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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기독교회사 - 민경배] 머리말
[한국기독교회사] - 민경배(대한기독교출판사)
머리말
- 한국 기독교회가 우리 근대사에서 차지하는 비중을 의심할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이 글은 항상 교회 신앙의 역사적 변모에 우선 관심하고, 다만 그것이 외연(外延)해서 미친 영향과 그 함수에 대해서 사필(史筆)을 연장하려고 한다. (5)
- 한국 교회는 아주 독특한 역사의 길을 걸어왔다고 할 수 있다. 우선 그것은 기독교가 전해준 복음의 기질과는 전혀 다른 심성(심성)의 터인 한국, 그 독자의 토양에서 전파되고 성장했다. 문명과 정신의 오랜 유산을 긍지로 아는 아시아 굴지의 어진 백성들 틈에서 체질이 전혀 맞지 않는 종교가 세기적인 기적이라고 불리어질 만큼의 발전과 확장을 이루었다는 것은 자랑임에 틀림이 없다. (5)
- 비록 전국적인 현상은 아니라고 할지라도, 근대 한국의 비극과 시련, 그리고 좌절감이 엄습할 때, 이 백성이 뒤돌아가서 기대어 손 붙잡을 곳은 교회의 벾밖에는 없다고 느꼈던 때가 있었다. (6)
- 교회는 공동체요, 따라서 고립과 소외는 거기 있을 수 없다. 역사상 한 번도 전세계와 혈연의식을 가져보지 못하고 불우한 약소민족의 서러움을 쇄국(鎖國)으로 겪어 온 우리 겨레는 교회를 통하여 비로소 세계와의 보조에 호응하고, 고립되지 아니한 결속을 체험하였으며, 따라서 범인류적인 공동체의 일원이라는 보람찬 의식을 낳을 수 있었던 것이다. 이것이 없었던들, 세계의 기운에 예민하게 반응했던 민족사적인 대업의 제기와 성취 및 장엄하게 남긴 민족운동에의 투쟁과 헌신은 쉽게 설명이 되지 않으리라고 믿는다. 사실 세계의 교회들은 그들 나름대로 한국의 운명과 함께 서러워했고, 기회 있을 때마다 유형 무형의 관여, 접촉을 통해서 겨레의 미래에 대한 소망을 다짐해 주었던 것이다. (6)
- 우선 우리는 원시적인 소박한 종교의 향수를 잃었다. 창공을 바라보면서 합장하고, 영혼이 주님과 어울려 신비로운 환희에 젖는 그 차원을 많이 상실하였다. (6-7)
- 현대 한국 교회는 현대 신학의 지나친 충격적인 주제들을 열거하면서 자체의 전통과 그 성실을 자모(自侮)하는 경향이 짙다. 선교의 언어일 수 없는 과격한 말들이 상황에 맞게 개념화하는 과정을 경과하지 않은 채, 유행어처럼 흐르고 있다. 이 새로운 현상을 한국 교회는 물론 막고 있지 않다. 그것도 우리 교회의 삶에 무엇인가 끼칠 적극적인 가공(加工)이 있으리라 보기 때문이다. (7)
- 교회가 무력하게 되어간 현상은 두말할 것도 없이 교회 분열의 타성에서 왔다. 명분과 까닭은 어쨌든, 한 몸인 교회의 분열을 수치로 여기고 뉘우치는 신학이 전혀 결여된 한국 교회의 모습은 옛날의 영광과는 대조적이다. (7)
序論
1. 기독교회사의 뜻
기독교회사
- 기독교회사라고 하는 말 가운데는 그리스도라는 뚜렷한 역사상의 인물과, 교회라고 하는 신도들의 세계적인 공동체, 그리고 사(史)라고 하는, 이 세 가지 현저한 다른 개념들이 들어 있다. (15)
