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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의 기적이야기] “회당에서 더러운 영을 쫓아내신 이야기”(마가복음 1장 21~28절)
[마가복음의 기적이야기] 강일상, 32-67
- 우리가 해석하고자 하는 본문은 더러운 영을 쫓아내는 이 이야기를, 마가가 왜 네 명의 어부를 부른 이야기 다음에 자리 잡게 했는가 하는 것은 쉽게 짐작이 가지 않는다. 시간의 경과에 따라 순차적으로 기록했다고 볼 수만은 없다. 어떤 의미상의 연관성이 있는 게 분명하다... 좀더 거슬러 올라가 1장 14-15절과 연관시켜 보면, 전혀 별개인 것 같은 두 이야기가 기실은 예수께서 전파하신 “하나님의 복음”(1:14)에 종속되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회개하고 믿으라’고 하신 그의 설교적 주제는 네 명의 어부들에게도, 그리고 더러운 영에 사로잡혀 있는 회당 안의 사람들에게도 똑같이 적용되었을 것이라는 추리이다. (32)
- 예수님이 촉구하신 ‘회개와 믿음’(1:15)이, 그들 어부들에게서는 ‘버림과 따름’(1:18, 1:20)으로 나타남... 그들의 ‘회개’는 제 가진 것을 ‘버리는 것’으로 나타나 있고, 그들의 ‘믿음’은 실제로 그를 ‘따르는 것’으로 구체화되어 있다. 이것은 회개와 믿음에 대한 마가의 생각이 매우 실제적이고 과격했음을 암시한다. 그 회개는 세례라고 하는 종교의식으로 대체될 수 없고, 그 믿음은 그 어떤 사상체계를 수용하는 것으로 관념화될 수 없다고 비판하는 것 같다. 제 가진 것을 버리는 구체적인 ‘포기’를 수반하지 않고는 회개했다고 말할 수 없고, 예수님의 뒤를 따라 그분처럼 살아가는 ‘추종’ 없이는 믿는다고 말할 수 없다는 것이다. (32)
- 가르침의 내용... 1장 15절에서 말하는 ‘회개와 믿음’이라는 주제와 연관이 되어 있다는 가설... “회개하라. 그리고 복음 안에서 믿으라”(1:15)고 하신 말씀이 그 회당 안에 있는 사람들(유대인)에게 어떤 반응을 일으켰는지를 보여주기 위해서, 마가는 네 명의 어부를 부른 이야기 다음에 이 이야기를 자리 잡게 한 것으로 보인다. 다시 말해 이들 회당 안의 사람들은, 앞에서 그물을 버리고 따른 네 명의 어부들과는 달랐다는 것이다. ‘복음 안에서’ 믿으라(1:15)고 했지만, 그들은 지금 ‘회당 안에’ 있고 ‘더러운 영 안에’ 있다. 겉으로는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인 척하지만 속으로는 더러운 영에 사로잡혀 있고, 스스로는 의로운 체하지만 실상은 회개해야 마땅한 죄인들이라는 비판이다. 한마디로 겉과 속이 달랐다는 것이다. (33)
- 예수님의 ‘가르침과 행위’를 분리해서 생각하는 서구 학자들에게는, 가르치는 일과 귀신을 쫓아내신 일이 서로 다른 별개의 일로 보일 수밖에 없겠구나 싶다. (33)
- 22절(가르침-놀람-권능)과 27절(귀신축출-놀람-권능)의 연결고리 (34)
- 예수님이 가르치신 일과 귀신 축출이 별개의 사건이 아니다... 마가에게서 귀신 축출은 가르침의 사건이었고, 그 가르침이 사람들에게 일으킨 내적 변화를 형상화하기 위해서, 마가는 설화라는 형식을 빌려 귀신 축출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다. (34)
- 마가가 이 귀신 축출을 “새로운 가르침”(27절)이라고 말했다면, 귀신 축출을 가르침이라고 말한 까닭을 묻고 찾는 일이 해석의 우선적인 과제가 되어야 하지 않겠느냐는 말이다. (35)
해석상의 과제
