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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기독교의 역사 1] 제2장 : 천주교의 한국 전래
1. 일본과 중국을 통한 천주교 접촉
1) 임진왜란기 천주교 유입설
- 1592년 임진왜란... 전쟁 중에 서양인 신부가 내한하였으며, 일본으로 끌려간 조선인 포로들 중 상당수의 천주교 개종자가 나온 것... (47)
- 고니시 부대에는 천주교 신자가 많았으므로, 장병들의 사기진작을 위한 것... 1594년 초 기독교 성직자로는 최초로 세스페데스가 내한하여 웅천의 일본군 진지를 순방하며 성사를 집행... 1597년에도 기리시단 다이묘인 아리마 하루노부의 요청으로 라구나 신부 등이 내한... 침략군의 종군사제... 대상도 일본군에 국한... 조선인 포로들 중에서 상당수의 개종자가 나왔고, 그들 중 복자위에까지 오른 순교자들이 있다는 점은 한국 기독교사에서 일정한 의미를 갖는다. (48)
- 일본에 잡혀간 포로들 중에 약 7천명이 천주교인이 된 것으로 추산... 그중 예수회 회원이 되어 신학훈련을 받고 조선선교를 시도한 권빈센트 같은 이도 있었다... 1614년 도쿠가와가 선교사 추방령을 내리고 대대적으로 천주교를 박해하였는데, 이때 많은 포로 출신 조선인 신자들이 순교... 순교한 오타 줄리아 등 6명의 조선인 ‘증거자’들이 일본 천주교회사에 기록... (49)
2) 소현세자와 선교사의 교류
- 명청교체기... 1920년, 명의 고위관리이며 천주교인인 서광계는 조선군이 후금에게 패배한 것을 계기로 조선에 천주교 선교를 시도...1636년 병자호란... 왕세자 소현세자와 왕자 봉림대군을 심양으로 데리고 감... 소현세자는 북경에 머무는 동안 에수회 신부 아담 샬과 교류... 1645년 귀국하게 된 소현세자는 아담 샬에게 선물을 보냈고, 아담 샬도 답례로 천문ㆍ역산에 관한 서책과 천구의 등 과학기물, 그리고 『성교정도』 등 천주교 서적 몇 권과 구세주상 한 장을 증정하였다. 하지만 소현세자는 천주교 서적과 구세주상은 정중히 사양하며 돌려보냈다. 그 대신 그는, 조선의 수도에도 선교사가 주재하면서 정부를 위해 봉사할 수 있도록 선교사 한 명을 동행시켜 달라고 요청... 소현세자는 귀국한 지 70여 일만에 돌연히 발병하여 사망... 소현세자를 통해 조선선교를 시도하려던 선교사들의 계획은 무산됨... (49-51)
2. 서학의 유입과 신앙공동체의 형성
1) 서학의 유입
- 17세기에 들어서면서 한역 서학서적과 선교사들이 제작한 세계지도를 비롯한 과학기물들이 국내에 유입... 새로운 학문 분위기가 조성되면서 ‘서학파’라 불리는 학자들이 나타남... 외교사절인 ‘부연사행’이 중요한 매개역할... 정두원, 이이명, 홍대용처럼 선교사들을 만나 대화를 나누고 서학서적과 서양기물을 선물로 받아오는 경우도 있었다... 종교적인기보다는 학문적인 데서 비롯... 18세기 중엽부터 서학을 본격적으로 연구하려는 분위기가 형성... 대표적인 인물이 이익... 이익의 서학연구는 제자들에게도 이어지면서 조선후기 실학의 형성에 영향을 주었다. ‘벽사’적 입장에서 서학을 비판하는 신후담, 안정복... 적극 수용하려는 이벽, 권철신, 권일신, 정약용, 정약전, 정약종, 이가환... 후자는 기호 지방의 남인계 학자들... (52-53)
- 이익에서 비롯된 서학파가 ‘이(理)’적 측면을 강조하였다면 ‘기(氣)’적 측면을 강조한 서학파는 ‘북학파’... 홍대용, 박지원, 이덕무, 박제가... “부국유민을 위한 이용후생에 기여”하도록 촉구... (53)
2) 신앙공동체의 형성