- 우선 그리스도는 역사상 특정한 인물을 지칭하고, 따라서 철학이나 형이상학적인 어떤 보편적 개념이나 비전이 아니라, 구체적인 사건을 경과한 시공적(時空的) 인물이다. 하지만 그분은 다만 인간의 본질에만 제한되신 분이 아니다. 하나님 내지는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신성(神性)의 차원에 아울러 계신다. 그런데 하나님의 인간화라는 것을 이른바 성육신이라고 한다. 인카네이션이 그것이다. 이 말은 具-體-化라고 풀어서 잘못이 없다고 본다. 기독교가 남달리 세계 속에서의 참여, 그리고 성실한 책임 수행을 다짐하는 이유가 여기 있다고 본다. 그것은 신성의 구체적 표현과 구형적(構形的) 실현이라는 과정을 거치기 때문이다. (15-16)
- 사실(史實)들은 각각 의미 설정의 전제에 따라서 하나 둘 연결할 수 있는 고리들이 여럿이 다르게 부착되어 있는 물체라고 볼 수 있다. 따라서 역사상(歷史像)의 구형(構形)은 피차 꼭 들어맞게 되어 있는 고리들을 정확하게 발견해서 그것들을 서로 연결시키는 작업이라고 할 수 있다. 사건의 대소가 의미의 대소와 직접 상응하는 것은 아닌 것이다. (19)
- 교회사라고 해서 일반사와 방법론과 작업과정이 다를 리 없다. 그렇지만 몇가지 특수한 양상들이 있다. 교회사는 우선 성서를 손에 쥔 신앙공동체가 실제로 이 세상에서 어떤 실험을 거쳐오면서 살아나왔는가 하는 것을 살핀다. 역사는 교리와 신학의 논리적 관계사에 전념하지 않는다. 그것은 교리사에서 취급될 성질의 문제이다. 교회사는 역사 과정 속에서 교회의 삶을 움직인 기동력이 실질상으로 정치, 인물, 지역과 같은 요소에 의해서 대거 제공된다는 점을 주목한다... 그러나 교회사는 신앙의 창조적 힘과 그것이 의인(義認)의 과정을 통해 변모하는 모습, 이 넘쳐 솟아나는 신 섭리의 결정적인 역학을 사실상의 주제로 삼는다. (19)
2. 한국 교회사의 제 문제
- 한국교회사는 선교사(宣敎史)의 입장에서 쓸 수 있을 것이다... 백낙준 박사의 “The History of Protestant Mission in Korea, 1832~1910”이다... 선교사의 대가이며 백 박사의 지도교수였던 라투레트(K. S. Latourette)는 이 책의 서문에 “서구적인 역사학도로서의 방법론의 수련, 자료의 수집과 분석, 그리고 비판에 고심 연마한 백 박사의 한국 개신교 선교사와 같은 학적인 저서는 다시 얻기 어려운 수작(秀作)이며, 한국에 있어서 앞으로 한국 기독교에 관해 저술하려든지, 연구를 할 사람들은 반드시 백 박사의 저서를 우선 잘 이해해야 할 것이다”라는 칭찬을 아끼지 않았던 것이다. (20)
- 그러나 이 선교사는 저자 자신이 시인하고 있는 바와 마찬가지로 순전히 기독교 선교의 확장 역사이며, 따라서 관심의 테두리나 사료의 대부분이 선교사를 파송한 나라의 교회와 인사들에게서 수집되었다고 하는 일방성을 가진다. 한국 교회 쪽의 고백과 증언이 전혀 고려되고 있지 못한 것이다. (20)
- 한국 민족교회사의 서술 방법이 따로 확립되어야 한다고 믿는다... (20)
- 1930년에 남감리교회의 양주삼... 한국 교회사의 독특한 방법론적인 시도는 1928년 이능화의 『朝鮮基督敎及外交史』에서 실질적으로 처음 시도된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21)
- 한국 교회가 공식적인 문서로서 사기(史記)를 출판한 일도 있었다... 각 교단의 총회록... (21)
- 통속적인 것으로는 채필근의 『조선기독교발달사』와 감리교 장정심의 『조선기독교오십년사화』가 있었다. 이 외에도 성결교 이명직의 『조선 야소교 동양선교회 성결교회략사』... (21-22)