- 최초의 기적설화... 마가가 예수님의 첫 번째 활동을 귀신 축출로 기록했다는 것이 중요하다. (35)
- ‘마가 요약’(1:32-39, 3:7-12, 6:53-56)... ‘병자 치유와 귀신 축출’, ‘말씀 전파와 귀신 축출’은 예수님의 활동을 서술하는 기본 행태로서 마가의 편집 경향을 나타내는 그 어떤 범례적인 성격을 갖고 있다. (35-36)
- 귀신 축출은 예수 활동의 뼈대를 이루는 중요한 일이었을 뿐 아니라, 제자들에게 위임된 사역 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일이었음을 알 수 있다. (36)
- 오늘날 물질 축복을 강조하며 기복신앙을 조장하는 교회 풍토 자체가 어느 면에서는 귀신 들린 상태나 다름이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아무리 목회에 성공하고 대형 교회를 이루었다고 하더라도, 성공을 탐하고 큰 것을 추구하는 그 영 자체가 이미 더러운 영인데, 어찌 성령 운운하며 거룩한 영을 설교한다고 해서 그 더러움이 가셔지겠는가? (37)
- 귀신 축출을 ‘새로운 가르침’이라고 하면서 설교와 연관 짓는 마가 저자의 신학적 의도... (37)
본문 해석
- 17절에서 예수님은 “내가 너희를 사람의 어부가 되게 할 것이다”(1:17)라고 약속하면서 “내 뒤로 오라”고 명령하신다. 그 어부들을 ‘사람의 어부’가 되게 하기 위해서, 예수님은 지금 ‘사람의 어부’로서 당신이 하시는 일을 그들에게 보여주고자 하신다. 그리고 이제 사람의 어부가 되어야 할 그들에게, ‘사람이 어떤 존재인지’를 회당 안에 있는 사람들을 통해서 보여주고자 하신다. 너희들은 지금 가진 것을 버리고 나를 따르지만, 인간에게는 제 가진 것을 버리지 못하는 더러운 영(욕심)이 그 내면에 도사리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자 하는 것이다. 그 욕심을 극복하지 않고는 가진 것을 버릴 수 없고, 그 더러운 영을 내쫓아 회개시키지 않고는 따를 수 없다는 것이다. (38-39)
- 가버나움... ‘위로의 동네’... 마가복음과 이사야서 40장 사이의 사상적 연관성... 바벨론 포로생활에서 해방되어 돌아온 이스라엘 백성에게 “위로하여라, 내 백성을 위로하여라”(사 40:1)고 하면서 감격에 겨워 소리치던 이사야의 그 ‘위로’를, 마가는 여기 ‘위로의 동네’인 가버나움에서, 예수님의 가르침을 통하여 독자에게 들려주려고 하는 것은 아닐까? 안식일에 회당에서 더러운 영을 쫓아낸 이 이야기의 주제를 ‘사로잡힌 상태에서의 해방’이라고 해석하는 필자에게는, ‘포로 생활에서의 해방’이라고 하는 이사야서 40장의 배경이 그대로 이 이야기의 무대 배경으로 설정되어 있다고 보이는 것이다. 그리고 이사야가 전한 그 과거의 메시지를, 마가는 자기가 처한 교회 현실에서도 의미있는 것으로 받아들이고자 하는 것이다. 과거를 현재화하고자 하는 이런 의도는, 이 이야기의 첫 절을 현재형 어법으로 말하고 있다는 데서도 그대로 드러난다. (39)
- “그들은 가버나움으로 들어갑니다.” 이 첫 절에서 “들어간다”는 동사는 현재형이다. 흔히 ‘역사적 현재형’이라고 하는 것이다... 헬라어에서 ‘역사적 현재형’은 과거의 사실을 현재 일어나는 일처럼 생생하게 그려내려고 할 때 사용하는 어법이다. (39)
- 이 귀신 축출 이야기는 마가 저자의 시점에서 보더라도 과거의 사건이다. 그러면서 이 이야기의 메시지와 신학적 내용은 현재의 삶과도 무관하지 않다. 과거의 사건을 기록한 것 같지만, 내용상으로는 현재의 우리와도 관계가 있는 ‘우리의 이야기’일 수도 있는 말이다. (40)
