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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신 100년과 그 신학적 정체성” - 김길성
김길성 (2001). 총신 100년과 그 신학적 정체성. 신학지남, 68(2), 99-137.
서론
- 감리교의 분열의 주된 원인이 교회의 주도권 싸움에 있었던 반면에 장로교회의 분열은 경건과 신학을 명분으로 내세워 일어난 분열이었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고 지적한 민경배 교수의 지적은 일리가 있다. (99-100)
- 교권과 정치적인 문제들이 분열을 일으키는 요소였다는 점은 부인할 수 없겠으나 더 중요한 원인은 신학적인 문제였다는 점이 분명... (100)
- 미합중국 장로교회의 신학적 좌경화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프린스톤 신학교의 신학적 몰락을 살펴보고... 조선신학교를 중심한 한국기독교장로회(기장)의 분열을 살펴봄으로써... 결국 성경의 영감과 무오를 부인하는 자유주의 신학과는 도무지 타협의 불가능하다고 하는 사실을 역사의 교훈을 통해 살펴보려고 한다... (100)
I. 프린스톤 신학교의 재편과 자유주의 신학의 수용
1. 프린스톤 신학교 설립
- 1812년 설립으로부터 프린스톤 신학교는 미합중국 장로교회(PCUSA)의 목사 양성 기관으로 출발했다. 당시 뉴저지 대학(College of New Jersey; 현 프린스톤 대학교의 전신)이 역할을 감당하지 못한 사실이 지적... 전문적인 목사양성기관의 설립이 추진... (100)
- 프린스톤 신학교는 미국 교회사에 있어서 대부흥 운동, 특히 제2차 대각성운동의 결과로 1812년에 설립... 1811년에 7인 위원회가 총회에 계획서를 제출하고 총회는 계획서를 채택... 이사회는 교회에 대해 철저한 감독, 심지어 교수들이 가르치는 과목의 변경을 허락하는 정도까지 감독권을 행사... 각 교수는 미합중국 장로교회의 신앙고백과 대소요리문답을 신앙고백으로 채택하고, 받고 서약... (100-101)
- 신학교에 있는 학생은 누구나 매일 아침과 저녁시간에 일부를 경건한 명상과 회상과 반성으로 지낼 것이며, 성경을 읽고 그 읽은 구절을 자신의 마음과 성격과 상황에 개인적으로 또 실천적으로 적용할 생각으로만 성경을 읽을 것이며, 열심 있는 겸손한 기도와 찬양을 은밀히 계시는 하나님께 드리도록 할 것이다. (101)
- 새무얼 밀러... 프린스톤 신학교에서 성경적 진리가 사랑을 받으며, 동시에 변호되지 않으면 안된다고 강조... “교회가 학식 있고 유능한 목회로 채워지더라도, 이에 상응하는 실제적인 경건의 면이 없을 때, 이것은 세상에 대해서는 저주요, 하나님과 자기 백성에 대해서는 일종의 모욕이다. 그리하여 간절히 바라기는, 총회가 교역자를 훈련시킬 신학교를 세움에 있어서 힘닿는 데까지 그런 큰 악이 생기지 않도록 주의하는 것이 필요하다.” (101)
- 프린스톤 신학교는 1929년 신학교 이사회의 개편 직전까지 보수적인 구학파(Old school)의 신학 유산을 유지했다. 워필드(B. B. Warfield)와 메이천(J. Cresham Machen), 그리고 구프린스톤 신학교의 교수진의 대다수는 프린스톤 신학교가 설립자들의 의도를 수행하기 위해서는 구학파의 전통을 보존해야 한다고 믿었다. (101-102)
- 프린스톤 신학자들은 칸트 이후의 근대주의(또는 현대주의)의 반지성주의를 거부할 뿐만 아니라, 후기 근본주의(또는 신근본주의) 운동에서 보여진 반지성의 경향을 동시에 배격하였다. 이들은 정통 칼빈주의가 성경에서 가르친 교리체계임을 믿었다. 이들은 성경의 영감과 무오를 변호하는데 진력했다. 하지(A. A. Hodge)와 워필드는 성경 원본의 문자영감과 이로 말이맘은 무오를 변호했다. (102)
