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가복음과 기적설화, 사실이냐 상징이냐, 해석과 설교”
[마가복음의 기적이야기] 강일상, 11~30
서론
1. 마가복음과 기적설화
마가복음에는 모두 17개(18개)의 기적설화가 수록되어 있다... 마가복음 전체의 3분의 1을 기적설화가 점하고 있다. 그래서 마가복음을 일러 ‘기적의 복음서’라고 말하기도 한다... 마가는 그의 복음서에서 ‘예수님이 하신 일’을 기적설화로 말하고 있다. (11)
왜 마가는 그의 복음서의 상당 부분을 기적설화로 채운 것일까? 물론 그 의미의 중요성을 누구보다도 잘 이해한 사람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우선은 이해하기 힘들다... 기적설화라는 말 그대로 설화(說話) 형식의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설화의 ‘상징성’ 때문에 이해하기 힘든 것이다. (11-12)
‘복음서라는 문학 형태’가 최초의 복음서인 마가복음에서 비롯... (12)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알케”(1:1)... 시작이라는 뜻과 함께 ‘기원’이나 ‘근원’(원천)이라는 의미를 함축... 시간적인 의미로는 ‘시작’(처음)일 수도 있겠지만, 그렇기 때문에 존재론적인 의미로는 그 시작이 ‘근본’이고 ‘근원’일 수도 있지 않겠느냐는 발상... (12)
요한복음 1장 1절, “태초에 로고스가 있었다”... “근본 안에는(근원적으로는) 로고스가 있었다”는 뜻으로 새겨들어도 무방하다. 그 로고스가 모든 존재의 ‘근원’이라는 뜻이다. (12)
마가복음은 ‘알케’라는 말을 대문자로 못박아 놓음으로써, 이 책이 복음의 ‘근본’임을 강조하고 있다. 마가는 초대교회에서 설교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그 복음의 ‘근본’이라고 할 수 있는 ‘예수의 삶’과 연결시키려는 신학적인 의도를 첫 절에서 극명하게 드러낸다. 모두들 ‘복음복음’하는데 내가 쓰는 이 ‘예수의 이야기’야말로 복음의 ‘근본’(알케)이라고 할 만하다는, 무언의 피력인 셈이다. 달리 말하면, ‘예수의 삶’과 무관한 복음이 어찌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일 수 있겠느냐는 항변일수도 있다. (13)
‘복음을 믿으라’(1:15)가 아니라... “복음 안에서 믿으라”... 우리의 믿음을 ‘복음 안에’ 자리잡게 함으로써, ‘예수의 삶’과 무관한 믿음이 되지 않게 하려는 의도적인 표현이다. 어쩌면 초대교회에서 복음이 점점 관념화하는 것에 반발하여, 그 복음을 ‘예수의 삶’에 뿌리박게 함으로써 초대교회의 신앙을 새롭게 갱신하고자 하는, 속 깊은 뜻이 있었을 수도 있다. 그래서 마가복음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말 대신 ‘그를 따른다’는 말을 즐겨 쓴다. 마가의 주장인즉, 예수님은 ‘나를 믿으라’고 하지 않고 “내 뒤로 오라”(1:17)고 했다는 것이다. ‘예수님의 뒤를 따라’ 그분처럼 사는 것을 믿음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그를 믿는 믿음’에서 한걸음 더 나아가 ‘그를 따르는 믿음’으로 갱신되어야 한다는 주장이다. 그를 따라 그처럼 살게 하기 위해서, ‘예수님은 이렇게 사셨다’고 말하고 싶었던 것이다. 그야말로 ‘복음의 근본’을 잃지 않게 하려는 마가의 신학적 노력이, 최초의 ‘복음서’인 마가복음을 쓰게 했으리라는 것이 필자의 견해이다. (13-14)
1970년대... 복음서의 ‘문학형태’... 아리탈로지(aretalogy)... 그 당시 헬라문화권에서도 복음서와 비슷한 아리탈로지라는 ‘영웅신화’가 있었음을 주목하게 된 것이다. 한 인간의 영웅적인 삶을 기술하는 아리탈로지의 표현양식이 예수님의 삶을 기술하는 복음서의 표현양식과 유사하다는 것이 밝혀짐으로써, 복음서를 달리 볼 수 있는 새로운 시각이 열린 셈이다. (14)
