
- 일제 경찰이 중일전쟁 후의 학생들의 시국관을 요약한 것... 1) 중일전쟁은 일본의 침략전쟁으로 발발한 것이다. 2) 전쟁으로 일본의 경제사정이 어려워져 조선에 대한 착취를 더욱 강화할 것이다. 3) 중일전쟁이 장기화하여 일본이 힘이 약화되면 소련이 최후의 일격을 가할 것이기 때문에 일본의 승리는 기대하기 어렵다. 4) 일인 관리, 교사, 신문, 잡지 등은 일본에 유리한 해설만 하므로 믿을 수가 없다. 5) 좌경한 학생들은 중일전쟁을 일본 제국주의의 최후발악으로 보았다. (259-260)
- 학생들의 시국관은 외형상의 승전양상을 보면서 지도층의 인사가 전향하는 경향과 대조를 이루고 있다. (260)
- 종전기의 학생운동은 민중의 항일운동을 대변하는 듯 왕성하였다. 학생은 민중이 아니라 원래 시민 성향이 강했다... 식민지 지배 아래서 민중의 수탈상태를 보면서 학생 지성은 민중적으로 발전해갔다... 생활 자체에서 농민과 노동자처럼 직접적인 피해가 적었다고 하더라도 그들은 연구하고 비판하는 신분이었으므로 양심과 정의에 호소할 의식과 임무를 가지고 있었다. (261)
2. 농민운동
- 일제의 직접적 수탈 대상이 된 농민은 그 피해 측면이 그 어느 계층보다 클 수밖에 없었다... 일제하 농민운동은 소작쟁의가 주류... 1919년 황해도 흑교농장의 쟁의를 효시로 함... (262)
- 1939년 12월 소작료통제령이 발표될 때까지 총 14만 969건의 쟁의가 있었고, 조선소작조정령과 조선농지령 발표의 전후인 1933년부터의 건수를 13만 6,251건으로 계산하고 있다. (262)
- 종전기에 해당하는 1938년부터 1939년까지 쟁의원인의 82.7%가 소작권 관계라고 한다면 소작료 감량을 요구하는 초기적 쟁의 성격과 달리 수탈체제에 도전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262)
- 농산물의 강제 공출에 산발적으로 항거하여 일제 관리와의 충돌이 일반화되어 있었고, 보국대와 징용 징발, 그리고 여자정신대에 대한 항쟁도 중단 없에 계속되었다... 징용이나 징발의 노무현장에서 항쟁한 것도 자유노동자가 아니었으므로 노동운동이 아니라 농민항쟁의 연장선 위에서 이해할 필요가 있다. (263)
- 1939년 소작료통제령 이후 사소한 농업문제까지 법적 규제로 묶고, 공출과 징용 등으로 물적 인적 농촌조직이 파괴된 상태... (263)
3. 노동운동
- 다른 민중운동에 비하여 운동전개상 편리한 점... 집단 생활, 고용주에 대한 피해 감각이 동질적이고 피해 반응을 동시에 일으키기 때문... 1935년을 전후하여 일제가 군수공장을 가동시킴에 따라 노동인원의 증가와 노동활동의 폭이 넓어졌다는 점, 징용ㆍ보국대 등의 노무동원으로 그들이 자유노동자는 아니었더라도 기왕의 자유노동자와 합류하여 노동운동을 발전시켜 간 점, 1930년대 전반기부터 지하로 잠적한 공산주의 운동이 합세한 점... (263-264)
- 파업을 수단으로 한 노동쟁의 외에 태업과 이동 또는 도망의 수단으로 항쟁... (264)
[제5절] 일제말기의 정치사회단체
- 종전기에는 민족적 성향이 다소라도 있는 여하한 단체도 있을 수 없었다. (265)
1. 경성콩그룹
- 민족진영의 많은 인사가 자치론자로 전락해갈 때 공산진영의 지도층에서도 역시 좌절과 전향으로 변절해간 인물이 많았다. 사회주의자의 전향은 1933년 일본 사회주의운동의 국제적 인물이었던 좌야학이 전향하면서 확산... 중일전쟁 후부터 많은 인원이 전향... (265)
- 비전향 공산주의 인사... 화요계ㆍML계ㆍ상해계의 고질적인 분파를 초월하여 1939년에 조선공산당 재건작업에 착수하여 경성콩그룹을 결성하였다. 한국공산주의운동에서는 파벌을 초월한 최초의 조직... (266)