- 마가는 ‘가르치다’와 ‘가르침’이라는 말을 이 이야기에서 무려 네 차례나 사용하였다... 예수님의 생애를 말할 때, 그것은 ‘예수님의 가르침과 행위’라는 말로 요약한다. 교훈적인 말씀을 ‘가르침’이라고 보고, 기적설과 같은 것은 ‘행위’로 보는 것이다. 그래서 마태는 말씀 자료에 주력하고, 마가는 기적 설화에 관심을 둔다고 말한다... 기적 이야기는 예수님이 실제로 행하신 일을 기록한 것인데, 그것을 마가가 왜 가르침의 구도 속에 설정해 놓고 있는지 이해가 되지 않는 모양이다. 예수께서 ‘하신 일 ’이 곧 ‘가르침’일 수는 없지 않느냐는 생각인 것 같다... 마가복음은 예수님이 행하신 일을 가르침이라는 차원에서 설화 형식의 이야기로 말하고 있는데, 그들은 이러한 마가의 ‘설화적인 화법’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것 같다. (40-41)
- 가르침의 권능에 놀랐다고는 하는데, 왜 마가는 그 가르침의 내용에 대해서 함구했을까? ... 마태복음의 저자는 이 귀신 축출 이야기를 그의 복음서에서 아예 삭제해 버렸다... 산상설교(마 5:1-7:29)의 말미에 남겨놓은 말... 마태복음 7장 28절을 보면, 예수께서 산상설교를 마쳤을 때 무리들이 “그의 가르침에 놀랐다”고 한다. 그리고 29절에서는 그 놀란 까닭을, “그것은 그가 그들의 율법학자들처럼 가르치지 않고 권능을 가진 것처럼 가르치고 계셨기 때문이었다”고 설명하고 있다... 마가의 첫 번째 기적 설화인 귀신 축출 이야기조차 과감하게 삭제한 마태가, 유독 마가복음의 이 구절만을 남겨서 그거슬 산상설교의 말미에 결구로 사용한 까닭은 무엇일까? (42)
- 마가복음을 원자료로 사용한 마태도 필자처럼, 예수께서 가르치셨고 사람들은 그의 가르침에 놀랐다고 하는데 왜 그 가르침의 내용에 대해서 마가가 함구하고 있는지 의아하게 여긴 것 같다. 그래서 독자적으로 예수님의 교훈적인 말씀자료들(산상설교)을 수집하여 그것으로 마가의 귀신축출 이야기를 대체시켜 버린 것이다. (42)
- 22절을 보면 “사람들은 그의 가르침에 놀랐다”고 한다. 여기 “놀랐다”는 말은 27절에 나오는 “놀랐다”는 말과 뉘앙스가 다르다. 이것은 ‘에크’와 ‘플렛소’의 합성어로서 ‘때리다’라는 말에서 유래되었다. 더욱이 이 말이 ‘수동태’로 표기되어 있는 것으로 미루어 보면, 단순히 ‘놀랐다’고 번역할 게 아니라 “충격을 받았다”고 번역하는 것이 문맥상 더 타당할지도 모르겠다. 놀란 사람들에게 초점이 있는 게 아니라, 그들을 놀라게 한 예수님과 그의 가르침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는 것이다. 풀어 말하면, 예수님이 그들을 ‘때렸고’, 그의 가르침이 그들에게 ‘충격을 주었다’는 뜻이다. 그리고 바로 이 충격이, ‘율법학자들과는 다른’ ‘예수님의 권능’과 자연스럽게 연결된다. (43)
- 사람들은 그의 가르침에서 오히려 ‘신적인 권능’(엑수시아)를 느끼고, ‘성스러운 충격’과 함께 ‘마음의 찔림’을 받았을 것이다. 만약 그들이 진정으로 그의 가르침에 충격을 받고 찔림을 받았다면, 그것은 분명 ‘그들을 때리는 것과 같은’ 비판적인 내용이었을 것이고, 그들 또한 그런 가르침에 찔림을 받을만한 그 무엇을 그들 신앙 속에 감추고 있었을 것이다. (44)
- 기적설화 자체가 설교요, 가르침... 서구 학자들... 귀신을 쫓아내는 일을 “가르침”(27절)이라고 말하는 마가가 이해되지 않는 것이다. (44)
- 귀신을 쫓아낸 일은 사건이지 가르침은 아닌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가는 “새로운 가르침”이라고 하면서 분명히 귀신 축출을 ‘가르침’이라고 말하고 있다... 마가는 왜 귀신 축출을 가르침이라고 하는 것일까? (45)
