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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 자료실]/[논문 정리]

“신학이 정치를 만날 때 - 해방 후 신학갈등과 교회분열” - 이덕주

by [수호천사] 2021. 6.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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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학이 정치를 만날 때 - 해방 후 신학갈등과 교회분열” - 이덕주

이덕주 (2016). 신학이 정치를 만날 때. 한국기독교와 역사(44), 103-163.

 

I. 머리말

 

  • 한국교회는 일제 말기 잃었던 자유와 자치 기능을 회복하고 무너졌던 교회 전통을 바로 세우고 전도와 선교활동을 펼쳐나가는 동시에 교회 안의 여러 가지 갈등 요인을 극복하지 못하고 분쟁과 분열을 겪었다. (104)
  • 교회의 분열과 내적 갈등은 교회 지도자들의 윤리적 타락으로 인한 권위 추락과 함께 오늘 한국교회의 위기를 초래한 가장 근본적인 원인의 하나로 작용하고 있다... 때로는 신학적 갈등이 교단분열의 직접적인 원인으로 작용하였고 때로는 근본적인 분열 원인을 숨긴 채 신학적 견해 차이를 표면적 이유로 내세우기도 했다. (104-105)

 

II. 신학갈등과 교회분열의 역사적 배경

 

  • 해방 후 전개된 신학적 갈등과 교회분열의 역사적 배경과 요인으로서 일제강점기 선교사와 한국인 신학자들에 의해 표출된 다양한 신학적 입장과 갈등 구조를 먼저 살펴볼 필요가 있다. (106)

 

1. 일제강점기 선교사 신학 : 복음주의와 교파주의

 

  • 북장로회 소속 헌트(William B. Hunt) 선교사는 근본주의 신학... 커(William C. Kerr) 선교사는 자유주의 신학에 가까운 성향... 미국 남감리회 소속으로 1907-24년 협성신학교에서 교수로 성서학을 강의했던 하디(Robert A. Hardie)는 문서비평설(고등비평)을 수용하고 (기계적) 축자영감설을 비판했지만, 같은 선교회 소속으로 개성과 김화에서 사역했던 피터스(Victor W. Peters)는 반대로 문서비평설을 비판하고 축자영감설ㅇ르 지지하였다. (106)
  • ‘복음주의’는 한국에서 사역하고 있던 다양한 국가와 교파 배경의 선교사들을 ‘하나로’ 묶는 연결고리로 사용되었다... 1905년 9월 결성된 ‘한국복음주의선교연합공의회’에서 구체화... “선교사역에서 협력을 추구하고 나아가 한국에서 하나의 토착 복음교회(one native evangelical Church)를 설립하는 것을” 목적으로 조직... 이 조직을 통해 장로교와 감리교 선교사들은 “칼빈과 아르미니우스라는 교파 장벽을 넘어 하나 됨”을 경험하였고 후에(1917년) 한국교회 지도자들도 참여하는 ‘조선예수교장감연합공의회’로 발전하여 일제강점기 한국교회 에큐메니칼 운동의 구심점이 되었다... 선교 초기 한국에서 ‘복음주의’는 서로 다른 교파 교회와 선교사들의 연합과 협력을 추진할 수 있는 ‘통합’ 개념으로 작용하였다. (107)
  • ‘복음주의’ 개념의 협력과 연합은 ‘개신교’ 영역 안으로 제한... 천주교회는 배제를 넘어 배척 대상... 천주교회도 배타적으로 대했음... 반(反) 가톨릭 정서의 근본 원인... (107-108)
  • 선교사들의 ‘교파주의’... 한국의 개신교회는 선교 초기부터 ‘교파형’ 교회로 성격이 고착됨... 1910년 단일 개신교회 조직을 포기한 이후 한국 개신교회의 ‘교파주의’ 성격은 더욱 강화됨... 선교지역분할협정... 지방색과 교파주의의 결합... (108-109)
  • 한국교회의 ‘교파주의’ 성격은 교파별 목회자 양성과 신학교육으로 더욱 강화... ‘교파주의’ 신학이 토착인 목회자들에게 전수되었고 그렇게 신학교육을 받은 목회자들에 의해 지역교회 교인들도 교파주의 영향을 받았다. (109)

 

2. 1930년대 한국교회 신학갈등

 