- 워필드는 메이천이 자기 시대에 그러한 것처럼, 성경에 대한 근대주의(또는 현대주의)의 비판의 많은 부분을 거부했다. 워필드는, 사람이 전문 방법에 대한 지식 없이는 성경을 읽어 이해할 수 없다고 하면, 필경 대부분의 기독교인이 성경을 이해한다고 하는 것도 불가능하다고 믿었다. 성경의 명료성에 대한 워필드의 자신감을 표명... (102-103)
- 학식이 있는 자나 배우지 못한 자나 신실하게 찾는 모든 사람들의 손닿는 곳에 구원하는 진리가 있다고 하는 의미에서 성경의 명료성은 신도게요에 확고하게 승인되고 있다. (103)
- 워필드... “성경의 다양성-심심치 않게 모호한 것들, 난제들, 문제들, 인생의 눈에는 도무지 가려진 심원한 것들-이 여기 충분히 인정된다. 지적 통찰력의 다양성과 성경연구에 소용되는 마음의 학습능력 등이 인정된다. 그러나 이 모든 모호한 점에도 불구하고, 성경은 보통 사람의 책이라고 하는 사실을 단언하며, 이와 더불어 성경에 대한 배우지 못한 사람들의 권리와 주어진 주된 목적을 위해 성경을 충분히 사용할 수 있는 능력과 동시에 평상적 수단을 적당하게 사용하는 일에 성경이 개방되어 있다는 사실을 단언한다...” (103)
- 찰스 브릭스(Charles Briggs)의 경우만 해도, 교회가 그를 포용할 만큼 충분히 넓어져야 한다고 하는 점증하는 인식이 장로교회 안에도 있었다. 그러나 통일과 평화를 갈구하는 열망이 종종 교회의 성경적 순결을 희생하게 된다. (104)
2. 프린스톤 신학교 교수들 사이의 갈등
- 1914년 로스 스티븐슨(J. Ross Stevenson, 1866-1939) 씨가 프린스톤 신학교의 학장으로 임명된 사건은 프린스톤의 신학적 좌경화에 불을 당겨놓은 셈이 되고 말았다. 왜냐하면 장차 스티븐슨은 신학교 이사회를 해체하고 새 이사진으로 재편성하는 데 주역을 담당한 인물... (104)
- 메이천은 스티븐슨에 대하여 “신학교에 대한 그의 학문적 공헌은 프린스톤의 표준이하”라고 말하면서도, 그 사람의 신앙의 “명백한 순수성”은 의심하지 않았다... 그는 신학교를 교단 내의 포용주의 주류와 일치시킬 목적과, 또한 자신을 교수회의 의장 및 대표자일뿐만 아니라 나아가서 신학교의 실질적 권한소유자로 만들 대권을 취하는 목적의 일환으로 그 직을 수락했다. (104)
- 스티븐슨... “우리[프린스톤 신학교]는 결합된 구학파와 신학파의 기관이다. 신학교 학장으로서 나의 포부는 신학교가 미합중국 장로교회의 어떤 특정 파벌이 아닌, 전체 미합중국 장로교회를 대표하게 하는 것이다.” (105)
- 메이천은 스티븐슨의 이런 정책이 미합중국 장로교회 내에 현존하는 정반대의 사상경향을 수용하여 역사적 정통노선을 표방해온 프린스톤을 파괴하는 데 도움을 줄뿐이라는 분명한 사실을 무시하고 있다고 말했다... “포용정책” (105)
- 당시 프린스톤 신학교 신약학 교수였던 암스트롱(William Park Armstrong)은 말하기를, 신학교가 설립자들의 뜻을 수행하는 것이라면, 프린스톤은 마땅히 교회 내에 구학파(Old school)의 전통을 대표하지 않으면 안된다고 주장했다. (106)
- 캐스퍼 하지(Caspar Wistar Hodge)... 신학교의 역사적 입장을 묻는 질의서에 대한 대답... “우리는 프린스톤 신학교가 전체 교회의 신학교가 될 수 있다고 믿지 않는다. 다시 말하면, 우리의 교리적 표준문서의 해석에 있어서 보편화된 자유허용 때문에, 교회헌법 아래에서조차도 그 역사적 입장을 떠나지 않으면 교리적으로 전체교회를 대표할 수 있다고 믿지 않는다... 교수회의 대다수는 본 기관이 구학파라고 알려진 교리적 관점과 역사적으로 맥을 같이해 왔다.” (106)
- 교회 내에 모호하고 때로는 이단적 교리의 관용을 요구하는 스티븐슨 학장의 유세는 프린스톤의 정체성에는 분명 낯선 것이었다. (106)
