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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기독교의 역사 1] 제4장 : 기독교의 수용
1. 중국을 통한 한국선교 시도
1) 귀츨라프의 내한
- 1816년 9월 4~5일, 충청도 서천군 마량진에 함장 맥스웰과 바실 홀이 이끄는 영군함선 알레스트호와 리라호가 나타나 일대를 탐사... 이때 선박을 조사하기 위해 승선한 마량진첨사 조대복과 비인현감 이승렬은 성경 한 권씩을 증정받았다... 『순조실록』 순조 16년(1816) 7월... 한국 최초의 성경 전달... (91)
- 가장 먼저 한국을 방문한 기독교(개신교) 선교사는 폴란드 출신의 귀츨라프... 네덜란드 선교회와 관계를 맺었다가 영국의 동인도회사에 줄을 대어 한국을 방문... 개신교 선교가 서구제국의 동양진출과 관련을 맺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91-92)
- 귀츨라프는 런던에서 모리슨의 중국 선교담을 듣고 선교에 뜻을 두게 됨... 1826년 7월 네덜란드선교회 소속의 선교사로 동남아의 바타비아(자카르타)를 향하여 출발... 중국의 동남해안의 영파ㆍ상해를 거쳐 천진에 이르렀고, 요동반도와 산동반도를 거쳐 마카오에 이르러 모리슨의 집에 머물렀다... 1832년 당시 중국 무역권을 독점하고 있던 영국의 동인도회사로부터 새로운 요청을 받았다... 중국 북쪽과 한국ㆍ오키나와ㆍ타이완 순방 시 통역 겸 선의(船醫)로 동승해달라는 요청... 모리슨은 그에게 한문성경을 주어 반포하도록 하였다... 개신교 선교사 토마스(1866)와 알렌(1884), 언더우드ㆍ아펜젤러(1885)의 내한은 물론 천주교 선교사 모방의 내한(1836)보다도 빠른 것... 1832년 2월 광동을 출발... 황해도 서해안 장산곶 부근... 7월 23일경 충청도 홍주만 고대도 앞에 정박... 국왕의 회신을 기다리는 동안 귀츨라프 일행은 그곳 사람들과 접촉... 천주교 신자들을 만남... 8월초 국왕의 특사는 중국황제의 허락이 없이는 외국과 통상할 수 없다고 통보... (92-95)
2) 윌리암슨의 한국선교 지원
- 중국은 아편전쟁의 결과 영국과의 남경조약(1842), 미국과 망하조약(1844), 프랑스와 황포조약(1844), 러시아ㆍ미국ㆍ영국ㆍ프랑스와 천진조약(1858) 체결... 중국은 9개국 28개처의 조계지를 허락하였다... 조계지는 점차 치외법권화되어 서양제국의 중국 진출 거점이 되었다. (96)
- 조계지는 반선교사운동의 중요한 원인이 되었지만, 당장은 중국선교에 활기를 불어넣었다. 이러한 분위기를 배경으로 하여 구미의 선교단체들이 중국 선교에 나섰으며, 윌리암슨의 한국선교도 추진되었다... 그는 1865년 황해를 건너온 한국인 천주교 신자들을 만나 토마스 목사에게 소개시켜주었다. 그후 토마스는 윌리암슨의 후원으로 다량의 한ㅁ누성경을 받아 제1차 한국방문에 나섰다. (96)
- 윌리암슨은 로스와 매킨타이어가 한국선교에 관심을 갖게 되는 데도 영향을 미쳤으며, 1883년 중국내지선교회 소속 의료선교사 다우드웨이트가 스코틀랜드성서공회의 업무차 한국을 방문한 것도 그의 요청에 따른 것이다. (96)
3) 토마스와 제너럴 셔면호 사건
- 두차례 한국을 방문하였다가 처형된 영국 선교사 토마스... 한국 개신교 최초의 ‘순교자’... 영국 웨일즈의 회중교회 목사의 아들... 런던대학교의 뉴칼리지에서 학사, 신학과정을 밟아 1863년에 목사안수를 받음... 그해 부인과 함께 런던선교회 선교사로 중국 상해에 도착... 부인이 사망하고 런던선교회 상해주재 책임자 무어헤드와 불화를 겪고 1864년 사표 제출하고 영국인 하트가 세관장으로 있던 청국해관에서 통역으로 근무... 윌리암슨의 소개로 한국의 천주교인들을 만나 한국선교의 열망을 품고 1865년 9월 지푸를 출발하여 같은 달 13일 한국 서해안에 도착... 조선인 천주교 신자의 도움으로 말을 배우고 윌리암슨에게 받은 성경을 한국인에게 반포... 만주로 귀환 후 런던선교회의 지시에 따라 1866년 1월 북경에 부임... (98)