- 마태복음 8장 16절... “날이 저물었을 때에 사람들이 많은 귀신 들린 사람들을 그에게 데리고 오는데, 그는 말씀(로고스)으로 많은 귀신들(영들)을 내쫓았다”... 마태는 마가의 진정한 해석자... 마가복음에 나오는 귀신 축출을, ‘말씀으로 귀신들(영들)을 쫓아낸 것이었다’고 해석해 낼 수 있었다... 마태는 ‘말씀으로’ 귀신을 쫓아냈다고 함으로써, 마가의 귀신 축출을 가르침(말씀)이 일으킨 인간 내면의 변화로 보고, 그 가르침의 영향력(권능)이 사람들의 마음 속에 숨겨져 있는 더러운 영들(욕심)을 쫓아내어 회개시킨 것이라고 정확히 해석한 것이다... (45-46)
- 저자인 마가 자신... 입에서 입으로 전해내려온 설화 형식의 이야기를 수집하여 그것을 나름으로 해석한 사람이다... 마가는 설화 자체의 상징성을 누구보다도 잘 이해한 사람인 듯하다... 마가 저자의 입장에서 보면 이 이야기 자체가 ‘사실’은 아니다. 단지 ‘이야기’요, ‘설화’일 뿐이다. 오히려 ‘역사적 사실’은 이 이야기 배면에 감추어져 있어서, 이야기를 바로 해석함으로써만 밝혀질 수 있다... 기적설화의 풍부한 암시성과 상징성은 설화문학의 백미로서, 그야말로 찾아내야 할 ‘숨은 그림’인 셈이다. (46)
- 회당 안에는 더러운 귀신 들린 사람 하나가 있었다. 안식일은 거룩한 날이다. 그리고 회당은 거룩한 장소이다. 거룩한 날 거룩한 장소에 거룩함과는 전혀 어울릴 수 없는 더러운 것이 자리잡고 있었다는 것 자체가 매우 심상치 않는 그 무엇을 암시한다. (47)
- “더러운 귀신 들린 한 사람”이라고 번역한 원문(1:23)은, 그대로 직역하면 “더러운 영 안에 있는 한 사람”이다... ‘더러운 영 안에 있다’는 이러한 표현은, ‘하나님 안에 있다’거나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말과 맥을 같이하는 표현으로서, ‘상호내재성’을 전제하고 있다... ‘더러운 영 안에 있다’고 하는 것은 ‘그 사람 안에 더러운 영이 있다는 의미’로 읽어야 할 것이다. 바울의 말대로라면, 그 사람 안에는 ‘하나님의 영’이 있어야 하는데(롬 8:9), 하나님의 거룩한 영 대신 더러운 영이 자리잡고 있었다는 말이다. 풀어 말하면, 더러운 영이 그 사람 안에서 주인 노릇을 하고, 하나님 내신 그 더러운 영이 그 사람을 지배하고 있었다는 말이다. 바울이 인간 실존을 ‘죄에 종 노릇한다’(롬 6:20)고 본 것과 맥을 같이하는 발상이다. (48)
- 마가가 말하고자 하는 더러운 영이란 과연 무엇인가? 마가복음 7장 20-23절... “사람에게서 나오는 것, 그것이 사람을 더럽힌다. 사람의 마음속으로부터 나쁜 생각이 나오기 때문이다. 음란, 도둑질, 살인, 간음, 탐욕, 악독, 사기, 방탕, 나쁜 눈(질시), 배신, 모독, 교만, 어리석음, 이 모든 악한 것들이 속에서 나오고, 그것들이 사람을 더럽힌다.” (49)
- 사람을 죄짓게 하는 그 마음 속 탐욕, 재물과 권력과 명예를 탐하는 그 욕심을, 마가는 영적으로 더럽다 생각하여 ‘더러운 영’이라고 하는 것이다. 로마서 7장 17절에서 바울이 말하는 ‘내 안의 죄’, 그것을 마가는 ‘더러운 영’이라고 보고, ‘죄에 종 노릇하는 삶’을 일컬어 ‘더러운 영에 사로잡혀 있다’고 말하는 것이다. (49)
- ‘한 사람으로 전체를 상징’하는 설화 고유의 화법을 마가는 알고 있었다... 마가는 “더러운 영에 사로잡힌” 그 한 사람으로 회당 안에 있는 사람 모두를 비추고 있다. 경건하게 회당에 나와 앉아 있는 유대인들 모두가 더러운 영에 사로잡혀 있고, 거룩한 그들 속에 기실은 더러운 영이 숨겨져 있다는 것을 폭로하고 있다. 그야말로 “회 칠한 무덤 같은”(마 23:27) 그들 신앙의 가식과 위선을 질타하고 있는 것이다. (50)