- 소위 “순결 보다 평화”를 내세웠던 이들... 보수적 대의에는 오히려 이단 그 자체보다 더 위험스러운 것으로 판명... (106-107)
- 1920년 「복음주의 교회의 유기적 연합 계획」(A Plan of Organic Union of Evangelical Churches)... 스티븐슨 학장... 어드만 실천신학 교수... 대부분 프린스톤 교수들... 앨리스, 데이비스, 그린, 하지, 메이천, 워필드 등에 의해 반대를 받음... (107)
- 그린(William Brenton Greene, Jr.) 교수... 1905년 프린스톤 신학교에서 한 회의에서 행한 연설... “광교회주의는 교회연합을 교회구별보다 더 중요하게 생각하는 경향이다. 물론 이 경향은 정도에 있어서 크게 차이가 날 것이다. 처음에는 연합을 위해 작은 정책의 차이만을 포기하는 것이 될 것이다. 그리고 마침내는 근본교리들을 제쳐놓고 규정적 원리가 모순되는 교회들과 유기적으로 연합하려고 애쓴다. 광교회주의는... 그 모든 유형에 있어서 진리에 대해 다소간 무관심으로 특징 지워진다. 그것은 교회론적 실용주의다.” (107)
- 스티븐슨 학장 등이 제출한 「다수안」... 1920년 총회 결의에 의해 각노회에 수의하도록 보내졌다... 총회 산하 320 노회 중에서 151 노외가 반대하고 찬성은 100노회뿐이었다... (107)
- 스티븐슨 학장이 추구하는 광교회주의에 동의하는 교수들... 프린스톤의 신학적 좌경화에 실제적인 역할을 다당... 리취 스미스 교수(J. Ritchie Smith)는 이단재판으로 장로교 목회에서 쫓겨난 찰스 브릭스(Charles A. Briggs)가 성경무오를 부인할 것이 옳은 일이었다고 옹호했다. 또한 프레드릭 레취(Frederick W. Loetscher) 교수는 유럽에서 하르낙 문하에서 수학했고, 또 그는 개인적으로 독단론을 싫어한다고 말하고 프린스톤 신학교 교수회 대다수의 논쟁적 경향에 당황해 한다고 말했다. (108)
- 어드만 교수... 「파즈딕 논쟁」에 대해서도 “사람이 충실하지 않다면 법에 따라 처결하자”고 말하는 것 외에 가급적 언급을 회피했다... 자신이 총회장에 출마한 1924년 총회에서, 교리적 갈등의 문제가 교회의 적극적 목회를 붕괴시켜서는 안된다고 하는 자신의 입장을 표명... 그는 자신의 관용적 평판 때문에 보수주의자 매카트니를 상대로 총회장에 출마했으며, 소위 총회 내의 온건파와 자유주의자들의 지지를 받았다. (108)
- 어드만의 모호한 행동 뒷면에 그가 성경모오성에 대한 제한된 견해를 가졌다고 하는 사실은 1920년대와 30년대 미합중국 장로교회 논쟁에서 그가 취한 행동과 결코 무관하지 않다고 하는 것이다... 어드만은 광교회주의의 물결에 휩싸여 그들의 도움을 받아 총회장을 지내기는 했지만, 신학적으로 보수인체 하면서도 자유주의자들을 지지하는 중립주의를 취함으로써 스티븐슨 학장을 도와 프린스톤 신학교가 재편되어 좌경화하는데 크게 공헌하고 말았다. 이러한 움직임의 뒷면에는, 어드만 교수가 프린스톤 신학교 교수로서 성경의 영감과 무오에 대한 가감 없는 수용이 아닌 “제한된” 수용의 입장을 취했다고 하는 사실이다... 정직하지 못한 한 사람의 신학적 태도가 장차 신학교와 교단의 물줄기를 돌려놓는 결과를 역사의 교훈으로 남겨놓았다. (109-110)
3. 해리 에머슨 파즈딕 논쟁
- 해리 에머슨 파즈딕(1878-1969)... 1922년 5월 21일 주일 아침 설교시간에 “근본주의자들이 이길 수 있을 것인가?”하는 제목으로 당시 근본주의자들을 비난하는 설교를 하였다... 메이천 교수의 친구 매카트니 목사(1879-1957)는 “불신이 이길 수 있을 것인가”라는 제목의 설교로 응수... 1922년 총회가 이 문제에 대해 대응하돌고 헌의하게 하는데 앞장섰다. (110)