  • 1934-35년, 장로교 총회는 교단 소속 목회자들의 신학을 검증하는 특별연구(조사)위원회를 가동... 1934년 제23회 조선예수교장로회 총회... 창세기 저자 문제(남대문교회 김영주)... 성진중앙교회 김춘배 목사의 여권문제... 1935년 사실상 ‘이단평결’... 『아빙돈 단권성경주석』에 대해서 총회 차원에서 책의 구독과 선전을 금하는 것은 물론 책의 번역작업에 참가했던 장로교 목회자들에 대한 ‘신학 검증’ 작업... (110-113)
  • 1934-35년에 일어난 일련의 신학 관련 사건들은 성경무오설과 축자영감설에 근거한 장로교회의 전통적 성경해석과 ‘다른’ 고등비평이나 근대적 성경해석의 시도에 대한 ‘단호한’ 배격과 응징으로 매듭지어졌다. (113)
  • 김춘배 목사와 김영주 목사의 신학 사상을 검증했던 특별 연구위원회는 1935년 총회에 다음과 같이 특별 주문하였다... “성경의 파괴적 비평을 가르치는 교역자들과 성경을 시대사조에 맛도록 자유롭게 해석하는 교역자들을 우리교회 교역에서 제외하기 위하여 총회는 각 로회에 명령하야 교역자의 시취문답을 행할 때에 성경비평과 성경해석의 방법에 관한 문답을 엄밀히 하야 조곰이라도 파괴적 비평이나 자유주의 해석방법의 감화를 받은 자는 임직을 거절케 할 일이오며 이미 임명을 밧었던 교역자가 그런 교훈을 하거던 로회는 그 교역자를 권징조례 제6장 제42조 43조에 의하야 처리케 할 일이웨다.” (113)
  • 문서비평설이나 고등비평과 같은 근대적 성경 연구이론들은 ‘보수적’ 한국장로교회 전통에서 ‘성경 파괴주의’로 낙인찍혔다. 근본주의 성경관 이외의 관점이나 해석은 그 어떤 것도 배격되었다. (113)
  • 장로교 학자들은 일본이나 미국의 신학교에서 수학하면서 한국장로교회의 ‘보수 일방적’ 신앙 전통이나 분위기와 다른, 서루 신학게의 ‘다양한’ 신학 전통과 이론을 접하였고 무엇보다 교리와 제도에 얽매이지 않는 ‘학문의 자유’를 경험하였다. 그리고 귀국한 후 외국에서 습득한 ‘자유’ 신학을 한국에서 소개, 혹은 적용해 보려다가 보수적 신학 및 교회 지도자들로부터 ‘이단 혐의’를 받았던 것이다. (114-115)

 

3. 평양신학교와 조선신학원의 ‘서로 다른’ 신학

 

  • 한국장로교회의 ‘완강한 보수주의’ 신학 분위기 배경에는 근본주의 신학 노선을 고수하는 선교사들과 평양신학교가 있었다. (115)
  • 마펫은 1934년 선천에서 개최된 3개노회 연합 희년기념대성회에서 ‘조선교회에 기(奇)함’이란 제목의 강연을 통해 “옛 복음에는 구원이 있긴 있으나 새 복음에는 구원이 없다”고 단언... ‘근본주의 신학’ 외에 다른 신학 이론이나 입장은 ‘저주 받을’ 대상이었다... 이런 입장은 평양신학교 박형룡 교수에게 전수되었다. (115)
  • 박형룡... 자신의 신학을 “다른 사람들의 화원에서 꺾어 모은 꽃다발”에 비유... 메이첸의 근본주의 신학을 “그대로 받아서 전달하는 데 있고 감히 무엇을 창작하려는 것이 아니라” 규정... “정통신학”... 그는 자신의 신학이 신구약 성경과 초대 교부, 종교개혁, 특히 칼빈주의 전통을 계승한 것이라 설명하지만 실제적으로는 근본주의 신앙 원리에 충실한 것임을 분명히 했다. (116)
  • 박형룡은 경계해야 할 사상을 ‘합리파’와 ‘경험파’, ‘실용파’로 분류... 합리파는 고등비평과 진화론, 자유주의와 현대주의, 그리고 신정통주의 신학까지 포함... ‘경험파’는 종교 신비주의와 체험주의, 오순절운동... ‘실용파’는 사회현실 참여와 사회개조를 주장하는 사회주의와 사회복음주의를 포함... (117)
  • 박형룡은 자신의 신앙과 신학의 기본 바탕과 원리를 규명하고 소개하는 차원을 넘어, 유교의 ‘척사위정론’과 유사한, 자신과 ‘다른’ 신앙과 신학을 배격함으로 자신의 신학을 세워나가는 신학 방법론을 취하였다... 평양신학교 신학은 ‘다른’ 신학에 대한 표용과 이해보다는 “다른 것은 잘못된 것이다”라는 배타적 성격을 취하였다. (117)
  • 평양신학교 폐쇄는 표면적으로 장로교 선교사들의 신사참배 거부정책 때문이었지만 내면적으로는 한국교회에 대한 선교사의 영향력을 배제하고 정부의 교회 통제와 관리를 강화하려는 총독부의 종교정책에서 비롯된 ‘필연적’ 결과였다... 2년 후 총독부 인가를 받아 설립된 채필근의 평양신학교와 서울의 조선신학원... 신사참배를 비롯한 총독부의 종교정책에 ‘순응노선’을 취하였다. (117-118)
  • 서울에서 김재준 송창근ㆍ함태영ㆍ윤인구ㆍ김영주ㆍ김대현 등에 의해 설립된 조선신학원은 그 출발부터 ‘신학의 세계화’와 ‘학문의 자유’를 표방하였다. (118)
  • 김재준은 ‘신앙과 학문의 자유’와 ‘세계 석학들의 제학설 소개’를 언급한 후 ‘신앙을 조선역사와 조선교회의 토양에 심음’, ‘역사와의 상관관계에서 신학의 가변성’, ‘역사의 그리스도화’ 등의 표현으로 평양신학교와는 전혀 다른 신학교육을 추구하겠다는 의지를 표하였다. 특히 박형룡의 ‘정통신학’에 대하여 ‘교권에 의한 신학의 독재’와 ‘복음의 율법화’, ‘교회의 정체성’ 등의 표현을 써가며 반대 입장을 분명히 하였다. (119)
  • 평양신학교 신학과 조선신학원 신학 사이의 갈등... 1930년대 후반에 일어난 적극신앙단 사건과 경중노회 사건, 정인과 찬송가 사건, 기독신보 사건 등에서 드러난 교권과 이권, 교파주의와 지방색을 둘러싼 교회갈등, 일제 말기 신사참배를 비롯한 총독부의 종교정책에 순응했던 교회 지도부의 신앙훼절과 변절문제 등이 맞물리면서 해방 후 한국교회는 신학적 갈등을 배경으로 한 교회분열을 경험하게 되었다. (119)