- 김양선의 『한국기독교해방 십년사』... 그는 “고난과 구원, 대립과 화해”라는 사관의 테두리 안에서 승리자로서의 교회와 신도의 모습을 뚜렷이 나타내는 데 주력하면서 저술했다고 밝혔다. 그러나 여기에도 민족교회사의 의식이 바탕처럼 깔려 있지는 않았다. 정사(正邪)의 투쟁과 그 객관성의 전시가 그 주안이었다. (22)
- 1962년 유홍렬의 『한국 천주교회사』라는 대작이 출간... 김용해의 『대한기독교침례회사』(1964), 이연린의 『한국재림교회사』(1965), 이천영의 『성결교회사』(1970), 장형일의 『한국 구세군사』(1975), 이성삼의 『한국감리교회사』(1975), 장희근의 『한국장로교회사』(1970)... 이호운의 『한국교회초기사』(1970)... (22)
- 오윤태... 『한국 경교사』(1973)... “타종교 속에 감추인 기독교적 산 신앙의 산 실마리를 풀어 오늘의 역사에 연결해 보려는 욕심이 過”했다고 스스로 고백... (22-23)
- 이영헌의 『한국기독교회사』(1978)... 해방 이후의 교호사 정리에서 정확한 자료의 재편성이라는 대업 때문에 높이 평가되어 마땅한 업적... (23)
- 김수진, 한인수 공저의 『한국기독교회사, 호남편』(1979)... 기왕의 한국교회사가 황평(黃平)과 북장로교 선교사 일변도의 일방사(一方史)라 여기고, “자료를 정리하고 또 증인들의 증언을 들어서, 고생하고 선교하던 남장로교 선교사들의 노고는 물론, 선배 목사와 이름 없는 조사 전도사들의 활동으로 이루어진 호남교회를 활자화하고자 한 뜻” 때문에 집필된 것이었다. (23)
- 선교사(史)의 교회사는 선교사를 파송한 나라 교회의 연장으로서 그 성장을 통계표에서 측정하는 양(量)으로서 이해하는 데 그칠 수가 있다. 거기서 한국교회는 한 대상이지 주체는 아니고, 따라서 생(生)이 아닌 형(形)으로 경화되고 만다. 주체로서의 민족교회사를 쓰고자 하는 대임을 가지고 우리는 한국 교회사를 써나갈 생각이다. (23-24)
- 우리들의 과제는 우리 교회가 민족 교회로서 형성되어 가는 과정을 살피는 데 있다... 성서의 구속적 진리라든가, 인간성, 종교적 자유와 같은 대의가 선행되어 확립되고, 그것이 한국이라는 지역에서의 실현을 추진해 나가는 단위 개념일 따름이다. (25)
3. 교회와 나라와의 관계
- 외국 선교의 적극적인 전개가 실현가능하였던 것은 식민지 확장의 제국주의 자본주의의 발전과 병행할 수 있었기 때문... 따라서 이 선교에는 이러한 상업적 동기와 정치적 동기가 불가피하게 혼합할 수 밖에 없었다... 식민지가 선교의 대상 지역... 선교사의 태도에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서구 문명에 대한 우월감과 정치적 종주 민족으로서의 거만이 나타난 것은 불가피하였다. (25-26)
- 19세기에 진행된 선교활동은 복음의 전파 한계를 서구 문명의 영역 밖으로 확대시켜 나갔다는 중요한 의의를 가진다. 동기의 불순이나 거기서 오는 여러 가능한 해독의 요인들의 제거는 선교 사업 사체만큼의 노력과 경계로 진행되었다. 여기에 비로소 선교의 독립이 확보되고, 선교가 정치적 상업적 동기의 교차에서 해방될 수 있었다. 이것은 확실히 새로운 동기의 자극과 그 실천에서만 가능하였다. (26)