- 최초로 서학(천주학)의 종교적 계율을 실천에 옮긴 이는 홍유한... 1770년 서학서적을 읽은 뒤 7일마다 하루씩 노동을 하지 않고 기도와 금욕생활을 실천... (53)
- 권철신, 정약전이 주도한 1777년 겨울의 교리연구회... 천진암, 주어사 등지에서 강학회 형태로 열렸다. (53-54)
- 주어사 강학회... 김원성, 이총억, 권상학 외에 권철신, 정약용, 정약전, 이벽... 초기 강학회의 주도인물 중에서도 이벽이 가장 적극적... 정약전의 처남인 그는 무반 출신이면서 서학서적을 탐독... (55)
- 이승훈이 1783년 동지사로 북경에 가는 아버지 이동욱과 동행하게 됨... 이벽은 이승훈에게, “북경에 가거든 천주당을 찾아보고 그곳에 있는 서양선비(선교사)를 만나 신경도 얻어오고 아울러 영세도 청하여 받고 오도록” 부탁하였다... 이승훈은 입교를 결심하고 귀국직전인 1784년 1월말 그라몽 신부에게 “베드로”란 영세명으로 세례를 받았다. (56)
3. 조선 천주교회의 창설과 박해
1) 조선 천주교회의 창설
- 이벽은 이승훈과 정약용, 정약전 형제에게 적극적인 신앙의 실천을 요구하며 천주교 전파에 나섰다.... 양반계층 이가환, 이기양 등 학자들과 공개토론까지 벌이면서 입교를 권유하였나 실패... 권철신, 권일신에게 전도하여 권일신을 입교시킴... 중인계층에게도 전교하여 역관인 김범우, 김종교, 지황, 최인길, 최창현 등이 입교... 역관출신은 전통유학에 사로잡힌 양반계층보다 새로운 사상과 종교를 받아들이는 데 개방적이었다. (57)
- 1784년 9월... 이승훈은 이벽과 권일신에게 세례를 베품... 이벽에게는 세례자 요한, 권일신에게는 프란치스코 사베리오라는 세례명이 주어짐... 권일신은 장인인 안정복에게 전교하였으나 실패... 권철신의 외숙 홍교만도 입교... 권일신은 충청도 내포 출신인 이존창과 전라도 전주 출신 유항검을 입교시킴... 예산출신 홍낙민, 이기양의 아들 이총억과 외숙 정섭, 진산 출신 윤지충 등이 입교... (57)
- 1786년 가을 북경의 천주교회와 유사한 형태의 사제단을 구성하여 교리서에 나오는 다양한 성사들을 거행하기로 계획... 1787년경, 유항검은 교리서들을 숙독한 결과 그들이 시행하고 있는 교회제도가 불법적인 것이며, 특히 무자격자의 성사집행이 ‘독성죄’에 해당된다는 점을 알게 됨... 이승훈ㆍ권일신은 성사집행을 중지하고 윤유일을 통해 북경의 신부에게 서한을 보냄... 구베아 주교를 비롯한 북경의 신부들에게는 매우 충격적인 보고... “아무 신부도 일찍이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전파한 일이 없는 나라에서 와서, 그 나라에 신앙이 얼마나 기묘하게 보급되었는지를 설명하는 이 천주교인의 존재는 선교사들과 특히 구베아 주교에게 가장 즐거운 광경이었다.” (58-59)
- 구베아 주교의 서한을 읽은 조선의 천주교 지도자들은 그 지시를 받아들이는 한편 성사를 집행할 신부를 요청하기로 하였다... 구베아 주교는 윤유일을 통해 보낸 서한에서 신부의 파견을 약속하였다. 윤유일은 북경을 방문하였을 때 조상제사에 대한 선교사들의 견해를 물었고, 프란치스코회 소속인 구베아 주교는 조상제사를 금지하는 천주교회의 입장을 단호하게 밝혔다... 이 점이 조선 천주교회가 처음으로 맞을 시련의 계기가 되었다... 유교적 전통에 익숙한 상당수의 교인들이 교회를 떠나게 되었다. (최초의 세례교인 이승훈이 교회를 떠난 것도 이 무렵)... (59-60)
2) 을사추조적발사건과 진산사건