- 거룩한 날(안식일) 거룩한 장소(회당)에 나와 거룩하신 하나님의 말씀(가르침)을 듣는 거룩한 백성(유대인)이지만, 실상 그들은 ‘더러운 영’의 소유자들이었다는 비판이다. 이러한 마가의 비판은 오늘날 우리에게도 유효하다. (50)
- 24절은, 예수님의 가르침(21절)에 대해 더러운 영에 사로잡힌 사람(유대인들)이 어떤 반응을 보였는지를 나타낸다.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하면서 “부르짖었다”고 한다. “나사렛 예수여, 우리를 어떻게 하시렵니까? 우리를 없애려고 왔습니까? 나는 당신이누구인지 압니다. 하나님의 거룩한 분이십니다.”... 예수님의 가르침과 그 권능에 맞서서, 그야말로 ‘큰소리를 치고’ 있는 것이다. (51)
- “우리를 어떻게 하시렵니까”... ‘티 헤민 카이 소이’... “무엇(누구)인가? / 우리에게 / 그리고 당신에게”라는 말이다... 동사가 생략되어 있고 주어가 없는 문장이다... “(당신은) 우리에게 누구이고, (우리는) 당신에게 누구인가?” ... 더러운 영에 사로잡힌 사람(우리)이 예수님을 ‘너’라고 하면서 맞서고 있다는 것만은 분명하다... (51-52)
- 왜 사람은 한 사람인데 말할 때는 ‘우리’라고 하는 것일까? 27절에서 사람들은, “그가 더러운 영들(복수)에게 명령한즉 그들도 그에게 복종하는구나”하고 말한다. 더러운 영이 하나가 아니라 여럿이기 때문에 ‘우리’라고 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나’라고 하는 한 인격 속에 ‘더러운 영들’이 다양한 형태로 숨겨져 있다는 것을, 마가는 ‘우리’라는 말로 나타내고 있는 것이다. (52)
- “너는 우리를 죽이려고 왔는가?” 죄가 죽지 않고는(죄를 없애지 않고는) 다시 살 수 없다는 뜻으로 예수님은 ‘회개하라’고 가르친 것이었는데, 그 설교를 더러운 영들은 자기들을 쫓아내어 ‘죽이려고’ 하는 설교라고 정확하게(?) 알아들은 것이다. (53)
- 24절 상반절에는 ‘우리’.. 하반절에는 ‘나’... 더러운 영들이 지금 자기들을 ‘우리’라고 하면서 말하고 있다. 겉으로는 ‘나’이지만, 그 속엔 ‘우리’가 숨어 있는 것이다. 그러니까 지금 여기서 말하는 ‘우리’는 ‘나 안의 우리’인 셈이다. 쉽게 말해, 그 ‘나 안의 우리’가 지금 예수께 맞서서 적대적인 태도를 취하고 있는 것이다. (53)
- 24절 상반절은 속으로 한 말이다... 겉으로는 내색하지 않으면서 마음속으로는 반발하고 있었다는 뜻이다... 하반절... “나는 당신이 누구인지 알고 있습니다. 당신은 하나님의 거룩하신 분이십니다.” 사람이 어쩌면 이럴 수 있을까 싶을 정도로, 속과 겉이 다르다. 그렇듯 속으로 반발하고 적대하면서도, 겉으로는 이렇게 입술에 침도 바르지 않고(?) 신앙적인 언사를 농하고 있다. 그야말로 입에 발린 말을 하고 마음에도 없는 소리를 하는 것이다. 오늘날 교회에서 ‘존경하는 목사님’,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하면서 나누는 우리의 일상적인 말들이 과연 이런 교언영색은 아닌지 새삼 되살펴보지 않을 수 없다... 마가는 지금 상반절과 하반절 사이에 숨겨져 있는 말의 다름을 통해서, 말하는 자의 ‘이중성’을 드러내 보여준다. 당시 유대인들의 위선과 그들 신앙의 가식을 적나라하게 폭로하고 있는 것이다. (54)