- 제너럴 셔먼호... 복음전파에 대한 열망을 안고 통역으로 배에 승선... 영국인 호가드를 비롯하여 5명의 백인과 19명의 아시아인(중국인과 말레이시아인)... 1866년 8월 지푸를 출발... 대동강 입구 용강군에 도착... 문정관에게 천주교인 학살을 문책하면서, 자신들은 천주교와는 다른 ‘야소성교’ 즉 기독교(개신교)를 믿으며, 이를 전파하려는 목적도 있다고 밝혔다. 문정관은 이들이 대포와 소총으로 무장하고 있음도 알게 되었다... 중군 이현익이 그들에게 억류당하고 제너럴 셔면호에서 대포 및 소총을 쏘기 시작하자 태도를 바꾸어 적극적으로 대응하였다... 퇴교 박춘권이 이현익을 구출... 평양감사 박규수가 정부의 지시를 기다리고 있었다... 제너럴 셔먼호가 공격에 나서자 반격하지 않을 수 없었다. 1866년 9월 2일, 대동강 수위가 낮아지면서 양각도 모래톱에 좌초된 제너럴 셔먼호가 화공을 받아 불길에 휩싸이자... 격분한 군민들은 “결박ㆍ타살”하였다. 이때 토마스의 나이는 27세였다... 1861년 ‘신미양요’의 원인... 1882년 한미수호통상조약 체결 및 이후 미국 각 교단의 선교사 파송으로 연결... (99-100)
- 『고종실록』 1866년 7월 25일... “유원(柔遠)하는 뜻으로 처음에는 설득하고 양식을 공급하였지만 도리어 그 악을 드러내었다. 처음에는 중군을 잡아 가두더니 종내에는 백성들을 상해하니 어찌 그 창궐함을 그대로 둘 수 있겠는가. 인심의 공분(公憤)이 곧 이세(理勢)의 당연함이다” (100)
2. 만주에서의 성경 번역ㆍ출판과 선교
1) 로스ㆍ매킨타이어와 한국인 개종자
- 만주에 진출한 스코틀랜드장로교회 선교사들도 한국선교를 시도하였다... 1872년 매킨타이어에 이어 로스가 중국선교사로 파송... 1872년 8월 중국에 도착한 로스는 윌리암슨의 충고에 따라 10월 만주의 개항장 영구로 갔다. 이듬해 5월에는 중국어로 설교가 가능하게 되었다... 윌리암슨은 로스에게 1866년 토마스가 평양에서 사망하였다는 소식을 알려주었다... 로스는 1874년 10월 영구를 출발하여 첫 번째 고려문 여행에 나섰다. 고려문은 봉황성 아래의 작은 마을로, 당시 청국과 조선의 국경이자 양국 사이의 합법적인 교역이 이루어지던 관문이었다. (101)
- 한국상인들은 영국산 면제품인 ‘양목’에만 관심... 50대의 상인(백홍준의 부친)에게 한국어를 배움... 그에게 한문 신약성경과 『훈아진언』(訓兒眞言)을 건네줌... (102)
- 의주 출신을 중심으로 한 한국상인들의 국경무역 실태와 그들의 의식상태... 관서지방에 일찍부터 ‘자립적 중산층’이 출현... 의주에는 국경무역을 통해 성장한 상인들이 많았다. 이들은 한문과 만주어에 능통한 학인(學人)으로 독서층이었고, 개방적이고 독립적인 의식을 소유... 이들이 로스ㆍ매킨타이어를 만났고, 성경을 번역하였으며, 한국에 복음을 수용하는 통로역할을 담당... (102-103)
- 로스의 두 번째 고려문 방문... 1876년 3월 강화도조약 이후 한국의 문호가 개방되었다는 소식에 자극을 받아 4월에 이루어졌다... 의주상인 이응찬을 만남... 이응찬의 도움으로 이듬해 1877년 선교사를 위한 한국어 교재인 『한국어 첫걸음』을 상해에서 발간하였다. 이무렵부터 로스는 한글성경 번역을 시작... 이응찬과 한국인 한두 명의 도움으로 1878년 봄까지 요한복음과 마가복음을 번역하였다. (103)
