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동의 눈으로 본 예수] 22장. 선한 사마리아인 비유 (누가복음 10:25-37)
대화
모든 해석자는 그가 속한 나라의 언어, 문화, 역사, 경제, 정치, 군사의 영향을 받는다. 복음서저자들은 1세기 정황을 배경으로 예수의 비유를 제시했다. (439-441)
율법교사는 “내가 무엇을 해야 영생(영원한 삶)을 유업으로 얻겠습니까?”라고 묻는다. 이에 예수는 대답을 하시지 않고 “율법이 무엇이라 하느냐?”라고 되물으신다... 예수와 율법교사가 나누는 대화 중 이 대목은 “행하다”와 “살다”라는 말로 시작하고 또 그 말로 끝맺는다. (441)
중동의 전통 문화를 보면, 선생은 앉고 학생은 선생에게 존경을 표시하고자 서서 이야기한다. 그러나 이 이야기에서는 율법교사가 선생을 시험하려고 일어선다... 율법교사는 겸손한 학생처럼 서서 질문하지만, 그의 목적은 선생을 시험/검증하는 것이다. (441-442)
이븐 알 타이이브는 율법교사의 독특한 관심사를 두 가지로 설명한다. “첫째는 예수께 온 사람들, 곧 실제로 이끌림을 받아 예수께 온 사람들에게 영생의 주제를 가르치시는 것이 만인의 구주이신 그분의 습관이었다.” 두 번째 설명은 율법교사가 예수의 대답을 이용하여 그분을 함정에 빠뜨린 다음, 사소한 말을 트집 잡아 그 말을 대적들이 예수가 모세 율법의 정당성을 부인한다고 공박하는 데 활용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는 것이다. (442)
사실 율법교사의 첫 질문은 흠이 있었다. 사람이 무언가를 하면 어떤 것을 유업으로 받을 수 있다니? 유업이란 본디 가족 중의 한 구성원(이나 친구)이 다른 구성원(이나 친구)에게 주는 선물이다. 유업은 서비스를 제공하고 받는 대가가 아니다. 이 이야기 속 질문자는 이런 사실을 잘 아는 유대교 율법교사다. (442-443)
한 이방인이 예수 시대 직전에 유명한 랍비인 샴마이에게 다가간 뒤, 한 발로 서서 이렇게 말했다. “내가 한 발로 서 있는 동안에 온 율법을 내게 가르쳐주십시오.” 샴마이는 화를 내며 그를 쫓아버렸다. 그러자 그 이방인은 1세기의 또 다른 유명한 랍비 학파의 창시자인 힐렐르 찾아가 같은 물음을 던졌다. 힐렐은 이렇게 대답했다. “네가 싫어하는 일을 네 이웃에게 하지 말라. 그것이 온 율법(토라)이요, 나머지는 그 율법의 주석이니라. 가서 그것을 배우라.” 우리는 이것이 황금률을 부정문으로 표현한 형태임을 쉽게 알 수 있다. 예수는 분명 힐렐의 답변을 받아들여 그 답변을 긍정문으로 바꾸신 듯하다. (443)