 

III. 해방 후 신학갈등과 교회분열

 

  • 일제 말기 교회 지도자들이 보여주었던 ‘친일’ 행적에 대한 역사적 평가 문제가 교회 안에서 중요한 이슈로 부각... 귀환한 선교사들의 선교 활동은 38선 이남으로 제한... 해방 전 (북한지역에 비하여) 상대적으로 진보적이었던 남한지역 신학지형에 변화가 불가피... 해방 후 월남한 평양신학교 출신 목회자와 신학자들은 남쪽에서 평양신학교의 보수신학 전통을 계승한 신학교를 설립하려는 운동을 전개했고 그것은 자유주의 성향의 기존 조선신학교 신학과 충돌이 불가피했다. (119-120)

 

1. 역사청산 문제로 인한 교회분열 : 재건교회와 고신측 분열

 

  • 조선신학교... 일제 말기 총독부 종교정책에 순응하고 협력했던 ‘전력’과 ‘진보적’ 성향의 신학 때문에 해방 후 보수적 교회 지도자들로부터 견제와 비판을 받음... (120)
  • 1946년 6월 서울 승동교회에서 개최된 조선예수교장로회 남부총회는 “조선신학교를 총회가 직영키로 하고 대학령에 의한 신학교로 하기로” 결의하였다. 이러한 남부총회 결의는 보수파 교회 지도자들의 반발을 불러 일으켰다... 총독부 정책에 순응했던 교단 지도부 인사들이 주도하는 남부총회에 대한 ‘정통성’ 시비... (120)
  • 해방 직후 ‘친일 경력’의 제도권 교회에 대한 저항과 비판은 ‘출옥성도’들이 주도한 재건교회와 고려파 교회를 중심으로 이루어짐... 김린회 전도사는 1946년 평북 선천에서 재건교회를 설립... 신앙적 순결을 강조... 최덕지 전도사도 경남노회 지역에서 1948년 재건교회 설립... 이기선 목사의 혁신복구파... (121-122)
  • 재건교회와 혁신복구파가 제도권교회(기성교회) 밖에서 신앙회개와 교회재건을 촉구하였다면, 고려파는 제도권 교회 안에 들어가 회개와 개혁을 촉구하다가 오히려 기득권(교권) 세력에게 배척을 당하고 별도의 노회(교회)를 설립한 경우... 한상동 목사와 주남선 목사... 경남노회의 대표적 ‘친일파’ 목회자였던 김길창 목사가 노회장에 선출되자 1947년 경남노회를 탈퇴하고 ‘법통노회’ 설립... 법통노회 성명서 발표... 성경적 교리 확립과 전통적 교회 재건, 정통신앙 회복이 경남 법통노회 조직 이유... (123-124)
  • 법통노회측은 1952년 9월 진주 성남교회에서 총노회를 조직하고 1956년 9월에 총회를 조직함으로 기존 총회와 완전 결별... 고려파... 고려신학교... 박윤선 목사를 초대 교장으로 세움... (124-125)
  • 박윤선 목사는 자신이 수학했던 평양신학교와 미국 웨스트민스터 신학교가 취했던 근본주의, 정통보수, 칼비주의(개혁주의) 신학을 고려신학교 신학노선으로 제시하였다. 그러면서 진보진영의 자유주의와 현대주의, 신정통주의 신학에 대한 경계와 배척을 더욱 강조... 1947년 10월 박형룡의 교장 취임... 6개월 만에 고려신학교를 떠남... 신학교 운영과 관리, 신학교와 정통 장로교 선교부와의 관계, 법통노회의 분리노선 등에 대하여 한상동 목사와 의견 차이를 보인 것이 결별 이유인 듯... (126)
  • 박형룡은 부산을 떠나 서울에 올라와 총회 신학문제대책위원회가 주도하는 신학교 설립운동에 참여하였다... ‘장로회신학교’... “전 평양신학교의 재생을 의미하는 것”이자 “보수주의 신학의 고수운동이 본격화되었음”을 의미... (127)
  • 고려신학교는 박윤선이 다시 교장직음 맡음... 1960년 고신측 교단 내부의 정치적 문제로 고려신학교를 떠나 1963년부터 박형룡의 서울 총회신학교에 합류... (127)
  • 박윤선이 고려신학교를 떠나게 된 이유... 1) 고신측 교단 지도자 중 1인인 송상석 목사가 마산 문창교회 예배당 소유권을 두고 법정 소송을 벌이고 있었는데 박윤선은 “교회 문제를 세속법정에 가지고 가는 것은 성경의 가르침(고전 6:1-8)에 어긋난다”며 비판적 입장... 고신파 지도부 인사들로부터 “교단의 화합을 깬다”는 비난을 받음... 2) 1960년 7월, 정통장로교 선교사 스푸너 선상 환송 예배... 교회의 주일예배에 참석하지 못함... ‘주일성수’ 규칙을 어긴 혐의로 노회와 총회 심사를 받게 되고 교장 해임통보를 받음... (127)
  • 재건교회와 고신측 교단 분립, 부산 고려신학교와 서울 장로회신학교 설립은 해방 직후 한국장로교회가 당면한 두 가지 역사신학적 과제, 즉 1) 일제 말기 교단 지도부 인사들이 보여주었던 신앙 훼절과 왜곡된 역사에 대한 반성과 회개, 2) 일제 말기 폐쇄된 평양신학교의 보수주의(근본주의) ‘정통신학’의 회복과 계승이라는 문제의식에서 나타난 현상들... (128)