- 1785년 을사년 봄에 형조의 금리들이 우연히 명례방(명동) 김범우의 집을 지나다가 이상한 집호를 보게 되었다... 이벽이 중앙에 앉아 천주교 교리를 설명하고 이승훈과 정약전, 정약종, 정약용 3형제, 권일신, 권상학 부자 등이 듣고 있었다. 금리들은 처음에 노름하는 것이 아닌가 하여 들어갔다가 천주교 서적과 화상이 있는 것을 보고 압수... 형조판서 김화진은 집주인인 중인 김범우만 체포하고 나머지 양반계층 교인들은 훈방하는 선에서 사건을 일단락지었다... 천주교인의 실체가 정부기관에 의해 최초로 발각된 사건... 김범우는 유배된 후 1년만에 유배지에서 처형되어 “조선 천주교회의 첫 순교자”가 되었다. (60-61)
- 1785년 태학생 이용서, 정서 등이 통문을 내어 천주교를 엄격하게 배척할 것을 요구... 서학을 연구하였던 학자들 중에서도 천주교를 비판하는 이들이 나옴... 권일신의 장인인 안정복은 『천학고』, 『천학문답』을 지어 천주학을 ‘사학’으로 규정하고 우의정 채제공에게 천주교 배척을 요구하였다. 이헌경, 홍정하, 홍낙안, 이기경 등도 유학의 입장에서 천주교를 비판... (61-62)
- ‘정미반회사건’... 1787년 겨울에는 이승훈, 정약용, 강이원 등이 김석태의 집에서 서학을 공부한 사실이 폭로... ‘정미반회사건’... 이 사건을 폭로한 인물은 이승훈, 정약용의 친구인 이기경... 홍낙안... (62)
- 진산사건... 1791년 전라도 진산에서 천주교인 윤지충, 권상연이 체포되어 처형되는 ‘진산사건’... 정약용의 외종 윤지충은 1784년 서울에 갔다가 김범우 집에 들러 『천주실의』와 『칠극』 등을 얻어 고향에 돌아와 그의 외종 권상연과 함께 연구하던 중 천주교에 입교... 이들은 ‘정미반회사건’ 이후 정부의 명령에 따라 서학서적을 불태웠으나 은밀하게 신앙생활을 계속... (62)
- 윤지충은 1790년 말 윤유일을 통해 전달된 북경주교의 조상제사 금지령에 따라 조상제사를 폐지하고 신주를 땅에 묻었다. 1791년 그의 모친 권씨가 별세하면서 이 같은 행위가 알려지자 큰 파장을 불러왔다... 1791년 11월 전주 풍남문 밖에서 참수... (62)
- 진산사건 이후 상당수 양반계층 교인들은 신앙의 위기를 맞았다... 1791년 11월 체포된 권일신은 천주교를 비난하는 글을 썼으며, 이미 “벽이문”이라는 글을 지어 천주교를 배격하는 입장을 밝히고 평택현감으로 있던 이승훈이 이 사건에 연루되어 비난을 받자 자신의 무관함을 밝히는 글을 쓰기도 하였다. 충청도 내포의 이존창도 이 무렵 배교하였다. (63)
- 이러한 위기상황에서 천주교회를 지켜나간 이들은 중인계층의 교인들... 역관 출신 최인길, 최창현, 윤유일, 악사 출신인 지황 등은 양반 계층이 떠난 천주교회를 지켜나갔으며, 이들에 의해 신부영입운동이 추진되는 한편 흩어진 교인도 다시 규합되었다. (63)
3) 주문모 신부의 입국과 활동
- 신부영입운동... 1793년말 윤유일, 지황 등이 북경으로 출발... 구베아 주교는 중국인 주문모 신부를 조선선교사로 임명... 1795년 초 서울에 도착한 주문모 신부는 북촌 사택에 거주하며 조선어를 배우면서 은밀하게 세례 등 성사를 베풀었다... 주문모 신부는 교인들의 주선으로 연산의 이보현의 집에 은신하였으나, 윤유일, 지황, 최인길 등은 체포ㆍ처형되었다. (64)
- 연산으로 피신하였던 주문모 신부는 1년 후 다시 서울로 잠입... 여신도 강완숙의 집에 은거하면서 6년동안 천주교회를 지도... 여성교인들의 증가... 강완숙의 역할이 컸다... 그의 전교로 은언군의 부인 송씨와 그 며느리 신씨를 비롯한 양반계층 부녀자들과 궁녀들도 입교하였다. (65)
- 조선어에 익숙해진 주문모 신부는 교리연구회 성격의 명도회를 조직하여 조선인 스스로 신앙훈련을 쌓도록 훈련시켰다. 초대 명도회 회장에는 정약종이 임명... (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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