‘역사적 사실’이라는 미망(迷妄)에서 벗어나고 싶어도 벗어날 수 없던 사고의 틀을 가진 사람들에게, 아리탈로지의 ‘신화적인 표현양식’은 복음서를 이해하는 데에 새로운 시각을 제공할 가능성을 보여주었다... (14)
신화를 연구하는 학자들이 영웅신화에 대해서 말하는 것을 들으면, 복음서가 왜 예수님의 생애를 그런 식으로 그려내는지를 이해하는 데 많은 도움이 된다. (14-15)
영웅신화는 ‘집단 인격의 중심축’으로서, 영웅신화의 모방을 통해서 그 집단의 구성원들은 집단 인격에 참여하게 하는 역할을 한다고 한다. ‘집단 이상’의 모델인 영웅은, 개인이 따라야 할 ‘이상적 자아의 원형’으로 존재한다는 것이다. 역사적인 인물을 ‘신화적인 원형’을 통해서 기억하게 함으로써 그를 모방하게 하고, 그 모방을 통하여 그 신화에 참여하는 개인의 삶을 의미있는 삶으로 ‘재형성’시킨다는 것이다. (15)
마가복음이 제시하는 예수님이야말로, 교회적으로는 ‘집단 이상의 모델’이고, 신앙인 개개인에게는 ‘이상적 자아의 원형’인 셈이다. 그리고 그러한 예수님의 삶에 참여하게 함으로써, 우리의 이상적인 자아인 예수님을 ‘닮은 자’가 되게 하려는 것이 복음서의 기록 목적이고, 그것을 가르쳐 전함으로써 우리를 ‘재형성’하고자 하는 것이 교육적 의도였다고 볼 수 있다... 오늘날 우리가 갖고 있는 역사적 관점으로 보면 ‘사실을 왜곡’(?)한 것처럼 비쳐질 수도 있겠지만, 마가에게는 역사저 사실조차 신화의 원형을 따라 재구성할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15)
마가의 화법... ‘설화적인 화법’... 설화적인 화법이 가장 두드러지게 나타나 있는 것이 바로 기적설화이다... ‘마가가 말하는 방식’을 이해하고 가능한 한 그의 ‘화법’대로 읽는 일... (16)
2. 사실이냐, 상징이냐
역사(歷史)와 신화(神話)... 구전 전승에 가장 적합한 것이 ‘신화적인 이야기’... 그렇다면 그들에게는, 그 ‘신화’ 자체가 그들의 ‘역사’였을 수 있다. 그들은 그들의 역사를 신화화(神話化)했던 것이다... ‘신화의 역사성’을 이해하는 역사가라면, 역사를 문자로 기록하여 문헌적 사료로 남기는 과정에서도 ‘신화적인 이야기’들을 그 역사에서 배제시킬 수는 없었을 것이다. 즉 단군신화가 『삼국유사』에 기록된 데에는 그 나름의 까닭이 있었을 수 있다는 말이다. (17)
입증될 수 있는 ‘사실’이어야 ‘역사’일 수 있다는, ‘실증적 역사관’이 범하는 어리석음... 비록 그 신화를 통하여 역사를 ‘재구성’할 수는 없다고 하더라도, 적어도 그 해석을 통하여 그러한 ‘신화적인 역사’가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 무슨 ‘의미’를 전하고자 하는지는 알 수 있을 터인데, 그 해석조차도 ‘역사적 객관성’에 위배된다는 이유로 도외시하기 일쑤다. (17)
역사비평이라는 시각으로 복음서를 대하는 학자들에게 ‘마가복음서 속의 기적설화’는, 마치 『삼국유사』 속의 단군신화처럼 오랫동안 ‘이물스런 이야기’로 취급되는 경향이 있었기 때문... 말로는 기적설화라고 하면서도, 해석하는 걸 보면 그 설화를 설화로 보지 않는 듯 하다. 설화 속 상징에 대해 그들이 얼마나 무지한가 하는 것은, 기적설화에 대한 그들의 해석을 보면 확연히 드러난다... 그들은 기적설화를 해석하면서도 곧잘, “이 기적은 실제로 일어났는가?” 또는 “실제로 일어났다고 믿을 수 있는가?”라며 되묻곤 한다. ‘사실’ 여부를 묻는 질문이다. 그리고 이 질문에 어떻게 대답하는가에 따라 믿음의 가부가 갈리기도 한다. 사실로 믿으면 ‘신앙’이고, 사실로 믿지 못하면 ‘불신앙’이라는 식이다... (17-18)
이런 유의 이야기를 사실로 받아들이기 힘들어하는 그 불신앙이야말로 ‘정직한 불신앙’이고, 그것을 사실로 믿는 그 신앙이 오히려 ‘부정직한 신앙’일 수 있다... ‘설화의 사실성’을 묻는다는 것 자체가, 어찌 보면 부끄러워해야 마땅한 무지의 소치이다. (18)