- 상반절의 ‘나사렛 예수’... 경멸적이고 적대적인 어감... 하반절의 ‘나사렛 예수’... ‘하나님의 거룩한 분’으로 고백... 속 다르고 겉 다른 이 위선과 가식이야말로 영적으로 보면, 그 사람이 더러운 영에 사로잡혀 있다는 것을 나타내는 병적인 징후로 보아도 별로 틀림이 없을 것이다. 사실 이 가식과 위선은 당시 유대인들만이 아니라, 오늘날 우리 믿는 자들에게도 예외는 아니다. 인간 누구에게나 죄라는 것은 보편적이고, 더러운 영은 다양한 형태의 욕심으로 우리 속에 내재해 있기 때문이다. 겉으로는 의로운 체하지만, 그 속은 불의하다.... 회개의 표로 세례는 받았지만, 거듭거듭 회개해야 하는 까닭이 바로 여기 있다. 믿음으로 의롭다 여김을 받았지만, 여전히 죄인임을 고백할 수밖에 없는 것도 이 때문이다. (54-56)
- 25절... 예수님의 귀신 축출은 이제 더러운 영을 향해 꾸짖는 것으로 구체화하고 있다. 마가는 25절을 통해서, 21절의 가르침이 어떤 내용이고 어떤 성격의 설교였는지를 밝히고 있는 셈이다. 한마디로 예수님의 설교는 ‘꾸짖는’ 설교였고, 더러운 영을 향해서 ‘그에게서 나가라’고 명령하는 것과 같은 설교였다는 말이다. 1장 15절에서 ‘회개하라’고 선포하신 예수님의 총체적인 메시지를, 마가는 여지 가버나움 회당에서 귀신을 축출하는 것으로 구체화시키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예수님의 권능(가르침의 영향력)이 사람들 마음 속에 숨겨져 있는 더러운 영을 쫓아내는 것으로, “하나님의 나라가 임박했다”(1:15)는 것을 나타내고 있는 것이다. (56-57)
- 거룩하신 분만이 더러운 영에 사로잡힌 자들을 회개시킬 수 있고, 거룩한 영(성령)만이 더러운 영을 쫓아낼 수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이 모든 귀신 축출 설화의 요체이다. 한마디로 귀신을 축출하는 데에는, 힘의 강약이 문제가 아니라 힘의 선악이 문제라는 말이다. 더러운 영을 쫓아낼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의 거룩한 영뿐이요, 또 그래야만 참다운 구원이 이루어질 수 있다는 것이 복음서의 주장이다. (57)
- 3장 20절 이하... 바알세불 논쟁... “사탄이 어떻게 사탄을 쫓아낼 수 있겠느냐?”(3:23)... 적대자들의 생각은, 강한 힘만이 약한 힘을 쫓아낼 수 있다는 통속적인 ‘힘의 논리’에 근거하고 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이러한 발상에 정면으로 맞서서 대응하신다... 더러운 귀신을 쫓아내려면 힘이 강해야 하는 게 아니라 영이 거룩해야 한다는 것이다... ‘거룩한 것’만이 ‘더러운 것’을 쫓아낼 수 있다는 것이 이 귀신 축출 설화의 핵심 주제인 셈이다. (57-58)
- 더러운 영을 꾸짖을 수 있는 것은 거룩한 영뿐이기 때문이다. 더러운 영을 꾸짖지 않는 영은 거룩한 영일 수 없다는 말도 된다... 오늘날 대부분의 교회 강단에서 이 ‘꾸짖음’은 이미 사라진지 오래다. 아멘으로 화답받는 ‘은혜로운 설교’를 하기 위해서, 많은 설교자들은 교인들의 “귀를 즐겁게”(딤후 4:3)하기에 여념이 없다... 우리는 그동안 자본주의적 사고에 물들어 있는 이 시대의 ‘더러운 영들’과 야합해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1960년대 이후 ‘교회성장’, ‘물질축복’을 강조... 결국 그동안 우리 한국교회는 ‘성공적인 목회’라는 이름으로 더러운 영들과 야합을 정당화해온 셈이다... 청부론... (58)
- 우리 속에 더러운 영들을 모시고 살면서 입으로만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한다면, 예수님은 지금 우리 속에 있는 더러운 영들을 향해서도 “그 입 닥치고 그에게서 나오라”(1:25)고 꾸짖어야 마땅할 것이다. (59)