예수는 “하나님을 사랑하라”를 먼저 말씀하신 뒤에 “네 이웃을 사랑하라”를 제시하셨다. 이 순서는 중요하다. 경험적으로, 미운 이웃을 사랑하기는 제자의 마음이 하나님을 사랑함으로 가득 차기 전에는 아주 어렵다. 하나님을 사랑함이 이웃 사랑이라는 힘든 일에 필요한 에너지와 동기를 제공해주기 때문이다... 신자가 하나님의 사랑에 감사하여 사랑의 값진 행위르 ㄹ다른 이들에게 펼친다면, 이런 이는 그를 향한 하나님의 흔들림 없는 사랑이 지지해준다. (444)
율법교사가 영생을 유업으로 받으려면 해야 할 일은 단 하나, 하나님과 그의 이웃에게 아무 조건 없는 사랑을 계속 행하는 것뿐이다. (444)
예수가 말씀하시는 기준은 하나님을 마음과 뜻과 영혼과 힘을 다하여 흔들림 없이 사랑하고, 이웃을 자신과 똑같이 일관되게 사랑하라는 것이다. 바울이 선언하듯이, 문제는 율법이 아니라 우리가 율법을 지킬 수 없다는 것이다(롬 7:13-20). 여기서 예수가 제시하신 기준은 우리가 아무리 탁월하게 노력해도 이루지 못한다. (444)
율법교사, “그럼, 내가 구원을 얻으려면 하나님과 내 이웃을 사랑해야겠군. 좋아, 이제 필요한 일은 몇 가지 정의를 내리는 것이군.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말은 율법을 지킨다는 말인데, 그건 나도 이미 알고 있지. 그럼 이제 정확히 누가 내 이웃이고 누가 내 이웃이 아닌지 정의해 볼 필요가 있겠군. 일단 이 점을 분명히 해두어야 다음 이야기를 할 수 있겠구나.” (445)
누가는 “그가 자기가 옳음을 보이고 싶어 예수께 말하되”라는 말을 포함시킴으로써 율법교사의 마음을 관통하는 생각을 우리가 이해할 수 있게 도와준다. 의롭다(옳다) 하심을 받는다는 것은 구원을 받는다는 것이요, 구원을 받는다는 것은 “영생을 유업으로 받는다”는 것이다... 자기의 의로움을 보이고 싶어하는 이 사람은 분명 “자신의 힘으로 하나님께 받아들여지는 사람이 되고” 싶어한다. (445)
요컨대 그는 “네 동포의 자손들에게 복수하거나 원한을 품지 말고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나는 야웨니라”라고 명령하는 레위기 19:18을 읽고 “네 동포의 자손들”만이 그의 이웃이라는 결론을 내렸을 가능성이 있다... 율법교사는 시편 139:21-22을 더 좋아했을 수도 있다... 성경을 골라 읽는 경향은 해묵은 골칫거리다. 이 율법교사는 자기 이웃과 이웃이 아닌 자들을 조심스럽게 구분하면서 영생으로 나아갈 길을 얻으려고 준비했던 것 같다... 율법교사가 “내 가족”과 “내가 사는 동네에 사는 나그네” 외의 사람을 이웃으로 생각하기는 불가능했을 것이다. (445-446)
선한 사마리아인 이야기의 일곱 장면
이븐 알타이이브가 11세기 이라크의 바빌론 유대인 공동체가 들려준 한 유대인 이야기(선한 사마리아인과 비슷... 피의 복수가 포함되었다)... 이 이야기가 유대와 관련지어 열왕기하 기사(왕하 17:24-38)와 연계한 것은 이야기의 뿌리가 유대임을 부각시켜준다.