- 이응찬이 귀국한 뒤 로스는 서상륜을 만났다. 동생 서경조와 함께 홍삼 장사차 영구에 왔다가 열병에 걸려 사경을 헤맸다. 친구들의 주선으로 헌터 의사의 치료를 받은 서상륜은 매킨타이어를 만났고 완쾌 후 로스에게 소개되었다. 누가복음을 번역하고 서상륜은 세례를 요청하였으나, 로스는 이응찬의 경우처럼 확고한 신앙인으로 성장할 때까지 기다리기로 하였다. (103-104)
- 1879년... 백홍준과 이응찬을 비롯한 4명의 한국인이 매킨타이어로부터 세례를 받음... 한국개신교 최초의 신앙공동체가 형성... 백홍준의 부친에게서 얻은 성경과 책자를 읽고 찾아와 세례를 요청한 두 명의 한국인... 번역 업무를 맡았던 한 사람이 매킨타이어로부터 세례를 받음(누군지는 알려지지 않음)... 백홍준이 ‘도를 배울’ 목적으로 매킨타이어를 찾아왔고, 구도자로서 3~4개월을 지낸 뒤 세례를 받고 의주로 돌아가 의주교회의 초석이 되었다... 세 번째 수세자는 이응찬... 아편쟁이로 의심... 식사 때 화주를 먹는 습관... 중국교인들이 그의 입교를 반대해 세례가 연기되기도 하였다... 7월경 세례를 받음... 그와 동행해온 의사 출신의 친척도 번역업무를 돕다가 12월경 세례를 받고 고향으로 돌아갔다. (104)
- 영국에서 이 소식을 들은 로스는 선교본부에 전도자 1명을 요청... “매킨타이어는 또한 4명의 학식있는(literary) 한국인들에게 세례를 주었다. 이들은 앞으로 있을 놀라운 수확의 첫 열매들이라고 확신한다. 비록 현재 한국이 서구의 나라들과 어떠한 접촉도 철저하게 격리시키고 있지만, 그 쇄국은 곧 무너질 것이고, 또한 한국인들은 중국인보다 천성적으로 꾸밈이 없는 민족이고 더욱 종교적인 성향을 지니고 있으므로, 나는 그들에게 기독교가 전파되면 곧바로 급속하게 퍼져나갈 것으로 기대한다... 기독교회를 향해 열려있는 새 민족, 새 나라, 새 언어가 있는 것이다.” (105)
2) 성경의 번역ㆍ출판
- 로스는 머지않아 선교의 문이 열릴 것을 믿으면서 성경번역 사업을 추진하였고, 성서공회의 지원을 받아 성경을 출판하였다. 성경번역은 준비기를 거쳐 1877년부터 1886년까지 계속되었는데, 번역자ㆍ번역저본ㆍ번역내용 등을 고려할 때 4시기로 나눌 수 있다. (106)
- 제1기는 로스가 이응찬을 만난 1874년 가을부터 Corean Primer가 간행되는 1877년 여름까지의 준비기... 제2기는 초역기로, 1877년 여름 이응찬에 의해 요한복음 번역이 착수된 이래 1879년 4월 로스가 영국으로 안식년 휴가를 떠나기까지의 시기... 마태복음에서 로마서까지 번역... 제3기는 로스의 휴가기간 동안 우장(牛莊)의 매킨타이어 주도로 번역이 진척ㆍ수정되는 시기로 1879년 5월부터 1881년 5월까지의 2년간... 자체적으로 만든 2,500단어의 어휘집과 한국정부에서 발행한 언해본을 통해 번역을 검토하는 등 번역방법상 일대 진전을 가져왔다... 제4기는 『예수셩교젼셔』가 완역되는 시기... 로스가 귀국한 1881년 6월부터 1886년 가을까지 봉천의 심양 문광서원에서 번역이 진행되었다. 로스가 채택한 번역원칙은 1) 본문의 뜻과 일치하면서 한국어 어법에 맞는 절대직역을 하며, 2) 영어본보다는 『개정 그리스어성경』을 기준으로 한다는 것이었다. 로스는 한글의 우수성과 함께 최신 개정판 그리스어 신약성경을 이용함으로써 한문성경보다 훨씬 정확한 번역본을 만들 수 있다고 확신하였다. (106-107)
- 번역방법... 관리 출신의 학자가 한문성경에서 1차번역을 하면, 로스ㆍ이응찬이 그리스어 성경을 참고하여 2차 번역을 하고, 이것을 제1번역인이 정서하면 다시 로스ㆍ이응찬이 재수정93차번역)하고, 로스가 그리스어 성경과 그리스어 성구사전 및 메이어 주석 등을 참고, 대조하면서 어휘를 통일한(4차번역) 후 식자공에게 넘기는 순서... (107)