 

2. 신학갈등으로 인한 교회분열 : 조선신학교와 기장측 분열

 

1) 조선신학교 학생 51인 진정서 사건

 

  • 조선신학교의 ‘자유로운’ 분위기가 보수주의(근본주의) 전통에 익숙한 신학생들에게 부담과 고민이 될 것은 당연했다... 김재준 1946년 12월 「새사람」에 발표한 “진리와 신앙 - 정통의 도취”란 글... 1947년 4월 ‘조선신학교 학생 51인 호소문 사건’... “조선신학교를 정통주의 신학교육을 실시할 수 있는 신학교로 바꾸거나 그런 정통신학교를 새로 설립해 달라”는 요구... (129-130)
  • 1947년 4월 18일 대구에서 개최된 조선예수교장로회 제33회 총회.. 8인 심사위원회(이자익 위원장) 구성하여 진상 조사... 조선신학교 이사회(이사장 함태영)는 김재준 교수에게 학생들이 문제 삼은 ‘성경관’과 ‘교리문제’에 대한 답변을 담은 진술서를 발표하도록 하였다... 김재준은 나름대로 칼빈주의 전통과 장로교 신조에 충실한 신학을 소유하고 있으며 그것을 가르쳐왔다는 점을 강조... (130-131)
  • 1947년 5월 12~15일 피어선성경학교... 김재준 교수의 신학을 검증하는 심사위원회가 열림... 박형룡의 비판적 검토서도 제출됨... 심사위원회는 김재준 교수의 신학교육에 대하여 부정적인 결론을 내고 “성경무오의 교리를 부인한다”는 내용의 보고서를 총회와 조선신학교 이사회에 제출... (132)
  • 1948년 봄부터 고려신학교와 조선신학교, 모두에 불만을 느낀 이정로와 이인식, 이재형 등 원로 목사들을 중심으로 새로운 신학교를 설립하려는 운동이 일어남... ‘조선신학교 개혁안’ 마련... 조선신학교 이사회의 반대... 김재준 교수를 유학케하는 절충안... 조선신학교 반대... 김재준의 “편지를 대신하여” 발표... (132-133)
  • 총회 신학교문제위원회는 1948년 5월 서울 창동교회에서 회집, 제3의 신학교로 장로회신학교를 설립하기로 결의하고 이정로 목사를 이사장, 박형룡 교수를 교장으로 선임... 1949년 4월 19일 장로회신학교를 총회직영신학교로 인준... (134)
  • 1950년 4월 21일 대구제일교회에서 제36회 총회가 개최... 총대문제로 격렬한 논쟁... 9월에 모이기로 하고 산회... 6ㆍ25 전쟁으로 모이지 못함... 1951년 5월 25일 부산중앙교회에서 제36회 속회총회가 모임... 새로운 교단직영 신학교로 ‘총회신학교’를 설립하는 안이 제출되어 가결됨... 선교사 감부열이 교장, 박형룡, 계일승, 한경직, 권세열, 명신홍, 김치선 등이 교수로 취임... (134-135)

