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동의 눈으로 본 예수] 5장. 지복 설교 1 (마태복음 5:1-5)
예수가 말씀하신 “심령이 가난한 자”는 무슨 뜻인가? 누가는 단순히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라고 말한다. 서구 기독교는 이 두 문구를 둘러싸고 오랫동안 논쟁을 계속해왔다. 이 논쟁에서 한 쪽은 예수의 진정한 목소리가 누가복음의 언급에서 발견된다고 주장한다. 하나님은 가난한 자에게 복을 주신다. 이 주장에 따르면, 마태는 이 단순하고 강력한 말을 영혼에 관한 말로 바꾸어 버렸다. 마태가 기록한 말과 누가가 기록한 말의 차이를 이해하는 또 다른 입장은 예수를 예언자 전통에 속한 사람으로 보면서, 예수가 이사야처럼 “가난한 자”를 겸비하고 경건하여 하나님을 찾는 자로 보았다고 본다. 마태의 말은 이미 누가복음에 현존하는 원래 의미를 밝히는 데 도움을 준다. 예수가 이 말씀을 빌려오신 이사야 66:2은 이렇게 말한다.
그러나 이런 사람이 내가 찾으려는 사람이니
가난하고(ani) 심령이 통회하는 자요
내 말을 듣고 떠는 자라(베일리 번역).
만일 독자가 이 본문은 물론이요, 이 본문과 비슷한 이사야서와 시편의 다른 본문들로부터 이미 영향을 받았다면, 이런 독자에게는 “심령이”라는 문구가 더 필요하지 않다. 그러나 이사야서의 이런 배경을 모른다면, “심령이 가난한”이라는 말은 이 본문을 이해하는 데 중요하다... 대다수의 경우에 “가난한 자”는 견비하고 경건하여 자신에게 하나님의 은혜가 필요함을 알고 하나님 말씀을 들으며 “떠는” 사람을 묘사한다. (110-111)
[슬퍼하는 자]
그리스도인은 고난을 추구하라는 촉구는 받지 않지만, 고난이 비범한 스승임을 깨달으라는 독려는 받는다. 우리는 고난을 겪고 난 뒤에야 비로소 인간의 영혼이 얼마나 깊고도 깊은지 깨닫는다. 고통은 우리가 우선시하는 것들의 순위를 바꿔놓는다... 슬퍼하는 자들은 고난을 견딘다. 그들 가운데 복이 있는 자들은 하나님의 위로를 체험하는 이들이다. (113)
[온유한 자]
“땅”을 이야기하는 이스라엘 예언자는 누구든지 한 가지 주된 의미를 마음에 두고 있었다. 예언자가 말하는 땅은 이스라엘/팔레스타인이라는 거룩한 땅이었다.
예수가 말씀하신 단어 ‘땅’은 “약속받은 땅”을 가리킨다. 여기서 예수는 시편 37편을 인용하면서 세 구절을 살짝 고치시는데, 그 세 구절은 다음과 같다.
그러나 야웨를 기다리는 자들은
땅을 유업으로 받을 것이요...
그러나 온유한 자들은 땅을 유업으로 받고
풍성한 번영 가운데 기뻐할 것이요...