- 뉴욕노회... 1923년 그리스도의 동정녀 탄생에 대한 믿음을 확인하기를 거부하는 두 젊은이... 헨리 반 듀센과 케드릭 레이먼에게 강도사 인허를 허락하고, 이들은 결국 장로교 목사가 되었다. (110)
- 반 듀센(1897-1975)는 뉴욕 유니온 신학교 교수와 학장이 되었다. 뉴욕노회는 유니온 신학교 졸업생들을 목사 안수하면서 교단 내에서 자유주의 물결의 선봉이 되었다. 1923년 총회는 보수주의자 윌리엄 제닝스 브라이언이 패배하고 자유주의의 지지를 받는 찰스 위샬트가 총회장에 당선되었다... 위샬트는 그의 선출에 대해 “관용에 대한 승리”로 표현했다. (110-111)
- 1924년 총회 재판국은 뉴욕노회로 하여금 파즈딕이 장로교인이 되도록 청하게 하였다. 그러나 파즈딕은 신도게요에 서명하는 일을 거절하고, 뉴욕 제일 장로교회에 사표를 제출했다... 교회는 그에게 대기 초청 기간을 연장해 주었다. (111)
4. 오번 선언서 사건
- 1923년 12월 26일자로 149명의 장로교 목사의 서명과 함께, 총회가 근본교리 5개조를 모든 목사후보생들에게 서약하도록 강요하는 것은 위헌이라고 하는 선언서 발표... ‘오번 선언서’... 역사적 신조들은 무오를 가르치지 않는다고 주장... 그리스도의 동정녀 탄생, 대속, 육체 부활, 이적 등의 교리들은 ‘이론’에 속하며, 총회가 이들 교리들을 교회 내에서 강도사 인허, 임직 등에 대한 필수교리로 선포하는 것은 위헌이라고 주장... 선언서 주장자들은 자신들을 신학적 혁명아 내지 급진주의자들로 제시하기보다는 온건파로 제시하고, 또 복음주의자들 또는 진정한 화해론자들로 제시... (111-112)
- 메이천은 「기독교와 자유주의」라는 책을 출판(1923), 자유주의는 기독교와는 뿌리가 다른, 자연주의에 기초한 별개의 종교형태라고 명쾌하게 지적했다. (112)
- 1924년 총회는 보수주의 기수 클라렌스 매카트니가 프린스톤 교수였던 찰스 어드만을 누르고 총회장에 당선... 헌의부에서 오번 선언서 발행 문제가 제기... ‘근본주의 5개조’는 장로교내에서 위헌이라고 하는 판결... (112)
- 교단의 지도자들과 관계자들이 “근본주의 5개조”의 위헌에 집착한 나머지, 교단 내에서 성경과 역사적 신조에 정면 대항한 「오번 선언서」에 서명한 이들 같은 자유주의자들을 처단하지 못하고 우유부단한 태도로 취한 것이 치명적인 실수였다. 교회는 이 사건을 계기로 종교다원주의에 대한 포용주의 입장을 수용하고 이를 천명하는 방향으로 흘러가기 시작했다. (112)
5. 1925년 이후
- 1925년은 보수주의자들에게는 치명적인 해... 브라이언(William Jennings Bryan, 1860-1925)이 원숭이 재판 충격으로 소천... 찰스 어드만이 총회장이 됨... (113)
- 동정녀탄생에 대한 믿음... ‘15인 위원회’... 순결 보다는 화평을 지향하는 보수주의자들로 구성... 1910년 채택한 ‘근본교리 5개조’를 무효로 하고, 교회가 그 근본교리들을 정의한 적이 없다고 선언... 프린스톤 신학교 이사회의 통폐합을 건의... 총회는 자유주의자들과 포용주의를 관용하는 소위 ‘온건파’에 의해 장악되어진 것... (113-114)
- 웨스트민스터 신학교... 메이천... 로벗 딕 윌슨, 앨리스 등... 보수주의 신학자들이 떠난 프린스톤 신학교는 1936년 존 매케이 박사를 스티븐슨의 후임 학장으로 선출하고, 1939년 신정통신학자 에밀 브룬너를 조직신학 교수로 받아들이고, 발트주의자 홈리히하우젠 교수를 기독교 교육학 교수로 받아들였다. 당시 뉴욕의 유니온 신학교의 교장은 그리스도의 동정녀 탄생교리를 부인하여 목사 안수가 지연되었던 헨리 반 듀센으로 1936년 이래로 학장을 맡고 있었다. (114)
II. 김재준 박사와 자유주의 신학의 수용
1. 조선신학교의 출현과 자유주의 신학의 온상