 

2) 김재준 목사 파면과 기장 교단 분립

 

  • 1952년 4월 29일 대구서문교회에 개최된 제37회 총회... 전쟁 때 월남한 이북노회 출신 67명이 총대권을 얻어 참석... 근본주의 신학의 기본원리인 성경무오설과 축자영감설은 한국 보수주의 신학사상의 2대 기준이자 한국장로교회 목회자들의 신학사상을 검증하여 합격 여부를 판단하는 리트머스 시험지가 되었다. (135)
  • 한국신학대학측은 1952년 9월 ‘대한예수교장로회 호헌전국대회’를 소집하고 제37회 총회 결정을 규탄... 1953년 4월 24일 대구서문교회에서 개최된 제38회 총회는 1년 전 김재준 목사의 파면을 지시한 총회결정을 따르지 않은 경기노회의 처사를 규탄하고 총회직권으로 파면함... 김양선은 이를 두고 “프로테스탄트교회로서는 전례 없는 교권의 발동”이라고 표현... (136)
  • 1952년 총회에서 김제노회로부터 “강도사 시취에 성경유오설을 믿느냐 무오설을 믿느냐 물으니 무오설을 믿는다고 대답하였고 축자영감설을 믿느냐 물으니 신학자가 아니어서 모르겠다 대답하니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하는 질의에 대하여 총회는 “축자영감설을 믿는다고 대답 못한 것은 성경유오설을 승인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로 해석하였다... (136)
  • 기장과 예장의 분열 과정에서 외국 선교회도 “어느 편을 지지할 것인가”에 대한 입장을 밝혀야 했다... 캐나다연합교회만 기장을 지지하였고 미국연합장로회(북장로회), 남장로회, 호주장로회는 예장을 지지하였다. 예장 측은 기장을 지지한 캐나다선교회에 대하여 기관지 「기독공보」를 통해 “가나다 선교회 드디어 左傾”이란 제목을 붙여 비난하였다. 진보진영에 ‘좌경’이란 ‘주홍글씨’가 붙여지기 시작하였다. ‘좌경신학’이란 용어도 그래서 생겨났다. (137)
  • 신학적 관점과 이해이 차이로 교회가 분열된 것은 안타까운 면도 있지만 대화와 공존이 불가능했던 진보와 보수, 두 ‘진영신학’이 차라리 공간을 달리하며 각자의 영역에서 각자의 역할을 감당하게 된 것이 ‘교회의 평화’와 ‘선교의 효율성’을 위해서 ‘잘된’ 일일 수도 있다. (138)

 

3. 신학교를 둘러싼 교권 분쟁 : 예장 통합과 합동 분열

 

1) 총회신학교 박형룡 교장과 ‘3천만환 사건

 

  • 총회신학교는 보수 ‘정통신학’을 수호한 예장의 교단직영 신학교로서 그 위상을 분명히 하였다. 그러한 성격은 박형룡 교수가 감부열 후임으로 총회신학교 교장이 되면서 더욱 강화되었다... 일제 말기 마지막 교장인 로버츠가 남긴 것으로 알려진 “박형룡을 교장으로 하라”는 유언까지 언급함으로 평양신학교 후신으로서 총회신학교의 정통성을 강조... (138-139)
  • 박형룡 교장 취임기념 강연... 박형룡의 총회신학교는 평양신학교 출신이 절대다수였던 목회자들의 모교에 대한 ‘향수’를 바탕으로 보수파 목회자와 교인들로부터 절대적인 지지를 얻었다. (139-141)
  • 박형룡의 권위와 위상은 ‘지존에 가까운’ 경지에 이르렀다... 정치 속성상 한 개인에게 지도력이 집중되면 거기에 부작용과 반발이 일어날 것은 당연하였다. ‘도전 불가능한’ 박형룡 교장 체제가 강화될수록 그것에 대한 내부 불만과 반발도 커졌다... 1957년 가을 ‘3천만환사건’... 법과 질서, 도덕과 윤리를 강조하는 ‘보수 정통신학’의 상징적 인물로 추앙을 받아온 박형룡 교장에게 ‘치명적’이었다... 1958년 ‘도의적 책임’을 표하며 사표 제출... 총회신학교 이사회(이사장 안두화)는 ‘근소한 표차’로 박형룡 교장의 사표를 수리... 박형룡 지지자들은 새로 구성될 이사회와 총회의 결정으로 ‘박형룡 교장 사임’을 번복시킬 수 있다고 생각함... (141-143)