의로운 자들은 땅을 유업으로 받고
거기서 영원히 살리로다(시 37:9, 11, 29)
예수는 온유한 자가 아브라함이 약속받았던 땅을 유업으로 차지하는 복을 얻었다고 선언하였다. (117)
처음에 예수의 말씀을 들었던 청중은 예수가 “그 땅”(유대 땅)과 그 땅을 자기 유업으로 주장할 수 있는 사람들을 이야기하신다고 들었을 것이다. 땅을 차지하는 사람은 민족적으로 어떤 이의 자손이거나 폭력을 휘두르는 사람이 아니라 “온유한 자”다. 우리는 마태복음 독자들이 바로 이 본문을 읽으며, 온 세상을 하나님의 자녀, 곧 온 세상을 보살피고 이 세상과 조화를 이루며 살아갈 이들이 물려받을 귀중한 유업으로 규정한다고 이해했으리라고 추측할 수 있다... 예수가 온유한 자를 가리키는 말로 사용하셨을 히브리어/아람어 단어와 우리가 보는 신약성경의 그리스어 단어는 강조점이 다르다. 각 단어는 본문을 풍성하게 해주는 뉘앙스를 제공한다. (118)
히브리어 단어 ‘ani’(가난한/겸비한)는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받아들이는 순종과 관련된다. 그리스어 단어 prays(온유한)는 하나님의 임재하심 가운데 살아가는 사람이 아니라 사람들 사이의 관계를 가리킨다. 아리스토텔레스는 기원전 4세기에 쓴 『니코마코스 윤리학』에서 prays를 무모함과 비겁함의 중도를 행하는 미덕이라고 정의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덕의 길이란 늘 두 극단 사이의 “중용”이라고 보았다. 진정 prays한(온유한) 사람은 마땅이 분을 내야 할 사람을 상대로 마땅한 이유에 근거하여 마땅한 방법으로 마땅한 순간에 마땅한 시간만큼 분을 내는 사람이다. 이 단어를 가리키는 말로서 본문 배후에 자리한 히브리어 단어의 의미는 우리에게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받아들이고 그분의 뜻에 순종하라고 말한다. (119)
바빌로니아 탈무드를 보면, 초기 팔레스타인 랍비들이 두 성전이 파괴당한 이유를 논의한다. 랍비 요하난은 이렇게 말했다. “예루살렘에 있던 첫 성전이 파괴당한 이유는 무엇인가? 우상숭배다. 두 번째 성전이 파괴당한 이유는 무엇인가? 까닭없는 증오다.” 그는 계속하여 까닭없는 증오가 “우상숭배보다 더 통탄스럽다”라고 설명한다. 바로 이런 까닭 없는 분노가 지금 우리가 보는 본문이 말하는 온유함의 정반대다. 그렇다면 의로운 분노는 어떠한가? (119)
하나님이 정하신 정의의 기준을 사용하는 사람들은 (하나님 앞에서) 온유한 자로서 그분의 정의를 이루고자 분투하는 자이기에 땅/세상을 유업으로 받는다. (119)
요약 : 지복 1
1. 누가는 지복과 저주 네 쌍을 제시한다. 마태는 아홉 가지 지복을 제시한다. 각각의 지복 모음에서는 핍박이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2. ‘복이 있다’는 어떤 보상을 받으려면 충족해야 할 요구 조건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신 기쁨을 이미 누리는 영혼의 상태를 말한다.
3. 이사야의 용례에 비춰볼 때, “심령이 가난한” 자는 겸비하고 경건하여 하나님을 찾는 자를 말한다. 하나님 나라가 그들 것이다.
4. 하나님은 슬퍼함으로써 복이 있는 자를 위로하신다.
5. 고난을 부인하는 것도, 고난을 어둡게 받아들이는 것도 모두 옳지 않다.
6. 고난은 심오한 지혜로 들어가는 문이 될 수 있다.
7. 초상집이 마음에 즐거움을 줄 수 있다.
8. 의인은 불의를 보고 슬퍼하며 긍휼히 여길 자를 긍휼히 여김을 그치지 않는다.
9. 의인은 자신의 죄를 슬퍼하며 하나님께 위로를 받는다.
10. 예수가 말씀하신 “땅”은 이스라엘 땅이었다. 폭력을 쓰는 자나 특정 지파 사람이 아니라 온유한 자만이 그 땅을 유업으로 받을 권리를 가진다. 후대 교회는 이 본문이 말하는 땅의 의미를 온 세상을 아우르는 의미로 확대했다.
11. 온유한 자는 겸손히 하나님을 찾는 자다. 그들은 무모하지도 않고 비겁하지도 않다.
12. 온유함은 다른 사람들에게 가하는 불의에 분노하는 것과 조화를 이룬다. (120-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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