- “한국인 학자가 1명이라도 없었다면 나는 속수무책이었을 것이다”... 실제 번역은 한국인 개종자들에 의해 이루어졌다는 점에서 ‘로스본’보다는 ‘예수셩교본’으로 부르는 것이 더 타당할 것이다. 번역의 제1공로자는 이응찬... 로스와 매킨타이어에게 한글을 가르쳤고 6년 가까이 ‘예수셩교본’의 절반 이상을 번역ㆍ수정하다가 1883년 9월 콜레라에 걸려 사망하였다... 백홍준과 서상륜은 1년 미만의 기간동안 번역에 참가... 첫 번째 및 네 번째 수세자도 1879년 세례받기 전 몇 개월간 번역업무를 맡았다. 최성균도 일정기간 번역에 참가하였다. (107-108)
- 의주 방언의 한계를 느끼고 ‘예수셩교본’ 번역진에 1881년 가을부터 서울 출신학자들이 동참... 1882년 로스의 제1번역인이었던 전직관리는 서울에서 온 사람... 1882년 7월 세례를 받아 서상륜에 이어 일곱 번째 수세자가 되었다... 그가 떠난 후 또 한 사람의 서울 출신 학자가 1882년 가을 봉천의 로스에게 세례를 요청하러 왔다가 1년 가까이 복음서부터 고린도후서까지 번역하였다. 한편 임오군란으로 국경에 좌천된 군인들 중 일부도 1884년 번역진에 합류... 1884년 이응찬 사후에 서간도 한인촌에서 온 한 학자 역시 번역에 큰 도움이 되었다. (108)
- 예수셩교본의 출판은 로스가 2년간의 안식년 휴가를 마치고 돌아오는 1881년 6월부터 시작... 2명의 중국인 인쇄공과 서간도 한인촌 집안 출신의 매약상 김청송이 식자공으로 채용되면서 심양 문광서원은 1881년 9월부터 시험인쇄에 들어가... “한글로 인쇄된 최초의 기독교 문서”라고 할 『예수셩교문답』과 『예수셩교요령』이 10월에 간행... 1881년 말부터 성경 인쇄에 들어감... 이방인을 위한 복음서인 누가복음이 처음으로 선택... 1878년 서상륜에 의해 번역된 이래 8~9차의 수정을 거친 것... (109)
- 『누가복음젼서』 인쇄후 김청송은 다섯 번째 수세자가 됨... (110)
- 두 번째 복음서인 『예수셩교 요안내복음젼서』 3천부 간행... 이 무렵 한미수호통상조약이 체결됨... 스코틀랜드성서공회와 맺은 계약에 따라 누가복음ㆍ요한복음 각 1천부와 다량의 소책자를 일본의 톰슨 총무에게 보냈고, 톰슨은 이를 일본인 권서인을 통해 부산에서 반포하였다. (110)
- 1883년 10월에 『예수셩교셩셔 누가복음 뎨자행적』(아딩턴의 지원으로 3천부 간행, 누가복음을 수정하여 사도행전과 함께 묶은 합본성경)과 『예수셩교셩셔 요안내복음』(1882년의 요한복음을 수정한 것)이 발행... 1882년 판에서 ‘하느님’으로 표기되던 신명이 1883년부터 ‘하나님’으로 바뀌었으며 서울말의 채택이 늘어남... (110)
- 단편이나 합본 형태로 발행되던 예수셩교본은 남은 서신서를 추가하여 1887년 최초의 한글 신약전서인 『예수셩교젼셔』로 합본ㆍ출간되었다. 총 339쪽... 5천부 발행... 이후 국내 선교사들에 의해 성서위원회가 조직되고 성경번역이 본격화된다... (111)
3) 반포사업과 교회들의 설립
- 성경의 반포는 한국인 개종자들과 ‘권서’ 또는 ‘매서인’이라 불리는 이들이 담당... 1880년대 초 만주와 국내에 여러 신앙공동체들이 조직... (111)
- 1880년 의주의 백홍준은 성경과 소책자가 발각되어 3개월간 투옥되었다. 천주교 신자가 아닌 까닭에 풀려나기는 하였으나 거의 모든 재산을 잃게 된 백홍준은 매킨타이어를 찾아가 “자신을 위해 돌아가신 주님을 위해 핍박받는 것을 즐거워한다”고 고백하였다. 한문성경은 한글성경이 나온 이후에도 계속 유입이 되었는데 지식층의 수요를 충족시키기 위한 것... (112)
- 1882년 3월 로스는 ‘한인촌’을 대상으로 반포하기로 계획... 식자공인 김청송을 “최초로 완성된 복음서를 가진 전도자” 겸 권서로 파송... 1884년 김청소에게 받은 성경을 읽고 기독교를 알게 된 한국인들 몇 명이 봉천이 로스를 찾아감... 이들은 임오군란 이후 평안도로 좌천된 보수파 군인들로, 정세변동에 따른 생명의 위협 때문에 한인촌으로 망명한 사람들... 이들 중 최연장자는 로스에게 세례를 받고 번역업무를 돕다가 집안으로 돌아와 전도하였다. (112)