기적설화가 ‘설화’라는 것을 긍정한다면, ‘사실이냐 아니냐’를 물을 게 아니다. ‘사실이냐 상징이냐’를 물어야 한다. 기적설화의 ‘사실성’과 ‘상징성’이 문제의 핵심으로 부각되어야 마땅하다. (19)
필자에게 설화가 말하는 중풍병자는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중풍병자가 아니다. 설령 중풍병자라고 해도, 나는 그것을 서구 학자들처럼 ‘육체적 질병’으로 보지는 않는다. 그리고 이것은 결코 필자의 주관적인 시각이거나 자의적인 해석이 아니다. 예수님 자신이 그런 식으로 말하고 있고, 마가복음 자체가 그런 식으로 이야기하고 있기 때문이다... 마가복음 2장 17절... “건강한 사람에게는 의사가 필요없으나 병자에게는 필요하다”고 하면서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오지 않았고 죄인을 부르러 왔다”고 분명히 말씀하신다. 자신을 ‘의사’에 비유하여 하신 말씀이다. 이 말씀에서 ‘건강한 사람’이니 ‘병자’니 하는 말은, 분명 은유적인 뜻을 가진 ‘상징적인 말’이다. 앞 구절에서 말하는 건강한 사람은 스스로를 의롭다고 생각하는 ‘의인들’을 일컫는 말이요, ‘병자’라는 말은 그 당시 유대교의 율법체제하에서 ‘죄인들’이라 일컬어지는 사람들을 두고 하는 말이다. 한마디로 말해, 마가는 ‘죄인’의 상징으로 ‘병자’라는 말을 쓰고 있는 것이다... 기적설화에 등장하는 모든 병자나 불구자들을 ‘육체적인 질병이나 불구’로 볼 수 없는 까닭은 바로 역에 있다. 마가복음 자체가 그런 식으로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마가가 말하는 방식대로’ 읽어야 하지 않겠냐는 것이다. 그래야 그 설화의 배후에 숨겨져 있는 ‘사실’에 근접할 수도 있고, 그 설화 속의 상징을 통하여 마가가 말하고자 하는 ‘의미’도 천착해낼 수 있다는 것이다. 설화 자체를 하나의 ‘상징적인 의미체계’로 보는 것이 기적설화를 대하는 필자의 시각이다. 요컨대, 설화는 ‘설화’로 읽어야 하고 상징은 ‘상징’으로해석되어야 한다고 보는 것이다... 기적설화 자체가 ‘사실’은 아니다. ‘사실’은 그 설화의 배후에 숨겨져 있어서 해석을 통해서만 어렴풋하게나마 밝혀질 수 잇다. 그리고 그렇게 밝혀진 사실을 통해서만, 마가가 말하고자 하는 메시지가 우리 삶의 현실에서도 의미 있는 것으로 받아들여지게 된다. 이런 해석과정을 거쳐야만, 마가복음이 말하는 기적설화가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도 비로소 복음일 수 있게 된다는 말이다. (19-20)
3. 해석학적 방법론이냐, 해석자냐
신학교에서 배운 ‘성서비평 방법론’이 한 편의 설교를 준비하기 위한 성서해석에는 아무론 도움도 되지 못하더라는 소리... (21)
‘역사비평’이니 ‘양식비평’이니 ‘편집비평’이니 하는 그 모두가, 보다 나은 해석을 위한 그들 나름의 ‘신학적인 몸부림’이었던 것이다... 부단히 다른 해석방법을 모색해왔다는 것 자체가, 그들 시각에 문제가 있었음을 드러내고, 그들 방법론의 어쩔 수 없는 한계를 그들 스스로 실토한 것과 다름없지 않겠는가? (23)
‘해석의 객관성’을 확보하기 위해서, ‘해석자’를 뒤로 밀쳐버리고 ‘주관’이 개입되지 못하게 하는 우를 범한 것... 해석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해석자’인데, 마치 그 어떤 ‘해석방법’이 해석하는 것처럼 여기게 만들어버린 것이다. 내가 땅을 파면서도, 땅을 파는 것은 ‘내’가 아니라 ‘곡괭이’라고 주장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 ‘해석자의 주관’ (24)
