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동의 눈으로 본 예수] 21장. 예수의 비유들 : 들어가는 글
의사였던 갈레누스는 그리스도인을 긍정적으로 이야기한 첫 이교도이기도 했다. 140년경 갈레누스는 이런 글을 썼다.
증명을 통한 논증을 끝까지 따라갈 수 있는 사람은 드물다. 이런 이유로 사람들은 비유를 요구하며 이런 비유에서 유익을 얻는다.... 지금 같은 경우도 우리는 그리스도인이라 불리는 사람들이 그들의 믿음을 비유(와 기적)에서 끌어오면서도 때로는 (철학 하는 사람과) 같은 방식으로 행동하는 모습을 본다... 그들은 정의를 열심히 추구한다는 점에서 순수한 철학자에 못지 않은 경지에 이르렀다. (431)
이후 몇 세기가 지나면서 비유는 그리스도인의 삶(윤리)를 밑받침하는 원천이 되었지만 그리스도인의 신앙(신학)을 떠받치는 원천은 되지 못했다... 비유는 어떻게 기독교 신앙의 원천이라는 지위를 잃어버렸을까? (432)
예수는 은유를 구사하는 신학자셨다. 즉 그가 의미를 만들어 낼 때 주로 쓰신 방법은 논리와 추론보다는 은유와 직유, 비유와 극적 행동이었다. 예수는 철학자가 아니라 드라마 작가와 시인처럼 의미를 만들어 내셨다. (432)
신학 : 개념의 신학과 은유의 신학
바울은 개념과 은유를 사용하여 일한다. 서구인인 우리는 바울이 구사한 개념은 강조하면서 정작 그의 은유는 배제하는 경향이 있다. 이를 통해 우리는 바울을, 개념을 즐겨 쓰는 우리 신학자들 세계에 짜맞추었다. (432)
예수는 개념의 신학자라기보다 은유의 신학자다. (432)
은유는 합리적 논증이 할 수 없는 방법으로 의미를 전달한다. 그림은 추상적 추론보다 강력해 보이지만 추상적 추론을 대신하지는 않는다. 텔레비전이 보여주는 강력한 이미지는 일천 단어로도 표현하지 못하는 의미를 전달한다. 신학에서 비유로 의미를 만들어 낼 경우, 비유는 추상 언어로 진리를 설명하는 말들이 범접하지 못할 방법으로 청중에게 도전을 던진다. 그러나 비유와 추상은 서로 연결되어 있는 경우가 잦으며, 둘다 신학 작업에 반드시 있어야 한다. (433)
은유는 의미를 설명하는 차원을 넘어 의미를 만들어낸다. 비유는 확장된 은유다. 그런 점에서 비유는 어떤 개념을 전달하는 시스템이 아니라 독자/청자에게 그 안에 들어와서 살라고 초대하는 집이다. (433)
비유가 청자/독자가 초대받아 들어가서 살 집이라면, 비유는 그 집의 창을 통해 세계를 바라보라고 재촉한다. 바로 이것이 나사렛 예수의 비유들의 실체다. (434)
우리가 할 일에는, 예수가 당신의 일부였던 문화의 빛 안에서 자신에 대해, 또 자신과 관련하여 들려주신 은유 및 이야기를 이해하려고 애쓰는 책임도 들어 있다. (434)
은유 풀기
첫째는 이 작업의 중요성을 깨닫는 일이다... 중동에서는 어린 자식이 아버지가 아직 살아 있는데 자기 상속분을 달라고 요구하는 것은 “아버지, 왜 얼른 안 돌아가세요?”라고 말하는 것과 같다. 아버지가 이런 말을 듣는다면, 당연히 펄펄 뛰며 아들 따귀를 후려갈기고 집 밖으로 내쫓을 것이다... 이 비유는 우리가 문화의 창을 통해 방금 말한 세 가지 사실이 지닌 의미를 통찰할 때라야 비로소 다른 경우에는 파악하지 못할 새로운 의미를 드러낸다. (434-435)
두 번째 과제는 하나님의 말씀이 가지는 역사성을 깨닫는 것이다... 역사적 해석이 신학적 의미라는 황금을 담고 있는 금고를 여는 열쇠다. 이 열쇠가 없으면 황금은 놋으로 변하고 만다. 이것이 모든 중요한 문헌에 해당하는 원리임을 유념하는 것이 유익하다... 남북 전쟁과 게티스버그 전투의 맥락을 무시하는 사람은 링컨의 연설을 이해할 수가 없다. 마찬가지로 예수의 비유를 해석할 때는 반드시 예수가 사셨던 세계 안에서 해석해야 한다. (435)
세 번째 과제는 예수가 사용하신 비유들의 올바른 의미 내지 의미들로 볼 수 있는 것이 무엇인지 밝혀내는 일이다... 20세기의 학자들 사이에서는 과거 수 세기 동안 알레고리 방법이 만들어냈던 해괴한 과장에 맞선 반동으로 “비유 하나마다 한 가지 요점”이 있다고 주장하는 흐름이 등장했다. 또 다른 이들은 한 비유 안에 몇 가지 주제가 들어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비유가 더 큰 세계관의 일부이고 “우리가 들어가 살도록 초대받은 집”이라면, 그 집에 사는 사람은 다른 창들을 통해 세계를 내다볼 수 있다... 각 부분의 의미는 이 비유 전체가 형성하는 덩어리 안에서만 비로소 완전하게 이해될 수 있다. 이 덩어리의 내용은 예수께 이 비유를 처음 들었던 청중이 이해했던 의미에 의해 제한되고 통제받아야 한다. (436-437)
한 비유의 신학 덩어리를 구성하는 주제들은 분명 그 비유를 이야기하고 처음 들었던 세계에서 자라났을 것이다. 하지만 그런 원리를 오늘날에도 엄격히 적용해야 할까? (437)
서구의 일부 사람들이 예수의 비유 안에서 마르크스주의나 프로이트주의나 실존주의를 발견했다. 또 다른 이들은 비유를 들여다보고 연구하는 데 적합한 렌즈로서 포스트모더니즘을 고른다. 그나 예수나 예수의 청중은 이런 해석들은 상상도 못했을 것이다. 더구나 해석자가 비유에서 발견한 것은 모두 예수의 삶과 증언에 비추어 평가되어야 한다. (437)
요약 : 비유 고찰을 시작하면서
우리는 모두 비유에서 드러나는 “그리스도의 생각”에 다가갈 때 활용할 지식의 자원과 영의 자원에 제한을 두었다... 우리가 할 일은 예수를 에워싼 청중 뒤쪽에 서서 예수가 청중에게 하시는 말씀에 귀를 기울이는 것이다. (4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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