 

2) 복음동지회(NAE)와 세계교회협의회(WCC)의 신학갈등

 

  • 복음동지회... 1947년 9월 김재준과 조선신학교 신학사상을 검증대 달라고 총회에 진정서를 제출했던 ‘조선신학교내 정통신앙을 사랑하는 학생동지’ 모임에서 비롯... 김덕수, 정규오, 박창환, 엄두섭, 손치호, 손두환, 차남진, 한완석, 박윤삼, 최인원, 최석홍, 박요한, 박신규, 장세용, 김준곤, 한성욱 외에 조동진과 신복윤, 박영창, 이정윤, 박치순 등이 핵심 회원으로 활동하였으며 장로회신학교 교장 박형룡과 고려신학교 교장 박윤선을 ‘지도교수’로 내세웠다... 1948년 12월, 동지회 기관지 『불기둥』... ‘초자연적 성경’에 근거한 ‘바른 신학’은 곧 박형룡 교장의 성경무오설과 정통신학을 의미... 1952년 정규오와 손치호, 박영창, 조동진, 김덕수, 신윤복 등이 중심이 된 ‘복음동지회’를 창설하고 정규오 목사를 초대 회장으로 선출... (144-145)
  • 복음동지회가 ‘NAE’라는 명칭을 얻게 된 것은 1954년 미국 복음주의협회(NAE) 및 세계복음주의연맹(WEF)과 연결을 맺으면서부터였다... 미국 복음주의협회와 세계복음주의연맹은 진보적인 교회연합운동 조직인 미국교회협의회(NCC)나 세계교회협의회(WCC)와 구별되는 대항조직으로 인식되었다. (145-146)
  • 미국 복음주의협회 및 세계복음주의연맹과 한국 복음동지회와의 연결은 1952년 전쟁 구호금을 전달하기 위해 한국을 방문한 복음주의협회 및 세계복음주의연맹 임원을 한국 복음동지회 임원이 만남으로 이루어졌다. (146)
  • 기존의 장로교 인사들 외에 감리교의 변홍규와 이규갑, 성결교의 천순봉과 김창근, 황경찬, 김중환 등이 참여하였고 구세군과 하나님의성회 목회자들도 개인적으로 참여하였다... 1957년에 회원수가 “목사 950명, 평신도 15만명”에 이르렀다... (146)
  • 해방 직후(1946년) 초교파 연합운동기구로 조직된 한국기독교연합회(NCC)... 1948년 8월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에서 개최된 창립총회에 총무 김관식 목파를 파견함으로 창립회원이 되었다... 1954년 8월 에반스톤에서 개최된 2차 총회에 한국기독교연합회 총무 유호준, 예장 대표 김현정과 명신홍, 기장 대표 강원용과 김정준, 감리교 대표 전종옥 등이 참가... 1946년부터 장로교와 감리교, 성결교, 구세군 등이 순차적으로 회장을 맡기로 하여 김관식과 강태희, 박현명, 황종률, 전필순, 김인영, 김창근, 장운용 등이 회장을 역임... (147)
  • 1958년 4월 서울 남산감리교회에서 개최된 복음동지회 제5회 총회에서는 “복음동지회 회원으로 다른 연합기구(NCC 및 ICCC) 임원 혹은 중앙위원으로 겸임할 수 없다”고 결의... 급진 좌파(NCC)와 급진 우파(ICCC)를 지양하고 온건, 중도 ‘복음주의 노선’을 취하겠다는 의지... 1950년대 후반 한국 기독교계가 한국기독교연합회(NCC)와 세계교회협의회(WCC) 노선을 따르는 ‘진보진영’과 국제기독교연합회(ICCC)의 근본주의, 반공주의 노선을 따르는 ‘보수진영’으로 극명하게 나뉘어 갈등과 대립이 고조되고 있는 상황에서 나온 결정... 국제기독교연합회의 칼 매킨타이어는 러시아를 비롯한 동유럽 공산권 국가의 정교회가 회원으로 가입, 활동하고 있는 점을 거론하며 세계교회협의회를 ‘좌경’, ‘용공’ 단체로 비판... (147-148)
  • 국제기독교연합회와 복음동지회에 참여한 보수파 인사들이 세계교회협의회를 비판하는 이유는 ‘용공 혐의’ 외에 보수주의(근본주의)에서 수용할 수 없는 진보적 신학사상(자유주의, 신정통주의, 현대주의 등)을 수용한다는 점, 그리고 세계교회협의회가 궁극적으로 교파를 초월한 ‘단일교회 설립’을 모색한다는 의구심 때문... 일제 말기 총독부의 강압에 의해 만들었던 ‘일본기독교조선교단’에 대한 ‘불쾌한’ 기억... (149)
  • 1957년 9월 부산중앙교회에서 개최된 대한예수교장로회 제42회 총회에서는 “친선과 협조를 위한 에큐메니칼운동은 과거에나 현재에도 참가하고 있으니 앞으로 계속 참가하기로 하며 단일교회를 진행하는 운동에 대하여는 반대하기로 한다”는 에큐메니칼위원회의 보고를 채택함으로 1) 에큐메니칼운동 계속 참여, 2) 단일교회 설립운동 반대라는 입장을 견지... (149)
  • 복음동지회와 보수진영... 박형룡... 1958년 6월 「신학지남」에 “에큐메니칼운동의 교리와 목적”이란 논문을 발표하여 세계교회협의회가 ‘자유주의자’들에 의해 이론과 운동이 주도되고 있음을 지적하고 ‘단일교회’ 설립의도를 경계하였다. (150)
  • 박형룡 박사의 교장 복귀에 대하여 비판적 인사들은 공교롭게도 한국기독교연합회(NCC) 지도부에 참여한 인사들(한경직, 강신명, 안광국, 유호준, 김양선, 전필순, 김종대 등)이었다. (151)