- “입 닥치라”... ‘피오데티’라는 말은 ‘피오모’라는 동사의 ‘명령법 수동태’이다. 그리고 ‘피오모’(잠잠하게 하다)라는 말은 본디 “재갈을 물리다”라는 뜻이다. (60)
- 나는 당신을 안다고 하지만, 그에게서 ‘나’와 ‘당신’은 전혀 무관하다. 거룩한 ‘당신’과는 무관하게, ‘나’는 더럽게 살고 있다. ‘아는 것’과 ‘사는 것’이 전혀 다르다. 신앙과 삶이 유리되어 겉돌고 있는 것이다. ‘당신을 따르지 않으면서 당신을 안다’고 하는 것이 무슨 소용이겠는가? 그래서 예수님은 그를 꾸짖으면서 “입 닥치라”고 하신 것이다. 그 당시 유대교 신앙에 대한 준엄한 비판이다. (60)
- 오늘날 우리의 신앙은 어떤가?... 입으로 시인하는 것이 중요한 게 아니다. 무엇을 행하며 사느냐가 중요하다. 아니 더 본질적으로는 나의 사람됨과 성품이 문제이다. 내 안이 영이 얼마나 더럽고 얼마나 거룩한가 하는 것이 구원의 성패를 결정하기 때문이다. (60)
- 26절은 “그를 찢어놓고, 큰 소리로 소리치며 나갔다”는 말로 표현하고 있다. ‘찢어놓았다’고 할 때 쓰인 ‘스파랏소’라는 말은 “잡아당겨서 찢다”라는 뜻이다. 마가복음에서는 세 번 귀신을 쫓아내는 이야기(1:26, 9:20, 26)에서만 쓰이고 있다... 더러운 영이 그 사람을 사로잡고 있었다는 것을 감안하면, 거룩한 영에 내쫓기면서도 더러운 영은 사로잡고 있는 그 사람을 놓지 않으려고 잡아당길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리고 거룩한 분과 더러운 영 사이에서 그 사람은 찢어지는 것과 같은 ‘뜻의 분열’을 겪었으리라는 것은 짐작키 어렵지 않다. 그리 보면 더러운 영이 “큰 소리로 소리쳤다”고 하는 것도, 내쫓기면서도 쫓겨나지 않으려고 악다구니하며 안간힘을 쓰는 모습을 연상시킨다. 더러운 영에 사로잡혀 있는 사람의 입장에서 보면 그는, 예수님의 명령을 따라 사느냐 더러운 영이 시키는 대로 사느냐 하는, 심각한 ‘내적 갈등’을 겪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그야말로 ‘영(성령)을 따라 사느냐’, ‘육을 따라 사느냐’하는 뜻의 분열과 내적 갈등을 겪고 난 후에야 더러운 영을 물리칠 수 있다는 것을, 마가는 이런 식으로 형상화 하고 있는 것이다. (61)
- 27절... “놀랐다”(담배오)라는 동사... 마가복음에 세 번 모두 과거 수동태로 쓰였다(막 1:27, 10:24, 10:32)... 수동태적 어감을 살리기 위해 “말문이 막혔다”라고 번역하고 싶은 것이다... “서로 말을 주고 받았다”... 저마다 속으로 “그들 자신에게 자문했다”는 말로 읽힌다. (62)
- “이것이 무엇인가?”... 모든 사람이 이렇게 자문하면서 스스로를 자성하게 되었다는 것을 의미할 수도 있다... 이 물음을 통해서 마가는 우리로 하여금 무언가를 깨닫게 하고 싶은 것이다... “권능에 의한(따른) 새로운 가르침”... 사람들의 마음 속에 숨겨져 있는 더러운 영을 내쫓아 회개시킨 것은, 다름 아닌 예수의 ‘가르침’이었다는 것이다. (63-64)