- 서울의 조선신학교(한국신학대학의 전신)은 신사참배 문제와 상관없이 그 기간 동안 세워졌으며(1940) 친일파적인 인사들에 의해 주도되었을 뿐만 아니라, 한걸음 더 나아가 자유주의 신학을 고수하는 인사들이 운영권을 쥐고 있던 상황... (114)
- 신사참배로 인하여 옥고를 치르던 성도들이 출옥 후에 당시의 신학교 상황을 볼 때 조선신학교에서 목사후보생을 양성한다는 것을 용인할 수가 없는 일이었다... 한상동 목사를 중심으로 1946년에 ‘고려신학교’를 설립... 1952년 10월에 이르러 결국 고려신학교를 중심한 고신 총회가 출범... (115)
- 총회는 1948년 제34차 총회에서 당시 총회 직영신학교였던 조선신학교의 자유주의 신학 흐름에 대하여 제동을 걸었다... 조선신학교 개혁안... 조선신학교 측의 맹렬한 반대로 물거품... 정통 보수신학을 지지하던 교단 지도자들은 1948년에 조선신학교의 자유주의 교육에 대한 포괄적인 대응책으로 창동 장로교회에 모여 서울에 새로운 신학교를 설립하기로 결정... 장로회신학교... 박형룡 박사를 교장으로 세운 장로회신학교는 제35차 총회에서 별 어려움 없이 인준을 받았다... 세 개의 신학교... (115)
- 고신측과의 분열이 신학적인 문제와 행정적 및 정치적인 이유가 뒤얽힌 복잡한 것에 기인한 것이었다면, 기독교장로회와의 분열은 단순하고도 명백한 신학적인 문제로 인한 것이었다. (116)
- 보수주의 신학의 근저에는 성경의 무오를 철저하게 강조하는 성경관이 놓여 있다... 이눌서 선교사... “기독교가 성경을 버리거나 성경을 믿지 아니하면 그 때부터 기독교가 될 수 없는 것이다... 성경의 문자나 절구를 고친다든지 그 정신을 덮어놓는다든지 그 의미를 굽힌다든지 해서는 아니 된다”고 하면서 성경의 권위에 대하여 강조했던 것이다. (116)
- 정통 보수즈의 신학 위에 세워진 장로교회는 점차로 시간이 흐르면서 자유쥬의 신학의 도전을 받기 시작했다. 이것은 초기 선교사들이 전수해 온 보수적인 성경관과는 상당히 다른 서구의 현대적 성경해석이나 관점이 한국장로교회에 적지 않은 영향을 미치기 시작한 것이다. (117)
- 김의환 목사... 자유주의 신학이 침투하게 된 경위... (1) 잠복기, (2) 발아기, (3) 성장기... (117)
- 기장 측과의 분열이 신학적인 문제에 기인된 것이라면 그것은 단연 자유주의 신학이 문제의 핵심에 놓여 있다. 분열의 원인을 그 근원부터 이해하기 위해서는 자유주의 신학과 정통 보수주의 신학의 신학적인 갈등과 대립을 발생 초부터 살펴보는 것이 좋을 것이다. (117)
- 자유주의 신학의 유입 원인으로는 미국 북장로교회의 좌경화를 들 수 있을 것이다... 북장로교회의 좌경화로 인하여 캐나다 연합교회의 자유주의적인 신학이 한국 교회에 더 크게 영향을 미치는 계기가 되었던 것... (118)
- 한국 장로교 총회는 1917년 ‘타신학을 졸업한 이로 본 장로회에서 사역하려는 자는 먼저 장로회의 인도와 관리를 받고, 본교(평양 장로회신학교) 별(別) 신학에 출석하여 신경, 정치, 규칙을 강습한 후, 취직케 하기로’ 결정하였다. 타 신학생의 무분별한 유입을 막겠다는 총회의 의지... 특히 일본에서 신학을 공부한 사람들을 경계하기 위한 것으로 당시 일본의 신학이 독일 근대주의(현대주의) 신학에 강하게 영향 받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119)
- 1918년 김장호 목사... 1923년 총회에서 목사 자격 정지를 받음... 총회를 탈퇴해 자유교회라는 교단을 조직... 윌리엄 커라는 선교사의 조사... 1924년 미국 북장로교 안에 자유주의자들이 천명한 오번 선언서에 서명했던 1283명 중 한 사람... (119)
- 1926년 함흥에서 열린 교역자 수양회... 캐나다 선교부 스콧(Scott) 선교사... 김관식, 조희염... 교역자 하기수양회... 자유주의 신학을 한국장로교회에 주입시키려 함... (119-120)