수사
이사야 28:14-18과 시편 23편도 예언적 수사 틀이다. 모두 일곱 장면이 있는데, 여기서 일곱은 완전수다. 정점은 중앙에 있으며, 마지막 세 장면은 첫 세 장면과 (역순으로) 연결되어 있다... 중앙의 정점은 사마리아인이 베푼 긍휼을 묘사한다. (450)
주석
흉악한 떼강도가 “그를 벗기고 두들겨 팼다.” 중동의 강도들은 피해자가 저항할 때만 때린다고 알려져 있다. 저항하는 실수... (450-451)
1세기에는 여리고에 사는 제사장이 많았다. 그들은 두 주씩 맡은 일을 행하고자 예루살렘으로 올라갔다가 여리고의 집으로 돌아가곤 했다(27킬로미터의 산길). (451)
제사장들은 세습 집단이었으며 부유하다고 알려져 있었다. 스턴(Menahem Stern)은 이렇게 썼다. “제2성전 시대가 끝날 즈음, 제사장은 유대 사회에서 특권 계급을 형성했다.” 이 이야기를 듣는 중동인은 돈많은 제사장이 탈 것을 탔으리라고 짐작할 것이다. 그렇다면 이런 제사장은 충분히 피해자를 탈 것에 태우고 데려가 도움을 줄 수 있었으리라. (451-452)
예수 시대에도 중동의 다양한 민족 공동체들은 입은 옷이나 쓰는 말이나 억양이 서로 달랐다... 언어와 옷과 억양, 이 세 가지는 “그들과 우리”를 쉽게 구별해주는 민족 표지요 계급 표지였다. (452)
다친 피해자는 죽었을 수도 있다. 그가 정말 죽었다면 그에게 다가간 제사장은 의식법(儀式法)상 부정한 자가 된다. 부정한 자가 된다면, 이 제사장은 예루살렘으로 돌아가 일주일 동안 정결해지는 과정을 거쳐야 한다. 이런 일을 하려면 시간이 제법 걸릴 것이다. 이 과정을 밟는 동안, 그는 제물의 십일조를 먹을 수도 없고 심지어 십일조를 거두어들이지 못할 수도 있다... 더구나 길에 쓰러져 있는 피해자는 이집트인이나 그리스인이나 시리아인이나 페니키아인일 수도 잇는데, 그럴 경우 율법에 따르면 제사장에게는 딱히 어떤 책임이 없었다. 만일 제사장이 피해자에게 다가가 그를 만졌는데 그가 나중에 죽었다면, 이 제사장은 그가 입었던 제사장 옷을 찢어야 했을 텐데, 그렇게 되면 귀중한 재산을 파괴하지 말라는 율법도 어기게 된다... 제사장은 의식법상 정결함을 지키는 것이 중요하므로 이런 정결을 헤치는 모험을 할 수 없다는 결정을 내리고 가던 길을 계속 갔다. (452-453)
제사장이 더럽혀졌는데도 그런 부정한 상태로 제단에서 제사를 올리려 한다면, 그는 다음과 같은 운명을 감내해야 할 것이다. “그의 형제 제사장들은 그를 법정으로 데려가지 않았지만, 제사장들 가운데 젊은 사람들이 그를 성전 뜰 밖으로 끌어낸 뒤 몽둥이로 머리를 쳐서 그 두개골을 쪼개버렸다.” 이렇게 부정한 자로 고발당할 위험성도 그를 두렵게 했을 것이다. (453)
앞서간 제사장이 선례를 보여주었기 때문에, 이 레위인은 양심의 부담 없이 다친 피해자를 지나쳐 갈 수 있었다. 제사장도 아닌 일개 레위인이 제사장도바 잘난 체할 수 있었을까? ... 만일 그가 다친 사람을 데리고 여리고에 들어갔다면, 제사장을 모독하는 일이 되었을 것이다! (454)
장면 4는 청중 앞에서 느닷없이 폭탄을 터뜨린다. 이야기 주인공이 유대교의 일반 신자가 아니라 유대인들이 미워하는 외부인이다... 오리게네스, 암브로시우스, 아우구스티누스, 이븐 알 타이이브는 모두 이 사마리아인이 예수를 상징한다고 정확히 보았다. (455)
중요한 것은 이 사마리아인이 자신이 활용할 수 있는 모든 것(기름, 포도주, 천으로 싸매기, 탈 짐승, 시간, 에너지와 돈)을 사용하여 다친 사람을 보살폈다는 것이다. (456)