- 예수님은 명령했다. ‘내적인 혁명’... 마음속 주인이 바뀐 것이다. 명령하는 자가 바뀐 것이다. 지금까지 내 속에서 명령하는 자는 ‘더러운 영’이었다. 더러운 영이 주인 노릇을 했다. ‘욕심’이 이끄는대로 살았다. 바울의 말처럼 ‘육을 따라’ 살았다. 그야말로 ‘더러운 영에 사로잡혀서’ 살았던 것이다. 그러나 이제 바뀌고 보니, 내 속에서 명령하시는 분은 ‘예수님’이요, 그의 ‘거룩한 영’이다. 그 거룩한 영이 주인이다. 그분이 명령하면 나(내 속의 더러운 영)는 복종한다. “육을 따라 살지 않고 영을 따라 산다”(롬 8:4)고 하는 것이 이 뜻이다. 거룩한 영으로 더러운 영을 내쫓음으로써, ‘마음속 주인’이 바뀌고 ‘심성’이 변화되고 ‘사람됨’이 달라진 것이다. 회개라면 바로 이게 진정한 ‘회개’이다. 예수께서 “나를 따르라”고 하신 것도 이 때문이다. 그를따라 그처럼 살 때 더러운 귀신을 쫓아낼 수 있고, 그 가르침과 명령에 복종하는 만큼 우리의 더러운 영도 씻김을 받아 깨끗해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누구든지 나를 따르고자 한다면 자기 자신을 부정하라”(8:24)고 하신 것이다. 그리고 그 ‘자기부정’을 마가는 더러운 영을 쫓아내는 이 이야기로 미리 형상화하고 있다... (64-65)
- 28절... “그의 소문”... 8장 27절에서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하고 물으신 예수님의 질문이 이 소문의 내용을 확인시켜준다... ‘대중의 소문’이라는 것은 믿을 게 못 된다... 대중은 항상 제 욕구에 따라 평하기 때문이다. (65)
총괄
- 더러운 영을 쫓아내는 이 이야기를 해석하고 보니, 결국 이것은 성품이 바뀌고 심성이 변화되어야 한다는 ‘사람됨’의 문제로 귀착됨을 어쩔수 없었다... 인간의 모든 ‘행위’는 우리가 영이라고 일컫는 ‘마음’에서 비롯된다. 마음과 그 마음속 생각에서 행위가 유발된다. 겉으로 드러나는 것은 행위(말도 포함)뿐인 것 같지만, 스스로 그 속을 들여다보면 행위 이전에 먼저 마음이 있음을 알 수 있다.... 물론 마음과 행위 사이엔 교묘한 비틀림이 있어서, 때로 위선적이기도 하고 때로눈 위악적이기도 하다. 속으로 미워하면서도 겉으로는 좋은 체할 수도 있고, 좋아 하면서도 그 마음 숨기고 짐짓 퉁명스럽게 대할 수도 있다. 그러나 행위의 주체가 곧 마음인 것만은 분명하다. 행위가 열매라면 마음은 씨인 셈이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마음과 행위 사이의 인과관계이다. 그래서 우리 옛 어른들은 ‘사람됨’(인격)을 평가할 때 그 ‘마음씨’를 무엇보다 중요시했다... 사람됨을 성품으로 평가하고, 그 성품을 마음씨라고 하는 심성의 문제와 결부시켜 보았다고 하는 점이, 오늘날 우리로서는 놀라울뿐이다. (66-67)
- 오늘날 우리는 ‘행동 위주의 서구적 사고방식’에 물이 들어서, 겉으로 드러난 것으로 인간을 평가할 뿐 그 속마음 보는 눈은 잃고 말았다. 마음으로 마음을 읽고 교감하는, 그런 한국인 고유의 전통적인 영성을 상실한 것이다... 그 동안 교회가 수많은 ‘교인들’을 만들어냈는지는 몰라도 그 ‘사람됨’을 길러냈다고 말하기에는 미흡한 점이 너무도 많다. 기독교를 바라보는 세상의 눈길이 점점 곱지 않은 쪽으로 기울어가는 까닭을 심각하게 재고해야 할 시점에 이른 것이다. 지금까지의 ‘성령운동’이 문제가 아니다. 새삼스럽게 ‘영성신학’을 들고 나선다고 될 일도 아니다. 성령을 말해도 그것을 ‘사람됨’과 결부시키지 않고, 영성을 논해도 그것을 ‘심성과성품’의 문제라고 생각하지 못하는 한, 우리 신앙은 점점 삶과 유리될 수밖에 없고, 그러면서도 성령의 이름으로 우리 속에 숨겨진 더러운 영들을 호도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67)
- 자신의 더러움을 부끄럽게 여길 줄 아는 영이야말로, 그만큼 깨끗하고 거룩해질 수 있을 것이다. (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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