 

3) 예장 교단 분열

 

  • 1959년 들어서 ‘박형룡 교장 거취 문제’를 둘러싸고 예장 내부의 복음동지회 측과 기독교연합회 측 사이에 여론전과 힘겨루기가 한층 고조되었다... 새 이사회 이사 40명 중에 복음동지회측이 17명... 실행이사 14명 중에 복음동지회측은 4명(이환수, 노진현, 양화석, 김재석) 뿐이었다... 복음동지회측은 이사회를 통한 박형룡 교장의 복귀가 어렵게 되자 노진현 총회장과 김상권 총무(서기)를 비롯하여 복음동지회에 우호적인 임원진으로 구성된 총회에 기대를 걸었다. (151)
  • 총대 선출권을 가진 노회에서 치열한 대결... 1959년 경기노회는 파행 끝에 복음동지회측과 에큐메니칼측이 서로 자신에게 유리한 총대 명단을 만들어 총회에 제출하기에 이르렀다. 1959년 9월24일 복음동지회측 인사인 부총회장 양화석 목사가 시무하는 대전중앙교회에서 제44회 총회가 개최되었다... 경기노회 총대 문제... 노진현 총회장은 “11월 24일까지 정회를 선포”... 이에 항의하는 에큐메니칼측 인사들은 ‘총회 임원 불신임’을 선언한 후 기차로 상경하여 9월 29일 연동교회에서 ‘25노회 149명 총대’들이 참석한 가운데 증경총회장 전필순 목사의 사회로 총회를 속개, 총회장 이창규 목사르 비롯한 새 임원진을 선출하였다... ‘연동측’... (152)
  • 경기노회... 1959년 5월 12일 소집된 정기노회에서 선출된 전체 총대 28명 중 복음동지회측이 18명(64%)이었는데 명단 발표 후 ‘계수착오’가 발견되었고 이에 이환수 노회장이 사임을 표명하였고 6월 29일 에큐메니칼측 강신명 목사가 소집된 임시노회에서는 오히려 28명 중 26명(93%)이 에큐메니칼측으로 채워졌다. 그런 결과가 빚어진 것은 복음동지회측 인사들이 임시노회 참석을 거부한 때문이었다. (152)
  • 총회 정회 선언... 복음동지회측(합동)에서는 노진현 총회장이 ‘장내 소란’으로 더 이상 회의를 진행할 수 없게 되자 증경총회장들이 “11월 24일까지 정회하고 그 전에 경기노회 총대를 개선하도록” 건의한 것을 받아들여 ‘정회’를 선언한 것으로 해석하는 반면, 에큐메니칼측(통합)에서는 노진현 총회장이 경기노회 총대 명단을 두고 격론 끝에 투표를 실시한 결과 정기노회 총대 명단(복음동지회측 유리)이 119표, 임시노회 총대명단(에큐메니칼측 유리)이 124표를 얻어 사실상 에큐메니칼측의 승리로 판명나자 복음주의측에서 시간을 벌기 위해 총회를 ‘연기’(정회)한 것으로 해석하였다. (152)
  • 복음동지회측은 노진현 총회장이 대전 총회에서 ‘정회선언’한 대로 11월 24일 승동교회에서 총회를 속개하였는데 ‘27노회 총대 193명’이 참석한 가운데 양화석 목사를 총회장으로 선출하고 새로운 임원진을 구성하였다... ‘승동측’... (152-153)
  • 미국 연합장로회와 남장로회, 호주장로회 등 3개 선교부... ‘중립적’ 입장에서 연동측을 지지하는 입장으로 선회... 연동측은 3개 외국 선교부와 전국 28개 노회로 구성된 ‘총회 통합위원회’ 명의로 1960년 2월 17일 서울 새문안교회에서 제44회 총회를 소집... 이때부터 ‘통합측’이란 칭호로 불렸다. 이창규 총회장 체제를 재확인하였고 분열의 표명적 원인으로 제기되었던 세계교회협의회에 대하여 “(세계교회협의회가) 신신학, 용공, 단일운동, 다(모두) 아니나 통합을 위해 탈퇴한다”고 선언하였다... 1969년 재가입... (153)
  • 승동(복음동지회)측으로서는 외국 3개 선교부의 지지를 얻지 못한 것이 큰 충격... 승동측은 ‘정통보수신앙’에서 맥이 통하는 고신측 총회와 합동을 추진하였다. 고신측에서도 찬성하여 1960년 12월 13일, 서울 승동교회에서 승동측과 고신측의 ‘합동총회’가 개최되었다... 그때부터 ‘합동측’이란 칭호를 얻었다... 그러나 고신측 한상동 목사를 중심으로 한 고신측 445개 교회는 1963년 ‘고신교단 환원과 고려신학교 복교’를 선언하고 합동측과 결별하였다... (154)
  • 기장 분열이 신학적 갈등이 기본 요인으로 작용하여 교회분열이 이루어진 경우라면, 예장 분열은 교권 분쟁이 먼저였고 신학적 갈등이 그 부속 요인으로 작용... 그 과정에서 교단신학교는 교단 내부 정치 세력 간의 교권투쟁에서 자유하지 못하였고 신학자 역시 교권 투쟁에 참가한 특정 세력의 ‘진영논리’를 대변하거나 지원하는 역할을 감당하였다. (154-155)