- 박헌영을 중심한 경성콩그룹은 조직을 강화하면서 항일 서클활동을 전개하다가 1940년 12월부터 이듬해 12월까지 3차에 걸쳐 거의 검거... 8ㆍ15 이후에 조선공산당의 정통성이 형성되었다는 점... (266)
2. 건국동맹
- 건국동맹은 1944년 8월에 여운형이 결성한 건국준비단체였다. 여운형은 1919년 말 임시정부 외무차장으로 동경 행차를 가진 이래 민족 지도자 가운데 일본 고관을 자주 면담한 유일한 인물이다. (266)
- 건국동맹은 각도에 비밀지부를 두고 8ㆍ15에 대비했을 뿐 아니라 농민동맹 같은 별동조직을 만들어 민중조직으로 발전시키면서 봉안촌 등을 근거로 항일운동을 전개했다. 또 중국 연안의 무정과도 연락하여 조선의용군에 의한 8ㆍ15전야의 유격전을 모색하기도 했다. (266)
3. 조선어학회 등의 문화단체
- 조선어학회는 정치단체가 아니다. 그러나 어느 정치단체보다 독립운동사적 공적을 평가받아야 할 단체였다. (267)
- 한글의 보전으로 민족을 보전했고, 한글의 보급으로 민족의 역량을 성장시켰다는 점에서 독립운동의 큰 몫을 담당했다고 이해되어야 한다... 『조선어사전』 발간에 임박한 1942년 10월에 일제는 조선어학회사건을 일으켰던 것... (267)
- 지도층의 허약... 박인호, 주기철, 한용운 등의 몇몇 인사를 제외한 종교계도 전향... 애국을 자처하던 수양동우회와 흥업구락부 인사도 거의 전향해 갔다... (267)
- 이윤재, 한징, 이극로, 최현배 등의 조선어학회 인사들은 일제의 감옥에서도 끝내 굴하지 않고 민족의 양심을 지켰다. 한글맞춤법을 완성하고 큰사전 원고를 완성했던 조선어학회의 공적은 식민지시기에 이룬 한국민족주의의 결실로서 그 어느 성과에 못지 않은 값진 것이었다. (267-268)
4. 재미한족연합위원회
- 미주 동포사회의 단체는 대한인국민회 외에 재래의 흥사단과 동지회가 있었는데, 종전기에 새로 결성한 중한민중동맹단, 한국독립당 하와이지부, 조선의용대 미주후원회가 결성되었다... 1941년 4월에 이들 단체가 연합하여 재미한족연합위원회를 결성하고 독립운동 지원체제를 일원화하였다. (268)
- 1942년 초에 중한민중동맹단과 이듬해에 동지회가 탈퇴하여 동요가 일어났다. 조선의용대 후원회도 1943년 조선민족혁명단 미주지부로 개편하면서 탈퇴하였다... 사상적 이념분쟁이 일어났다. (268)
- 재미한족연합위원회는 임시정부의 재정을 지원했고 동포사회에서 청년을 모아 맹호부대를 창설하고 미군 OSS부대에 입대를 알선하는 등 독립전쟁의 몫을 맡기도 했다. (268)
5. 조선독립동맹
- 1942년 7월 화북에서 화북조선청년연합회 제2차 대회에서 조선독립동맹이 결성되었다... 무정을 비롯한 중국공산당 팔로군 출신, 무창ㆍ한구에서 화북으로 이동한 조선의용대 출신이 주축이 되어 있었다. 조선의용대는 1941년 3월에 화북으로 이용하여 조선의용대 화북지대로서 태항산 일대에서 항전... 호가장 전투... 1942년 5월 편성 전투를 치르면서 타격을 입은 뒤에 중공군의 무정을 사령관으로 한 조선의용군으로 개편... 중경에서 연안으로 온 김두봉을 맞아 독립동맹을 결성... 1943년에 일본군의 공격을 맞아 혈전 후에 연안으로 이동... 그 뒤에는 조선항일군정학교를 운영하면서 항전... (169)
- 독립동맹의 강령은 임시정부의 건국강령과 큰 차이가 없으므로 서로 통일전선을 형성하기로 합의한 그때에 8ㆍ15를 맞아 실현하지는 못하였다. 8ㆍ15 후에 중국공산당의 동북정진군을 따라 북상하여 북한으로 들어갔는데, 북한에서 조선신민당으로 개편한 뒤에는 성격이 변해갔다. (269)
[제6절] 일제말기의 독립군