- 로스는 1884년 11월 동료 선교사 웹스터와 함께 한인촌 방문... 4개 마을에서 75명의 남자에게 세례를 베품... 이듬해 추가로 25명에게 세례를 베품... 1884년 말 현재 수세자 100명, 남자 세례요청자 600명 등 “매일 가정예배를 드리고 하나님의 말씀을 읽는 수천 가정들이” 있었다. (113)
- 의주에서는 1879년부터 백홍준의 전도로 구도자가 나오면서 성경에 대한 수요가 늘어났다... 1882년 10월 서상륜이 대영성서공회 최초의 한국 권서로 파송... “불교보다 더 훌륭한 종교다. 왜 진작 알지 못하였던가”라며 큰 관심을 나타냄... 의주에서는 백홍준이 요리문답반을 운영하고 있었으며, 늦어도 1885년에는 18명의 신자 및 예배처소가 있었다. (113-114)
- 평안북도에 이어 1883년에는 평양에도 복음서가 반포... 1883년 5월 김청송에 이어 두 번째 식자공이 된 동지사 수행원 출신의 청년이 모친 위독 소식을 듣고 평양으로 오게 되는데 약 1천권의 누가복음ㆍ요한복음을 판매하였다. (114)
- 1883년 초 서울에 온 서상륜은, 제2식자공으로부터 받은 4백권의 복음서를 6개월간 반포... 로스에게 “서울로 와서 세례를 원하는 13명의 친구들에게 세례를 베풀어 교회를 조직해 줄 것을 요청”하는 편지를 보냄... 로스는 대신 상해ㆍ제물포간의 기선항로를 이용하여 1884년 봄 다량의 한문성경ㆍ한글성경과 소책자를 서상륜에게 보내주었고, 그는 묄렌도르프의 도움으로 이것을 전달받을 수 있었다. (114)
3. 일본에서 성경 번역ㆍ출판과 선교
1) 이수정의 개종과 활동
- 이수정... 온건개화파 양반학자... 1882년 9월 수신사 박영효의 비공식 수행원으로 일본에 건너감... 조사시찰단(신사유람단)으로 일본을 다녀온 친구 안종수로부터 들은 바 있는 기독교인 농학자 쓰다센을 만나려는 목적... (115)
- 쓰다센에게 한문신약성경을 받은 이수정은 기독교 교리를 연구... 1882년 12월에 도쿄 쓰키지교회(도쿄제일장로교회)의 성탄축하예배에 참석하여 큰 감명을 받았다. 이듬해 초부터 이수정은 쓰다센이 소개해 준 오사다와 함게 성경을 체계적으로 공부... 미국 선교사 녹수에 의해 2시간동안 세례문답... 1883년 4월 29일 주일에 야스가와 목사 입회하에 로게쓰초교회에서 세례를 받음... 도일 7개월만에 일본에서 세례받은 첫 한국인 개신교 신자가 되었다. (116)
- 이수정의 개종과 신앙고백은 한국선교의 가능성을 모색하던 재일 미국인 선교사들과 일본교회에 큰 자극을 주었다. 재일미국성서공회 총무 루이스의 제안을 받아 성경번역에 착수하는 한편, 김옥균의 인솔로 일본에 와 있던 30여 명의 유학생들에게 전도... 동경외국어학교 한국어 교사로 있던 손붕구... 1883년 6월 세례문답을 받았다. 이수정은 손붕구의 도움을 받아 6월 한문 요리문답서를 교재로 하는 주일학교를 개설하였다... 12월에 ‘한성순보’ 발행준비를 위해 유학하고 있던 청년 박영선이 세례를 받았다. 1883년말 도쿄에는 김익승, 박명화, 박영선, 이경필, 이계필, 이주필 등 7~8명의 한국인 수세자를 중심으로 한 신앙공동체가 형성되었다... 도쿄에 세워진 최초의 한인교회... (117-118)
- 이수정은 선교사 파송을 요청... 녹스의 서신을 받은 미국교회는 이수정의 요청을 “한국의 마게도니아인의 부름”이라 불렀고, 이는 한국선교에 대한 미국교회의 관심을 고조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118)