사마리아인은 자기 목숨마저 위태로운데도 다친 사람을 유대 지경 안에 있는 여관으로 옮겨간다. 이런 여관은 광야가 아니라 동네에 있었다... 사마리아인이 사람을 태우는 짐승 위에 다친 유대인을 태우고 유대인 동네에 들어가는 것은 위험했을 것이다. (457)
두 데나리온은 적어도 한 주나 두 주 동안 여관에서 묵는 데 충분한 비용이었을 것이다... 여관에 묵는 사람이 여관비를 내지 못하면, 당시에 대체로 평판이 좋지 못하던 여관 주인들을 통해 노예로 팔릴 위험이 있었다... 사마리아인은 다친 사람을 구한 일이 헛일이 되지 않게, 여관비 일부를 미리 내고 잔액은 마지막에 내겠다는 확약을 해야 했다. 이런 특별한 노력을 하지 않았으면, 사마리아인은 가난한 피해자가 광야에서 죽게 버려두는 것이 더 나았을지도 모른다. (458)
이 이야기를 들으면서 율법교사에게는 스스로를 의롭게 할 수 없음(곧 자신의 힘으로 영생을 얻을 수 없음)을 깨달을 기회가 찾아온다. 예수가 요구하신 일은 그의 능력을 넘어서기 때문이다. 아울러 그와 이 비유를 읽는 모든 이들에게는 이 비유가 만들어졌을 때부터 그들이 본받을 고귀한 윤리의 모델이 주어졌다. (459)
요약 : 선한 사마리아인 비유
이 비유에는 윤리와 신학이 모두 들어 있다.
1. 영생-은혜의 선물. 율법 교사는 그가 도저히 충족시킬 수 없는 기준을 받는다. 그 과정에서 그는 자기 힘으로 영생을 얻지 못함을 발견할 수 있는 기회를 가진다. 영생은 그에게 거저 주어지는 선물이기 때문이다.
2. 이웃이 됨. “누가 내 이웃입니까?”라는 율법교사의 질문은 그릇된 질문이다. 그는 “내가 누구에게 이웃이 되어야 하는가?”라는 질문을 해보라는 요구를 받는다. 이 비유는 이렇게 대답한다. “네 이웃은 언어나 종교나 민족을 불문하고 절박한 처지에 있는 사람이다.” 성경 전체를 통틀어 외부인을 긍휼히 여기는 모습이 가장 뛰어나게 표현된 곳이 바로 여기다. 이런 비전에서 나온 윤리적 요구는 한계가 없다.
3. 율법의 한계. 긍휼히 여김은 모든 율법의 요구가 미치는 범위를 넘어선다. 제사장과 레위인은 글로 기록된 책만 생각하다가 그들이 해야할 의무를 발견하지 못한다.
4. 민족 차별. 이 비유는 공동체가 가진 신앙의 태도와 민족을 차별하는 태도를 공격한다. 이 이야기는 사마리아에서 한 선한 유대인이 다친 사마리아인을 구하는 이야기였을 수도 있다. 그러나 이 비유에서는 유대인에게 미움을 받는 사마리아인이 (추측컨대) 다친 유대인을 구조한다.
5. 선생이신 예수. 이 이야기에는 선생으로서 예수의 노련한 모습이 나타난다. 예수는 율법교사의 질문에 대답하시지 않고 다른 질문들을 던지심으로써, 율법교사가 스스로 자기 질문에 대답하게 하신다. 그 과정에서 율법교사는 율법에 대한 신실함이 요구하는 것에 관한 이해를 넓히라는 요구를 받는다.
6. 기독론. 청중의 종교 지도자(제사장과 레위인)가 실패한 뒤, 구원자가 외부에서 갑자기 나타나 구원을 베푸는 데 따르는 희생을 개의치 않고 구원을 베푼다. 예수는 자신에 관해 이야기하신다.
7. 십자가. 선한 사마리아인은 뜻밖의 사랑을 값지게 보여준다. 그는 목숨이 위태로운데도 다친 유대인을 유대인 동네로 데려가 거기서 밤을 보낸다. 다친 사람은 이제 이전과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될 것이다. 예수는 자신의 수난이 지닌 의미를 일부나마 생생하게 일러주신다. (460-4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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