- 8ㆍ15 해방 당시 독립운동 무장단체는 임시정부의 광복군, 독립동맹의 당군인 조선의용군과 소련의 소수민족 국제군인 88여단에 소속해 있던 한인부대 등 세 부대가 있었다. (270)
1. 한국광복군
- 한국광복군은 1940년 9월 17일에 창설... 1938년 11월에 결성한 한국광복진선청년공작대와 1939년 임시정부 군사특파단을 기초로 창설하였다. 1941년에 이미 태항산 일대에서 공작활동을 전개하고 있던 청년전지공작대를 제5지대로 편입시켜 실제에는 1ㆍ2ㆍ5지대로 편성되어 있었다. 제1지대(이순식)는 산서성 임분지방, 제2지대(공진원)는 수원지방, 제5지대(나월환)은 서안에 본부를 두고 노안지방에서 공작활동을 펴고 있었다. (270)
- 1942년 5월에는 조선의용대 병력 가운데 중경에 남아있던 본부병력의 편입으로 다시 1ㆍ2ㆍ3지대로 개편... 이 개편을 기준으로 광복군을 전기와 후기로 나누기도 한다. 제1지대는 조선의용대 병력, 제2지대는 전기 광복군의 1ㆍ2ㆍ5지대를 통합한 것, 제3지대는 부양ㆍ서주 일대에서 모병하여 활약... (270-271)
- 광복군 병력은 1933년 중국의 중앙군관학교 낙양분교를 이수한 인원을 비록하여 그 후에도 중앙군관학교 또는 각처의 분교 출신자가 주축... 초모인원은 현지 중국군관학교 분교에서 훈련을 받게 한 후에 광복군 병력으로 입적시켰다. 한청반ㆍ한광반... 중경 토교에 있던 토교대란 것이 때로는 보충대, 때로는 교육대로 역할하였다. (271)
- 광복군 인원은 1945년에 크게 증원되었다. 보계수용소와 유가만수용소에 있던 한인병사를 인수했기 때문이다. 그해 5월 1일 중국정부는 일본군을 수용한 포로수용소의 한인병사에 대한 광복군 인계조치를 시달하여 집단인원의 인수인꼐가 이루어졌다. (271)
2. 조선의용군
- 조선의용군은 조선독립동맹의 당군이었다. 원래는 조선의용대 화북지대였으나 1942년 7월 10일에 조선의용군으로 개편하였다... 1938년 10월 무한에서 창설했는데 젊은 대원들의 요구를 받아들여 1940년 11월에 화북진출을 결정하고 낙양으로 집결하여 1941년 3월 황하를 건너 처음에는 하북성으로 북상... 신약, 윤세주 등이 주도하여 만주로 이동할 계획을 가지고 있었다. 제1대(이익성), 제2대(김세광), 제3대(왕자인)로 편성하여 석가장 남쪽 경광선 일대에서 활약하였다. 그러다가 그해 12월 12일과 26일에 호가장 전투와 형태 전투에서 큰 타격을 입고 태항산중 사현으로 이동하였다. 거기서 1942년 5월 28일 편성전투에서 윤세주가 전사하는 등 타격을 입었다. (271-272)
- 중경에 남아있는 조선의용대 본부에서는 광복군 제1지대로 편입... 화복지대는 본대 없는 지대로 남게 되어 독자적인 조선의용군으로 개편... 이때의 개편은 중국공산당 또는 팔로군과 협의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팔로군 포병사령관인 무정이 조선의용군 사령관에 취임... 때마침 중경에서 연안으로 온 김두봉을 영입하여 조선독립동맹을 결성... 실제로 독립동맹과 조선의용구은 이신동체격이었다... 중국 공산당은 조선의용군을 안전한 연안으로 이동시켰다. 1944년 4월에 연안의 나가평으로 이동... (272-273)
- 조선의용군 편제... 조선항일군정학교를 본부로 하여 박효삼이 거느린 4개 구대가 있었고, 이익성ㆍ이상조ㆍ김세광이 주관한 익동ㆍ산동ㆍ동북ㆍ진서북에 주둔한 4개 선견대가 있었다. 조선의용군 인원은 1941년에 북상한 조선의용대 화북지대를 주축으로 해서, 원래 중공군에 있던 10명 정도의 인원, 1938년 조선의용대가 계림에 있을 때 연안으로 갔던 최창익 등의 18명 외에 동북지방이나 국내에서 망명해온 인원도 있었으나 수적으로는 선견대에서 초모한 인원이 많았다. (273)