해석이야말로 해석자의 눈과 귀가 어느 정도인지를 드러내는 두려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과연 얼마나 깨달은 사람인가 하는 것은, 그 눈과 귀가 말해주고 그 해석으로 드러나게 마련이다. 결국 보이는 만큼 해석하고 해석하는 만큼 살 수밖에 없다면, 한 사람의 신학자나 설교자가 해석자로서 갖는 책임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소경이 소경을 인도한다”는 예수님의 말씀이, 새삼 오도의 책임을 묻는 중압감으로 느껴지는 것도 이 때문이다. (25)
4. 해석과 설교
신학자는 ‘해석’을 했을 뿐이고, 그 속에서 ‘의미’를 찾는 일은 설교자의 몫? 그러나 ‘의미’가 찾아지지 않는 ‘해석’이 갖는 주석상의 문제는, 그냥 지나칠 일이 아니다. (25)
‘의미’가 무엇인가? ‘나와의 관계’를 묻는 속에서 찾아지는 것이 ‘의미’이다. 그래서 의미가 있다느니 의미가 없다느니 한다... 중요한 것은, 그 과거의 이야기가 오늘을 사는 나의 현실과 무슨 관계가 있고 어떻게 잇대어질 수 있느냐 하는 것이다. 나와의 관계를 찾기 위해서 해석하는 것이고, 그렇게 찾아진 의미를 전하기 위해서 설교하는 것이다... 설교자는 해석자이다... ‘우리’가 해석할테니 ‘너희’는 설교만 하라는 식으로 말한다면, 그건 너무 교만한 게 아닐까? 또 ‘우리’는 설교할테니 해석은 ‘너희’가 해달라는 식이라면, 그것 역시 지나친 자기비하가 아닐까? 지금 한국교회의 현실에서는 이 ‘우리’와 ‘너희’ 사이의 간격이 점점 심화되는 것 같아서, 우려하는 마음으로 하는 말이다. (26)
설교 자체가 갖는 ‘설득력’의 문제... 청중으로 하여금 깨닫는 것이 있게 해야 한다... 결국 이
‘설득력’의 문제는, ‘남의 이야기’처럼 보이는 ‘과거의 이야기’가 ‘우리의 이야기’로 들릴 수 있도록 어떻게 ‘현재화’하느냐 하는 문제와 직결된다. (26-27)
마가복음의 저자... 그들에게도 예수님의 이야기는 과거일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소위 ‘역사적 현재형’이라고 일컫는 ‘동사의 현재형’을, 마가가 빈번하게 사용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그런 면에서... 복음서의 저자는 ‘저자’이기만 한 것이 아니라 복음을 설교하는 ‘설교자’였다고 볼 수도 있다. (27)
예수님이 안식일에 회당에서 더러운 귀신을 축출하신 이야기... 귀신은 우리가 생각하는 그런 귀신이 아니라 ‘더러운 영’임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인간 누구나 마음 속에 숨겨 지니고 있는 ‘욕심’을, 성경이 ‘더러운 영’으로 말하고 있다는 것도 깨닫게 된다. 더구나 그 ‘귀신 들린 사람’이 안식일에 회당에 있었다고 하는 것까지 고려하면, ‘상황파악’은 끝났다고 볼 수 있다... 그 ‘안식일’과 ‘회당’이 우리에게는 ‘주일’이고 ‘교회당’이며, 그 ‘더러운 귀신 들린 사람’은 다름 아닌 ‘내 자신’이기 때문이다. 여기까지가 해석이다... 우리가 ‘욕심’이라고 일컫는 ‘더러운 영’을 주제로 다양하게 개진될 수 있다. 자본주의가 표방하는 ‘자유’라고 하는 것이 기실은 ‘욕망 추구의 자유’에 불과하다는 것을 깨닫게 할 수도 있고, 물질 축복을 조장하는 기복신앙의 잘못을 지적하며 회개를 촉구할 수도 있다. 예수께서 왜 “자기를 부정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고 하셨는지도 설명이 가능하다. (29)
심성이 바뀌고 삶이 변화되는 것이, 어디 하루아침에 이루어질 일이던가? 인간됨의 성숙이라고 하는 것은, 교인들만이 아니라 목회자 자신에게도, 자기 수련을 통하여 부단히 추구하며 이루어가야 할 거룩한 과제이기 때문이다. (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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