 

IV. 맺음말

 

  • 해방 후 한국교회가 경험한 신학적 갈등과 분열은 해방 전부터 잉태된 원인과 배경에서 비롯된 필연적 현상이었다고 할 수 있다. (155)
  • 반성할 점...
    1) 신학의 다양성을 조화와 일치로 이끌지 못하고 갈등과 분쟁으로 이끈 점... 신앙고백과 신학의 다양성이 갈등이나 분쟁의 요인이 아니라 조화와 일치의 조건이 되려면 무엇보다 자기중심적인 사고와 배타적이고 폐쇄적인 자세를 벗어나 상대방을 이해하려는 개방적이고 포용적인 자세를 취해야 할 것인데, 한국교회는 그 점에서 신앙과 신학의 다양성을 포용하는 신앙훈련과 신학교육에서 미숙하였다... ‘다름은 다름’일 뿐인데 ‘다름을 틀림’으로 교육하고 훈련한 결과 교회는 배타적이고 폐쇄적인 신앙집단으로 전락했다...
    2) 신학적 사고의 양대 기능인 진보와 보수 사이의 대화와 협력이 부족했던 점... 전도와 선교의 내용인 복음의 가치와 전통을 ‘지키려는’ 의지(보수)와 시대적, 지역적 상황에 맞추어 복음의 형식과 전도 방법을 ‘바꾸려는’ 의지(진보)가 신학과 목회에 모두 필요한 것인데, 이 두가지 기능과 성향이 조화와 일치보다는 대립과 갈등을 빚었다... 민족통일을 향하여 화해와 일치를 구현해야할 한국교회가 갈등과 분쟁을 넘어 ‘하나 되는’ 모습을 보여주기 위해서 우선 진보와 보수, 두 진영 신학 사이의 대화가 필요하다. 그런 맥락에서 보수 신학교에서 진보신학, 진보 신학교에서 보수신학 강좌가 개설되기를 기대해 본다...
    3) 신학과 교회 사이의 관계를 건설적이고 창조적이기보다는 종속적이고 파괴적인 것으로 경험한 점이다. 신앙 체험과 고백을 다루는 학문으로서 신학은 그런 체험과 고백이 이루어지는 현장으로서 교회를 배제하거나 초월, 무시할 수 없다. 신학교육의 궁극적인 목적도 교회를 통해 이루어지는 목회와 선교사역의 종사자를 양성함이다... ‘교회의 신학’... 교단신학교는 교회의 정치구조 정점인 교단과 밀접한 관계를 맺을 수밖에 없었다. 그 결과 교단신학교 신학은 학문적 양심과 이성에 근거하기보다는 교단의 정치세력이 요구하는 ‘진영논리’를 개발하거나 그 선전 도구로 이용당하는 경우도 없지 않았다... ‘교회의 신학’이라 했을 때, 신학과 교회의 관계를 재정립할 필요가 있다. 교회(교단 정치)의 지시와 요구에 맹목적으로 순종하는 시녀인가? 아니면 교회가 건전한 방향으로 나아가도록 지도하고, 교회가 잘못된 길로 갈 때 이를 견제하고 경책할 수 있는 교사인가? 교회를 위한 신학의 사명과 역할이 과연 무엇인지 냉철하게 생각해야 할 시점이다. (155-1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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