- 한국선교를 지원하는 일본인에 대해서는 반대하며 미국 선교사의 파견을 요청... “여러분의 나라는 기독교 국가로 우리에게 잘 알려져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들이 우리에게 복음을 보내주지 않으면, 나는 다른 나라가 그들의 교사들을 신속히 파송하리라 생각하며, 또한 그 가르침이 주님의 뜻과 일치하지 않을까 하여 걱정하는 것입니다. 비록 나는 영향력이 없는 사람이지만 여러분들이 파송하는 선교사들을 돕는 데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118-119)
2) 성경의 번역ㆍ출판ㆍ반포
- 루미스가 이수정을 찾아와 성경번역을 제안하자 이수정은 이를 흔쾌히 수락하였다. 이수정의 소망은 “성경을 자기 민족에게 주는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는 1883년 5월 번역에 착수하였다. 그 방법은 한문성경에 한국 지식층에서 널리 사용되던 토를 다는 이른바 ‘현토성경’이었으며, 번역저본은 브릿지맨과 쿨버트슨이 공역하고 1864년 상해에서 발행된 『신약전서문리』였다... 번역하기 쉬운 토달린 성경을 일단 완성하여 그 경험을 바탕으로 한글성경을 번역하려는의도가 있었지만, 일차적 전도대상이 유학생이었다는 점도 작용... (119-120)
- 현토성경들은 이후 한글성경 번역에 많은 영향을 주었고, 당시 도쿄의 유학생은 물론 국내 지식층에게도 환영받았다는 점에서 큰 의의를 지닌다. (120)
- 미국성서공회에 의해 1885년 2월 요코하마에서 마가복음 6천부가 간행되었다. 그것은 한국선교사로 임명된 언더우드와 아펜젤러가 일본에 도착하는 1885년 초에 맞추기 위해서였다. 그리하여 바로 이 마가복음을 들고 아펜젤러와 언더우드는 1885년 4월 5일 제물포에 상륙할 수 있었다. (121)
- 마가복음의 문체는 국한문 혼용체... 이수정 역의 마가복음은 ‘예수셩교본’이 민중층을 대상으로 순한글만 사용한 것과 대조가 된다. 그리고 ‘예수셩교본’에 비해 용어와 고유명사가 헬라어나 히브리어 원어에 가깝게 표기되었고, 한문투의 단어와 문장이 많았다. (121)
- 루미스는 유학생 박명화를 고용하여 요한복음 번역업무를 맡겼다. 그러나 이 번역 원고 역시 인쇄에는 들어가지 못하였다. 이 무렵 갑신정변의 여파가 일본에 파급되었고, 이수정은 김옥균 등 망명객들과 관계를 멀리다가 자객에 의해 상처를 입었다. 그리하여 신약전서의 한글번역계획은 취소되고 이수정도 1886년 5월 귀국하여 은거하다가 병사하였다. (122)
3) 재일선교사들의 역할
- 일본의 막번체제는 1858년 미일수호통상조약이 체결되면서 와해되기 시작... 선교사들의 첫 접촉대상은 사무라이(무사)들이었으며 한문성경과 소책자들이 널리 사용되었다. 초기의 선교활동에서는 교육사업ㆍ의료사업이 기독교에 대한 일본인들의 편견을 제거하는 데 큰 효과를 거두었다. (122)
- 녹스가 일본에 도착한 1877년의 개신교 통계... 교인은 836명(성공회 28, 일본기독교회 164, 캐나다기독교회 100, 미국기독교회 114, 조합기독교회 240)에 불과했다. 그러던 것이 1870년대 말에는 100여 개의 교회에 신자 5,000명, 선교사 150명, 신학교 7개, 학교 70개 등과 더불어 많은 병원과 주일학교가 설립되어 있었다. (123)
- 이수정이 도일한 이듬해인 1883년은 일본교회가 급격한 성장을 이루는 계기가 된 해... 3년내에 교회는 2배, 교인은 3배로 증가... 1890년에 이르러 300개 교회에 약 42,000명의 신자를 확보하였다. 이러한 부흥의 열기 속에 한국인 유학생들의 개종이 이루어졌고 한국선교에 대한 관심도 고조되었다. (123)
- 일본에서의 한국선교 모색은 먼저 문서사업 방면에서 시작되었다... 미국성서공회 루미스는 이수정을 통해 성경을 번역... 스코틀랜드성서공회는 만주의 ‘예수셩교본’을 일본인 권서들을 통해 한국의 개항장 중심으로 반포... (123-124)