3. 광복군과 조선의용군의 활동
- 활동은 전선에 잠입하여 정보수집ㆍ선전활동ㆍ일본군 포로심문 등 비슷한 내용... 독립군 교육을 필한 후에 입적시킨 것은 극히 당연하고 현명한 처리... (273)
- 광복군의 인도ㆍ버마 전선에서 활약... 광복군의 OSS훈련... 국토회복작전 수행... 조선의용군의 선견대가 동북과 산동성 등 국내와 근접한 일본군 점령지 안에 있었고, 특히 만주에서는 국내와도 연락하고 있었다는 사실이 주목된다. (274)
- 8ㆍ15 해방을 맞자 광복군은 관내에 있던 청년동포와 일본군에 있던 한적 병사를 받아들여 3개 지대와는 별도로 북경, 남경, 상해, 항주, 한구, 광주 등 주요도시를 중심으로 7개의 잠편지대를 편성하여 국내로 개선할 채비를 갖추고 있었다. 조선의용군은 9월 15일 중공군의 동북정진군과 함께 만주로 가서 국내로 개선할 대오를 갖추고 있었다. (275)
- 과복군이 1989년 창설 49주년에야 비로소 창설기념식을 가질 정도로 외면당한 남한 정국과, 조선의용군이 북한에서 연안파 숙청으로 역사의 미아가 되어버린 사실을 반성하면서, 중국 관내의 독립군 또는 독립운동은 분단 정국에 의해서 희생되고 말았다. (275)
4. 소련 88여단의 한인부대
- 소련의 88여단은 소련 아무르주 하바로프스크 북방에 있던 소수민족부대로서 부대장은 중국인 주보중이었다... 그곳의 한인부대는 1940년에 만주에서 활약하던 중국 동북항일련군의 한인부대가 이동하여 편입한 빨치산 부대를 가리킨다. 동만주에서 활약하던 김일성 부대, 동북만주에서 활약하던 최용건 부대, 북만주에서 활약하던 김책 부대가 그들이었다. 소련군에 들어가 최용건은 본무참모, 김일성은 제1영장으로 활동... (275)
- 8ㆍ15 후에 김일성은 원산을 거쳐 평양으로 들어왔는데 최용건은 만주로 파견되었다. 소련이 보기에 최용건은 너무 중국적인 인물로 진단된 것 같다. 최용건은 중국의 운남강무당 출신으로 27년까지 황포군관학교 교관까지 역임하였다. 그에 비하여 김일성은 중국색이 짙지 않았다. 그러므로 소련군이 진주한 북한에서 김일성의 선점이 가능했던 것이 아닌가 한다. (276)
[제7절] 중경의 임시정부
- 임시정부의 수립이 없었다면 3ㆍ1운동의 가치도 감소되었을 것이다. 그것은 한국인의 독립의 의지, 자유의 의지, 통치의 의지, 통일의 의지를 표상한 것이 곧 임시정부였기 때문이다. (277)
- 7개의 임시정부가 출현했으나 1919년 9월 통합정부가 실현됨으로써 통일의지를 구현하였고, 민주공화정을 표방함으로써 한국사에서 처음으로 봉건주의를 불식하고 자유주의 역사의 제도적 기초를 닦았다. (277)
- 1923년 국민대표회의를 고비로 임시정부는 침체되어 갔다... 여기서 대통령 이승만의 독주와 국무총리 이동휘의 소련자금 문제가 겹쳐 더욱 혼란에 빠져 들었다... 1930년경의 임시정부는 침몰할 듯한 위기 속에서 김구 등의 몇몇 인사가 간판을 지켜가는 비참한 형상이 되고 말았다. (278)
- 윤봉길 의거... 1940년 9월 9일 중경에 안착할 때까지 8년여 동안 항주, 진강, 장사, 광둥, 유주, 기강으로 이동의 수난... (278)
- 발생가치(3ㆍ1운동)와 역할가치... 존속 여부가 의심을 ㅂ다음... 1935년 김규식, 김원봉이 주도하고 양기탁, 조소앙, 신익희, 이청천이 합세하여 조선민족혁명당을 결성할 때 그들은 임시정부의 해체를 구상했다. (278)
- 임시정부의 중경시대... 1940년 광복군을 편성하여 중일전쟁에 조직적으로 대처... 삼균주의에 근거한 건국강령을 다듬어 광복 한국의 길을 분명하게 닦았다. 민족진영은 한국국민당, 한국독립당, 조선혁명당 3당 통합으로 임시정부의 여당격인 한국독립당을 결성했으며 또 조선민족혁명당과 조선민족해방동맹 등의 좌파 인사화 무정부주의연맹 인사도 임시정부에 참여하여 1942년 10월 통합의회를 성립시켰다. 그에 앞서 조선민족혁명당의 조선의용대도 광복군에 편입하여 임시정부는 크게 확충되었다. (279)