- 1920년 초 일본과 미국으로 유학을 떠난 이들이 1920년대 말부터 한국에 귀국... 세계 신학사조를 한국교계에 소개하면서 신학적 다양성이 등장... 송창근, 채필근, 김재준... (120)
- 평양 산정현 교회의 담임이었던 송창근 목사의 사임... (120)
2. 김재준 목사의 자유주의 신학
- 간하배... ‘한국교회에 논쟁의 불씨를 가져온 중심인물’이라고 평했던 김재준 목사의 글이 「신학지남」에서 문제됨... (121)
- 김양선... “그는 파괴적인 성경비판을 감행하는 극단의 자유주의 신학자는 아니었으나, 그러나 그는 성경의 축자적 영감과 성경의 역사적, 과학적 무오를 역설하는 보수주의 신학자와는 완전히 대립되는 자유주의 신학자였고 전통과 정통을 무시할 뿐만 아니라 그것과 대결하여 싸우려는 철저한 자유주의 신학자였다.” (121)
- 사실 김재준 목사는 자유주의와 정통주의를 거부하면서 신정통주의 입장을 따른 신학자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121)
- 김재준 목사는 극단적인 자유주의 신학자에 더욱 가까운 신학자... 그의 관심을 끌었던 것은 메이천 박사의 신학이었다기보다는 그의 심경과 생활태도와 행동규범 등이었던 것이다... 메이천의 신학에 직접적인 영향을 받은 흔적은 없다... (122)
- 김재준 목사와 감리교의 정경옥... “조선신학원의 출범으로 감리교의 자유주의 신학진영은 큰 힘을 얻었다. 하나의 좋은 신학동지를 얻었기 때문이었다. 가장 어려운 시기에 양쪽 신학동지들은 서로 격려하면서 자유롭게 신학하는 풍토와 전통을 확인하였다... 감리교의 자유주의 신학 거성인 정경옥 교수가 1945년 초에 그의 사무실까지 찾아와서 김교수를 격려하고 돌아갔다.” 그러면서 다음의 글을 인용하고 있다. “김 목사, 조선신학교는 끝까지 지켜주시오. 학생이 한 둘이라도 좋고 그 학생들이 신학생 답지 못해도 좋소. 전혀 알아듣지 못하는 것 같아도 그대로 3년을 뒀다가 내보내시오. 그래도 뭔가 남으니까요!”, 송길섭 「한국신학사상사」, 348... (123)
- 박형룡 박사... 19세기적인 철저한 자유주의뿐만 아니라 신정통주의란 이름으로 바르트를 추종하는 자들 역시 자유주의 신학자들임을 확실히 하고 있다. (123-125)
- 아빙돈 주석 사건... 1935년 제24회 총회... 장로교 목회자들은 아빙돈 주석을 읽지 않도록 충고하기로 결정... (125-126)
- 신사참배로 평양신학교 무기 휴교... 1939년 3월 조선예수교장로회 대표 13명... 조선신학교 설립위원회 조직... 채필근, 김영주, 함태영, 이정로... 송창근, 김재준, 윤인구, 한경직... (126)
- 김재준 교수는 조선신학이 평양신학보다 다른 점이 선교사와 보수신앙을 가진 분들의 손을 떠나 순수한 한국인에 의한 자유주의 신학을 바탕으로 하는 것을 자랑으로 알고 있었다... 해방 이후 유일한 신학교... (127)
- 조선신학교 학생들 중 51명이 총회에 진정서 제출... 김의환 교수... “학생들이 그것도 신학생들이 어떻게 교수의 강의를 거부할 수 있겠느냐고 그들에게 윤리적인 질문을 던질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런 윤리적 질문이 있기 전에 ‘신구약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니 신앙과 본분에 대하여 정확무오한 유일의 법칙이니라’고 있는 신조 위에 서 있는 한국장로교회 직영신학교에서 그 신조에 어긋나는 신학을 가르칠 수 있느냐는 원리 문제가 문제시되어야 한다. 그리고 그 신조를 받아들일 수 없는 신학자였다면 아예 장로교 총회직영 신학교에서 떠나는 것이 학자의 양심상 타당한 처사였을 것이다. ‘성경은 곧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성경관을 신조로 하는 장로회 총회에게 그 신조의 타당성을 재확인하기 위하여 총회 직영 조선신학생들이 총회에 진정서를 낸 것은 오히려 정당한 것이었다. 그러나 신학교 당국에서는 그 학생들을 도리어 퇴학 및 무기정학으로 부당한 처벌을 하게 되자 대부분이 고려신학교로 전학을 하고 말았다.” (128-129)