- 일본에 온 미국선교사들 중 한국선교의 선구자는 장로교의 녹스와 감리교의 매클레이였다. 녹스는 이수정에게 세례를 베풀고, 미국 선교본부에 이수정의 선교사 요청서신을 전달하며 한국에서의 교육사업, 의료사업의 필요성을 역설하였다. 매클레이는 미감리회의 첫 중국선교사로 1848년에 임명되어 1872년까지 봉사하던 중 해안에 조난되어 온 한국선원들을 만나 한국선교를 계획하였다. 1873년 초대 일본선교사로 부임... 선교사로는 처음으로 1884년 6월 한국을 방문하여 2주간 머물며 미감리회 한국진출의 터전을 닦았다. (124)
- 1882년 9월 일본에 온 김옥균은 유학생 4명의 영어교수를 맡아주기로 한 매클레이 부인을 찾아가 감사 인사를 드리면서 재일선교사들과 접촉... 매클레이가 한국을 방문하였을 때 김옥균의 중재로 고종으로부터 ‘선교사업’ 윤허를 받아내는 데 영향을 주었다. (125)
- 그런데 김옥균은 1883년 7월 다시 일본에 왔을 때, 자신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몇몇 유학생들이 기독교로 개종한 것을 발견하고 그들에 대한 지원을 중단할 정도로 기독교에 대해 호의적이지 않았다. 그러나 3백만엔의 차관도입이 민영익과 묄렌도르프 등 보수파의 방해로 실패하게 되자 자신의 세력강화를 위해 종전의 태도를 바꾸었다. 그는 야스가와와 친분을 맺고 기독교 교리를 배웠으며, 루미스로부터는 한문신약과 『에수셩고요안내복음전서』ㆍ『천도소원』 등을 받아 읽었다... 1884년 초 김옥균은 루미스를 찾아가 녹스와의 면담을 요청... 기독교에 대해 호의적으로 발언하였으나 직접적ㆍ즉각적인 한국선교에 대해서는 유보적 태도를 보였다. 그가 녹스를 만나려고 한 것은 “미래의 사업의 기초로서 서울에 기독교병원을 설립하는 일에 자신의 영향력을 행사”할 것을 제안하기 위해서였다... 이후 선교사들에게 문호를 개방하겠다고 약속... 김옥균은 일본의 개화를 가능케 한 기독교를 자신의 정치적 세력 확장과 개화의 방편으로 이용하려 하였다. (125-126)
4. 미국 선교부의 한국선교 결정
1) 한미수호통상조약과 견미사절단의 파견
- 한국은 서구열강 중 미국과 가장 먼저 국교를 맺었다... 1971년 ‘신미양요’... 일본의 한국진출을 견제하려는 청국의 중재로 마침내 1882년 5월 제물포에서 한미수호통상조약이 체결... 조문에는 종교의 자유를 보장한다는 내용이 없으나, 미국측은 ‘학자’를 파송하여 “언어와 문학과 예술를 연구할 수 있는” 권한이 주어졌다고는 인식하였다. (126-127)
- 초대 주한미국공사 푸트는 고종을 알현하면서 한국의 친선사절을 미국에 파견할 것을 건의... 특명전권공사에 민영익, 대리공사에 홍영식이 임명... 고영철, 변수, 서광범, 유길준, 최경석, 현홍택이 수행원으로 선발... ‘견미사절단’... 또는 ‘보빙사’... 1883년 7월 출발... 민영익ㆍ변수ㆍ서광범 등은 유럽을 순방하고 이듬해 5월에 귀국... (127)
- 샌프란시스코에서 시카로로 이동하던 사절단 일행은 가우처 박사를 만남... 가우처 박사... 볼티모어 여자대학 창설... 미감리회 목사... 한국선교를 염원하게 되었으며, 1883년 11월 와일리 감독에게 편지를 보내 한국에 선교사를 파견할 것을 촉구하면서 선교비로 2천달러를 기부... 견미사절단의 방미는 한국선교가 추진되는 계기가 되었고, 가우처는 “이디오피아 내시 앞에 나타난 빌립(행 8:26-39)”처럼 ‘은둔의 나라’의 복음화에 기여... (128)
2) 미국 개신교 선교부들의 한국선교 결정
- 한국에 선교사를 직접 파견한 최초의 국가는 미국이다. 18세기 말 제1차 대각성운동이 일어나 해외선교의 열기가 고조... 남북전쟁 후에는 부흥사 무디가 부흥운동을 주도... 선교사들이 내한하기 시작한 19세기 말은 미국이 ‘대아메리카’를 구상하며 해외진출을 시도하던 시기... 미국의 대외팽창주의 또는 백인우월주의에 바탕을 둔 기독교문화의 전파라는 측면... (128-129)