- 통일전선의 형성... 1941년 워싱턴에 주미외교위원부를 두고, 대통령에서 탄핵당한 후 분열을 일삼던 이승만을 다시 책임자로 임명했던 것도 통일전선 형성의 일환으로 이해해야 한다. (279-280)
- 1942년 4월부터 한국의 국제관리설이 보도되어 독립운동계를 긴장시켰다... 임시정부는 새로운 외교문제에 당면... 전시외교를 더욱 강화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종전기 임시정부는 독립전쟁과 국제관리설에 대한 독립외교에 전력을 쏟았던 시기라고 이해된다. (280)
[제8절] 8ㆍ15 해방과 독립운동 진영의 시련
- 8ㆍ15 당시의 독립운동 단체는 중경의 임시정부(광복군), 연안의 독립동맹(조선의용군), 미주의 재미한족연합위원회, 소련의 88여단 한인부대로 나눌 수 있다... 8ㆍ15 당시 해외에서 독립운동의 정치 군사 양면 조직을 가지고 있던 것은 임시정부와 독립동맹이 대표된다고 보아도 좋을 것이다... (281-282)
- 8ㆍ15 후 환국할 때는 미군과 소련군에 의해서 무장이 해제되고, 임시정부와 독립동맹, 광복군과 조선의용군의 인사는 개인자격으로 환국하였다... 그때 미국이나 소련은 남북엑서 각각 자기 세력이 집권하도록 준비를 진행하였다. (282)
- 남과 북의 분단이 고정되어 가는 속에서, 북에서 박헌영, 무정, 김두봉 등의 숙청은 소련의 기반을 확대해가는 과정을 의미하는 것이며, 남에서 김구ㆍ여운형의 암살과 반민특위사건은 미군정 아래 친일파의 정착과정을 한 눈으로 보게 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가운데 남과 북에서 민중과는 유리된 정치세력이 성장하여 갔다. (282-283)
- 1942년부터 국제관리설이 제기되었고, 임시정부나 독립동맹이 그토록 반대해왔던 국제관리설이 신탁통치로 이름을 바꾸어 전달되어 왔을 때, 찬탁이 아무리 차원을 달리하는 정치적 의미가 있었더라도 국제제패를 심화시키는 처사라고 믿었다. (283)
- 자유주의자가 찬탁을 할 수 없고, 공산주의자가 반탁을 외칠 수 없는 비민족적 함정에 들어감... 남한에서는 반탁과 반공 구호가 유착하여 미군정 아래서 친일군상이 난무하는 계기가 되었다. 8ㆍ15 이후 친일 풍조의 불식 문제, 적산관리 문제, 농지개혁의 문제, 식민교육 잔영의 청산 문제 등이 당장의 민족적 과제였으나 어느것 하나 제대로 논의하고 단죄해 본 것이 없었다. 그보다는 미소를 대변한 좌우의 세력 성장이 당면과제가 되어버렸다. (283-284)
- 미소의 냉전이 한국에서 긴박하게 나타나 한국의 극단적 남북대립을 조성하였다... 독립운동의 역사적 시각은 색맹증에 걸려 정사ㆍ선악을 구별할 수 없는 세상이 되어갔다... 얼마나 많은 사람을 이데올로기의 노예들이 죽였고, 애국이란 미명으로 서로 처단했던가? (284)
- 북에서는 약간의 중도적 기색만 보여도 반동으로 몰아넣었고, 남에서 다소라도 복지국가적 지향을 나타내면 좌경으로 단죄하던 우매했던 역사를 반성해야 한다. (284)
- 8ㆍ15 해방의 역사 속에서 독립운동의 전통과 이념은 퇴색되면서 시련을 겪어야 했으며 그에 따라 민중은 방향감각의 탈피를 잡을 수가 없었다... (284-2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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