- 진정서에 서명한 학생 중... 정규오, 박요한, 김준곤, 엄요섭... 총회는 7인 조사위원회를 조직... 박형룡 박사는 김재준 교수의 성명서를 조사한 후... 김재준 교수가 모세 오경 저작권을 부인함으로써 정통 신학에서 떠났으며, 그가 성경의 무오성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신앙은 보수, 신학은 자유라는 미명하에 자유주의 비평학을 과감하게 수용하고 있지만 자유주의 비평학과 성경의 무오성은 서로 조화될 수 없다고 결론을 내렸다. 이와 같은 박형룡 박사의 비판문이 발표되자 교계는 일대 노골적인 신학논쟁에 휩쓸리게 되었다. (129)
3. 기장의 분열
- 맥케이 박사, 부룬너 박사가 방한하여 자유주의 신학에 대해서 변호하는 한편, 조선신학교 측에 용기와 힘을 실어줌... 1949년 4월 새문안교회에서 열린 제35회 총회에서 장로회신학교의 총회직영이 가결... 한경직 목사의 조정으로 합동위원을 내도록 제안... 남궁혁, 이대영, 배은희, 윤하영, 이창규, 안두화, 인톤... 1951년 5월 부산중앙교회 총회... 이창규 목사... “양 신학교 합동을 위하여 많은 노력을 기울였으나 끝내 성사시키지 못했으므로 총회는 두 신학교의 직영을 취소하고 새로이 총회 직영 신학교를 설립하되 방법은 신학교위원회에 일임하였으니 급속히 실현하여 달라”... (130-131)
- 1951년 9월 18일 대구에서 총회신학교 개교... 조선신학교는 응하지 않음... 사실상 조선신학교는 정통 보수를 내새우는 평양신학교와 교회를 같이할 수 없다는 신학사상의 배경을 뒤에 갈고 있었던 것... (131)
- 조선신학교의 신학적 성격은 결코 정통 보수신학의 산실인 평양신학교의 그것과는 합치할 수 없는 것임을 알 수 있다. (132)
- 1953년 4월 25일 대구 서문교회당 제38회 총회... 경기노회는 김재준 처리를 명령한 제37회 총회 결의에 대하여 문제를 제기... 총회는 노회의 결정을 무시하고 본회 석상에서 직결 파면토록 경기노회에 지시하였다. 경기노회가 이를 거부하자, 즉석에서 김재준 목사를 파면하는 표결을 하여 그 결과에 따라 ‘김재준 목사는 제36회 총회 결의 위반 및 성경유오설을 주장하였으므로 권징조례 제6장 42조에 의하여 목사직을 파면한다’는 전례없는 결의를 단행하였던 것이다. 이날 투표 결과는 51대 46표의 근소한 차이로 가결되었다. (133)
- 호헌 총회... 1954년 6월 한국신학대학.. ‘대한기독교장로회’... 568교회, 목사 291, 교인 21,917명... (134-135)
- 기장측의 신학적 성격은 이미 출발에서부터 장로교의 기본적인 신학과 상충되는 것... (136)
결론
- 개교 100주년을 맞으면서 다음 세대를 위해 무엇을 남길 것인가를 깊이 생각해야할 시기에 와 있다. 우리가 과연 본교의 건학정신에 따라 신구약 성경 66권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자신이 가감 없이 믿고 가르치는 신앙, 곧 역사적 개혁주의, 정통 칼빈주의, 청도교적 장로교 신학의 물줄기에 서 있는지 새삼 자신을 돌아보는 계기가 되어야겠다. (1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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