- 미국의 여러 개신교단은 해외선교부를 창설하였다... 제2차 대각성운동 및 1840년까지 게속된 부흥운동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129)
- 한국선교와 밀접히 관련된 교단은 장로교화 감리교... 중국 지푸에서 활동하던 선교사 리드도 먼저 교사와 의사를 한국에 파견하여 선교사업에 착수해야 한다고 주장... 일본에서 이수정은 미국인 선교사의 한국선교를 요청하는 호소문을 기고... 미국의 선교본부들은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이러한 선교본부를 움직인 것은 선교의 필요성을 강조한 교계언론이었다... 감리교 기관지 The Christian Advocate와 해외선교부 기관지 The Gosple in all Lands의 공헌... 가우치의 요청에 따라 재일감리교 선교사 매클레이는 1884년 6월말부터 2주일간 선교의 가능성을 타진하고자 한국을 방문... 1884년 말 감리교회 소속 스크랜턴 박사와 스크랜턴 대부인, 아펜젤러 목사 등이 한국선교사로 임명되었다... (130)
- 미국의 장로교회도 이수정의 호소문이 알려진 뒤 한국선교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북장로교 선교부 임원 엘린우드는 즉시 선교사를 파견해야 한다고 주장... 브룩클린 교회의 평신도이며 장로교 선교본부의 위원인 맥윌리엄즈를 움직여 1884년 2월 한국선교를 위한 기금 5천 달러를 기부받았으며, 이를 계기로 많은 이들이 모금에 호응하였다... 1884년 의사 헤론을 한국 선교사로 임명... 인도선교를 목표로 신학공부를 마치고 1년간 의학공부까지 한 언더우드가 1884년 7월 한국 최초의 ‘복음선교사’로 임명되었다. 그러나 한국에 가장 먼저 상륙한 선교사는 1884년 내한한 의사 알렌이었다. 중국에서 의료선교사로 활동하던 그는 선교지를 한국으로 바꾸고 최초의 ‘정주(定住)선교사’로 내한... (131)
3) 매클레이의 방한과 알렌의 입국
- 매클레이는 가우처와 해외선교본부의 요청을 받고 주일미국공사 빙햄과 주한미국공사 푸트의 후원을 얻어 1884년 6월 24일부터 7월 8일까지 한국을 방문했다... 김옥균을 6월 30일 찾아가 방문목적을 설명하고 협조를 요청... 일본어로 된 편지와 한국에서의 사업계획을 적은 간단한 설명서를 건네줌... 7월 3일 김옥균을 다시 만남... 김옥균은 국왕에게 제출한 탄원서가 받아들여졌음을 축하... 한국에서 교육과 의료사업을 허가받은 메클레이는 며칠 동안 서울에 더 머물며 선교사업을 위한 정보를 수집하고 대지를 물색... (131-132)
- 한국에 부임한 첫 선교사는 미감리회가 아닌 북장로회 소속 알렌... 1883년 중국에 파송되었으나 정착하지 못하고 1년을 보냄... 상해의 유력 인사들과 동료 의사들이 한국행을 권유... 한국세관에 근무하고 있는 하스에게 편지... 외국거류민을 위한 서양의사의 필요성을 탐문... 1884년 6월 본국 선교부에 편지를 보내 자신의 한국행에 대한 승인여부를 요청하여 7월 선교부의 승인을 받음... 9월 14일 상해를 출발하여 22일 서울에 들어옴... 미국 공사 푸트는 그를 공사관 공의(公醫)로 임명하고 후원을 약속함... 그후 알렌은 영국공사관을 비롯한 여러 외국기관의 의사로 활동... 미국 공사관에서 멀지 않은 곳에 조그마한 집 한 채를 구입... 여름 매클레이가 내한하였을 때 선교사업을 위해 미국 공사에게 매입을 부탁하였던 그 곳... (133-1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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