- 중국, 일본, 한국... 사실상 서구의 식민지적 확장에 말려들지 않았던 나라들... 중국에서 기독교는 실용적 가치 체계의 입장에서 인식되어 왔고, 다른 한편에서는 오랫동안 서양의 여러 나라들 때문에 시달려 온 중국인들에게 낯선 서양 종교로서의 인상을 주는 데 그쳤고, 따라서 공산주의 이념의 공세에 몰렸을 때, 거기 맞서 싸울 소신의 근거 하나 제공하지 못하였음이 드러났다... 일본에선느 그 지성에 동화(同化)해서 기독교의 신학적 발전은 어느만큼 이루어 놓았으나, 신사정치의 체제적 강압 앞에서는 유일신의 경건 하나 고수하지 못한 좌절로 끝나고 말았다. (26)
- 한국 사람들은 기독교에 대해서 어느 동양 사람들보다 수용적이었다. 이것은 한국에서의 카톨릭 선교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1872년의 에딘버러 리뷰는 “서구의 기독교는 어떠한 아시아의 사람들에게서보다도, 끈질기고 수용적인 기독교인들을 한국에서 획득할 수 있었다”고 갈파한 바 있었다. 프로테스탄트의 경우에도 이 말을 해당되며, 오히려 더 적극적인 전향의 자세를 보이고 잇었다. 1922년의 『국제 선교 리뷰』는 “한국인의 반응은 일본 사람이나 중국 사람 혹은 인도 사람의 반응보다 훨씬 더 현저한 바 있다”고 보고했던 것이다. (27)
- 한국의 기독교회야말로 기독교의 회개나 선교의 신학 및 방법에 대한 분석적 연구의 가장 적절한 대상이 된다고 말해도 결코 과언이 아닐 것이다. (27)
- 로마 카톨릭은 쇄국 한국에 선교를 기도하면서 쇄국의 본질적인 동기, 곧 이 나라의 안정을 위협하는 태도로 임했다.강화도나 양화진에의 침범, 그리고 황사영의 백서 사건... 한국 사람이나 나라가 로마 카톨릭에 대해서 가졌던 태도는 단순히 이와 같은 위협에 대한 인간의 자연스러운 방어 태세요, 따라서 적대감에로 연장될 수밖에 없었다. (27)
- 일본은 서구의 백인 식민지 확장 제국주의는 아니었다. 그러나 일본이 근대화의 기민한 작업의 여력으로 제일 처음 침범한 것이 한국이었다. 한국은 임진왜란의 원한과 함께 이 문제의 강압에 시달려 몸부림쳤던 것이다... 한국은 겨레와 함께 프로테스탄트 선교사들이 전한 기독교의 복음 속에서 긍지와 나라의 위신, 그 의식에 대한 강한 호소를 들을 수가 있었다... 기독교가 한국에 있어서 식민주의자의 손에 의하여 전파되지 아니했다는 특수 사정... 기독교와 근대 한국과의 정신적 동일성이 여기에서 비롯... (27-28)
- 겨레와 함께 살아온 교회, 여기에 한국 교회의 특수성이 있다... 아아(亞阿)의 여러 나라들이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서구의 제국주의에서 독립하고 있지만, 이들은 한결같이 그 민족 주체 의식의 확립을 그들 고유의 민속적 종교에 연결시키면서 동시에 구제국주의가 함께 가지고 왔던 기독교에 대한 모진 반격으로 구체화시키고 있었다. 한국에서도 물론 여러 재래 종교의 부흥이 가세되고 있다. 그러나 그것이 반서양적 내지는 반기독죠적인 반발을 동반하고 있지는 않다. 그런데 이 현상은 역사적일 뿐이다. 서구 교회의 경우처럼 생태적인 교회 국가 동일 의식이 정착된 현상 때문이 아니다. 1926년대 이후의 교회의 약세가 이 점을 더 심각하게 내보내주고 있다. 우리는 기독교의 민족주의적 전개의 역사 그 원형을 찾고, 그 정착을 향후 계속 추진해 가야 할 것이다. (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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